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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저수첩]

포항 碧도장의 여걸 - 정기활

타이젬 아이디는 '우정1'

김종서 작가2009-03-12 10: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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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잘 되는 기원

3월 첫 주말, 영일만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닷바람이 따사로워 나그네, 코트를 벗고 포항 역 앞에 선다. 요즘 잘 나가는 도시가 포항이라고 들었는데 역사(驛舍) 건물이 예상과 달리 아담하다.

역 앞 교차로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벽 도장 간판. 뒤죽박죽 뒤엉킨 전신주의 전선이 을씨년스럽다. 인터넷 바둑의 확장으로 점점 시들어가고 있는 기원문화의 현실을 간판이 보여주는 느낌이다.

그런데 비좁은 계단을 돌고 돌아 기원에 들어서니 웬걸? 사람이 가득하다.
우중충한 벽돌 건물에 허름한 분위기인데 기원 실내는 바둑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3월 7일 포항의 기원 벽 도장이 새롭게 개소식을 가진 날이다.
이 날에 맞춰 기원의 단골손님들이 전체 풀리그를 계속 벌여왔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디데이가 도래했고 승률에 따라 입상자들이 결정됐다.
바둑 인들의 잔치 날이니 만큼 프로기사 김세실 2단이 초청돼 다면 지도대국을 가졌다.

지방도시의 기원 경제가 최악이라는데 포항의 벽 도장은 매일 20~30 여명의 기우들이 찾아와 단란한 바둑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지역 유지들과 여성 기우들까지 합류해 아주 가족적인 분위기다. 점심이나 저녁도 회원들끼리 쌀이나 반찬 등을 가져와 함께 지어 먹는다. 한솥밥에 수담까지 나누니 그 정(情)의 농도가 오죽할까?

얼마 전 고향인 포항에 7080 라이브 카페를 차리고 정착한 가수 함중아씨도 벽 도장의 핵심 멤버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원에 들러 딱 세 판을 두고 간다. 공연에 앞서 바둑을 두면서 마음을 가다듬는다고 밝힌다.


▲ 가수 함중아 씨(오른쪽)과 김세실 2단의 대국 모습.

함중아 : 오후에 나와서 바둑을 두고 대개 여기서 저녁 식사를 합니다. 그리고 공연 시간에 맞춰 가지요. 바둑으로 공연 직전 마음을 가다듬노라고 제 입으로 말하고 다닙니다만 저는 아직도 하수라서 바둑을 지면 열을 받아 버려요. 노래를 부를 때도 패착이 어른거리지요. 하하하

80년대의 인기스타 함중아 씨를 열 받게 하는 라이벌은 뜻밖에도 인심 좋아보이는 관상의 정기활 여사다. 처음 만났을 때 두 점을 접고 두었던 바둑 어느덧 정선, 호선으로 바뀌더니 지금은 정 여사가 백을 잡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여걸이 오늘 유저수첩의 주인공이다.

S#2 바둑판을 엎은 남편

그녀가 바둑을 접하게 된 것은 10여 년 전이었다. 남편이 포항제철에 근무한 까닭에 직장 부인들의 취미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바로 인터넷 바둑동호회에 가입해 바둑의 오묘한 세계로 푹 빠져들게 되었다.

"많이 늘었나? 내 한 수 갈켜줄까?"

7급 기력의 남편은 하수 부인을 밤마다 바둑판 앞에 앉혀놓고 대마사냥의 포만감을 만끽하며 희희낙락하곤 했다. 바둑을 둘 땐 남편이 아니라 웬수였다. 거친 행마로 우격다짐하는데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바둑보다 깐죽깐죽 능멸하는 언사가 더 얄미웠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승부욕이 강한 정기활 여사는 남편의 바둑이 제대로 익은 바둑이 아니고 어딘가 엉성하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조금만 익히면 따라잡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확신했다.

뭐든지 시작했다 하면 뿌리 뽑는 성격인지라 책을 파고 인터넷 대국 수를 쌓으면서 비장의 칼을 갈았다. 한동안 남편과 각방을 쓰면서 바둑도 삼가고 복수의 날을 헤아렸다.
그리고 인터넷 바둑의 급수가 급격히 향상된 어느 날 남편에게 도전장을 던졌다.


▲ 이번 유저수첩의 주인공인 정기활 여사.

"한 판 하입시더."
"우화화 좋제. 몇 점 깔아주믄 좋겠나?"
"호선."
"미친나?"
"호선으로 지믄 당신 시키는 거 뭐든 할낍니더."
"우화화, 좋아."

그렇게 시작된 복수전에서 정 여사는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완벽하게 남편을 제압하고 말았다. 초장에 이미 끝난 바둑인데 남편이 돌을 던지지 않고 몽니를 부리는 바람에 처참한 살육전을 피할 수 없었다. 남편은 도저히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표정이었다.

완벽하게 퇴로마저 차단해놓고 정 여사는 야금야금 남편의 영토를 지워가며 그 동안 지겹게 당해왔던 깐죽거리기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정도가 좀 지나쳤던지 남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치아뿌라!"
그가 갑자기 바둑돌을 쓸어버렸다.

"이기 무신 짓인교?"
"와? 꼽나. 고마 확 바둑판을 던져뿔라다 참았구마."
"하이고! 던질라믄 던져뿌소."

불 같은 성미의 남편은 두말없이 아파트 2층 유리창을 열고 주저 없이 바둑판을 던져버렸다. 그 날로 부부의 바둑은 영원히 끝났다. 남편은 아예 바둑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고 했다.

"호호, 바둑판을 창밖으로 던진 남편은 아마 찾아보기 드물끼라예. 그 소동을 겪었지만 지금은 내가 바둑에 열중하는 걸 내심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예."

요즘 그들 부부는 철저하게 서로의 영역을 인정해주고 각자의 자유를 즐기기로 합의를 봤다고 했다.

남편은 술, 아내는 바둑이다. 서로의 영역을 지키느라 좀 늦어도 간섭하기 없기로 말뚝을 박았다. 아니 아예 늦은 시각 각자의 취미를 즐기고 한 차로 함께 귀가하는 날이 많아졌다.


▲ 정기활 여사의 타이젬 아이디는 '우정1'이다.

S#3 바둑은 제2의 삶

그녀 정기활 여사는 바둑을 알고 난 뒤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의 바둑지도사로 일도 얻었으니 너무 행복하다는 것이다.

"제가 바둑 두는 걸 시아버님이 가장 좋아하십니더. 며느리가 바둑을 잘 둔다고 손님들 오실 때마다 자랑하시거든 예"

또 바둑을 통해 다양한 계층의 기우들과 친분을 나누게 된 것도 복이라고 고마워한다.
늘 웃는 낯으로 바둑판 앞에 앉는 그녀는 포항 벽도장의 얼굴 마담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그녀의 밝은 기운이 기원의 공기를 정화하는 듯싶다. 기우들을 위해 커피는 물론 점심 식탁까지 차리는 인심이 푸근하다. 그 덕분에 여성 기우들이 캠프라도 차린 것처럼 자주 드나들게 되니 보기에도 좋다.

"아마추어 대회가 있으면 멤버를 꾸려 꼭 참가합니다. 아직은 대도시에 비해 실력이 딸리지만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까 언젠가는 포항 여성바둑이 한번쯤은 타이틀을 가져올 날이 있을 낍니더."

일취월장! 정기활 여사는 벽 도장 리그전에서 최다승을 거두고 늠름하게 우승을 차지했고 30만원의 상금을 탔다. 물론 그날 밤 상금에 세금까지 얹어 술값을 치러야했지만.^^


▲ 기원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정기활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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