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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바둑사]

독일인 바둑쟁이 '버나드 룽어'

유럽국가 중 가장 활발한 바둑활동을 보이는 독일

한상대 교수2009-10-30 18: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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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란덴부르크 문. 프리드리히 2세가 ‘평화의 상징’으로 1788년에 베를린 정문으로 세웠다. 서울의 남대문 격이다. 독일 분단 시 이 문으로만 왕래가 가능했다. ‘냉전시대(Cold War)의 심볼’

독일
독일은 경제, 과학, 철학, 예술, 스포츠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 최고를 달리는 선진국이다. 독일은 962년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이 되었다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망한다. 39 개 공국으로 분열되었던 독일은 1871년 프러시아 수상 비스마르크의 주도로 통일된다. 독일은 1~2차 대전을 일으켜 전세계를 상대로 싸웠다. 1-2차대전의 패전국으로 전 국토가 황폐해졌으나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며 20년 내에 경제대국으로 우뚝 섰다. 2차 대전 후 동서로 분단되었다가 1990년 통일되었다.

동서독이 서로 엄청난 양보를 하며 통일을 추진하던 일을 생각하면 우리 민족과 남북한 지도자들이 다 못나 보인다. 독일 통일로 지구상 분단된 나라는 우리만 남게 되었다. 한반도 통일은 주변 4대국 미, 중, 러, 일이 다 원치 않는 일이다. 우리 민족의 자구적 노력 없이는 통일은 힘들다. 그런데 남북이 다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느라고 민족의 장래를 위한 큰 결단은 내릴 줄 모른다. 독일 인구는 8206만 명, 게르만 족이 91.5%, 터키계가 2.4%, 나머지 6.1%가 기타 민족이다. 독일은 대도시나 작은 시골이나 생활수준의 차이를 못 느끼게 평준화 되어 있다. 면적은 남한의 3.7배. 세계 4위의 경제력을 갖고 있으며 1인당 소득은 약 4만 5000 달러다. 유럽연합(EU)의 실질적 지도국이며 바둑 활동도 유럽 국가 중 가장 활발하다.

▲ 1871년 프랑스를 점령한 후 베르사유 궁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이 탄생한다

1. 역사의 현장 베를린(Berlin)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은 독일 수도 베를린에 대한 총 공격을 시작했다. 2주 동안 독일인 15만 명, 러시아인 10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격전이었다. 4월 30일에는 베를린 시 중심부에 위치한 브란덴부르크 문에 소련의 적기가 계양 되었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56세의 히틀러(Adolph Hitler)는 애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수상관저 지하 방공호에서 권총 자살을 한다. 그리고 1주일 후에 독일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다. 이로써 베를린을 “세계의 수도”로 만들려던 히틀러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5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독일은 동부는 소련, 서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 연합군이 점령했다. 동독 한 복판에 위치한 수도 베를린도 동서로 분할되어 서부 베를린은 섬처럼 동독에 둘러 쌓였다.

1948년 6월 서독 마르크(Mark)가 동 베를린에 유입되는 걸 막기 위해 소련은 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교통수단을 차단하고 서쪽 베를린 지구에 대해 전기, 석탄, 식량 공급을 차단했다. 이 것이 “베를린 봉쇄”다. 인구 235만 명의 서 베를린은 서독 경계선에서 20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육지의 고도”가 되었다. 연합군 측은 서부 베를린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역사상 유래 없는 “대 공수작전”이 시작 되었다. 대형 수송기 1400대가 식량, 연료를 총 19만 6천회에 걸쳐 수송되었다. 매 90초 마다 수송기가 한대씩 뜨고 하루에 1만 3천 톤이나 되는 물자가 서 베를린으로 운반되었다. 1949년 5월, 소련은 11개월 간의 봉쇄를 해제한다. 그 후 동 베를린에서 서 베를린으로 망명하는 인구가 점점 늘자 1958년 소련 수상 후르시초프는 연합국 측에게 베를린에서 퇴거할 것을 요구했지만 연합국은 이를 거부했다. 1961년에는 하루에 약 1천 5백 명의 청년, 지식인 등이 서독으로 망명한다. 이 일로 동독 경제건설이 타격을 받자 1961년 8월 13일 동독 측은 베를린 시내의 동서 경계선을 따라 45킬로미터에 달하는 콘크리트 장벽을 쌓는다. 3백 군데가 넘는 감시 탑에는 1만 4천명의 병사가 경비를 맡았다.

▲ 1961년 동독이 베를린 장벽을 쌓고 있다.(왼쪽 사진) 지금은 일부 벽을 기념으로 남겨 두었다

내가 학생 때 읽고 감명 받은 얘긴데 장벽의 담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는 시민을 동독경비가 구경만 하고 있자 소련군이 “왜 저 사람을 쏘지 않느냐?”고 하자 동독 군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신네는 같은 민족에게도 총을 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후 경비병은 소련군으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한국전쟁(1950~1953)에서 동족끼리 이념이란 미명하에 서로 수 백만 명을 죽이는 비극을 저지른다. 독일은 이념보다 민족이 우선했다. 내가 세계바둑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동서독 선수는 친하게 같이 식사도 하고 돌아다닌다. 그러나 남북한선수는 전혀 어울리질 않았다.

1989 년 헝가리가 국경의 철조망을 제거하자 20만 명 이상의 동독 시민이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를 경유하여 서독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이 일을 계기로 동독 정부는 벽을 헐고 자유선거를 할 것을 국민에게 약속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동 베를린에서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50만 명의 데모대가 그들 힘으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냉전의 종말을 고하는 상징적 사건이 된다. 이 당시 나는 소련 모스크바에 1개월 반 동안 있었는데 장벽 무너지는 뉴스를 모스크바 TV가 하는 걸 못 봤다. 동독 해방의 최대무기는 위성TV이었다. 위성TV로 인해 세계는 더 이상 비밀이 없어졌다. 내가 2007년에 가 본 북한은 인터넷이나 위성 텔레비전이 개방이 안 됐다.

1990년 10월 3일 0시.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 옆에 위치한 제국의회 의사당 광장 앞에 서독의 헬무트 콜 총리, 빌리 브란트 전 총리, 동독의 바이츠게커 대통령, 데메지에르 총리, 인민회의 의장 베르그만 등 동서 독일의 최고 지도자들이 엄숙하게 열립해 서 있었다. 이 곳에서 전승 탑까지 약 백만 명의 베를린 시민이 모였다. 광장의 국기계양 대에 독일 국기인 3색 기가 천천히 계양 되었다. 군중은 일제히 독일 국가를 합창했다. 그들은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어서 ‘자유의 종’이 은은히 울려 퍼졌다. 이어 군중들의 환성이 터지고, 폭음과 함께 불꽃이 베를린 하늘을 아름답게 수 놓았다. 총선거에서 압승한 서독이 45년 만에 동독을 흡수 통일하는 순간이었다. 이로써 독일은 인구 8천 2백만의 대국으로 다시 태어났고 베를린은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된다.

▲ 내가 동독 군 모자를 쓰고 미군과 소련군 사이에 섰다. ‘분단의 상징’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2. 친한파 룽어씨
나는 2003년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유럽바둑대회에 40명의 한국팀 단장으로 갔다. 2 주간 대회 후 그 중 18명의 명지대 팀을 인솔하고 유럽 여러 나라를 돌며 한국 바둑을 알렸다. 그 중 인구 400만의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2박 3일을 묵는다. 그들이 마련한 바둑행사와 민박은 완벽했다. 훔볼트(일명 베를린)대학에서 개최된 환영회와 교류전, 관광 안내 등은 우리가 미안할 정도로 준비가 철저했다. 그 중심에 버나드 룽어(Bernhard Runge)박사가 있었다. 헤어지면서 베를린 바둑인들은 나에게 이구동성으로 “한국 바둑강자들과 보낸 시간은 좋았는데 말이 안 통해 답답했다. 제자들에게 영어 좀 부지런히 가르쳐 다음 올 때는 의사소통이 잘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당시 바둑학과 학생들의 영어 수준은 거의 벙어리였다. 영어로 복기는 엄두도 못 냈다.

나는 베를린에 있는 동안 반나절 시간을 내어 한국대사(공사가 대신 옴), 독일 바둑협회 회장단, 한국 측 바둑관계자 등 10여 명을 한국식당에 모이도록 주선했다. 거기에서 독일주재 ‘한국대사배 바둑대회’ 개최에 대한 4자(대사관, 독일협회, 한국기원, 한상대)역할 분담에 대한 합의를 끝내고 돌아왔다. 이후 버나드가 그 때 합의사항을 충실히 이행하며 대사배를 진행시킨다. 한편 버나드는 나에게 “제자 중 영어 하는 사범 한 명을 베를린으로 보내 달라”는 요구를 해왔다. 그런데 막상 영어를 잘 하는 바둑 강자를 찾기가 만만치 않았다.

평소에 나는 국제사범을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여기 저기 협조를 구했으나 서울에 교실 하나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돈을 내고 구하면 수강생들의 부담이 너무 커진다. 시간을 끌고 있는데 버나드가 또 독촉을 해 온다. 나는 2004년 당시 한국 아마바둑협회 회장이던 곽영필 회장 사무실로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그가 “이제까지 내가 들어본 얘기 중 가장 가슴에 와 닿는다”며 부하 직원에게 당장 내가 강의할 공간을 찾으라고 지시한다. 그래서 생긴 것이 지금 역삼동 ‘영 빌딩’에서 운영되고 있는 바둑영어교실이다. 곽 회장은 한국바둑 세계화를 위한 숨은 공로자다.

▲ 베를린

이듬해 봄, 어느 날 버나드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에 온다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는 대로 청량리 역으로 가서 춘천행 기차를 타야 한다고 했다. 그가 오는 날 나는 강의가 있어서 공항에 나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제자 중 영어와 운전이 가능한 최유진에게 연락했다. “공항에 가서 룽어 씨를 태우고 청량리 역으로 가서 춘천행 기차를 태워드려라. 그런 후 강원대학 김 교수에게 룽어 씨 도착시간을 전화로 알려 드려라”고 했다. 유진이는 유럽 여행을 나와 같이해서 룽어 씨 얼굴을 안다. 이 일로 유진이는 하루를 거의 보냈다. 유진이는 바둑학과를 졸업했으나 대학원은 나에게 와서 ‘해외동포학’을 배우고 있었다. 유진이가 요즘은 잘 나가는 바둑 TV진행자로 유명해 졌다. 버나드 룽어(Bernhard Runge) 씨는 친한파로서 한국 바둑계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내가 유진이를 공항에 보내면서까지 성의를 보인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베를린에 갔을 때 잘 돌보아준 감사의 뜻도 있었지만 앞으로 한국 바둑계를 위해 그가 유익한 일을 할 인물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 나와 버나드 폴란드.(2004) 최유진 캐스터(오른쪽 사진).

춘천에서 1주일을 보낸 버나드는 서울로 와서 나에게 전화를 했다. 자기가 세종회관 뒤편 어느 기원에 있다고 한다. “기원을 어떻게 찾았느냐?”고 하니까 “춘천에 있을 때 김 교수가 강의하는 시간에는 혼자 대학 근처 기원에 가서 바둑만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기원 찾는 건 전문”이라고 한다. 내가 기원에 가니까 그는 남의 바둑을 관전하고 있었다. “벌써 7시니까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하자 그는 “우리 바둑 좀 두고 가자”고 한다. 바둑 두 판을 두고 우리는 8시 반쯤 식당엘 갔다. 식사 중에도 그는 바둑 얘기만 한다.
(버나드) “내가 한국에 와서 3년쯤 살면서 바둑공부를 하면 5단이 될 수 있겠나?”
(한) “사범만 제대로 만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버나드) “그럼 수퍼 그룹(Super group)에 들어갈 수 있다는 얘긴가?”
(한) “그렇다.”
버나드의 얼굴에 회심의 미소가 스쳤다.

유럽 국가들은 1년간 성적에 따라 16명이 ‘수퍼 그룹’에 속하고 그들 중에서 챔피언을 뽑는다. 쉽게 말해서 ‘챔피언 조’다. 수퍼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표정부터 달라진다. 그들은 하수들에겐 경외의 대상이다. 버나드는 자기가 그 그룹에 속한다는 상상만 해도 벅찬가 보다. 그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나에게 자기가 컴퓨터 SP(Session Announcement Protocol) 분야의 박사인데 삼성전자 같은 곳엔 분명히 자기가 취업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지금 독일에서 받는 월급의 반만 주어도 한국에 와서 3년쯤 근무 하고 싶다”고 한다. 내가 “가족도 같이 올 생각이냐?”고 묻자 “아들 둘은 거기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고 아내는 작가이기 때문에 그곳에 있어야 한다” 며 자기 혼자 와 있겠다고 한다. 수퍼 그룹 멤버가 될 수 있다면 그 정도 희생은 치르겠다는 각오가 그의 표정에 묻어 있었다.

▲ 인사동 차(茶)집. 룽어, 필자, 볼리(시애틀 바둑센터 매니저), 한해원3단, 다니엘라, 버럴(미국서부 챔피언)

그가 “한국은 나의 꿈의 나라(Dream Land)”라고 한다. “한국에선 바둑 두고 싶으면 언제든지 기원에만 가면 되니까 얼마나 좋으냐?”고 하면서 “그런 나라에 사는 당신은 ‘행운’”이라고 한다. 웃는 말이 아니고 너무 진지하게 말한다. 그는 “다만 기원에서 담배들을 피우는 게 괴로웠고 11시에 개업하는 게 불편했다”고 한다. “춘천에서 하루는 김 교수가 9시에 출근했는데 기원을 안 열어 두 시간쯤 길에서 헤매야 했다”고 한다. 내가 “요즘에는 기원도 흡연실을 따로 두어 담배 안 피우는 공간이 많다”고 하자 그는 “한국은 역시 나의 Dream Land”라며 웃는다.

버나드는 2단이다. 나에게 4점 놓는 하수가 바둑에 대한 애착은 나보다 상수다. 나는 당시 용인에 있는 명지대 캠퍼스 안에 살았기 때문에 그를 바둑학과 최고령 학생 김종수(55세) 씨 집에 묵도록 해주었다. 김종수 씨의 집은 서부이촌동이고 바둑은 버나드가 선으로 들어갔다. 밤 10시가 넘어 김종수 씨의 아파트에 도착한 버나드는 식구들과 인사가 끝난 후 곧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버나드는 원래 동독 출신이다. 바둑도 동독에서 배웠다. 독일 챔피언 마르코, 한국에 유학 온 다니엘라가 다 동독 출신이다. 통일이 되자 버나드는 만하임(Manheim) 대학의 강사가 되어 컴퓨터를 강의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국에서 교환교수로 김 교수가 왔는데 바둑이 호선이었다. 버나드 말로 “그 1년 동안 우리는 매일 바둑만 두었다”고 회상한다. 마치 꿈 같은 신혼생활을 회상하는 말투다. 버나드는 바둑 둘 상대가 마땅치 않은 만하임에서 바둑 인구가 많은 베를린으로 직장을 옮긴다. 이번에 버나드는 휴가 중 2주일을 할애하여 김 교수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한국엘 왔다. 그러나 그의 진짜 목적은 바둑유학 가능성 타진과 바둑을 실컷 두고 싶어서였다. 그는 2주 동안 바둑만 두다가 떠나기 전 하루만 서울 관광을 했다. 독일에 가서 사진이라도 보여주어야 했던 것 같다 ^^

▲ 탱고를 추는 서양 바둑쟁이들. 버나드 룽어와 얀 볼리 압구정 ‘탱고 클럽’

2004년 폴란드 시골 투홀라(Tuchola)에서 열린 유럽 바둑대회에 온 버나드는 나에게 자기 차 열쇠를 주며 “필요할 땐 이 차를 쓰라”고 한다. 그는 나와 탁구도 치고 맥주도 마시며 주로 한국팀 주변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그는 2주 동안 열리는 대회에 1주만 참가하고 돌아갔다. 나에게 “가족과 휴가의 반을 안 쓰면 쫓겨나게 생겼다”며 웃는다. 그가 모든 휴가를 바둑에만 쓰기 때문에 가족들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음을 알겠다. 그는 그 무렵 베를린 바둑협회 회장이 된다. 몇 달 후 우리 집사람이 독일에 연구여행을 갔을 때 버나드는 이 사람을 자기 집에 묵도록 했다. 그래서 부인네끼리 친구가 된다.

버나드의 부인 마누엘라(anuela)는 소설가다. 라이트 형제(The Wright Brothers)가 1903년 인류사상 첫 비행에 성공했을 때 이미 1890년 독일에서는 릴리엔탈(Otto Lilienthal)이라는 사람이 비행에 성공을 한다. 그리고 그는 1896년 추락사한다. 그러나 아직도 비행기 발명은 라이트 형제(The Wright Brothers)로 되어 있다. 마치 구텐베르그 보다 2백여 년 전에 우리나라가 인쇄술을 발명해 놓고도 아직도 인쇄술 발명은 구텐베르그로 되어 있는 것과 같은가 보다.

집사람이 베를린에 갔을 때 마누엘라는 릴리엔탈을 소재로 글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쓴 책 “차도르(Chador)를 벗겨라”는 세계적 베스트셀러 중 하나로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팔리고 있다. 저녁식사 후 응접실에 같이 앉아 차를 마실 때는 버나드가 바둑에 대한 얘기를 전혀 안 한다. 그는 여자들이 듣기 좋아하는 주제로만 얘기한다고 한다. 그러나 아침에 자기 차를 몰고 우리 집사람과 둘이서 출근할 때는 바둑 얘기만 한다고 한다. 자기가 한국에 바둑을 배우러 오는 문제를 얘기를 할 땐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는데 속삭이기까지 한다고 한다.

▲ 인사동 방문(왼쪽 사진). 추석 날 내 부모님 산소 성묘에 따라 붙은 서양 바둑쟁이들.

내가 그 해 11월에 베를린에 갔을 때다. 베를린에서 ‘Go to Innovation’이란 이름으로 바둑대회를 혁신적이고 재미있게 하는 방법에 대해 아이디어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걸 위한 세미나도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응모한 아이디어들은 모두 독일을 비롯한 서양 국가에서만 온 것들이다. 버나드가 “Big Three(한중일)에도 연락했는데 응모자가 없어 섭섭하다” 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세계 바둑인구의 대부분이 동양3국에 있는데 응모가 없었다는 게 이상하고 한편 창피했다. 영어로 써 내는 게 불편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나는 호텔로 돌아가서 곧 방내기를 대회용으로 변형시킨 ‘한상대 점수 제도(Hahn Pointing System)’를 만들어 제출했다.

얼마 후 버나드가 나에게 회의장에 나와 내 제도에 대한 설명을 해 달라고 한다. 내가 설명할 때 회장인 버나드가 열심히 독일어로 통역한다. 독일에서 영어가 잘 통하는데 이 날은 주요사안이라 확실히 한다는 의미에서 통역을 했다고 한다. 이 날 질문 중 “호선 바둑인 경우 한 방이 9.5나 10.5 점 중 어느 쪽이냐?”고 하는데 내가 대답을 얼른 못하니까 자기네끼리 어느 쪽이 맞는지 토론을 한다. 놀랍게도 이날 거의 만장일치로 ‘한 제도(Hahn System)’가 ‘Go(碁) to Innovation’가 바둑대회방식으로 채택되었다. 이 대회는 1년에 두 번 열리며 지금까지 우승은 다 한국인이 했다. 우승 상금은 1000 유로(약 180만원), 유럽대회에선 최고 수준이다. 이 대회의 ‘사이드 대회’는 재독사범들의 노력으로 순장바둑으로 결정 되었다. 그래서 이 대회는 ‘한국바둑의 날’이 된다
☞한 제도 관련사이트 바로가기

이 제도는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실험적으로 시도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둑의 원리에 어긋난다” 며 대회에 참가조차 하지 않고, 참가자들은 “더 짜릿하다” “한국 싸움바둑의 진수다”라고 한다. ‘한 시스템’은 한 방 이기면 승자는 60점을 받지만 패자도 40점을 받는다. 두 방이면 승자 70점, 패자 30점, 이렇게 올라가 다섯 방 이상을 이겨야 승자 100점 패자 0점이 된다. 7라운드 전체를 한 방씩 전승한 사람보다 5승2패 한 사람이 집 차이가 크게 이기면 우승할 수 있다. 이 제도는 누구나 욕심 때문에 싸움 바둑을 피하지 못하게 만든다. 20점 이상 이기고 있는 사람이 더 이기려고 무리를 하다가 거꾸로 지는 등 웃지 못할 일이 많이 일어 난다. 그래서 이 제도는 바둑을 끝까지 포기 않고 두어야 하도록 만든다. 그래서 ‘감정소모’가 다른 대회 보다 많다고 한다 ^^

▲ ‘Hahn System” 2009 봄 대회 우승자 오치민 7단. 가을대회는 11월 21~22일에 열린다.

2005년 말 버나드가 급한 목소리로 전화해 왔다. “함부르크에 조석빈이란 사범이 나타났는데 내가 사범 부탁한지 2년이나 되었는데 베를린은 왜 아직도 안 오느냐? 너무 섭섭하다”는 내용이다. 그 얘길 듣자 나도 마음이 급해졌다. 내 제자 중 황인성을 불렀다. “네가 곧 베를린에 가야겠다. 네 영어가 아직 6개월은 더 해야 할 것 같은데, 영어는 현지에 가서 계속 공부하고 우선 떠나라” 했다. 인성이는 내 교실에서 공부하다가 갑자기 베를린으로 떠났다. 베를린과 함부르크는 해마다 ‘도시대항전’을 한다. 각 10명씩 뽑아 대항전을 하는데 그럴 땐 흥분한 바둑인들이 모여서 밤새 복기도 하고 한판한판 승부에 열광을 한다. 버나드가 나에게 사범을 부탁한 것은 함부르크를 납작하게 만들려는 속셈이 있었다. 그런데 석빈이가 먼저 함부르크에 나타나니까 나에게 그런 반응이 올 만도 하다.


▲ 2006 독일 한국대사배를 참관하는 황인성 사범

황인성 7단은 베를린으로 간 후 그의 바둑실력과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베를린 바둑인의 인기를 한 몸에 모은다. 거기에다가 그를 완벽하게 돌봐주는 룽어 회장이 있다. 인성이는 “룽어 씨는 저의 독일 아버지”라고 말한다. 마침 버나드의 아들과 인성이가 동갑이다. 인성이와 석빈이는 유럽대회마다 출전하여 둘이서 우승을 다툰다. 그 1년 동안 두 명은 유럽에서 한국바둑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내가 거의 1년 만에 만난 인성이는 기대했던 것보다 더 성장해 있었다. 영어 실력도 좋아지고 인간적으로도 성숙했다. 베를린은 물론 유럽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실히 굳혀놓고 있었다. 제자가 이러면 선생은 보람을 느낀다.

2006년 나는 여류기사 한해원, 이하진 사범을 대동하고 유럽에 간다. 베를린 공항에 도착하니까 버나드의 웃는 얼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우리가 베를린에 4박5일 있는 동안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며 돌보아준다. 한국대사배를 베를린 외곽 포츠담에 있는 ‘상수지 궁’에서 열었다. 이 궁은 오늘날 강대국 독일이 있게 만든 프리드리히 2세가 황태자 시절을 보낸 유명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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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회 진행에 바쁜 버나드 룽어 회장(왼쪽 사진)과 로베르트 5단, 현 챔피언 마르코 6단

나는 변호사 번트(Bernd Schütze) 아파트에서, 해원이와 하진이는 베를린 바둑협회 부회장이며 남자 간호원인 안드레아스(Andreas) 아파트에서 묵었다. 우리 숙소는 베를린 중심지에서 가까웠으나 구 동독지역이었다. 서독지역에 비해 사회주의 잔재가 많이 보이는 곳이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있을 것은 다 있다. 바둑행사가 끝나면 저녁엔 버나드가 우리를 베를린의 유명한 곳을 데리고 다녔다.


▲ 2006 한국대사배


▲ 이하진 사범과 상수지 궁에서(왼쪽 사진). 2006 한국대사배 입상자 3명


▲ 독일 국회의사당


▲ 브란덴부르크 앞에서 ‘독일 월드컵’ 멕시코 응원 TV프로에 말려들어가서 판초입고 솜브레로(모자)를 썼다


▲ 서울에 온 버나드 바둑영어교실에서 한해원, 이하진 사범과 재회.

그 여행에서 나는 당시 만 16세의 하진이에게 각 국 챔피언이 두 점을 놓고 두게 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응했고 하진이가 두 판 다 이겼다. 하진이는 초단이 되자마자. 루이를 꺾고 성적이 수직 상승 할 때라 기세를 타고 있었다. 그런데 독일 한국대사배 우승자 펠릭스 6단은 거절한다. 자존심 상 두 점을 놓기 싫은 모양이다. 자기 생각으론 이겨야 본전이고 지면 망신이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대신 까다로운 정석을 바둑판 위에 놓아보며 하진이에게 “이런 경우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다. 다른 독일인이 나에게 귀속말로 “저 정석을 지난번 일본 9단과 연구를 끝낸 거”라며 “하진이 실력을 테스트하는 중”이라고 한다. 하진이는 바둑 실력으로 유럽인들에게 겁을 주었다. 해원이는 바둑 TV를 통해 일부 사람들이 벌써 알고 있었고 그 곳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해원이를 사람들이 보급용으로 알고 있지만 나는 해원이가 유럽에서 둔 다면기 성적이 높은 걸 보고 바둑도 강한데 놀랐다. 해원이가 좀처럼 지질 않는다. 귀국 후 해원이와 하진이가 유럽기행문을 썼는데 두 명이 다 유럽 여행 중 잊을 수 없는 인물 1호로 “룽어 아저씨”를 꼽았다.

유럽에서는 우리를 위해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가 한국대사배를 1주일 간격으로 주말에 열었다. ‘대사배’를 차례로 참석하며 대회 창설자인 나는 감회가 남달랐다. 우리는 영국에도 가서 한인바둑회, 옥스포드 대학 바둑클럽을 돌며 다면기 행사를 하고 한국 대사배 개최와 사범파견 문제에 기본 합의를 보고 돌아 왔다.


▲ 버나드 룽어, 김수정 기자, 황인성 사범, 한해원 사범


▲ 버나드가 우리 교실에서 독일 바둑 현황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버나드는 내가 베를린에 가면 항상 한식으로 저녁을 산다. 내 옆은 안영길 8단

2007년에 나는 안영길 8단, 이강욱 3단, 강경낭(여자연구생 1조)을 대동하고 베를린에 갔다. 인성이는 군대에 가기 위해 귀국했고 대신 홍슬기가 2대 사범이 되어 우리와 같이 다녔다. 슬기는 2003 유럽 챔피언으로 나와 베를린에 간 일이 있어 현지에 잘 알려져 있다. 슬기도 1년 동안 버나드의 비호 속에서 보내다가 귀국한다. 3대 사범으론 오치민이 간다. 하루는 버나드 집 근처 월남식당에 우리가 내리고 버나드는 자기 집으로 갔다. 우리가 월남국수를 막 먹기 시작하는데 버나드가 자전거를 타고 우리에게 왔다. 슬기가 가방을 자기 차에 두고 내려서 그 걸 가지고 다시 왔다.

나는 월남국수 한 그릇을 더 시키려고 하는데 버나드가 한사코 사양한다. 나는 속으로 “별로 배고프지가 않은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후 경낭이가 자기 국수를 3분의 1쯤 남기고 수저를 놨다. 조금 후 버나드가 경낭이에게 “다 먹은 거냐?”고 묻자 경낭이가 “그렇다”고 하자 그 남은 음식을 자기가 순식간에 먹어 버린다. 우리나라에서는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은 잘 안 먹는데….독일인들은 사과를 껍질, 씨까지 다 먹어 버린다. 우리에겐 비싼 음식도 척척 사면서도 검소하고 거품이 전혀 없는 독일인의 모습을 버나드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또 한 명의 친한파 홀거(2단 Holger)박사가 우리의 안내를 맡았다 강경낭, 필자, 홍슬기(포츠다머 광장)


▲ 베를린 시내


▲ 독일 챔피언 마르코와 경낭이의 대국


▲ 안영길 8단의 ‘마르코 VS 경낭’ 대국을 옆 방에서 동시해설. 훔볼트 대학


▲ 2007 베를린 대회 훔볼트 대학


▲ 8강부터는 강당 무대를 사용한다.

나는 버나드 부부가 별거에 들어 갔다는 소문에 너무 놀랐다. 이유는 바둑이라고 한다. 그러나 버나드는 마누엘라를 포기를 하지 않고 최선을 다 하였다. 그 결과 가정은 원상복귀 되었으나 버나드의 바둑 유학의 꿈은 접는 수 밖에 없었다. ‘아쉬움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버나드는 자기 아들 게오르그(Georg)를 대신 고려대학에 1년간 보내 한국어와 문화를 배우게 했다. 버나드는 황인성, 홍슬기, 오치민 세 사범을 베를린에서 1년씩 자기 아들처럼 돌보아 주었다. 지금은 황인성 사범이 다시 베를린에 가서 버나드의 도움을 받고 있다. 김치중독자가 된 버나드는 한국에 관한 일이면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이런 친한파 바둑인이 있다는 게 우리에겐 행운이다.


▲ 베를린 협회 재무를 맡은 다니엘라 엄마가 우리 일행을 만났다. 훔볼트 대학교.


▲ 독일국기(왼쪽 사진)와 국장.


▲ 독일지도(왼쪽 사진)와 베토벤.


▲ 강경낭, 이강욱과 벤츠 박물관. 슈투트가르트


▲ 독일의 젖 줄 라인(Rhine) 강


▲ 1000년 전 마을 로텐부르그(Rothenburg)


▲ 독일 전통 마을


▲ 베를린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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