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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기사]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

보석을 찾아 떠도는 방랑기객 박성균 사범

김종서 작가2009-09-28 12: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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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 운명을 바꾼 반집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그러나 성공은 성적순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 하버드 대학 도서관에 적힌 낙서다. 경쟁사회를 사는 엘리트들의 의식을 보여주는 웅변이다. 바둑계에도 이 말은 의미심장하게 적용될 듯싶다. 빛나는 타이틀이나 프로 입단이 행복의 절대조건은 아니지만 적어도 바둑으로 세상과 승부해보겠다고 맘먹은 이들에게는 성적이 성공의 척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공이나 행복 같은 단어는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바둑을 접한 이후, 이 길은 그냥 운명이었지요. 그러므로 이 길에 나선 이상 당연히 프로기사가 됐어야 하는데 되지 못했다는 것은 뭔가 부족함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아마추어 정상권에서 메이저 전국대회를 십 여 차례 석권한 박성균 사범. 1995년에 그는 절호의 입단기회를 잡았다. 아마국수에 등극한 보너스로 세계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 출전한 것. 프로나 다름없는 중국대표를 꺾고 최종우승 결정 국에서 일본의 사대천왕 히라다 7단과 마주쳤었다. 결코 녹록치 않은 고수라지만 상대는 환갑을 넘긴 노인, 세계제패와 자동입단이 바로 눈앞에 놓여 있었다.

몇 번이나 끝낼 수 있는 찬스를 놓치고 박성균은 끝내 반집을 지고 말았다. 말 그대로 눈물의 반집이었다. 한집만 어떻게 잘 지켰더라면 그는 그대로 프로기사가 됐을 테고 후회 없이 승부사의 길을 걷다 후학들을 위한 도장을 차렸을 것이다.

그날 이후 좀처럼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그는 입단대회보다 세계대회 우승을 통해 프로 면장을 받는 코스에 끊임없이 도전했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 홍콩 히타치 배 우승, 아시아 선수대회 우승, 한중일 3국 아마 정상대국 2회 우승, 세계아마추어 페어바둑에서 김세실과 출전해 우승했지만 그 것들은 아마추어 정상에 주어지는 훈장들일 뿐이었다.

이후 박성균 사범은 바둑과 함께 세상을 떠돌았다. 쓸쓸하지만 담백한 그의 행로를 따라가 보았다.


▲ 1970년대 후반 고성 옥탑방 멤버들.


S#2. 성북구 만화방에서 고성 옥탑 방까지

1957년 부산 대신동에서 출생한 박성균은 6세 때 가족과 함께 상경했다.

"소설가 김진명, 프로기사 김종수 사범이 동갑에 같은 부산 출신이며 같은 여섯 살에 상경한 벗들입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김진명 씨와 그런 인연으로 친해졌고 어려웠던 청년기에 영감을 주고받으며 동행했다고 한다.

바둑은 중학 1년생 때 만화방에서 처음 접했다. 만화방 주인이 3급 정도 두는 애기 가였는데 바둑을 잘 두는 아이들에게 몇 권씩 무료로 만화를 볼 수 있는 특전을 베풀었다. 박기당과 김종래의 만화에 푹 빠져있었던 소년 박성균은 어떻게든 공짜로 만화를 잔뜩 보고 싶어 바둑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단수치는 법부터 배우기 시작한 바둑이었는데 6개월 만에 만화방 주인을 호선으로 격파했다.

그리하여 만화는 원 없이 볼 수 있는 특전을 획득했으나 그때부터 정작 만화보다 바둑에 빠져버리게 됐다. 방에 누울라치면 천장의 도배 무늬가 바둑판으로 변해 천변만화의 흑백 행마들이 꿈틀거리곤 했다.

만화방 주인을 넘어선 뒤에 스승을 만나지 못해 책으로 공부했다. 성북구에서 청계천까지 걸어가 헌책방을 뒤져 바둑에 관한 모든 책을 구했다. 어느 정도 기리를 터득하자 만화방의 사과궤짝 위에 놓인 접는 바둑판을 떠나 정식 기원에 가고 싶었다.

삼선교의 산진기원, 미아리의 서라벌기원, 정릉의 정릉기원 등을 전전하며 동냥바둑으로 내공을 키워갔다. 그 사이 중학교를 졸업해 고교에 진학할 나이가 됐는데 학업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냥 인생을 바둑에 올인하기로 작심했다.

다소 약하지만 1급 딱지를 달았을 때 신촌으로 건너갔다. 독수리기원에 강자들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찾아가 윤철승 사범, 문용직, 신병식 씨와 교분을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삼선교 중앙기원에서 해병대를 제대한 이주용(작고한 프로기사)을 만났다. 이주용은 중앙기원 원장의 아들이었다.

"성균아. 경남 고성에 바둑 강자들이 모여 공부하는 곳이 있다는데 같이 갈래?"

두 청년은 그 길로 영등포역에 가 삼랑진 행 표를 끊었다. 삼랑진에서 다시 고성 가는 완행버스를 타고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바로 고성읍 동외리에 위치한 동산의원, 언젠가 타이젬 스페셜 다큐멘터리로 소개했던 권재룡 박사의 병원이었다. ☞ 낭만기객 권재룡 바로가기


▲ 박성균 아마7단.

권 박사의 병원 옥탑 방에 올라가보니 과연 양산박처럼 강호의 준재들이 득실거렸다. 신영철, 제정제, 박수현, 김기헌, 이상식, 조병탁, 정대상, 임선근 등이 서울에서 내려온 두 청년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고성 동산병원에서는 바둑을 좋아하는 청년이면 누구나 환영하지만 머물기 위해서라면 권 박사의 시험 기를 거쳐야했다. 세 판을 두는데 두 판을 이겨야 정식 입문을 할 수 있는데, 바둑이 세더라도 눈치껏 한 판은 살짝 양보하는 미덕을 보여야 한다고 선배들이 귀띔해줬다.

천릿길 타향이지만 청년 박성균은 모처럼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당시 바둑에 미친 청년들은 십중팔구 방황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둑이 과연 미래를 보장할 것인지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업까지 포기한 박성균의 입장에서 고성의 도장은 낙원이라고 해도 좋았다. 다른 멤버들보다 늦게 시작한 바둑이지만 세상의 모든 번뇌를 떨쳐버리고 19로 깊숙이 몰입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양산박에서 정기적으로 벌어지는 리그전에서 그의 성적은 중위권이었다. 그러나 축구를 잘해서 이따금 벌어지는 4:4 축구시합에서는 박수현과 라이벌로 갈려 주장 역할을 했다. 그 환상의 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가을에 고성에 정착했는데 겨울에 입대영장이 날아와 떠나야했던 것이다. 고성 양산박의 모든 청년들이 그랬던 것처럼 박성균도 눈물을 속으로 삼킨 채 속세로 나와야 했다. 아니 속세로 잠깐 나와 암울한 별세계로 다시 들어가야 했다.

그는 1978년 4월 군에 입대해 특전사령부로 차출돼 격동의 79년 12,12 사태를 폭풍의 눈 핵심부에서 겪었다. 군기가 엄정한 특전사에서 바둑은 아무 쓸모없는 취미일 뿐이었다. 단 한 번도 빛나는 바둑실력을 과시할 기회가 없어 특혜를 입지 못했다.


▲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박성균 아마7단.


S#3. 꼭 이겨야만 했던 나날들 - 승부사의 길

36개월 군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나온 박성균은 그 공백의 허기를 채우고자 미친 듯이 바둑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춘천 보타사에 들어가 오청원 전집과 사카다의 묘 시리즈를 독파했고, 도선사에 들어가 현현기경, 관자보에 실린 사활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틈틈이 아마대회에 출전해 전국의 강자들과 힘을 겨뤘다.

그 무렵 퇴계로 대한기원에서 소설가 김진명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바둑대회에 나가 상금을 받으면 함께 술을 마셨고, 소설과 바둑을 논하며 20대의 어두운 시절을 동행했다. 김진명 작가가 이휘소 박사의 삶을 그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로 대성공을 거두었을 때의 일화 한 토막.

그가 하루아침에 스타작가로 떠서 친구 박성균을 만났을 때 아무 말 없이 셔츠 상의의 호주머니에 수표 한 장을 꽂아주며 술이나 한 잔 마시라고 말했다. 접힌 수표를 펼쳐보니 깔끔하게 1천만 원. 박성균이 이따금 바둑대회 상금을 푼돈이라도 나눠 쓴 것에 대한 의리의 보복(^^)이었다.

어느 해인가 일반인 강자들이 연구생들보다 많았던 입단대회에서 박성균은 파죽지세로 연승을 거두고 프로 입단을 눈앞에 둔 적이 있었다. 그때 전패를 기록한 상대를 만났다. 입단대회에서 작전대국은 있을 수 없지만 통상 전패자가 전승자에게 전의를 불태우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박성균도 대충 그 판은 쉽게 이기겠거니 방심했다. 그런데 상대가 최선을 다해 부딪혀오자 당황했다. 결국 박성균은 주춤거리다 완패를 당하고 말았다. 솔직히 그 상대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전승 기록에 먹칠을 하고 나자 심기가 뒤틀려 남은 판을 다 망치고 말았다.

"하하 많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보면 역시 그런 사연조차 운명의 정확한 잣대 아닌가 싶어요. 어떻게 됐든 '넌 프로가 못 돼'하는 팔자라고나 할까요? 그 판에서 방심을 한 것이 아마추어 기질을 버리지 못했음을 입증합니다."

그가 시원시원하게 자신의 미완성을 인정했다. 그렇게 몇 차례 코앞까지 찾아온 입단기회를 붙잡지 못하고 박성균은 세상을 떠돌아 다녔다. 그때부터 방랑하면서 이기는 바둑을 두어야만 했다. 이기는 바둑이 뭘까? 먹고 살기 위해서 지면 안 되는 바둑.


▲ 박성균 아마7단은 현재 안산 청석초등학교에서 김진환 사범과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S#4. 금맥을 찾아 전국을 유랑하다

입단을 포기한 이후로 그는 여러 곳에서 바둑교실을 운영했다. 서초동 삼풍아파트, 상계동 등지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박정상, 김태향, 원성진, 박영훈 등과 만났고, 고양시 화정동에서 장수원, 김영관 같은 유망주들을 발굴했다.

그 아이들은 배운지 1년 반 만에 오성과 한음 배와 국무총리 배에서 우승하며 기염을 토했다. 사부 입장에서 그야말로 보석 같은 아이들을 만난 거였다. 화정동 바둑교실에서 그가 혼신을 다해 키운 제자가 세 명 있었는데 그 아이들이 모두 공부도 잘해서 어느 순간 일제히 미국으로 유학을 가버렸다. 부모들이 바둑보다 학업을 선택한 것이다.

세 아이들이 품에서 떠난 순간 박성균은 바둑교실을 접었다. 그리고 터미널로 나갔다. 눈 내리는 겨울 밤. 그 시간에 떠나는 버스가 딱 한 대 있었는데 속초행이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표를 끊었다. 그냥 속초로 가서 묻혀 있고 싶었다.

그런데 강원도로 접어든 버스가 홍천에서 주저앉았다. 폭설 때문에 한계령과 미시령이 막혀 회차한다는 거였다. 그는 그냥 홍천에서 내렸다. 어차피 특별히 정처를 두고 떠나온 게 아니라서 홍천에 머물라는 운명으로 생각했다. 홍천에서 빈집 하나를 얻어 기거하다 현지의 유망주들을 가르쳤는데 전국적으로 소문난 장원막국수 집 아들의 두뇌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 아이가 바로 지금 양재호 도장에서 입단준비를 하고 있는 원생 정성우다. 성우는 바둑을 배운지 1년 3개월 만에 강원도 지역을 평정했던 천재 소년이었다. 정성우를 키워 서울로 보내고 또 허허로운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박성균은 횡성공항을 찾아갔다. (강원도 횡성공항은 전국에서 가장 작은 규모의 공항이다.)

여객시간표를 봤더니 제주도행 KAL 한 편이 남아 있었다. 홍천에 올 때처럼 또 훌쩍 여객기에 몸을 싣고 제주도로 날아갔다. 제주도에서 페리를 타고 찾아간 곳은 추자도. 아무런 계획 없이, 그 섬에 들어가 낚시나 실컷 하고 싶었다. 그런데 또 그 섬에서 알고 지내던 제주기우 한 사람을 만났다. 면사무소에서 행정 일을 하고 있었다.

"아, 박 사범님 잘 오셨습니다. 우리 면사무소에 청소년 쉼터가 있는데 추자도 아이들에게 바둑 좀 가르쳐주시죠."


▲ 추자도.

도서관이나 피시방이 없는 섬이라 면사무소 쉼터는 다양한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임시 바둑교실을 열었는데 상추자도 하추자도에서 25명이 넘는 아이들이 찾아왔다. 박 사범은 두 달 남짓 동안 열심히 추자도 아이들에게 바둑을 가르쳤다.

섬에서의 생활은 환상이었다. 아이들과 맑은 공기 속에서 공부를 하고 남는 시간은 낚시를 하며 지냈다. 그리고 약속한 기간이 차서 섬을 떠나왔는데 추자도에서 전화가 왔다. 바둑을 가장 열심히 배웠던 세 자매(이유경, 이유빈, 이시영)의 부모들이었다.

"사범님, 비금도는 되는데 추자도라고 못 하라는 법 있습니까? 우리 딸들 바둑계로 보낼 테니까 알아서 하세요."

그렇게 잘라 말하고 추자도 부모들은 그 길로 세 자매를 서울로 올려 보냈다. 아이들은 현재 이세돌 도장에서 연구생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 (박 사범은 매일 밤 10시~12 타이젬 수담 방에서 세 자매를 가르치는 중이다. 관심 있는 분들은 수담 방에 들러 박 사범의 강의를 도강하셔도 좋을 듯.)

추자도에서 올라와 박 사범은 강원도 인제 예술인 마을과 충북 괴산을 거쳐 지금은 바둑 특성화학교인 안산 청석초등학교에 사범으로 둥지를 틀었다.

"저는 유별나게 아이들을 좋아합니다. 유망주들 욕심이 많은 편이죠. 바둑을 접하지 못하는 시골을 찾아가 기재 있는 아이들을 찾아낼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 박성균 아마7단과 취재를 하고 있는 김종서 작가.


S# 5. 기사의 방

청석초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얻었다는 안산의 오피스텔.
넓은 평수는 아니어도 쓸데없는 짐이 전혀 없는 박사범의 공간은 독특했다.
바둑 책과 바둑판이 거의 전부였다.

"지인들과 꾸준히 바둑자료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세상을 돌아다니며 모아야 해요. 일본에 비해 우리 바둑문화가 너무 척박하거든요."

그는 조남철, 김인 국수의 기보 집을 기획했고, 많은 분량의 바둑 서적을 모아 절친한 바둑애호가에게 기증했다. 또 일본에서 진귀한 조선 바둑판을 수집해 국립박물관에 기증했고 지금도 열심히 자료를 수집하는 중이라고 했다.

바둑 유망주들을 찾아 어디라도 떠날 수 있고, 바둑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애쓰는 박성균 사범.
그의 외롭지만 자유로운 영혼에 공감과 지지의 손길을 내밀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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