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바둑사]
I LOVE GO - 미국 1편
유태계 독일인 '라스커' 미국에 처음 바둑 보급
한상대 교수2010-05-24 11:42:15

▲ 뉴욕 항구

▲ 엠파이어 스테이트(102층 1931년) 빌딩 9.11테러로 무너진 세계무역센터(쌍둥이 110층 1967)

▲ 펜실베니아 대학교
내가 1967년 펜실베니아 대학 바둑클럽(Go Club)에 찾아 갔을 때다. 내가 들어서니까 나에게 “곤니찌와!” 하고 누가 인사한다. 내가 “한국인”이라고 하자 나에게 “한국인이 어떻게 일본게임을 배웠느냐?”고 한다. 내가 “바둑은 중국에서 시작하여 한국, 일본으로 퍼져나갔다”고 하니까 “우리는 일본에서 발명되고 일본문화의 산물이라고 알고 있다”라고 한다. 내 말을 듣고 혼동 되는 모습이다.
바둑클럽 회장이란 친구가 5급으로 제일 상수다. 내가 5점으로 시작해서 9점으로도 이기자 다 들 놀란다. 일본 5급이 우리나라 기원 10급 보다 약한 것 같았다. 당시 바둑에 관한 한 일본이 지존이었다. 바둑 책, 가르치는 사람이 다 일본 일색이다. 한국과 중국의 바둑은 일본에 비해 너무 미미했을 때였다. 바둑도 ‘GO(碁)’라고 일본 식으로 부른다. 나도 해외에 나가서야 그 걸 알았다. 바둑클럽 회원 중 누가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냐?”고 한다. 60년대 한국은 ‘전쟁 - 원조 받는 나라’라는 이미지 외에 별로 알려진 게 없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국은 정치, 경제, 문화, 생활, 모든 분야에서 우리나라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이 쓰는 영어가 세계어가 되었고 이제는 영어를 못하면 2등인간 취급을 받는 세상이 되었다. 미국문화가 우리 삶 속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어 그 정도가 얼마큼인지 가늠조차 안 된다. 코카콜라, 맥도날드, 디즈니, 팝송, 영화, TV 드라마, 진바지 등 미국식 소비문화 물결 속에서 우리는 살아왔다. 한(韓)민족의 전통문화는 설 자리가 없었다. 특히 남북대치상황에서 우리는 미국의 눈치를 봐야 했고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다.

▲ 서울
나는 우리나라가 반세기만에 이렇게 발전하리라곤 그 당시엔 상상도 못했다. 나는 처음 뉴욕에 가서 미국이 한국에 비해 문명발전 정도나 풍요로움의 차이가 너무 커서 ‘충격’이었다. 미국으로 가는 길에 동경에 5일 간 있었는데 그 때 처음으로 칼라TV, 자동문을 경험하고 전자시장에 많은 제품을 보고 놀랐다. 미국과 일본은 우리가 따라잡기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현재 미국에는 2백만 명 이상의 우리 동포가 거주하고 있다. 한국이 살기 좋아지자 그들 중 역 이민인구도 늘어나고 있다.

▲ LA 한인촌
미국이 대륙횡단철도를 1869년에 완성하는데 그 공사를 위한 노동자를 아일랜드와 중국에서 들여온다. 그 중국 노동자 ‘구리(䇢力 Coolie)’들이 바둑을 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는 1903~1905년 사이에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7천 여 명이 이민 간다. 이 중 샌프란시스코로 옮겨 간 사람, 독립운동 하러 미국에 건너 간 사람들이 바둑을 둔 기록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네끼리 둔 것이지 미국인에게 보급할 생각은 하지도 못 했다. 미국에 바둑을 처음 보급한 사람은 유태계 독일인 ‘라스커’였다.

▲ 백두산 천지 보다 높은 레이니어 산(Mt. Rainier) 정상(4,392 m)에서 대국. 시애틀 바둑협회 캠프
●○…미국 바둑 약사(略史)
1. 에드워드 라스커(Edward Lasker 1885-1981)
1905년 독일 베를린대학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전기공학과 학생인 에드워드라스커에게 그의 친구 막스랑거(Max Lange)가 어느 잡지기사를 보여 준다. 그 제목은 “체스의 라이벌 바둑”이었다. 그들은 그 시대의 최 고수 체스 선수들이다. 1961년 일본 바둑월간지(Go Monthly Review)에 기고하면서 라스커 박사는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우리는 잡지 바둑기사에 예시된 게임을 120~150 수쯤 두어 본 뒤에 그 게임을 그만 두었다. 한문으로 쓰인 숫자도 힘들었고 체스와 같은 특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체스클럽에서 일본신사 한 명이 일본신문을 읽고 있는 걸 봤다. 신문 뒷면에는 바둑도해가 나와 있었다. 독일신문에 체스 난과 같았다. 우리는 그 일본인이 떠난 후 그가 버린 신문을 주어와 검토하였다. 며칠 후 그 일본인이 카페에 다시 왔다. 그가 신문에 나온 대국은 흑이 졌다고 일러주었다. “우리는 놀랐다. 우리는 흑이 이겼고 백이 돌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막스가 나중에 백이 사석작전으로 이기는 절묘한 22수의 수순을 찾아내게 된다. “우리는 희열을 느꼈다” 이것은 우리에게 “바둑도 체스처럼 심오한 게임”이라는 발견이었다. 에드워드와 막스는 그 일본인으로부터 더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다른 체스선수들은 체스에 버금가는 게임이 있다는 걸 믿지 못 했다.” 그들은 “어리석은 소리 하지 마(Don’t be silly!)” 하며 웃곤 했다. “우리는 카드보드 위에 19줄 판을 그리고 두 가지 다른 색깔의 동전을 사용해 바둑을 두었다”.

▲ 미국 지역대회
이 무렵 27번이나 세계챔피언을 지낸 전설적인 체스 선수 엠마누엘 라스커(Emanuel Lasker 1868~1941)가 14년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한다(그는 에드워드의 3촌, 4촌, 혹은 친척이 아니라는 3가지 설이 있다. 그는 에드워드 보다 17년 연상이다). 에드워드가 그에게 바둑을 소개하자 그는 한판을 두어 본 후 곧 이 게임이 룰은 간단한데 엄청난 작전이 내포된 걸 금방 알아낸다.
그가 에드워드에게 “바둑을 두는 일본학생을 찾아라. 그러면 일주일에 한번씩 우리 집에 모여 바둑을 두자”고 제안한다. 에드워드는 같은 과 야쑤고로 기타바다케(Yasugoro Kitabatake)란 일본학생이 바둑을 두는 걸 알아낸다. “야쑤고로는 처음에 우리를 넉 점을 접어두고 두었으나 2년 후에는 우리가 호선으로도 그를 이길 수 있게 된다”. 에드워드는 그의 동생 버톨트(Berthlod)에게도 바둑을 가르친다. 어느 날 야쑤고로가 찾아와 “일본수학교수가 런던에 가는 길에 베를린에 잠깐 들렸는데 그가 유명한 아마추어 고수다. 한 판 지도 받을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 왔다.
에드워드가 “나야 좋지. 그런데 치수는?” 하니까 야쑤고로가 웃으며 “물론 9점이지” 한다. 에드워드는 “우리가 그 동안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이 세상에 누가 감히 우리를 9점을 접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에드워드가 “내 동생 버톨트와 함께 상의하면서 두어도 될까?” 하니까 야쑤고로가 “그 분이 상관 안 할 꺼야” 한다.
대국결과 라스커 형제가 처참하게 완패한다. 엠마누엘과 팀을 짜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더 큰 좌절은 그들이 열심히 수를 읽고 의논한 다음에 한 수를 놓으면 일본교수는 생각도 않고 금방 응수한다. “우리는 빨리 두는 일본인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드디어 하늘 높은 줄 알게 된다. 1909년에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은 에드워드의 일생을 바꾸는 계기가 된다.

▲ 에드워드 라스커(Edward Lasker) 엠마누엘 라스커(Emanuel Lasker)
당시 저명한 수학자이기도 했던 엠마누엘이 실망한 에드워드에게 “일본은 아직 세계적인 수학자를 배출하지 못한 나라 아니냐? 바둑은 수리적 게임이니까 우리가 일본에 가서 그들과 같이 공부만 하면 몇 년 내로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거다. 우리 같이 도쿄에 가자” 한다. 이 말에 에드워드는 크게 고무되어 일본에 가서 바둑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이 무렵 에드워드는 베를린대학을 졸업하고 독일전기공사(GEM)에 기사(技士)로 취업이 된다. 어느 날 에드워드는 자기 회사가 도쿄에 ‘지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본에 가기 위해 에드워드는 궁리를 한다. 결심을 한 후 에드워드가 자기 상관에게 가서 말한다. “제 부서에 기사가 41 명이 있습니다. 저는 그 중 한 명인데 특별히 뛰어난데도 없습니다”. 에드워드는 자기가 이 곳에서 꼭 필요한 인물이 아닌 점을 강조했다. “제가 혹시 외국지사에 가서 근무할 수 있겠습니까?” 상관이 “어디에 가고 싶은데?” 하니까 “도쿄요” 했다. 그의 상관이 회사 국제부와 얘기한 후 에드워드에게 “안 되었지만 자네는 안 되겠어. 일본에서는 영어를 잘 하는 기술자만 채용한다네. 자네는 영어를 못 하잖아”

▲ 그의 저서 바둑과 오목
그래서 에드워드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영국지사에 지원해서 1912년에 런던으로 간다. 그러나 1914년 ‘1차 세계대전(1914~18)’이 발발하자 그는 민간인 전쟁포로가 되었고 영국수용소에서 거의 5년을 지내게 된다. 1919년 라스커는 미국으로 이주한다. 그는 시카고에 살면서 1925년 뉴욕으로 가기 전까지 바둑을 안 둔다.
그는 뉴욕에 간 후 리 하트만(Lee Hartman, 하퍼스지 편집장), 칼 데이비스 로빈슨(Karl Davis Robinson 그래픽 미술가) 등을 만나 다시 바둑을 두기 시작한다. 그들은 작은 클럽을 결성하여 매주 그린위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에서 보헤미안 풍의 첨리스(Chumley’s)란 카페에서 만난다. 이 식당의 일본인 웨이터들이 바둑을 두기 때문이다. 회원 수가 늘어나면서 그들은 식당 2층에 방 하나를 빌린다. 이 만남이 나중에 ‘뉴욕 바둑클럽’의 초석이 된다. 이 후 뉴욕바둑클럽은 동부 10번 가 마샬 체스클럽(Marshall Chess Club)으로 옮긴다.

▲ 초창기 뉴욕 클럽. 우상귀 문 옆에서 두는 사람이 에드워드 라스커
일본인 고수에게 무참히 패한 후 일본에 가서 바둑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에드워드는 끝내 일본에 가질 못 한다. 그러나 그의 친구 막스 랑거는 일본에 가서 바둑 수업을 하는데 성공한다. 막스는 그의 처남 펠릭스 듀발(Felix Dueball)에게 바둑을 가르쳤는데 펠릭스가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유단자가 된다. 한편 일본에 안 가고 체스로 돌아 간 엠마뉴엘 라스커도 일생 바둑 애호가로 남는다. 그의 저서에서 바둑을 소개하는 부분을 넣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바둑 세트는 미 육군사관학교(West Point Military Academy)에 기증된다.
1934년에 에드워드 라스커는 “바둑 입문서(an elementary book on Go)”라는 책을 집필한다. 나도 이 책을 호주에서 사서 읽었는데 꽤 내용이 좋다. “바둑과 오목(Go and Gomoku)”이라는 책도 인기를 끌었다. 이 때부터 라스커는 국내 전역으로부터 바둑에 대한 문의를 받기 시작한다. 문의자 이름과 주소를 가지고 라스커, 로빈슨, 하트만 등은 1935년에 미국 바둑협회(AGA-American Go Association)를 결성한다.
“미국바둑협회(AGA)는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협회이며 한국기원과 중국기원보다 그 역사가 오래되었다”

▲ ‘나는 바둑을 사랑한다’ 메인 주 어느 바둑 광의 차 번호 판
2. 전후(戰後) 성장
2차 세계대전 후 1949년 미국바둑협회는 미국 바둑저널(American Go Journal)을 출판한다. 어느덧 미국 바둑수준이 프로대국까지 검토할 수 있게 되었다. 1959년 AGA가 전국대회를 만든다. 그 당시에 최강자는 단연 일본인 타카오 마쯔다(Takao Matsuda)였다. 그는 1959년~1975년 사이에 무려 15번이나 ‘US오픈대회’를 우승한다. 1960년대에 그는 ‘마쯔다의 편지들(The Matsuda’s Letters)’이란 책을 출판한다. 이는 최초의 고급 바둑교본이다.
1960년대에는 동부와 서부에서 바둑인 그룹이 부상하기 시작한다. 다른 지역에서도 조금씩 바둑 움직임이 생긴다. 예를 들어 클리블랜드(Cleveland)에선 노블 칼슨(Noble Carlson)이 바둑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뉴저지(New jersey)에 있는 벨(Bell)연구소에서는 과학자들이 여가시간을 이용하여 바둑을 즐겼다. 그러다가 미네소타에 있는 칼리턴 대학(Carleton College) 바둑회원 중에서 미국 최초의 프로기사가 탄생한다. 이 곳 학생인 제임스 커윈(James Kerwin)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1977년 프로가 된다.
1960년대 중반 AGA 회장인 폴 앤더슨(Paul Anderson)이 협회를 재건한다. 그 당시에는 지역적으로 따로 바둑활동이 활성화 되고 있었다. 1970년대에 뉴저지의 어느 차고 안에 있던 한 상자의 바둑서류를 근거로 AGA는 재정비된다. 한국이 1954년 조남철의 한국기원 설립을 현대 한국바둑역사의 기원으로 하듯이 현대 AGA는 1974년에 미국 바둑의 중심으로 다시 태어난다. 그 해에 뉴욕에서 존 스티븐슨(John Stephenson), 매티어스 팀(Matthias Thim)과 타사오 타카베(Tasao Takabe)가 이 서류를 근거로 더 발전된 ‘미국 바둑저널(The American Go Journal)을 출판한다.

▲ 제 19회 미국 바둑대회(US Go Congress) 휴스턴
곧 동부와 서부의 대회에서 입상한 선수들간에 정기대국이 마련되었다. 미국은 서부와 동부가 멀어서 함께 바둑대회를 열기가 힘들다. 1977년경에 현재의 체제가 성립된다. 당시의 멤버들은 옛날 회원번호를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미국 바둑재단(AGF) 설립

몇 년 후 클리블랜드의 로저 비 화이트(Roger B. White)가 세금공제가 가능한 기부금을 받기 위해서 미국 바둑재단(AGF-The American Go Foundation)을 창립한다. 지금도 AGF는 청소년 바둑캠프와 모든 청소년 바둑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각 학교에 새로 생기는 클럽, 각 종 청소년 바둑 프로그램에 재정과 장비지원은 물론, 운영에 대한 자문도 해 주고 있다. 청소년 바둑 웹 사이트(http://tigersmouth.org), (http://agfgo.org/).
3. 바둑 르네상스
1979년 2월. 일본 세계대회가 열리기 시작하면서 그 후 10년 동안 미국 바둑계는 활력이 넘치게 된다. 당시 전 세계 각 국의 바둑협회가 일본기원의 재정지원으로 결성되고 있었다. 이렇게 설립된 각 국의 협회가 바둑대회를 주최하여 그 나라 챔피언을 선발하고 그들을 모아 세계대회를 열기 위함이었다. 일본의 이런 공로는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일본이 결성해 놓은 각 국 협회를 이용해서 똑 같은 방법으로 세계대회인 ‘국무총리 배’를 한국이 주최하니까 일본이 불쾌해 했다. 일본에서는 한국이 단체전이나 다른 방식의 대회를 개최하여 나라마다 특성화 시키길 원했다. 한국이 강행하자 화가 난 어느 관계자는 “일본이 그 동안 국제보급을 해왔으니까 이제는 한국이 맡을 차례” 라며 자기네는 세계대회에서 서서히 손을 땔 것을 예고했다. 한편 미국에는 ‘바둑의 르네상스(Renaissance) 시대’가 온다.

▲ 에님 센트럴(Anime Central) 시카고 2006년 10 여 명이 가면복장으로 출전(닭?)
1965년 존슨 대통령 주도로 미국이민법이 개정된다. 그래서 한국은 1년에 2만 명이 쿼터제로 미국에 이민을 갈 수있게 된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평화봉사단(US Peace Corps) 강사로 1967년에 미국에 갔을 당시 미국 내 우리 동포 수는 3만 명 정도였다. 그나마 대부분이 유학생이었다. 1970년 대에 좀 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한국인 이민자 수가 증가한다. 특히 유신체제에 환멸을 느낀 엘리트 그룹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한다. 그들의 가족초청으로 한국의 이민자 수는 급증하게 된다. 그들 중에는 바둑을 두는 사람이 많았다.
1980년경에는 합법/비합법 체류 한국인이 미국 내에 100만 명쯤이 된다. 큰 덩치다. LA를 비롯한 미국 주요도시에 한인촌 ‘Korea Town’이 생겼다. 이들이 미국바둑 계를 휩쓸게 된다. 미국의 ‘바둑 르네상스 시대’는 한국인의 독무대였다. 동시에 호주와 캐나다에서도 한국인이 완전히 석권한다. 바둑을 일본게임으로 알고 있던 서양 바둑인들에게는 충격이었다. 당시 일본은 “우리가 전 세계에 바둑보급을 하고 있는데 현지 강자들은 다 한국사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탄식이 나오기 시작한다. 한국기원은 ‘세계보급’이 무언지도 모르고 있을 때다. 미국 2 편에 계속……….

▲ 미국 바둑대회 전야제 축하공연 중에도 한 판
한상대 전 시드니대 교수 E-mail sdhahn@gmail.com ☎ 017-276-5878
*미국교민사회 바둑에 대한 정보를 구합니다. 자기 지역의 교민 바둑역사, 현황 등을 (사진첨부) 줄 수 있는 사람은 위 메일 주소로 연락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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