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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저수첩]

바둑폐인과 聖者 -평범 9단

뼛속까지 외로움으로 무장된 사내에게 세속의 친화력이 무슨 소용있으랴

김종서 작가2009-02-09 14:2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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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등진 사내의 정체

오래 전 부산 서면의 한 기원을 찾아갔을 때 그의 뒷모습을 보았었다.
인사하지 않고 그냥 뒷모습만 보았을 뿐인데, 눈에 확 들어왔다.
필자가 바둑 친구들과 오랜 시간 어울리는 동안 그는 계속 등만 보인 채로 면벽(面壁) 수행 중이었다. 그 벽에 모니터가 있었고, 그 안에 타이젬 화면이 보였다. 그러니까 그는 종일 타이젬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 뒤로도 몇 번 그 기원에 들렀는데 그는 마치 벽에 걸린 정물화처럼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커피 한 잔을 타러 가면서 일부러 그의 등 뒤로 다가가 모니터를 훔쳐봤다.
헉! 그의 아이디를 확인한 순간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평범 9단.

대국 실에서 몇 년 넘게 거의 매일 만났던 이름을 이렇게 만나다니!
“반갑습니다.”
먼저 인사를 건네니 엉거주춤 일어나서 수줍게 손을 내미는 사내.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인데도 악수 이후 대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그는 등을 돌렸고, 필자도 뻘쭘하게 돌아서야 했다.
대국실에서 심심찮게 쪽지 대화를 나누는 온 라인 친구들이 현실에서 악수 한 번으로 눈빛을 교환하고 만다는 건 서글픈 일이나 상대가 원치 않는 맞장구를 칠 수 없는 법 아닌가?
그런데 인사를 나눈 뒤로 그의 뒷모습에서 미묘한 동요가 감지되었다. 모니터에 바둑판 대신 대기실이 보였다. 늘 바둑만 두던 그가 그냥 멍하게 대기실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필자가 용무를 마치고 기원에서 나올 때 어눌한 사투리가 계단을 따라 울렸다.
“점심했능교?”
그가 서둘러 내려오면서 발길을 잡았다.
그가 부르는 바람에 그 날 점심을 두 번 먹고 말았다.
세숫대야만큼 넓직한 스테인레스 그릇에 가득 담긴 부산 밀면의 추억, 그것이 평범 9단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몇 년 후 부산 취재 도중에 정말 우연히 그와 조우했다.
구서동 비탈진 골목의 5층 건물 벽면에 기원의 신장개업을 알리는 홍보 게시물이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 ‘타이젬 평범 9단 사범’의 아이디가 보였다. 아마 7단도 아니고 타이젬 9단의 단위(段位)를 내세운 홍보물의 아이디어가 참 이채로웠다. 어떤 이들은 피식 웃을지 모를 일이나 평범 9단의 존재감을 아는 이들이라면 고개를 끄덕이시리라.

일단 장소를 눈여겨 보아둔 뒤 아주 늦은 밤이 되어서 구서동 세진기원을 찾아갔다.
자정이 가까운 탓인지 바둑 손님들은 보이지 않았고 벽 쪽의 컴퓨터에 몇 사람이 온라인 바둑을 즐기고 있었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평범 9단은 역시 그때와 다름없이 면벽수도 중이었다.



S#2 절대고독(絶代孤獨) - 나는 나와 사귄다

“아이디 작명의 의도는?”
“평범하고 싶어서요.”
“자신의 기풍은?”
“남들이 평범하다 그러던데요.”

대화는 이런 식이다. 바둑 고수들의 말발은 급수와 비례하는 법이거늘 짧디 짧은 단문으로 돌아오는 대답이 싱겁고 단조롭다.
그렇다고 일부러 페인트모션을 취하는 것 같지는 않다. 무릎팍 도사의 컨셉으로 자존심을 팍팍 긁어대도 진지하고 솔직하게 대답한다.
늘 기원에 거주하는 삶이 과연 평범하단 말인가? 가족은 어찌 하고 사회생활은 또 어찌 한단 말인가?

“그러니까 평범을 지향하는 거죠.”
“시내에는 가끔 나갑니까?”
“아뇨. 기원에서 24시간 생활합니다.”
“그 중 온라인에 머무는 시간은요?”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겠죠.”
“답답하지 않으세요?”
“아뇨. 편합니다. 살만 해요.”
뭔가 아픈 사연이 흘러나올 법한데 지극히 태연자약하고 평화롭다. 그렇게 묻는 필자의 가슴만 하릴없이 먹먹할 뿐이다.

평범 9단의 또 다른 타이젬 아이디는 淸江萬里다. 언젠가 타이젬에서 9단을 대상으로 실시했던 인기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던 이름이다.
그는 온라인에서 끊임없이 하수들을 위해 뭔가 베풀고 싶어 한다.
대가는 바라지 않는다. 사이버 머니도 나누고 기력도 나누는 게 목표다.
기원에서도 마찬가지다. 바둑을 배우러 오는 기우들에게 19로의 네비게이션이 돼주는 걸로 만족한다.
네오스톤 시절부터 사용해 온 평범 9단의 아이디는 그래서 유명한 것이다.

온라인과 현실의 극단적인 괴리, 그 사연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바둑은 우리에게 무엇이며, 우리는 또한 바둑에게 무엇일까?
유저수첩이 생긴 이유가 바로 바둑 마니아들의 삶을 엿보기 위해서였으니까.

“삼성전관에서 브라운 관을 만들었지요. 거기서 바둑이 늘었습니다. 술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료들과 바둑 두는 게 낙이었지요. 또 울산의 조선소에서도 근무했었는데 마찬가지로 바둑에 미쳤었구요. 결혼했었는데 제가 가정을 제대로 지키지 못 했습니다. 사회생활에 적응을 못한 거죠. 오래 방황하다 기원에 정착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 말에 그의 인생역정이 다 들어있다. 수 만 명의 타이젬 회원들에게 어떤 9단이 이처럼 담담하게 삶의 굴곡을 털어놓을 수 있을까?


“온라인은 편하세요?”
“그럼요. 세상보다 온라인이 훨씬 편합니다.”
“그거 자폐증인데......”
“병인 줄 알지만 그렇게 돼버렸어요. 좋은 걸 어떡합니까?”
“평범님은요. 세상이 왕따시킨 게 아니라 스스로 세상을 왕따시켰어요.”
“하하. 그런가요?”
그는 결점 투성이인 자신의 모습을 미화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출세하지 않아도 온라인에서 한 줌만큼의 즐거움과 평화를 누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다. 또 밤마다 지켜내지 못한 가정에 대한 회한으로 뒤척인다고 고백했다.

아아,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를 이해하면서도 과연 이 캐릭터를 유저수첩에 소개해도 좋은지 망설여진다. 혹시 평범 사범을 그리워하는 기우들이 실망하지는 않을까? 통속에 길들여진 필자의 만년필이 정처를 잃고 헤맨다.
“멀리까지 내려 오셨는데 편하게 소개하세요. 뭐 어떻습니까? 이런 바둑 폐인도 있다는 게 알려져야 많은 분들이 참고할 수 있잖아요.”
폐인이라지만 성자(聖者)의 내공이 느껴지는 한 마디다.



S#3 평범, 땅 끝에 서다

밤새 대화를 나누고 다음 날 다짜고짜 그의 손목을 잡았다.
“답답한데 바람 좀 쐬러 갑시다.”
외출이 익숙하지 않은 듯 평범 9단은 머쓱한 표정으로 코트를 걸친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해운대 백사장에 섰다.


그가 멋쩍게 웃는다.
“12년 만에 이 바다를 보네요.”
“고맙다고 그러세요.”
“그렇지 않아도 그럴 참이었습니다.”

바다에서도 그와의 대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뼛속까지 외로움으로 무장된 사내에게 세속의 친화력이 무슨 소용있으랴.
그저 취재를 구실로 먼 수평선으로부터 불어오는 맑은 바람 한 번 함께 나눠 마시는 걸로도 그를 찾아온 부산여행은 후회없을지니.

문득 생텍쥐베리의 작품 ‘인간의 대지’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아래 인용문의 ‘사막’을 ‘19로’로 바꿔 읽으면 평범 9단의 삶에 조금은 근접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고독을 안다. 3년 동안 사막에서 살았으므로 나는 그 맛을 잘 안다. 거기에서는 광물성 풍경 속에서 스러져가는 청춘이 도무지 겁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에서는 자기로부터 저 멀리 떨어진 온 세상이 늙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나무들은 열매를 맺었고, 땅은 곡식을 냈고, 여인들은 벌써 아름다워졌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가니 빨리 서둘러 돌아가야 할 텐데 나는 먼 곳에 붙들려 있다. 여기서는 세상의 재화(財貨)가 언덕의 가는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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