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력보다 기세로 싸우는 사람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바로 순국산 고추장바둑 서봉수이다. 그는 필생의 라이벌 조훈현과 비교하면 참으로 대비가 많이 되는 사람인데, 그 중 가장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은 바로 실력이었다. 통산 승률에서도 30% 정도의 비율이었고, 그래서 누가 봐도 조훈현이 황제로 보였지만, 한 번도 황제와의 승부를 포기하지 않았던 불굴의 투사였다. 그를 지탱해준 것은 기력이 아니라 기세였다. ●…중얼거림의 원조는 조훈현, 고함의 원조는 서봉수 ‘아, 이 사람아. 좀 생각할 수도 있는 거지, 바둑 유리하다고 되게 유세 떠네.’ 이런 식의 대화는 우리네 아마추어의 특권이다. 그러나 프로들의 대국에서 이런 식의 구시렁거림은 물론 있을 수 없다. 규칙에 안 된다고 정해진 것은 없지만 예도(禮度)를 이미 알고 있는 그들이 그런 식으로 ‘치졸하게’ 대국에 임한 적은 없다. 조훈현은 언제나 중얼거리는 타입. 서봉수는 상대적으로 순박하여 조훈현의 눈치를 슬슬 보면서 짜증석인 표정으로 ‘아, (시끄럽구먼)…’ 정도의 방어적 잔소리일 뿐, 자신이 작전을 건 적은 별로 없었다. “그 좀 조용히 하쇼!” 조훈현은 ‘반칙 아닌 반칙’에 익숙한 것에서 서서히 적개심(?)이 생겨났을까. 80년대 들어서 한번 크게 반발한 적이 있다. 도전기 중에 한번은 크게 용기를 내어 조훈현에게 큰소리를 친 사건. ‘아니, 이 순둥이가 웬일이지?’ 분명 그런 지적을 먼저 한 사람이 바둑은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면, 흥얼거리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러나 반발하고자 하는 쪽은 ‘지금 말할까. 좀 기다려볼까. 한 소리했다가 또 도리어 쪼잔하다고 욕 듣는 건 아닐까.’ 등등 속으로는 무진장 복잡한 생각이 꼬리를 문 다음 비로소 터져 나오는 것이다. 오히려 피해자는 자신이 발설하기 전 이미 마음고생이 심한 상태여서 대국에 도움이 될 수가 없다. 당연히 그 바둑도 서봉수가 일찌감치 접고 말았다.
그 날 이후 두 사람은 극도의 라이벌 의식을 가지게 되며 앞서가는 자와 쫓아가는 자의 대립구도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그 시점부터 조훈현은 순풍에 돛단 듯 일취월장하고 반면 서봉수는 변방고수로서 머무는 시간이 늘어난다.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신경전도 자주 등장한다. 조훈현 때문에 서봉수의 대국태도도 좀 험악해졌다는 세간의 주장은 상당히 일리가 있다. ‘신문지사건’이 있었다. 조훈현은 여느 대국 때처럼 어김없이 조훈현은 소파에 거의 드러누워서 뜻 모를 중얼거림으로 나오고 있었다. 서봉수는 하수인 양 머리를 조아리며 수읽기를 하고 있는 광경은 당시의 흔한 그림이었다. 그때까지는 조훈현의 중얼거림은 상대를 의식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서봉수는 자신의 정신을 흩뜨리려는 저의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서봉수는 앞의 예처럼 고함도 질러봤지만, 워낙 조훈현의 습관은 고질적인 것이라 고쳐지질 않았던 터. 그래서 고안해낸 전가의 보도는 바로 신문지. 신문지을 확 펴서 조훈현의 얼굴을 아예 가려버리는 것이었다. 같이 대들다간 중얼거림의 명수에게 뒤질 터. 따라서 ‘난 당신의 중얼거림이 듣기 싫소!’ 기분을 거슬리는 작전으로 나가자는 것이 서봉수의 작전이었다. 물론 상대가 신문을 펼쳐들고 마치 잠복 중인 형사처럼 나오니 천하의 조훈현도 적잖이 황당했었다.
‘아 괴롭네. 괴로워…’ 드디어 엄살이 들려오면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서 스포츠신문을 꺼내들고는 대국장을 배회했다. 마치 '당신의 엄살은 신경을 전혀 안 쓴다'는 뜻으로 딴청을 피우는 듯이 말이다. 그쯤 되면 대국장 공기가 싸악 가라앉는다. 그 신문을 든 ‘형사’는 관계자 또는 옆 대국자에게 대국 중임에도 다가와 말을 붙이곤 하는데, 오히려 관계자는 ‘서봉수편’으로 보일까봐 몸 둘 바 몰라 당황한 적도 다반사. 그런데 역시 조훈현이 한 수 위였다. 신문지를 이용한 대응책에는 이미 간파가 되었음이다. 바로 서봉수가 스포츠신문을 다 읽을 때까지 착석을 않는 것이다. ‘아이쿠 이러다가 링을 사이에 두고 시간만 흘러가고….’ 조훈현이 되치기에 서봉수는 또 속수무책이었다. 괴로운 시간들이 흐르다가 결국 자신의 시간만 흘러가니 링 밖으로 나갔다가 결국 먼저 돌아오는 쪽은 서봉수였다. ‘그래! 내가 항복이다.’
그들이 국수전 본선리그에서 만났다. 그런데 두 기사 간에는 대국과 관계없이 관계가 어색한 일이 그 이전에 있었던 모양이다. 사적인 일로 심기가 서로 불편하던 때에 그들은 본선리그라는 중대한 한판에서 마주친 것. 따라서 그간의 사적감정의 앙금은 이 한판을 이겨서 갚아버리겠다는 심사로 서로에게 남아 있었을 것이고 그 한판은 마치 진검승부를 연상시키는 빅 매치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두 사람의 편치 않은 관계를 잘 아는 동료기사들도 그 한 판에 상당한 주목을 하고 있었는데, 소문난 잔치에도 먹을 것이 있다는 새로운 학설이 등장할 만큼 볼거리가 풍성했다. 흑을 든 김재구가 첫 수를 김수영의 우하귀 쪽에다 갖다놓자 김수영은 그 불같은 성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다음 착수를 않는다. ‘빛나리’ 김수영은 느닷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런 분위기에서는 바둑을 둘 수 없다”며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이에 뒤질세라 김재구는 자신이 반칙한 것도 아니니 ‘법대로 해라’는 식이었다. 김수영은 그 분을 이기지 못해 딴 대국을 구경하며 김재구의 부당성을 동네방네 알리고 있었다. 동료기사들은 그래도 대국이 중단되는 건 막아야 한다며 김수영에게 화를 풀고 대국에 임하라고 권유했고 결국 김수영도 대국 개시 2시간이 한참 지나서 두 번째 수 (그러니까 자신으로서는 첫 수)를 둔 일이 있었다. 참 승부가 아이러니한 것이, 그 바둑은 김수영이 좋은 내용으로 이끌었으나 막판에 역시 그 분을 채 가라앉히지 못한 죄로 역전을 당하고 만다. 역시 열 받으면 안 되는 것이 바둑이다.
당시 한국에서 벌어진 제1,2국은 서로 한판씩 나눠가져 40만 달러의 우승상금은 제3국인 싱가포르에서 3번기로 축소된 상황에서 펼쳐지게 되었다. 성하(盛夏)의 도시 싱가포르엔 선수 서봉수와 단장 김수영 그리고 기자인 필자가 동행했다. 여독은 안 풀렸지만 그래도 해외원정길이니 도착하자마자 선수단은 시내관광부터 하게 됐다. 그런데 시내를 돌다 보니 본의 아니게 일본선수단과 같은 곳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물론 양국 선수단은 일단 40만 달러를 놓고 싸워야 할 입장이라 좀 어색하긴 했지만 그래도 덜 어색하게 웃음도 나누고 악수도 하고 억지로 사진촬영도 했다. 그런데 한 쪽 옆에서 일본 측 단장인 구도노리오 길이 3m는 됨직한 구렁이를 몸에 칭칭 감고 사진 촬영을 하는 것이 아닌가. 물론 사진 촬영용 구렁이였다. 이를 보자 ‘빛나리' 김수영 단장이 절대 한국단장도 질 수 없다며 구도의 뒤를 이어 촬영에 나서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는 구렁이 감기의 진수를 보여주려는 듯, 그 구렁이를 좀 더 복잡하게 칭칭 감아 돌리면서도 구도보다 훨씬 여유 있는 인상으로, 또 더 장시간 촬영을 한 것이다. 이를 본 일본 단장 구도가 두 손을 든 것은 불문가지. 반외 신경전에서 일본단장이 판정패를 당하고 슬금슬금 자리를 떴다. 그러자 필자가 과거에도 구렁이를 감아본 경험이 있냐고 물어봤다. ‘무슨 소리요! 나는 쥐꼬리만 봐도 기겁합니다. 다만 구도를 보는 순간 단장으로서 선수단의 기를 살려야겠다는 마음밖에 없어요. 제가 아까는 미쳤지요. 죽으려고 작정을 한 거지요. 그것도 돈 내고 말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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