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호주 원주민 기 ( 旗 ) 노란 태양, 붉은 흙, 검은 피부의 3색 |

▲ 원주민 춤 . 1788년 1월 26일 백인이 처음 호주에 이주한다 |

▲ 붉은 캥거루 (Red Kangaroo) |

▲ 회색 캥거루 (Grey Kangaroo) |
1. 호주의 바둑 광
나는 호주에서 살면서 바둑을 통해 많은 친구를 만났다. 그들과 만나고 바둑을 두는 일은 호주생활의 큰 기쁨이었다. 나는 바둑만 두면 민족을 가리지 않고 친구가 되었다. 지금 돌아다봐도 그 때가 그립고 그 친구들과 다시 어울리고 싶을 뿐이다. 서양 바둑인 중에는 마음 약한 지식인이 많다. 지적(知的) 능력은 있으나 사회 적응력은 좀 문제가 있다. 그들은 어떤 구속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어쩌면 그들이 진정한 자유인인지도 모른다. 자기네 본성이 가리키는 대로 인생을 맡기고 있다. “혹시 그들이 바둑을 통해 무위(無爲)사상을 실천하는 현대판 도인(道人)들은 아닐까?” ^^ 호주의 바둑광들(Go Freaks). 그 중 나와 친한 몇 사람을 소개한다.
1) 톰 포인튼(Tom Poynton)
1975년 어느 날. 나는 멜본 식물원공원(Botanic garden) 잔디밭에 앉아 한국에서 온 ‘월간 바둑’을 보며 복기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누가 지나가다가 나에게 “바둑 두는 사람이세요? (Are you a Go player?”)하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자기는 7급인데 한판 두어달라고 한다. 9점을 깔라고 하니 흠칫 놀라는 눈치다. 9점에 두 판을 지고 나서 그가 “나는 바둑을 배우기 전까지는 동양인은 백인에 비해 머리가 단순한 줄 알았다. 이제 보니까 영어 때문에 표현이 단순했지, 머리가 단순한 게 아닌 걸 깨달았다”며 바둑이 자기를 개안(開眼)시켰다고 한다. 그는 즉석에서 우리 부부를 주말에 자기집으로 초대를 한다. 그의 집은 바닷가 브라이튼(Brighton) 부자동네에 있는 큰 저택이었다. 점심식사 후 당시 70대였던 그의 어머니와 나는 크로케(Croquet)라는 잔디 밭에서 하는 게임을 하며 놀았다. 그의 차림이 허름해서 이렇게 부자 집 외아들인 걸 몰랐다.

▲ 나와 톰이 처음 만난 곳 . 이 공원을 다 보려면 2~3 시간이 걸린다 |
톰은 나에게 자기는 원래 대학교 불어교수인데, 일본어를 계속 공부해서 대학에서 일본어교수로 자리를 바꾸었다고 한다. 한 나라말로 교수되기도 힘든데 대단한 사람이다. 내가 일본어와 한국어가 문법은 같다고 하자 이제부터는 한국어를 공부하겠다고 한다. 당시 50쯤 된 그가 쉽게 다른 나라 말을 배우겠다고 해서 놀랐다. 그리고 몇 년 후 그가 독학으로 한국말이 어느 수준에 오른 걸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는 한국말 실습과 바둑을 두기 위해 한국에 다섯 번이나 찾아온다. 한번은 제프리(G. Gray)와 같이 찾아와 권갑룡도장에서 몇 달 동안 바둑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 때 바둑에 소질이 있는 알렉스란 20살 된 호주 청년을 데려와서 권도장에서 공부를 시켰다. 물론 경비는 톰과 제프리가 부담했다.
한 번은 종로 2가 근처 여관에 몇 달간 묵으면서 매일 파고다(탑골) 공원에 나가 그곳 노인들과 바둑을 두었다. “나이도 비슷하고 바둑 실력도 비슷하여 좋았다”고 한다. 점심 때면 서울시에서 나오는 트럭 앞에서 줄 서서 기다리다가 공짜 국수를 얻어 먹는다. 누가 이들이 대학교수 지식인에 백만장자라고 상상이나 하겠는가? 아마 외국 거지 정도로 알지 않았을까? 이렇게 30년을 노력한 톰은 지금 1~2단 정도다. 서양 바둑광은 우리와 차원을 달리 한다. 하는 짓이 대책이 없다. 톰이 결혼에 실패한 얘기만 들었지 그 이유는 모른다. 톰은 지금 80이 넘은 노인인데도 작년에 호주에 간 안영길 사범과 가까이 지내고 있다. 두 사람의 성분을 보아 앞으로 더 많이 가까워 질 것 같다.

▲ 안영길 사범과 톰 포인튼 |
2) 제프리 그래이(Geoffrey Gray)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프리는 호주에 바둑을 소개한 사람이다. 그는 부자가 된 후 전 세계를 돌며 기행(棋行+奇行)을 벌였다. 1970년대 초에는 만리장성에 올라가서 바둑을 둔 최초의 호주인이 되었고, 관계자도 아닌데 미국이나 유럽대회에 자주 얼굴을 나타내곤 했다. 그도 한국을 좋아해서 위의 글대로 포인튼과 바둑 공부도 하고 한국 일주여행도 했다. 그는 바둑으로 천하를 주유하며 다른 걱정은 다 잊고 살아 온 인물이다. 최근에는 연로해서 KGS에서 인터넷 바둑을 주로 두고 주요행사 때나 바둑계에 얼굴을 내민다. 호주 바둑 초창기 시절 제프리는 명실공히 ‘호주의 조남철’이었다.
*서양인 90% 이상이 일본 사이트 KGS(Kiseido Go Server)에서 바둑을 두는데 Tygem은 언제나 영어 사이트가 나오려나?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파고다 공원 . 바둑 두는 노인들 |
3) 돈 포터(Don Potter)
나는 돈이 바둑 기인 중 세계 랭킹 1위 후보라고 생각한다. 그와 30년 간 친하게 지내면서 나로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는 일을 그가 계속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는 동양학을 전공했고 박사 학위가 있는 사람이 바둑으로 석사논문을 또 쓴 사람이다. 피아노는 전공자보다 실력이 좋아 어려운 오페라 아리아도 초견(初見)으로 반주를 한다. 호주 바둑모임에는 그가 반주를 하고 내가 노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도 그래이처럼 대학교수였다가 부자가 되어 조기사임을 한 사람이다. 자기 부모가 죽으면서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 돈 포터 |
세계바둑대회에 가면 프로들이 각국 아마대표가 둔 바둑을 복기해 준다. 여기에 참여해 일본어나 중국어로 마구 떠들고 거침없이 깔깔대고 웃는 서양인이 한 명 있으면 그는 분명 돈이다. 그의 목소리는 높고 카랑카랑해서 웃음 소리가 멀리서도 들린다. 그는 대회와 아무 관련 없이 선수단이 묵는 호텔에 자비로 묵으면서 바둑인과 몰려 다닌다. 그는 일본 프로기사들과도 친분이 많아 마치 대회 관계자처럼 보인다. 그는 중국계 일본기사 왕리청 9단을 저단시절에 자기 집에 몇 달간 묵게 한 일도 있다. 그는 종종 나에게 “한국 바둑이 세계최강이 될 줄 알았으면 젊어서 중국어, 일본어 대신 한국어를 배울 걸 그랬다”고 한다. 그의 중국어나 일본어 실력은 중국/일본인들이 수준급이라고 인정한다. 어디에 가서 한문 시(詩)가 걸려 있으면 돈은 중국어로 읽어 내려가며 뜻을 해석해 준다.

▲ 돈은 목장에서 아침마다 조깅을 했다고 한다 |
그가 20년 전쯤 타스마니아(Tasmania)란 섬에 500만 평이 넘는 목장을 샀다. 목장 일을 모르는 사람이 그 먼 곳에 목장을 왜 샀는지 그것조차 엉뚱하다. 다만 타스마니아에 사는 에반스 2단과 친분이 있어 그쪽으로 연관이 되었을지 모른다는 짐작만 간다. 그가 거기에서 무언가 이상한 일을 벌일 거라는 나의 예감은 적중한다. 돈이 목동을 뽑을 적에 응모자들은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 고용이 됐다. 그 서약서는 목장 일이 끝나고 식사 후 두 시간쯤 돈에게서 바둑을 배운다는 약속이다. 돈은 자신이 채용한 목동들에게 바둑이 그들의 두뇌를 개발시켜 준다고 설득해서 고용인 전체가 바둑을 배우게 했다. 밤마다 자석판으로 돈이 강의한 뒤 그들끼리 바둑을 두게 했다. 3년쯤 지나 그 중 17세 소년이 2단이 되어 호주 청소년대표로 세계대회에 출전을 한다.

▲ 타스마니아 수도 호바트 (Hobart). 86년 호주대회 개최. 서봉수 9단과 박치문씨가 온다. 여기서 서사범은 오송생 9단과 5번기를 두고 박위원은 나를 꺾고 오픈 챔피언에 오른다. |
그것으로 그의 시험이 끝났음인가? 그는 목장을 팔고 시드니에 팜(Palm)비치라는 부자동네로 이사를 간다. 그가 우리부부를 식사에 초청하길래 가 봤더니 그의 집에 동네 아이들 40여명이 몰려와 바둑을 두고 있다. 웬 아이들이냐고 물었더니 “바둑을 두어 이긴 아이에게는 2불씩을 준다. 40명이면 이기는 애가 20명이 나오고 2불씩 20명이면 40불밖에 안 된다. 이 중에 벌써 바둑에 호기심을 보이는 애들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 2불씩 받은 아이들이 아이스크림 집으로 뛰어 가는 게 보인다. 그가 창안해 낸 독특한 방법의 바둑보급이다.

▲ 건너편 섬에서 본 팜 비치 (Palm beach) |

▲ 팜 비치 (Palm beach). 이 해변가에 돈이 살았다 |
돈이 착한 일만 한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바둑회에서 쫓아내는 일도 한다. 클라이브(Clive Davis)는 고졸 학력의 재향군인회 직원이다. 그는 바둑을 열심히 두어 20대 중반에 강한 3단이 되었다. 클라이브는 호주바둑협회 초대재무로 공헌도 많이 했다. 1980년에 내가 김재구 8단 일행을 초청했을 때 한 달 휴가를 내어 자기 차로 수천 킬로를 운전하며 도와준 일도 있다. 거기에다 클라이브는 잘생기고 날카로운 눈매에 자존심이 강한 만만치 않은 청년이었다.
그가 총을 갖고 있다고 수근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그가 화를 내면 누구나 충돌을 피했다. 그리고 클라이브 외 또 한 명. 나이트 클럽 트럼펫 주자 글렌(Glynn Divine) 2단이 있다. 그들은 돈의 눈으로는 바둑회 회원이 되기에는 수준미달이었다. 돈은 가끔 “우리들 사이에 저 두 명이 끼어서 분위기 망친다”고 투덜댔다. 그러나 내가 그들을 감싸고 있어 어떻게 하질 못 했다.

▲ 앞줄 오른 쪽이 돈 포터 2009년 8월 8일 한국대사배 |
그러다가 한번은 클라이브가 세계대회에 나가는 결정판을 나에게 지고 화가 나서 소리를 막 지른 일이 있었다. 나는 그 해에는 어차피 못 나가기 때문에 져도 상관 없는 판이었다. 그렇다고 내 입장에서 일부러 져 줄 수는 없었다. 그 패배로 클라이브가 가장 미워하는 라이벌 쿵이 세계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승률은 같은데 스위스 제도로 꼭 1점 차였다.
조용히 바둑 두던 모든 사람이 놀랐다. 나에게 소리지른 게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낸 거라고 변명했으나 나는 그를 불러 “연장자에다가 상수 앞에서 무례한 짓” 이라며 기어이 사람들 앞에서 나에게 사과를 시킨 일이 있었다. 그 때 저 멀리 앉아서 놀라움과 반가운 웃음으로 날 쳐다 보는 돈의 얼굴이 내 눈에 비쳤다. 나중에 사람들이 한국문화가 자기네와 다른 걸 그 때 나의 단호함을 보고 알았다고 했다.
클라이브의 사과를 받은 후 나는 그와 다시 친한 감정으로 돌아왔는데 돈은 내가 클라이브를 싫어하는 줄 알고 그를 바둑계에서 쫓아 낸다. 쫓아내는 방법도 좋지 않았다. 돈은 먼저 포커 판을 크게 벌였다. 돈이 클라이브에게 1500불 이상을 따게 되었다. 클라이브가 “지금 돈이 없으니 나중에 주겠다”고 하자 돈은 “그 돈을 안 받을 테니까 영원히 꺼지라”는 가장 모멸적인 방법으로 그를 그 포커 판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그는 글렌도 쫓아냈다. 글렌은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내가 한인회관 바둑클럽에서 자도록 해 주었다. 그는 침낭을 가져와 그 방에서 자면서 청소도 잘하고 관리도 잘 했다.
글렌은 바퀴벌레를 손으로 잡는 재주가 있다. 호주 바퀴벌레는 크고 아주 빠르다. 잡은 바퀴벌레를 왼 주먹에 쥔 채 오른손으로 바둑을 두고 있으면 마음 약한 상대는 거기에 신경을 쓰느라고 돈을 잃는다고 했다. 당시 한 판에 10불짜리 내기가 유행했었다. 그를 어떻게 쫓아 냈는지 모르지만 역시 돈이 그의 가난한 약점을 잡은 후 모멸감을 주었으리라 짐작한다. 그 후 돈은 자기가 바둑계를 정화했다며 의기양양했다고 한다.
나는 이 일로 돈에게 한 동안 화가 나 있었다. 2년 전에 시드니 공항에서 그가 날 보고 반가워 달려와서 포옹을 한다. 그 동안 그의 몸이 불어서 처음엔 내가 누군지 얼른 몰라봤다. 60대까지는 매일 조깅을 해서 호리호리했는데 70이 넘은 지금은 옛날 그만의 날카로운 분위기가 없어졌다.

▲ 시드니 한인 바둑모임 ( 앞줄 왼편 이정웅 한인바둑회장 . 다음 줄은 최해택 화백 ( 좌 ) 과 진양일 박사 |
돈은 바둑이 두고 싶어서 부자동네 팜비치에서 가난한 한인촌 캠시(Campsie)로 거처를 옮겼다. 부자인 그가 독신으로 일생을 사는 이유는 나도 모른다. 혹시 바둑 때문에? 그도 최근에 안영길 사범과 가까이 지내고 있다. 마침 안 사범도 피아노를 치고 작곡도 한다. 70대 중반의 그가 안 사범과 앞으로 무슨 일을 저지를까? 기대된다.
4) 데이빗 에반스(David Evans)
하루는 데이빗이 시드니대학 내 연구실로 장거리 전화를 했다. 자기의 어려서부터 취미가 목수 일인데 요즘 바둑판을 만들어 보면서 직업을 목수로 바꾸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는 내용이다. 그가 은퇴를 3년 앞 당겨 바둑판 제작업자가 되려고 하는데 나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내용이었다. 보통 65세가 은퇴니까 그가 그 때 62세였나 보다. 당시 그는 타스마니아 국립의료원 원장으로 저명한 의사였다. 내가 말리니까 그럼 자기가 만든 바둑판만이라도 평가해 달라고 한다. 나에게 바둑판을 가져오겠다고 한다. 그것까지 말릴 수 없어서 허락했다. 사흘 후 주말을 이용해 데이빗이 2000 킬로를 비행기로 날아와 시드니 우리집에 찾아 왔다. 타스마니아에서 나오는 11가지 나무로 소형 바둑판 11조를 만들어 들고 왔다. 내가 바둑돌을 두들겨 보고 너무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것은 빼고 몇 개를 골라 주었다.
그는 장시간 바둑판 만드는 일에 대해 설명을 했다. 한국에 보낼 판이면 한국 1년 평균 습도에 맞추어 컴퓨터 건조실에서 말린다고 했다. 그러면 한국에서 판이 휘지 않는다고 한다. 결을 따라 판을 자르는 방법도 알려 준다. 또 판을 반 쪽씩 나누어 붙여야 왜 더 좋은지도 설명한다. 줄은 컴퓨터로 1000분의 1 밀리도 안 틀리게 친다고 한다. 나무 색깔도 본인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다고 한다. 바둑판 밑에 코르크 판을 붙여 유리 테이블에 올려 놔도 상처가 안 나게 했다고 한다. 내가 그렇게 만들면 생산가가 높아 수지가 맞겠느냐고 했더니 명품 만드는 보람을 말하고 자기가 돈은 좀 있다고 한다. “이 사람이 아무리 목수 일이 좋아도 이렇게 까지?” 그는 이미 상태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 내가 갖고 있는 에반스 바둑 판 . 바닥에 코르크를 붙여 유리 위에 놔도 긁히거나 움직이질 않는다 . |
데이빗이 나에게 한국에 언제 가느냐고 묻길래 다음 달 방학에 간다고 했더니 자기가 따라가도 되겠느냐고 한다. 수천 년 바둑판을 만들어 온 한국 명인들의 바둑판 제작의 노하우를 알아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음 달 내가 그와 같이 한국에 와서 한국기원에 데려갔다. 한국기원은 데이빗에게 직원 한 명과 함께 한일바둑판 수원공장에 견학을 갈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나는 그가 다녀올 동안 기사실에서 바둑도 두고 양재호, 유창혁 두 사범과 식사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 데이빗이 수원에 간 동안 양재호 , 유창혁 사범과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필자(관철동 어느 카페) |
저녁 무렵에 돌아온 그는 실망한 태도가 역력했다. 나에게 “한일바둑 공장엘 갔더니 대패질, 줄로 가늠해서 나무를 자르고 줄을 치는 모든 게 너무 원시적 방법이라 놀랐다” 고 한다. 한국이 자동차와 컴퓨터를 만드는데 왜 바둑판은 아직도 그렇게 만드느냐고 한다. 자기 예상과 너무 달랐다고 쓴 입맛을 다신다. 바둑판 제작에 미쳐 일찍 은퇴한 데이빗은 결국 이혼을 당한다. 그의 바둑판은 거의 안 팔렸다. 그가 나에게 1986년에 준 ‘자라’라는 나무로 만든 바둑판은 20년 이상 쓰자 줄이 희미해졌다. 줄은 똑바로 쳤어도 물감은 잘못 선택한 것 같다. ^^

▲ 줄이 희미해진 자라 나무 바둑 판 |
홀아비가 된 데이빗은 시드니로 돈 포터를 찾아가 일생 그의 꿈이었던 슈베르트(Schubert)의 연 가곡 ‘겨울 나그네(Winterreise)’ 전 24 곡을 독일어로 외워서 불렀다. 완창(完唱)하는데 1 시간 반쯤 걸린다. 돈의 반주로 6개월간 맹연습을 했다고 한다. 그의 발표회에 갔던 사람들은 그의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아서 부르는 본인 외에는 아무도 못 즐겼다고 한다. 그의 목소리는 작고 달달 떨기까지 한다. 그리고 보니까 에반스가 한국 룸살롱 술자리에서도 성곡(聖曲)을 불러서 분위기를 망친 기억이 난다. 그는 타스마니아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단에서는 오보를 불었다.

▲ Franz Schubert 와 그의 친필 악보 |
데이빗은 이 무렵 주위의 권고와 도움으로 호주바둑협회(AGA) 회장 자리에 오른다. 그는 회장직에 전력을 다 했다. 그러나 열성하고 능력은 조금 달랐다. 그가 3년간 회장을 하고 났을 때 내가 회장직에 출마를 하자 그가 당혹해 하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다. 그가 나에게 선거에서 지자 실망감을 노골적으로 나타내었다. 내가 일본 바둑클럽과 교류전에서 호주바둑인을 대표해서 그에게 인사말도 시키고 전임회장 예우를 계속 잘 해주자 나에게 마음을 풀고 협조하기 시작한다. 잘 나가던 의사가 이혼을 당하고 타향에서 작은 방을 하나 얻어 살고 있는 데이빗을 보는 내 마음은 착잡하다. 그러나 그가 좋아하는 바둑을 두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면 “지금이 저 사람에겐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행복은 주관적인 거니까.

▲ 세계대회 동포챔피언 좌 (左): 정의선(스웨덴) 이학용(한국) 홍성화(캐나다) 김인(한국단장) 에반스(호주단장) 신흥수(미국) 한상대(호주) |
5) 데본 베일리(Devon Baily)
3년 전인가 우리집 사람이 호주에 세미나 참석차 가게 되었다. 내가 간 김에 호주바둑협회 회장 데본을 만나 몇 가지 일에 대해 상의하고 결과를 알아오라고 했다. 시드니에 도착한 집 사람이 데본에게 전화를 했더니 목소리에 힘이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가 “오늘은 힘이 들고 내일쯤 만나도록 노력해 보겠다”고 하길래 집사람이 “나도 내일은 캔베라에서 회의가 있는데 오늘은 안 되느냐”고 했더니 데본이 “사실은 심장수술을 받고 어제 퇴원했다. 의사가 나더러 여러 날 침대에서 꼼짝 말고 있으라고 했는데 바둑 일이라면 무리를 해 보겠다”고 했다. 놀란 집사람은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다시 연락 하겠다”고 하며 얼른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집사람은 지금도 “그때 데본이 나와서 저와 얘길 하다가 쓰러지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어요?” 하며 아찔해 한다. 진정한 바둑 쟁이는 바둑이라면 목숨도 건다?

▲ 데본 베일리 |
데본은 대학에서는 물리학을 전공했으나 교육자로 풀려 고등학교 물리교사, 교감을 거쳐 교장이 되었다. 시드니 남부에 있는 명문 사립고 교장이었다. 호주–뉴질랜드 국가대항전이 그의 학교에서 주말을 이용해서 열렸을 때다. 대회장이었던 내가 “내일 블루마운튼(Blue Mountain)에 피크닉을 가는데 우리가 오후 6시경에 바비큐(Barbeque)를 하니까 점심은 샌드위치로 먹으려고 한다. 30인 분이 필요한데 자원자를 찾는다” 고 했더니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데본이 손을 든다. 내가 “몇 명분이나 해 오겠느냐”고 했더니 “30인분을 다 해오겠다”고 한다.

▲ 호주 - 뉴질랜드팀이 피크닉을 간 불루 마운틴 (Blue Mountains) 의 세 자매봉 (3 Sisters) |
나는 그때 대학생 딸과 같이 서있던 그의 부인이 그를 노려보는 눈빛을 보았다. 죽일 것 같았다. 단상에서 얘기를 하고 있는 나만 다 볼 수 있었다. 교장관사가 학교 바로 옆이라 데본 가족이 총출동하여 행사를 도와주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나누어서 하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내 아내와 딸이 샌드위치를 맛있게 만든다”며 “다 만들겠다”고 한다. “이 사람이 가정에서 수읽기가 제대로 되고 있는 거야?” 나는 걱정이 되었다. 다음 날 샌드위치 30인 분은 해 왔으나 그로부터 몇 개월 후 데본은 이혼을 당한다.
그는 교수들이 주축이 된 바둑협회 집행부와 코드가 안 맞아 이사직 한번 안 한 채 시드니 바둑클럽 회장만 20년 가까이 하고 있었다. 한인촌에서 가까운 애쉬필드(Ashfield)에 있는 웨스트리그 클럽(West League Club)에 방 하나를 얻어 시드니 바둑클럽(Sydney Go Club)을 운영했다. 데본은 항상 제일 먼저 나와 바둑판 세트를 제 자리에 놓고 끝난 후에도 끝까지 남아 정리를 했다. 오랜 세월 꾸준히 봉사하는 데본을 보면서 나는 존경심까지 생겼다. 데본도 자존심이 세어서 섣불리 타협을 안 하는 성격이다.
그가 시드니 바둑클럽 이름으로 1990년에는 일본 기성전 도전기를 시드니에 유치한 적이 있었다. 가토, 고바야시, 다케미야, 임해봉 등이 오고 해설은 레드몬드가 맡았다. 호주 문화성장관과 일본대사, 국회의원도 여러 명 참석한 자리에서 데본이 호주챔피언인 나는 자세히 소개하면서 바둑협회 회장단 소개는 한마디만 슬쩍 하고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데본과 사이가 별로이었던 집행부가 다 물러가고 10여 년 후에야 회장이 되더니 그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머무른다.
호주대회가 시드니에서 열렸을 때다. 대회장인 내가 애들래이드에서 온 짐(Jim Bates)을 데본 네 집으로 배정했다. 조금 있다가 짐이 나에게 혼자 찾아 와서 “다른 집은 없느냐?”고 한다.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자기와 데본은 사이가 안 좋다고 한다. 내가 “2년 전에도 그 집에 묵지 않았느냐?”고 했더니 “그 때 서로 말을 한 마디도 안 했다”고 한다. “그 집에 닷새를 지냈는데 어떻게 한마디도 안 할 수 있나? 내가 같이 차를 타고 다니는 걸 봤다”고 하자 “차 안에서도 한마디 안하고 그 집에 가서도 지정해 준 침실로 들어가고 아침에 부엌에 가서 먹을 걸 먹고 그의 차를 타고 대회장을 왔다 갔다 했으나 서로 말은 전혀 안 했다”고 한다. “이런 변태들 봤나?” 나는 할말을 잃었다. 할 수 없이 짐을 한국인 집으로 보냈다.
데본은 스위스제도 진행전문가이고 짐은 랭킹점수제 전문가다. 내가 머리를 굴려 둘에게 대회진행을 맡겼다. 서로 의논과 협력을 안 하면 대회 진행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드디어 기적이 일어났다. 둘이서 진행도표를 테이블 위에 놓고 앉아 서로 대화를 한다. 서로 쳐다보고 웃기까지 한다. 내가 한국인들에게 그들을 가리키며 “저 두 명이 서로 원수인데 내가 저렇게 친하게 만들었다”고 자랑을 했다. 그런데 웬 걸 대회가 끝나자 마자 다시 원수로 돌아 간다. 공과 사가 분명했다. 나는 서양에 그렇게 오래 살면서도 그들이 자기 감정과 책임을 명확히 구분하는데 문화충격을 받았다.

▲ 양사범에게 지도 받는 데본 그 옆은 돈 포터 ▲ 호주 팬에게 사인해 주는 조훈현 9 단 |
1990년대 후반 어느 날. 강남 법원 건너편 한일바둑판 근처 중국식당에서 나는 데본 베일리와 오송생 9단을 만나고 있었다. 호주바둑협회(AGA) 전임회장, 현 회장, 국가사범 3인이 서울에서 회동한 셈이다. 그 자리에 데본은 루(Lou)라는 자기의 새 부인을 데리고 나왔다. 전 부인은 교장 부인 같았는데 비해 루는 젊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데본이 나에게 “루는 나의 바둑활동에 적극 협력하겠다고 해서 결혼했다”고 그녀 앞에서 말한다. 거기다 오 9단은 한 술 더 뜬다. 한국말로 “내 처는 호랑이 띠고 나는 닭 띠라 서로 안 맞아. 그래서 이혼했어” 한 사람은 바둑활동에 협조한다는 조건으로 결혼하고 한 사람은 띠가 안 맞는다고 이혼했다. “이 거 결혼과 이혼이 이렇게 쉬운 거야?” 내가 좀 혼동되어 있는데 오 9단이 “이거 내 새 와이프(Wife)입니다” 하며 사진을 보여준다. 그 당시 그는 존댓말과 반말을 혼용하고 있었다. 하얼빈 여자라는데 딸이 하나 있고 나이는 오 9단 보다 20여 년이 아래였다. 미인이라 모델처럼 보였다. 그들의 전처들과 잘아는 나로서는 젊은 부인을 얻은 이 두 명에게 무슨 말로 어떻게 축하를 해 주어야 할지 몰라 한 동안 헤맸다.

▲ 앞줄 오른쪽이 데본 베일리 . 한국대사배 시드니(2009년 8월 8일) |

▲ 톰 , 데본, 돈 3명이 함께 모였다. 2009년 8월 |
6) 네블 스마이스(Neville Smythe)
네블은 호주 바둑계에서 비중으로는 가장 큰 인물이다. 그는 초대 호주 바둑회장을 맡아 10년간 회장으로 호주 바둑계를 이끌었다. 그를 지금에서야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기인(Weirdo)이 아니어서 사고를 안 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얘깃거리가 없다. 네블은 다만 조심성이 너무 많아 나를 답답하게는 만들기는 한다. 그러나 언행이 언제나 모범생다웠다. 예를 들어 내가 북한에 간다니까 그렇게 말리더니 내 결심이 굳은 걸 보고는 “그럼 호주팀 단장을 맡지 말고 숨죽이고 바둑만 두고 오라”고 한다. 호주팀 단장은 북한에 잘 안 알려진 신명길 7단을 시키라고 한다. 네블이 “국제적으로 알려진 당신이 단장을 맡아 어쩌다가 발언을 잘 못해 북한에 억류되면 어떻게 할 거냐”며 국제전화로 걱정걱정을 한다. “북한에 가는 나는 걱정을 안 하는데 왜 자기가 난리야?” 나는 평양에 가서 호주팀 단장을 맡았다. 그리고 무사히 돌아 왔다.

▲ (좌) 네블 스마이스, 안영길 사범, 이정웅 한인바둑회장, 이세나 7단, 신명길 7단, 최태진 총무(2009년) |
내가 1993년 회장이 됐을 때다. 신임 총무를 지명해야 하는데 내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이 안 보인다. 그 때 네블의 얼굴을 보니까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단상에 올라가서 “네블 스마이스 교수가 10년 이상은 회장직을 안 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그의 능력을 썩히기에는 호주 바둑계를 위해 너무 아깝다. 네블이 총무직을 맡아 나를 도와주길 바란다”고 하며 네블을 총무로 지명했다. 참석자들이 모두 놀랐다. 그는 호주 바둑계 대부로서 최고의 거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숨죽이고 있는데 네블이 일어나더니 “총무로서 신임회장 한교수를 도와 열심히 일을 하겠다”고 하자 다들 또 한 번 놀란다. 그래서 네블이 호주 바둑협회 총무가 되었다.
그 무렵 호주 야당인 자유당에서는 당수와 부당수가 의견 충돌을 빚었다. 그들은 임시전당대회를 열어 투표로 대결했는데 부당수가 이겨 새로운 당수가 되었다. 그러자 그가 곧 퇴출 당한 당수를 부당수에 지명하자 어제까지 당수였던 사람이 그걸 수락한다. 두 명이 자리만 바꿔 앉았다. 예비내각(Shadow Cabinet)에서 야당의 당수는 수상, 부 당수는 외무상을 맡는다. 전직 당수인 새 부당수는 외교문제를 열심히 공부해서 국회에서 여당의 외교정책을 공격하며 그 방면에 전문가가 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 때 살아있는 민주주의를 직접 목격했다. 3년 후 전당대회에서 그가 이겨 다시 당수로 돌아온다. 바둑회 사람들은 네블이 총무가 된 걸 “바둑계의 자유당 사건”이라고 했다.
내가 멜본에서 8년을 산 뒤 켄베라로 옮겨갈 적에 네블 부부가 나서서 내가 살 집을 구해 주었다. 자기네가 약 20군데 후보를 미리 찾아 놓고 국립대학 행정직 높은 자리에 있던 그의 부인 모우라가 우릴 안내하고 다녔다. 나는 네블 집에서 약 5분 거리에 집을 샀다. 그 후 내가 시드니대학 교수가 되어 시드니로 이사 갈 때까지 5년간 이웃으로 우리는 가깝게 지냈다. 내가 네블이란 사람을 알기 때문에 그를 총무로 지명할 수가 있었다. 네블은 현재 국제바둑연맹(IGF) 오세아니아 이사로 있다. 돌이켜 보면 누가 회장이 되든지 네블은 언제나 호주 바둑계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 나와 네블이 살던 동네 Red Hill. |

▲ 앞줄 : 안영길사범, 이정웅회장, 네블 스마이스 교수 뒷줄: 2009 한국대사배 각 조 입상자들 |

▲ 캔베라 신 , 구국회의사당(앞 건물) |

▲ 캔베라 타워 . 오른쪽 산 (남산타워와 똑 같이 생겼다 . 캔베라가 1년 먼저 세움 ) |

▲ 캔베라의 밤. |

▲ 600미터 고원에 들어선 호주 수도 캔베라. |

▲ 저녁에 골프장에 모인 야행성 동물 캥거루. |

▲ 백인들이 5백만명이었던 원주민을 노예로 쓰고 거의 다 죽였다. 현재 인구는 47만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

▲ 4만년 전으로 추정되는 동굴 속 원주민 벽화 ▲ 속이 빈 통나무 관(棺) |

▲ 원주민 발명품. |

▲ 원주민 발명품들. 부머랭과 디저리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