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1. 바둑을 통해 할 수 있는 일들 면목동이라 했던가? 기원 간판을 달고 성매매업소를 꾸민 사건이 터져 바둑 팬들의 미간을 찌 푸리게 만들었다. 바둑을 직접적으로 모욕한 건 아니지만 기원이 페인트모션의 매개로 쓰였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하하, 역설적으로 아직까지는 바둑의 이미지가 나쁘지 않다는 증거 아닐까요? 바둑 두는 장소를 빙자했다는 건 그 사람들이 뭔가 안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범법행위는 대단히 나쁘지만 저는 뉴스의 행간에서 바둑의 가능성을 확인합니다. 바둑을 통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죠?" 박창규 사범이 껄껄 웃으며 면목동 해프닝을 그렇게 풀이한다. 낙천적이면서 긍정적인 해석이다. 실제로 그의 화술은 넉넉하고 편안하다. 묵직한 바리톤의 음성과 점잖은 용모 덕분에 10년 넘게 바둑 텔레비전 해설자로 활약해 온 그는 프로기사들만큼이나 얼굴이 알려진 바둑계의 마당발이다. 기력은 타이젬 8단 정도인데 그의 부드럽고 편안한 음성의 해설은 여성 시청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은 초점 국 퍼레이드. 150회 이상 방송을 한 장수 프로그램인데 김성룡 9단과 호흡이 잘 맞아 명콤비 MC로 떠올랐던 작품이다. 또 서봉수 9단, 강훈 9단, 목진석 9단 등 프로기사들이 바둑 TV해설을 시작할 때 옆에 지켜 서서 가이드 역할을 맡기도 했었다.
해설자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는 대한바둑협회 임원(심시위원장)이며 경기도 바둑협회 전무로 맹렬히 뛰고 있는 바둑행정가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바둑협회와 한국기원의 통합을 위해 만들어진 ‘통합추진위원회’의 실무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중이다. "한국기원의 정통성과 체육회 가맹단체로써의 바둑협회가 합쳐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몇 가지 문제가 있긴 하지만 바둑 인들이 지혜를 모아 멋진 해결책을 도출해내야지요. 어찌하다 보니 평생 바둑의 혜택을 받고 사는 인생이 되었더라구요. 그러니 앞으로 남은 삶은 바둑에 바치는 게 옳겠지요. 힘이 닿는 데까지 뛰어 볼 생각입니다." S#2. 바둑 키드의 행로 1957년 남영동 출생. 미아리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숭인초, 삼선중, 철도고를 다니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바둑을 익혔다. 그 당시에 청소년들의 놀이문화라고는 탁구와 바둑이 대세였다. 당시에 가난한 시골의 수재들이 동경하던 철도고를 지망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사업실패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경영하던 가발공장이 부도를 맞으면서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 그래서 국비혜택을 받는 철도고에 진학할 수밖에 없었다. 토목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는데 조금씩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졸업할 때는 거의 바닥권을 기며 학우들을 받쳐주는 역할을 했다. 원래 인문계 적성인데 공과에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래도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지방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너무 좋았다. 친구들의 자취방을 찾아다니며 술과 담배를 익혔고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게 낭만인 줄 알았다. 그러다 휴일이면 집 맞은편에 있는 기원에 나가 바둑을 두었다. 그 기원에 아마 강호인 강대길, 양대웅 , 백종대 등이 버티고 있어 자연스럽게 기력이 강해졌다. 철도고를 졸업하자 경북 구미시 보선사무소로 발령이 났다. 그의 임무는 교량, 터널, 승강장을 설계하는 일. 그때가 바로 낙동강변 허허벌판에 구미공단이 세워질 무렵이어서 전국의 많은 산업인력들이 그 곳으로 몰려왔다.
미남 철도공무원 박창규의 전성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기숙사를 방불케 하는 다세대 자취방에는 수십 명의 처녀들이 입주해있었는데 그가 유일한 청일점이었다. 이따금 건물 옥상에 올라가 기타를 치며 팝송 한두 곡 뽑으면 처녀들이 슬그머니 올라와 신청곡을 부탁하곤 했었다. 지금 바둑계의 바리톤으로 이름난 것도 알고 보면 바로 그 시절 구미공단 처녀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던 옥상 콘서트의 실전훈련 덕분일 것이다. 1979년 설계변경 문제로 직장상사와 트러블이 생기자 박창규는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나왔다. 브리태니커 서적과 생명보험 영업 등으로 전국을 주유했고, 인천에서 속독학원을 운영하기도 했으며 사출공장에 들어가 일당 1,350원을 받고 험한 노동을 체험했었다. 맞닥뜨린 일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청춘의 이상과 열망을 실현하기에는 뭔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좀처럼 인생은 멋진 기회를 내주지 않았다. 송파구의 건설현장에서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일을 꽤 오래 했다. 1포에 40Kg짜리 두 포대를 질통에 지고 경사진 발판을 밟고 오를라치면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 힘든 노동도 자신에게는 축복이라 생각했다. 그 시절 세월은 수상했고 정국은 어지러웠으니 어떤 청춘이라도 평화롭게 빛나는 이는 드물었다. 겨울이 되자 물이 얼어버려 공사판의 일이 중단됐다. 졸지에 백수가 된 그는 우연히 을지로의 국수기원에 나갔다가 기우 백종대와 김동섭을 만나 새삼스럽게 바둑을 다시 두기 시작했다. 그들보다 기력은 약했지만 승부근성이 강해서 기원의 하수처리반 담당으로 맹활약하며 짜장면과 커피를 자급자족했다. 그러던 중 김동섭의 권유로 압구정동 현대바둑싸롱의 사범으로 취업했고 회원제 기원인 현대돌핀 바둑클럽을 만들어 알게 모르게 바둑 인으로 편입된 것이다. 1994년 그는 바둑 인들의 힘을 모으기 위해 ‘전국아마바둑연맹’을 주도적으로 결성했다. 그 모임이 1997년 5월 한국 아마추어 바둑협회로 커졌다. 적어도 아마 바둑계에서 박창규 사범은 오래 전부터 바둑공동체를 위해 꾸준히 뛰고 있었던 것. "2001년에 바둑인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한 적 있었는데 그때 무려 120만 명의 서명을 받았지요. 말이 백만이지 그 숫자는 실로 엄청난 겁니다. 바둑 인구를 측정할 때 천만이다 오백만이다 가늠하기 어렵지만 저는 당시에 서명해주셨던 120만 명의 규모만으로도 우리 바둑의 잠재력에 관해 확신을 갖는 쪽입니다. 바둑행정 시스템이 정비되면 분명히 바둑은 우리나라에서 다시 한 번 생명력을 얻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S#3. 내가 속한 사회에서만큼은 최선을 다하고 싶다 박창규 사범은 머뭇거림이 없는 스타일이다. 통화를 할 때도 그냥 시원시원하다. 용건이 있으면 당장 얼굴 맞대고 대화부터 나누자는 쪽이다. 그래서 그가 전무를 맡고 있는 경기도 바둑협회의 청사진은 일단 푸르다. 유소년 바둑 활성화를 위해 9줄, 13줄 바둑 프로그램을 준비 중이고, 노인바둑 강좌도 확대 보급할 계획이라고 한다. 아울러 현재 여류기사회가 의욕적으로 추진 중인 군부대 바둑 보급에도 경기도바둑협회가 적극적으로 나서 서포터 역할을 하고 싶다고 밝혔다. "경기도는 서울과 맞먹는 규모의 지자체입니다. 경기도에 거주하는 바둑인들 많습니다. 현재 프로바둑에 한국 리그가 있는 것처럼 아마바둑계에 지자체 리그가 생긴다면 그 활력이 대단하지 않겠어요? 저뿐만 아니고 많은 바둑계 인사들이 지혜를 모아 지자체 리그를 출범시키면 그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하리고 봅니다. 리그 활성화 자체로 입단하지 못한 아마 강자들이 마음껏 바둑을 둘 환경이 조성되지요. 그래야 어린이들도 바둑의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을 테구요." 지자체 리그 출범, 유소년 바둑 활성화, 군부대 바둑 보급, 노인바둑강좌, 박창규 사범이 메모지에 목표들을 꾹꾹 눌러 다시 써 보인다. 바둑으로부터 삶의 기회를 조금이라도 얻었으니 앞으로 바둑에 신세를 갚겠다는 그의 소박한 의지가 어디까지 펼쳐질지 오래 지켜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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