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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기타]

가지와라 9단과 하시모토 9단을 추모한다

두 분의 명복을 빌며…

한상대 교수2009-12-18 12: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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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와 씨는 1975~78년 사이 호주 일본무역관 관장을 지낸 사람인데, 호주 일본인 바둑회장이기도 했다. 그는 게이오대학 시절 바둑 대표선수로 활동했던 인물로 기력이 상당했고. 특히 모든 정석에 훤했다.

그는 나에게 정석을 가르쳐 주면서도 나와 승률은 비슷한 편이었다. 우리는 바둑 라이벌로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었다. 1979년 2월 나는 도쿄에서 가시와 씨를 다시 반갑게 만났다. 그는 당시 일본 무역진흥공사 본부의 도서관장이면서 사내 바둑회장을 맡고 있었다.

가시와 씨가 우리 부부를 후지산(富士山) 옆 하코네라는 온천에 초청을 해서 그곳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식사 중에 가시와 씨가 나에게 "독설가로 유명한 가지와라 다케와 (梶原 武雄) 9단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가지와라 정석이라고 이름 붙인 정석을 두어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는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기사가 가지와라 9단이라고 했다. "가지와라 9단은 아무리 바둑이 유리해도 적당히 물러서 닦아 버린다든지, 잠그는 수는 두지 않고 자신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간다. 명인전이나 본인방전 리그전의 도전자 결정국 같은 큰 승부에서도 마찬가지다. 많이 남는 형세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최선-최강수만을 연발하다가 역전되기 일쑤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가지와라 9단을, 타협을 모르는 고집불통 '기인'으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에게서 승부의 결과보다 한 판의 과정에서 최선의 수만을 추구하는 구도자(求道者)의 모습을 본다"는 것이었다.

다음날 가시와 씨는 나를 도쿄의 번화가 신주쿠(神宿)에 '혼인보(本因坊)'란 바둑 카페에 데려갔다. 새로 개장한 고급 바둑살롱인데 바를 겸하고 있었다. 당시로는 놀라운 발상이었다. 그 무렵 일본 바둑인들은 누구나 이 살롱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서니까 마침 당시 유럽챔피언인 하시베더(Helmut Hasibeder) 6단이 같은 오스트리아 출신 빌무어(Wilmur)프로 초단과 함께 환담을 나누고 있다. 하시베더가 날 보더니 대뜸 한판하자고 한다. 그는 당시 자기 바둑에 대한 자존심이 꽤 있었다.

우리가 바둑을 두고 있는데 가지와라 9단이 들어오더니 우리 바둑을 구경하기 시작한다. 나는 전 날 그에 대한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가 내 바둑을 구경하고 있는 게 좀 황송했다. 나에게 세 판을 내리 진 하시베더가 나에게 "한 판은 내가 졌지만 두 판은 당신이 내가 이긴 바둑을 훔쳐갔다"고 한다.

내가 웃으며 "진 사람이 무슨 구차한 소리냐?"고 했더니 그가 얼굴을 굳히며 나에게 "당신이 진 바둑을 훔쳐갔으면 인정을 하라"고 한다. 나도 그때는 미소를 거두었다. 내가 "꼼수에 당하는 것도 실력"이라고 맞받았더니 그의 입에서 "비겁하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영어에 능숙하지 않은 가지와라 9단이 빌무어의 일본인 부인에게 통역을 하라고 해서 우리 둘의 대화 내용을 알았다. 그는 갑자기 하시베더를 향해 우리 말로 "떼끼!" 하는 식의 불호령을 내린다. 살롱이 떠나갈 듯한 큰소리였다.

그가 계속 소리를 지르자 통역을 하던 빌무어 부인은 급기야 울음을 터뜨리고, 하시베더와 빌무어는 주인에게 야단 맞은 강아지 표정이 되어 숨도 못 쉬고 있다. 나도 민망해서 어색하게 앉아만 있었다.

가지와라 9단은 통역 없이 한참 더 야단을 치고는 그제야 분이 풀렸는지 자리를 옮겨 맥주 한잔을 시켜서 마신다. 내가 가서 "미안하다"고 하니까 그는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만 본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가시와 씨가 신이 났다. "내가 뭐라고 하더냐? 그가 기인인 걸 직접 경험하니까 기분이 어떠냐?" 고 한다. 나는 그때 30대, 가시와 씨는 40대, 가지와라 9단은 50대였다.

나는 30번 이상 일본에 갔었고, 갈 때마다 일본기원에 자주 들리는 편이었다. 가끔 가지와라 9단을 마주치면 인사를 했다. 그러나 그가 인사를 받는 태도로 보아서는 나를 기억 못하는 것이 틀림 없었다.

그는 사람들과 무난히 잘 어울리는 '사회적 인간'이라기보다는 자기 내면 세계를 고집하며 살아가던 기인이었다. 그의 얼굴에 세속의 때가 전혀 묻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1981년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23명의 각국 챔피언들은 관서기원의 초청을 받아 도쿄에서 오사카로 갔다. 관서기원 측에서도 환영이 대단했다. 관서의 주요도시를 돌며 교류전을 하고 매일 저녁 파티였다.

행사의 클라이맥스는 그 옛날 초대 혼인보 산샤가 묵던 교토 자꼬지(寂光寺)에서의 법회와 특별대국이었다. 400년 전의 초대명인이 쓰던 바둑판과 바둑돌이 유리 상자 속에 보관이 되어 있었는데, 그걸 꺼내어 대국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 관서기원의 제일인자였던 하시모토 쇼지(橋本 昌二) 9단과 나와의 대국이다. 칫수는 석점. NHK가 중계까지 한다. 관서기원을 창설한 하시모토 우타로 9단도 노구를 끌고 참석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속에서 나는 석 집을 졌다.

이긴 줄 알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작렬한 하시모토 9단의 맥점에 걸려 5~6집 손해를 보면서 역전이 되었다. 국후 사람 좋은 하시모토 9단이 그 맥점을 가리키며 "한 선생이 모르는 것 같아 끝까지 기다렸다. 이 자리를 방비했으면 한 선생이 최소한 한집은 이겼을 것"이라면서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날 하루 종일 국제선수단과 행동을 같이한 하시모토 9단은 말이 안 통해도 통역을 통해 얘기하며 소탈하게 외국 선수들과 어울렸다. 예의는 바르지만 이방인과는 거리를 유지하는 도쿄 일본기원 9단들과는 달랐다.

그 후에도 나는 관서기원에 6~7차례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하시모토 9단은 언제나 나를 기억해 주었고, 얘기할 기회가 있으면 한국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당시 일본 바둑이 세계 최강이었고 장고 바둑의 '십단' '왕좌', 속기전인 NHK배 같은 유수의 타이틀을 차지한 바 있어 하시모토의 무게는 대단했다.

그러나 그의 이웃집 아저씨 같은 태도는 외국 선수단에게 호감을 주었다. 또 그가 대국 때에는 투덜거리는 것으로도 유명하다고 들었지만, 실제 만나 보니 전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세월은 흐르고 구세대는 유명을 달리한다.

나와 인연이 있는 두 명의 일본 9단이 최근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니 가슴이 허전해진다. 흡사 ‘승부 기계’ 같은 느낌을 받는 오늘날의 젊은 프로기사들에 비해 치열한 승부 속에서도 매력적인 개성과 폭넓은 인간성으로 낭만을 구가했던 시대의 인물들이 한 명 두 명 고인이 되고 있다. 두 분의 명복을 빈다. (한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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