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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신라면배]

구리(銅) 연금술사, 이세돌

예술과 전쟁의 농심신라면배 최종국 관전기

김종서 작가2009-02-20 13:4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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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세의 충돌, 지략의 조화

바둑이 예술이고 전쟁이고 드라마임을 보여준 한판이었다.
294수에 걸친 환상의 기보, 그 결과에 따라 한반도가 열광했고 대륙은 침잠(沈潛)했다. 초장부터 토끼몰이 하듯 이리 치고 저리 막는 구리의 초강력 압박신공에 우리는 얼마나 치를 떨고 불안해했던가?

포석부터 종반까지 온몸 구석구석 축적된 아드레날린 때문에 식욕을 잃고 바둑TV 화면과 타이젬 대국 실을 들락거린 목요일 저녁, 필자는 294수의 엔딩 타이틀을 확인한 뒤에 늦은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굳이 메뉴를 대라면 ‘엔돌핀 국밥’이라 대답하고 싶다.

구리의 현란한 공격과 이세돌의 교묘한 타개는 두 마리의 학이 설원에서 우아한 날갯짓으로 어울리는 강신무(降神舞)라고 해도 좋았다. 그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강수와 강수의 충돌, 지략과 용기의 조화를 어떻게 글로 설명할 수 있을까?

명승부 중의 최고 명승부였다. 올해 들어 나란히 중원의 큰 성을 차례로 점령해가며 필연적으로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게 되어있는 한·중 간판스타 이세돌과 구리. 두 라이벌이 국가대항전 대미를 장식하는 농심 배에서 마침내 조우했다. 타이틀의 규모와 상금의 액수를 떠나 국가대항 농심배는 21세기 바둑 최강국을 가르는 자존심이 걸려 있었다.
작년 중국의 창하오가 9회 농심배에서 4연승을 거두며 최초로 우승컵을 중국에 바쳤을 때 대륙이 들썩거렸다. 환호의 눈물을 흘리고 중국 바둑에 기여한 잉창치 선생 헌시(獻詩)가 올라오고 마침내 창하오는 잉씨배 우승 때도 받지 못했던 훈장까지 받았었다.

그들이 기뻐할 때 우리는 침통할 수밖에 없었다. 늘 이겨왔기에 패배는 정말 익숙하지 않았다. 묵직하게 치솟아 오르는 중국 바둑의 기세를 그제야 실감하면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던 게 사실이었다.

국가대항전의 승패가 기세의 주도권을 쥔다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세계의 바둑 팬들이 주목한 것은 이세돌과 구리의 대결이었다.

과연 누가 더 셀까?

필자는 작년 12월 30일 타이젬 특집기사로 [기왕사신기 - 유아독존]편에 두 라이벌을 언급한 적 있다. 동갑에 공격적 기풍까지 닮은 이세돌과 구리는 전적마저 7승 7패로 호각이었으니 그야말로 2009년에 천하의 패권을 놓고 격돌하게 되어있는 숙명의 상대였다.

세계의 모든 기사들이 상대하기 가장 꺼려하는 스타일이 바로 이세돌과 구리라고 입을 모은다. 그들은 수읽기가 전광석화 같고 기세가 용맹해 항상 상대의 의도를 거스르고 수순을 관장(管掌)하는 바둑을 즐긴다.

구리의 천재성은 한국의 젊은 기사들이 인정한다. 특히 포석감각이 당대제일이어서 얼마 전 새로 개발된 한국의 바투 게임에 출전해 충분한 연습도 없이 놀라운 솜씨를 발휘했었다. 특히 ‘묻지마 히든’으로 통하는 초반 히든 초식은 바투 전술의 하나로 자리 잡을 정도였다.

“글쎄요. 전적은 제가 좀 낫지 않나요?”
연말 구리가 이세돌과의 전적을 묻는 질문에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렇게 대답했다. 비슷한데도 그는 그처럼 우월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제가 좀 밀렸죠. 갚아야 할 빚이 있습니다.”
이세돌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7승 7패로 비슷한데도 그는 열세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 아닌가?
하긴 천하의 이세돌에게 그 정도 승률을 기록했으니 착각할 수도 있겠다.


타이젬 사상 최고의 베팅기록

돌(乭)과 구리의 대결이라!
석기시대를 내몰고 도구의 진화를 가져온 청동기(靑銅器)시대를 생각하게 된다. 구리 9단의 이름이 왜 하필 원소기호 CU란 말인가?
어제 운명의 결전이 벌어지기 전에 필자도 베팅 군자금을 마련해놓고 마우스를 만지작거리며 라이벌의 이름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아하! 돌이 그냥 돌은 아니고 앞에 ‘쎈’이 붙어 쎈돌 아닌가? 그렇다면 강철이란 뜻이니 청동기시대를 보내버린 철기시대로 아전인수 격 해석을 내린다.

구리의 제1수가 바둑판에 떨어지자마자 가차 없이 이세돌에게 베팅을 날린다.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는 심정으로. 필자와 같은 심정을 지닌 유저들이 와르르 몰려들어 이세돌 쪽 막대그래프가 쭉쭉 늘어난다. 그러나 초반 포석에서 구리가 기선을 잡자 그래프의 균형이 대등하게 움직인다.

50수로 마감한 1라운드 베팅은 53:47로 이세돌의 우세.
베팅 액 3,539,140,900 : 3,027,189,000
무려 650억 포인트가 걸린 희대의 기록이 나온다.
바둑은 분명히 구리가 우세하다는데 이세돌의 역전을 믿는 유저들이 많다.

중국 고수1방은 49:51 중국 고수2방은 47:53으로 집계됐다.
2라운드에서 구리가 계속 앞서가자 대화창에 탄식이 흘러나온다.

“아아! 이런 상황에서 애국 베팅을 해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 비통한 심정으로 글을 올린다.

“구리한테 베팅해요. 세돌이 이기면 무조건 좋고 혹시나 지면 베팅 승리로 위안을 삼을 수 있잖아요. 베팅에는 국경이 없습니다.”
또 누군가가 살짝 유저들의 심기를 긁는다.

바둑은 80수에 극적인 타협이 이뤄졌지만 그래도 구리의 저돌적인 기세가 판을 압도하는 분위기. 해설자가 열심히 판을 분석해도 유저들은 좀처럼 좌불안석 TV와 모니터를 오가며 또 다른 해설과 비교한다.

104수. 드디어 세돌의 승부수가 떨어지자 환호성이 터진다.
뭔가 터질 것 같다. 참고 또 참았던 세돌이 마침내 칼을 뽑고 성큼성큼 적진으로 진군하는 영상이 오버 랩 된다. 대국 전에 세돌이 말했다.
“구리의 포석이 아주 강합니다. 포석에서 많이 밀리지만 않으면 중반 이후에 이길 자신이 있습니다.”
의미심장한 표현이다. 그런데 포석에서 아주 많이 밀리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돌이 말하는 자신감은 역시 중반 이후에 여지없이 발휘된다.

구리가 거의 약점이 없는 바둑을 둔다지만 세돌은 뭔가 표현하진 못해도 구리의 빈틈을 감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상변 구리의 진영으로 깊숙이 들어간 세돌이 흔들기 초식으로 청동(靑銅)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리고 살금살금 그 균열의 틈바구니에 황산을 부어 녹이기 시작한다. 마법과 같은 연금술 솜씨에 유저들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이윽고 철통같았던 흑의 우상 귀를 도려내고 대마의 삶까지 위협하며 세돌이 승부를 미궁으로 몰아간다. 그러나 구리도 좌상 귀에서 수를 내고 패를 이용해 끝까지 강수를 연발한다.

“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신묘하게 빠져 나온 이세돌이 갑자기 둔탁한 수를 연발하네요. 뭔가 착각한 듯싶은데요.”
TV해설자가 상변을 만지작거리며 안타까워한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관자노리에 빠른 맥이 요동치며 흘러간다.

“아, 계가를 해보니 백이 앞섰네요. 대단합니다 이세돌!”
어느 순간 우위를 확립한 세돌이 단단하게 빗장을 잠그고 판을 닦아버린다.
3집 반 승리!
대화창이 빠르게 올라간다. 세돌의 역전승에 모든 유저가 한 마음으로 축포를 쏘아 올린다.

tomatin(4단) : 이세돌은 우승 상금으로 우황청심환을 바둑 팬들에게 돌려야 한다!
여백의美(5단) : 세계 1,2위의 싸움이니 승패를 떠나 즐겁지 아니한가?
석송산(4단) : 타이젬은 우승 축하 기념으로 모든 유저들에게 티머니를 지급하랏!
데이지(3단) : 이창호는 잉여인간이 되어버렸군요.^^
소주공짜(1단) : 나 지금 울고 있습니다 흑흑!
때로때때로(6단) : 전율이네요. 만세!


확신의 바둑, 망설임의 바둑

이세돌은 확신의 바둑을 둔다. 오직 자신만을 믿는다. 그래서 당당하다.
상대적으로 이창호는 망설임의 바둑을 둔다. 자신을 믿지만 상대의 능력도 인정하기에 한 번 더 생각하고 고민한다. 물론 그 망설임의 격조는 최상위급이다.
구리도 이세돌과 흡사하게 확신의 바둑을 둔다. 주기율표 11족의 Cu, 열전도율이 빨라 전선(電線)으로 쓰인다. 중국바둑의 간판 구리도 전류처럼 빠르고 눈부시다.

확신의 바둑을 두는 기사들은 당당하다. 비록 그 확신이 때로 오판이 되어 자신을 베는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은 언제 봐도 당당해서 아름다운 법이다. 당당함은 외적조건이 아니라 자기에게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분위기다.
 

언젠가 이세돌은 중요한 대국의 아주 어려운 대목에서 별 생각 없이 툭 한 수를 던졌다. 그 수의 대응을 위해 장고하던 상대는 마침내 위축된 수를 연발하다 돌을 던지고 말았다.

대국 후에 세돌에게 문제의 한 수에 관해 물었다.

“준비된 수였나요?”
“아뇨. 정말 모르겠던데요.”
“그런데 노타임으로 팍 둬버립니까?”
“하하, 나도 모르는데 상대도 모르겠죠.”


이 얼마나 자신만만하고 당당한 대답인가?
나 이세돌이 모르는데 누군들 알겠는가? 그러니 상대가 실수할 수밖에!
그래, 천하의 이세돌이 둔 수니까 분명히 뭔가 있을 거야!
그렇게 상대의 주저함과 망설임을 유발하는 것이 확신의 바둑이 지니는 어드밴티지고 마일리지인 것이다.
확신의 기사 이세돌과 구리.

비록 오늘 우리 편 이세돌이 승리해 큰 기쁨을 누리고 있으나 당대 최고의 라이벌이 앞으로 펼칠 무수한 명승부를 기다리는 기쁨만 할까?
수고했다. 연금술사 이세돌.
멋있었다. 당당했던 구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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