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저수첩]
주문진에 고래가 산다
관동 바둑 광 바다짱 5단
김종서 작가2010-04-17 00:53:07

S#1. 그만의 바둑 인맥 확장 법
3월 31일.
아직 백두대간 동쪽 이마에는 잔설이 수북하고 동해의 바람은 칼날처럼 옷깃을 파고든다.
여명의 주문진항은 분주하다.
임연수어와 대구를 위판장 바닥에 부린 어선들이 뱃머리를 돌리고 갈매기들은 저공비행하며 생선 부스러기를 노린다.
그렇게 위판장을 어슬렁거리다보니 갈매기처럼 공복의 허기를 느낀다.
‘동해 쪽에는 곰치 국이 맛있다던데!’
그 갈등을 여지없이 깨트리는 전화 한 통.
“빨리 들어와요. 우럭미역국으로 해장하게.”
주문진 항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바다짱 5단의 목소리였다.
담백하고 고소한 우럭미역국에 가자미 물회까지 곁들인 아침식사는 해장의 차원을 넘어 포식으로 이어졌다.
주문진의 바다짱5단.
그는 바둑계의 평발로 소문난 바둑 광이다.
많은 바둑 인들이 동해를 찾으면 주문진을 경유하는 이유도 바로 그의 인력(引力) 때문이다.
작년 강릉 세계청소년바둑대회에 참관한 바둑인들 대다수가 주문진항의 바다짱 5단 횟집에서 동해의 내음을 맛봤고, 사시사철 바둑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바둑인들이 주문진을 찾는 만큼 그도 바둑대회를 즐겨 찾는다.
3월의 마지막 날 필자가 주문진을 찾은 그날도 바다짱 5단은 생선회와 물회 한 양동이를 싸들고 상경했다.
응암동 A7사무실에서 열린 타이젬 주최 아마바둑최강전 회식에 협찬하기 위해서였다.

바둑 친구들과 만나면 술병 뚜껑부터 따는 술고래 바다짱 5단.
그의 이름은 홍승종, 강릉바둑협회 부회장이다.
그는 마흔이 넘어서 바둑을 배웠다.
어느 날 강릉을 찾아온 아마 고수를 만나 시커멓게 깔고 접바둑을 배웠는데 그 엄청난 흑 진을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면서 환상의 드리블을 해대는 백의 행마에 심장이 쿵쾅거리는 영감을 받았다.
그날부터 노영하의 바둑비디오 전집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돌려보며 바둑의 기초를 닦았다.
박성균, 김철중 사범을 틈날 때마다 초청해 지도를 받으면서 속성 코스로 타이젬 5단에 이르렀다.
한철균, 유종수 사범 등과 친구를 텄고 임동균, 박창규, 심우섭 사범과 호형호제하는가 하면 프로기사 박병규와 대바협의 김광선은 양자를 삼았으며 홍맑은샘은 조카라 호칭하니 이쯤 되면 평발도 어지간한 평발이 아닌 셈이다.

S#2. 바둑인들의 세계가 너무 좋습니다.
그가 바둑 인들과 두터운 교분을 자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사실 주문진 수산시장에서 번잡하게 생활하다 보니 가끔 인생에서 품어야 할 꿈을 잊고 사는 것 같은 허탈감이 들곤 했습니다. 그런데 바둑인들을 만나고 보니 그들의 생각이나 사는 방식이 너무 낭만적인 거예요. 와아, 미치겠더만요. 마냥 좋더라고요.”
생업에 투자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남는 시간은 무조건 바둑으로 보낸다고 했다.
“바둑TV를 시청하고 인터넷사이트에서 바둑을 두곤 합니다. 여덟 개 사이트를 드나들며 대국하는데 다른 곳에서는 6단, 7단을 오르내리는데 유독 타이젬에서만큼은 5단이 버겁습니다. 술이라도 마신 날은 4단까지 강등하거든요. 거참 오기가 받쳐서 타이젬 바둑을 가장 많이 둡니다. 허허”

주문진에서 건어물 상회 30년, 횟집 13년을 운영하면서 퍽이나 거칠게 살아왔다는 바다짱 5단은 바둑을 알게 되면서 인생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뭐랄까? 아주 조금이지만 품격을 얻은 기분이예요. 바둑을 통해 사색도 하게 되고 바둑인들과의 교분을 통해 수산시장에서 겪을 수 없는 색다른 세계와 통하게 됐으니까요.”
그래서 바둑인들에게는 아까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시간이 되도 타이밍이 맞으면 그는 생선회를 한아름 싸들고 바둑대회를 찾는다. 그런 순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바둑에 많은 시간을 뺏겨도 그의 아내는 너그럽게 웃는다.
“바둑만큼은 지지하고 싶어요. 그 세계의 사람들이 멋있구요. 저 이가 바둑을 대할 때는 신선처럼 느껴지거든요. 호호 바둑 둘때만요.”
뉘앙스가 묘하지만 그녀의 말뜻이 쉽게 전달된다.

S#3. 주문진으로 오세요.
봄에는 복어와 가자미가 좋고 여름에는 오징어가 좋다는 주문진.
자연산 홍합인 섭도 좋고 김치를 넣은 곰치 국도 일품인 동해바다.
“바둑을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바다짱 5단의 인사는 횟집사장의 장삿속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횟집 2층에 콘도 스타일의 숙소를 네 칸이나 마련했다.
물론 손님을 배려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바둑 인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강조했다.
그 이면에 뜻밖에도 필자와의 인연이 배어있음을 듣고 깜짝 놀랐다.
“낭만기객 권재룡 박사 스토리를 타이젬에서 읽고 감동받았습니다. 권 박사님이 고성에서 옥탑 방을 마련해 바둑청년들에게 제공했던 것처럼 저도 조건 없이 바둑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바둑인들이 언제라도 찾아와 편하게 쉴 수 있는 공간, 아무 때라도 머물면서 바둑을 연구하는 공간을 제공하고 싶었습니다.”

▲ 맨 오른쪽이 바다짱 5단.
방은 넓고 깨끗했다. 욕실과 씽크대까지 갖췄으니 생활하는데 문제가 없는 공간이었다. 이쯤 되면 바다짱 5단의 바둑에 대한 순정에 찬탄을 금할 수 없지 않은가?
3월 31일. 서울의 바둑대회에 참관한 바다짱 5단은 밤을 꼬박 새워 바둑 친구들과 술병을 기울이고 이른 새벽 부랴부랴 주문진으로 돌아갔다.
주말 예약 손님이 많아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머리를 긁었다.
한 번에 6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는 대형횟집 사장의 바둑 짝사랑이 흥미롭다.
한 지역의 바둑 열(熱)은 결국 한 사람의 바둑 광(狂)에 의해 덥혀지는 것이 아닐까?
바다짱 홍승종님의 존재가 주문진을 바둑계에 확실하게 각인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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