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1. 신도시의 기원 신도시 일산과 분당은 바둑 인구가 제법 많고 그래서 기원도 적지 않은 곳. 필자가 사는 행신동 화정동 지역에도 한때 여기저기 기원이 많았었다. 2003년 타이젬에 연재했던 소설 [승부사]의 무대도 바로 이 지역이었다. 차수권, 강훈, 유건재 사범이 거주했고 박성균 사범 등 아마 강자들이 도장을 운영했던 곳이다. 물론 지금은 상당수 기원들이 문을 닫았다. 그러나 고양시 화정동에 신도시 개발 때부터 간판을 걸고 지금까지 당당하게 버텨온 기원이 하나 있다.
화정역 3번 출구의 글로리아 빌딩. 그 10층에 위치한 한양기원. 소설 [승부]의 저자인 조세래 감독과 필자가 가끔 들러 커피를 마시는 장소이다. 그 곳에 모이는 바둑마니아들이 이따금 회식을 할 때면 가난한 글쟁이들을 불러 수저 몇 벌을 얹어 맺어진 인연으로 알게 됐다.
10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보이는 간판들. 호프집과 노래방, 기원이 세트로 보인다. 당연히 그 세 곳의 손님들은 바둑과 무관하지 않다. 바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순례하는 곳이다. 신도시 번화가인데도 10층 인심은 시골 동네처럼 푸근하고 따뜻하다. 오늘은 한양기원의 송년회를 겸한 바둑대회가 열리는 날. 호프집과 노래방 여사장님들은 일찍부터 출근해 기원 잔치의 대장금 역할을 맡는다.
S#2. 12월의 마지막 주말에 기원 단골손님들을 위한 바둑대회인지라 상금이 많진 않지만 예선 토너먼트의 N경쟁은 치열하다. 대략 32강에서부터 출발한 예선 사다리를 타면서 참가자들의 희비가 엇갈린다. “어떻게 호선 바둑인데 대마를 60개나 때려 잡노? 치수가 안 맞다 아이가!” “에이, 계가 바둑인데 어르신이 너무 승부를 서두르시는 바람에 대마싸움이 됐잖아요.” 기원 손님들의 평균연령이 50은 훌쩍 넘어 보인다. 고령화 현상이 가장 두드러진 분야가 혹 바둑 아닐까? 현역에서 은퇴하고 바둑 친구들과 소일하는 어르신들이 많다. 65세 이상의 노인들은 기료도 경로우대요금을 낸다. 그렇다고 승부욕까지 물렁한 것은 아니다.
바둑판 앞에 앉은 이상 그 분들에게 한판의 승부는 일진과 이어진다. 8강까지 올랐으나 젊은 강자와 만나 불계패를 당한 노인 한 분은 돌을 쓸어담고 나서 벌떡 일어섰다. “한 잔 하고 가세요.” “아냐. 나 갈래. 기분이 안 좋아.” “에이, 그러지 마시고 오늘은 승패를 떠나 모두 사이좋게 한 해를 마감해야죠.” “그건 좋은데......지금 기분이 영 안 좋단 말이야.” 복도까지 나가버리는 어르신을 원장은 끝내 잡지 못한다. 그러나 화장실에서 울분을 삭히고 그 분은 10분 만에 다시 기원으로 들어오셨다. 아무튼 치열한 토너먼트 끝에 순위가 결정났다. 올해 우승자는 5급 기력의 곽기범씨.
그는 기원 서열로 따지면 저 아래 쪽이나 최근 기량이 급성장해 치수의 화력을 이용해 승승장구했다. 일산에서 학원 강사(국어)로 활동하는 곽기범 씨는 이 기원의 10년 단골. 하루 종일 학원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수업을 한 뒤 퇴근하면 기원에 들러 바둑으로 피로를 씻는다. 진정으로 바둑을 즐기는 그에게 우승은 덤으로 찾아온 것. 어르신들도 곽 선생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분위기다. 준우승은 이규달 씨. 그는 고수 축에 속한다. 3위 신영철 씨 등이 결정 나고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대마킬러 상을 획득한 이학영 씨. 무려 60여 개의 대마를 잡고 120집을 이긴 주인공이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준 인물.^^ 패자들을 안배하기 위해 추첨을 통한 시상도 마련되고 마침내 전원이 기원 내실에 모여 송년파티를 시작한다.
S#3. 대마는 동행하라 기원 송년회의 식탁이 예상과 달리 풍성하다. 수육과 팥떡, 김치찌개가 먹음직스럽다. 그 음식 모두가 같은 10층에 포진한 호프집 노래방 여사장님들 작품이다. 한 해 동안 자신들의 가게를 이용해준 바둑 손님들을 위해 팔을 걷어 부치고 내 집안일처럼 나선 것. 집은 서울이지만 한양기원의 사범으로 신망이 두터운 김복규 사범도 찾아와 김영춘 부원장과 수담을 나누었다. 술잔을 부딪치며 기객들은 아까 두었던 바둑을 복기한다. 그러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으면 당장 판으로 가서 수순을 밟는다. 참고 도를 여러 번 놓아보지만 좀처럼 의견은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 그 차이가 결국은 기풍이라는 걸 그들은 모르는 듯싶다.
회식이 끝나고 기객들은 호프집으로 가서 목을 축인다. 글로리아 빌딩 10층 호프집은 일산 바둑 인들이 알아주는 단골집. 호프집답지 않게 꼬막도 삶아주고, 쭈꾸미도 데쳐주는가 하면 동치미 국물도 서슴없이 퍼준다. 또 손님이 출출해하는 눈치면 여지없이 공기 밥을 내온다. 한양기원과 함께 오랜 세월 동행하다 보니 그렇게 하고 있더라고 스스로 혀를 찬다. 이윤이 남진 않겠지만 그도 노하우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다.
마지막 코스는 노래방. 노래방 여사장님은 기원의 막내라고 한다. 6개월 정도 열심히 바둑을 배우고 있다는 것. 손님이 없는 시간이면 카운터 아래 비치한 바둑서적을 열심히 탐독한다. 그 기원에 놓여있는 TV는 항상 바둑채널로 고정되어 있고, 딱 한 대의 컴퓨터 화면은 타이젬 대국실이 떠 있다. 기원에서도 타이젬 대국실 기력이 비교적 공정한 잣대로 작용한다. 이 번 유저수첩의 주인공은 동네기원이다. 그 기원 대다수 손님들이 인터넷만큼은 타이젬을 이용하므로 우리들의 수첩에 올려도 무리 없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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