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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雜學]

일본 바둑의 부활을 꿈꾸며

ㅋㅋ

진재호 바둑평론가2009-04-15 16: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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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바둑의 부활을 꿈꾸며

바둑이 한중일의 지적(知的) 유희를 넘어 전 세계인의 m스포츠(마인드스포츠)로 발전해가는 이즘, 바둑이 도태되어가는 오직 한 국가 일본을 문득 생각한다.

과거엔 저마다 이순신 장군의 맘으로 ‘격퇴’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일본을 주적(主適)으로 삼았었다. 다들 민족주의적인 관점에서 우리바둑이 발전해야 한다고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일본은 한국바둑이 개척하고 번성해야 할 과제를 던져준 바로미터이자 이정표였다.

일본바둑계의 몰락은 한마디로 급속한 바둑계의 변화에 대해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했고, 또 '젊은 피'의 수혈이 제대로 안되어 동맥경화에 걸려 있는 프로제도의 문제, 다변화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재미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한 문제 등이 있을 것이다.


●…일본유학파는 한국 바둑의 대들보가 되다


일본바둑은 한국바둑의 모태가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남철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 조치훈 조상연 류시훈 조선진 김수준 김광식 김현정 등 10여명의 한국기사들이 일본(바둑)과는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

해방 후 순장바둑을 일본의 현대식바둑으로 바꾼 조남철 선생의 개혁부터 룰 문제, 기원의 제도적인 장치 문제까지 우리는 일본을 그대로 따라했다. 1990년도부터는 우리식의 자주적인 여러 정책들이 생겨날 때까지 50년 동안 선진국 일본의 ‘전철’을 밟았다. 일본은 한국바둑의 은인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은 유일한 바둑인들의 희망이 땅이요, 하나뿐인 커다란 ‘인큐베이터’였다. 조훈현이 바둑메이저리그인 일본 땅을 밟을 때, 기다니미노루(木谷實)가 조훈현의 스승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공항에서부터 세고에겐사쿠(瀨越憲作)가 소년 조훈현을 낚아챘다는 일화가 있다.

중국에서 온 제자는 세고에가, 그리고 한국은 기다니가 맡는다는 ‘신사협정’을 세고에가 먼저 깬 것이다. 세고에의 제자 욕심이 빚은 촌극인데, 촉망받는 소년을 자기 제자로 삼으려고 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제자 욕심은 국경을 넘나든다. 그들이 단순 돈벌이로 해외의 기재들을 받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바둑보급의 숭고한 뜻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던 발상일 것이다.


●…호랑이새끼라도 그들은 마다않고 키웠다


일본은 일본 시장만으로는 세계화작업에 차질이 올 것이란 사실을 이미 생각했던 것이다. 일본의 고민은 이 좋은 바둑을 세계 속으로 전파하려는 뜻을 100년 전에 생각한 것이다. 한국 중국 대만 등 바둑을 즐겨하던 국가에는 일본의 ‘스파링 파트너’가 될 만큼 몸집을 키우는 것이 필요했고, 그밖에 국가는 관전해주고 열광하여 박수를 쳐줄 상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1926년 12세의 중국의 천재소년 우칭위엔에 관한 소문을 접한 일본은 나중 본인방에 오르는 이와모토가오루(岩本薰)가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서 테스트를 해 본다. 대륙의 보잘 것 없는 소년을 일본으로 데리고 간 것도 일본이었다.

씨앗은 스스로의 인자에 의해 결정되지만, 그 싹에 물을 주고 온도를 주며 빛을 주는 행위가 따라야 하는 법이다. 그뿐이 아니다. 대만에서는 린하이펑(林海峰)과 왕밍완 왕리청 장쉬 등을 일본으로 불러들였다.


▲ 2007년 6월, 한국에서 열린 후지쯔배 대국장 전경.

●…후지쓰배는 세계바둑의 역사가 되고 있다

1988년 전 세계 바둑 팬을 흥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빅이벤트 후지쯔배가 출현한다. ‘세계’라는 글을 앞에 붙은 대회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공식적인 세계타이틀전에 생긴다고 세계바둑계는 약간 어색한 환영을 보이기도 했다. 이미 대회 개최를 선언한 잉씨배를 못 마땅히 여긴 일본이 ‘새치기’를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자존심이었다. 현대바둑의 꽃을 피웠다고 자부하고 있으며, 세계 속에 바둑을 심고 있고, 기량으로도 최고를 자랑하고, 더욱이 경제력이 있는 일본으로서는 절대 타국이 바둑에서 만큼은 앞서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듯.

약관을 넘긴 후지쯔배가 최근 열리고 있다. 일본은 최근 들어 우승과는 거리가 먼 전력이며 자국 바둑열기가 2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식어있다. 그러나 꿋꿋하게 대회를 주최하는 대승적인 일본의 태도에 경의를 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강력한 내구성을 자랑하는 콘크리트처럼 새로운 역사가 되고 있다.

중국과 한국이 일본처럼 바둑약소국으로 전락했을 때도 과연 ‘돈 먹는 하마’ 세계기전을 과연 계속 개최해줄 것인가. 한국이 후지쯔배에서 무려 10연패의 대기록을 세울 때도 가만히 앉아서 점잖게 박수를 쳐 줄 것인지를 한번 생각해보자. 후지쯔배 이후로 도요타덴소배 CSK배 등 굴지의 세계대회가 창설되기도 했다.


●…세계바둑계에 종주국화를 생각하자


중국 한국은 바둑문화에 대해서는 아무도 신경 쓰질 않는다. 오직 기도연마에 관심이 있을 뿐 바둑문화사적으로 세계바둑계에 대한 기여는 초라할 지경이다.

한국은 세계 최강의 실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문화로서의 바둑을 육성하거나 한국바둑의 우수성을 해외에 알리는데 실패하고 있다. 현재 일본식 바둑용어가 전 세계에 전파, 교육되고 있는 등 바둑을 일본의 문화홍보 수단으로 적극 이용하고 있다. 한국은 세계최강국이라는 더 없이 좋은 인프라를 두고도 바둑보급은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본인방이었으며 1948년 우칭위엔과의 치수고치기도 벌렸던 이와모토가오루(岩本薰)는 10억엔을 기부하며 1992년 유럽바둑센터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다 지었다. 오늘날 서방세계에 바둑이 널리 퍼진 것은 순전히 일본의 공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조차 없는 타국에서 바둑보급을 하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바둑의 불모지인 유럽이나 미주지역은 일단 바둑을 알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서양에서 100여 년 전부터 바둑을 일본식 ’go'로 썼다.

1960년대에 일본은 경제적으로 안정되어가자 유럽각국의 선수들을 초청하여 서양인들의 바둑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주기적으로 체크도 하는 등 세계바둑의 대부노릇을 해왔다. 1970년대에 와서는 더욱 체계적으로 공부하려고 했고 일본어로 된 각종 바둑교재를 구인하고 일본어를 배우는 사람들도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실로 눈물겨운 인큐베이터 역할은, 클럽중심의 바둑활동이 전 세계적으로 꾸준히 성장하여 오늘날 매년 일본에서 개최하는 세계아마바둑선수권전의 참가국 수가 70여 국에 이르는 결실로 나타나게 되었다. ‘바둑=일본’이라는 등식을 가진 국가가 상당히 많다. 일본이 바둑의 창시국이라는 오해까지 듣게 했다. 그만큼 일본이 국가브랜드를 갖추어놓았다는 말이다.


●…일본바둑의 부축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일본 아사히신문 보도에 의하면 관서기원은 올해부터 입단 나이제한을 18세로 정하면서 그 이상의 연구생을 모두 퇴출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재능이 아까운 20대들을 상대로 특별입단 기회를 주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관서기원 4단 이하의 기사와 2국, 9단과 1국을 두어 남자는 2승, 여자는 1승 이상의 성적을 거두면 준 프로기사의 자격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출전한 기전에서 토털 승수가 20승을 넘어서게 되면 전문기사로 인정되며 모든 기전의 출전이 가능하다고.

이는 저물어가는 관서기원에서는 일본기원에 대항할 수 있는 인재를 영입하려는 뜻과 윤춘호․ 홍맑은샘 아마7단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설이 돌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느끼기엔 몰락하는 일본바둑의 현실에서 나온 궁여지책에 다름 아니다. 오죽했으면 일본에서 프로가 되는 길은 ‘입단대회에 나오는 것’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

지금 한국은 일본과의 교류전이 모두 끊어졌다. 과거 우리가 호선으로는 판판이 깨어질 때에도 일본은 스스로 물주를 잡아서 한일 교류전을 해주었다.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다보니 한국은 교류의 대상이 중국으로 바뀌어져있다. 그렇지 않아도 좁아지는 일본의 입지를 더욱 줄여놓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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