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저수첩]
사람이 곧 바둑이다 - 광주 빛광회
빛고을 광주 동호회 정모 참관기
김종서 작가2010-06-12 12:29:08

S#1. 전야제
5월의 무등산 능선은 바라보기에 눈이 시리다.
벌써 30년이 흘렀지만 불의에 저항해 궐기했던 시민들의 분노와 상처, 절망에서 피어난 긍지가 그 능선에 어려 있다.
5월의 마지막 날. 광주에 도착한 감회는 착잡했다.
실로 오랜만에 다시 찾은 도시.
고속도로 진입로에 위치한 모교와 산수동 오거리 하숙집을 슬쩍 눈도장 찍고 금남로를 천천히 드라이브했다.
콩나물시루처럼 학생들로 가득 들어찬 19번 버스를 타고 30년 전에 필자가 통학했던 길이다.
바둑도 그때 하숙집에서 룸메이트들과 밤새워 두곤 했었다.
고교시절 3년을 광주에서 살았을 뿐인데 친구와 정서와 추억과 그리움, 그 모든 것이 그곳으로부터 발아해 마음의 나침반 N극으로 남아있다.
타이젬에 바둑 글을 쓰면서 전국 방방곡곡을 쏘다녔으나 취재 차 광주를 방문한 것은 딱 한 차례였었다.
그것도 대회 스케치가 아니었고, 누구의 초청을 받은 게 아니라 비 내리는 여름날 충장로를 걷다가 우연히 타이젬 바둑을 두고 있는 구멍가게 주인을 익명으로 소개한 유저수첩 <쓸쓸한 듯 아니 쓸쓸한>편이었다.
아무튼 수도권이나 대구 부산 쪽에 비해 호남 지역의 바둑열기가 좀 썰렁한 것 아닌가 싶던 차에 대국실을 통해 초청장 쪽지가 날아왔다.
3월에 만들어진 빛고을광주 동호회가 정식으로 회원 바둑대회를 개최하니 구경 오라는 거였다.
그냥 빈손으로 갈 순 없어 광주 출신 양건 9단을 섭외했다.

▲ 다면기를 하고 있는 양건 9단.
“아, 광주의 바둑동호회라면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달려가야죠.”
작년 프로기사회장 선거에 과감하게 출마했고, 올해 한국리그 넷마블 팀 감독을 맡은 양9단도 벌써 중견이건만 시시콜콜 토를 달지 않고 흔쾌하게 동행을 약속한다.
요즘 프로기사들의 움직임이 그렇다.
바둑동호회 모임에 적극적으로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적지만 한국기원에서 보급 차원의 지원금도 나온다.
그러하니 각 동호회에서 큰 부담 갖지 말고 바둑잔치에 프로기사들을 초청해도 괜찮을 것이다.
한국기원에 문의하면 친절하게 소개해 줄 것이고 그도 번거롭다면 타이젬이나 필자에게 노크하셔도 좋다.
그날 밤 필자와 양9단이 도착한 곳은 광주의 한 횟집.
그곳이 바로 동호회 시샵을 맡고 있는 빛고을지도(2단)님 업소였다.
“굵고 짧게 인사드립니다. 모두 반갑고요. 전야제를 위해 오늘 손님을 안 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정말 횟집 안에 일반 손님이 보이지 않았다.
지역동호회라 그런지 전야제에 거의 모든 회원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문자만 날리면 5분대기조처럼 달려와 모인다고 했다.

S#2. 무안투어 - 초당대학교 캠퍼스에서
대회의 명칭이 <빛고을동호회 무안투어>.
다음에는 다른 지역의 이름이 붙을 예정이라고 한다.
회원들이 사는 지역을 돌면서 바둑을 두겠다는 계획이다.
1번국도 변에 위치한 초당대학교 캠퍼스는 쾌적하고 아름다웠다.
초당대학의 교수인 흥부의행복(3급)님이 강의실을 대회장으로 제공했다.
개회식대신 회원들이 케이크를 들고 와 아홉 개의 양초를 꽂았다.
5월 13일 입신인 9단에 오른 양건 사범을 축하하기 위한 이벤트.
“9단에 올랐어도 축하 케이크는 처음 받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전혀 예고 없었던 깜짝 이벤트에 양9단의 볼이 붉어진다.
대회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예선전을 미리 온라인 대국으로 치른 까닭에 무안투어는 본선대국으로 빠르게 진행됐다.
오전 16강 대국이 끝나고 양9단의 다면기가 진행됐다.
그 옆자리에서 4면 지도대국을 맡은 이는 대불대 바둑학과 학생인 임지성 타이젬 9단.
게다가 대불대교수 9단과 좋은착상 9단까지 가세해 빛고을광주 동호회 전원이 지도대국을 둘 수 있었다.
점심은 캠퍼스 인근 식당에서 닭볶음탕으로 포식했다.
남도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먹 거리가 풍성한 곳.
그냥 뜨거운 밥에 묵은 김치만 곁들여도 한 그릇을 뚝딱 비운다.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는 족구시합이었다.
양9단과 대불대 9단 트리오가 주니어 팀으로 뭉치고, 필자와 40대 회원들이 시니어 팀으로 맞섰다.
바둑동호회 족구 게임에서 밋밋한 친선대결은 가당치 않다.
내기가 걸려야 승부욕에 발동이 걸리는 법.
쌍방 조건의 저울추를 확인한다.
주니어가 이기면 평생 사범 대우는 물론이고, 만날 때마다 삼겹살 회식에 준하는 식사접대.

시니어가 이기면 양 프로와 9단 트리오 평생 노예계약 및 신체포기각서.
양 팀 모두 따질 것 없이 콜!을 외친다.
서로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분위기다.
정규 족구장에서 펼쳐진 치열한 3세트 공방의 결과-
양건 9단과 대불대 사범들이 요즘 타이젬 대국실에서 거의 매일 밤 빛고을광주 동호회원들에게 지도대국 및 복기 서비스를 하고 있다는 서글픈(^^) 후문으로 미뤄 짐작하시길.
S#3. 바둑이 곧 사람이다
빛고을광주 동호회원들은 비교적 젊다.
치과의사 하얀유나(2단)과 교수 흥부의행복(3급) 두 분이 환갑에 턱걸이한 원로이고 그 외엔 30대가 주축이다.
무안투어 행사를 기점으로 거의 매일 호남지역 회원들이 가입하면서 동호회 규모도 틀을 갖춰가고 있다.
“요즘 사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 전에는 늘 하는 일에 치어 숨 돌릴 틈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바둑 친구들과 모임을 만든 뒤로 하루가 즐겁습니다. 타이젬에 들어가면 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고 심야 온라인 대국 한 판으로 하루의 피로를 씻곤 합니다. 급수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승패를 떠나 쓸쓸한 이 시대에 바둑으로 누군가와 소통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하잖습니까?”

▲ 동호회원들과 수담을 나누고 있는 필자.
하얀유나 2단의 고백이 따뜻하게 가슴에 닿는다.
“그렇죠. 회원들 모두 무척 강한 연대감을 품고 있습니다. 앞으로 같은 지역에 있는 대불대 학생들과 결연을 맺고 바둑을 배우고 또 그 젊은 인재들이 이 지역에서 외로움타지 않도록 배려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바둑대회에도 자주 출전할 예정입니다. 호남에 바둑문화가 활짝 꽃피울 수 있도록 우리 동호회가 밑거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지역 동호회 여러분들이 연락주시면 언제든지 교류전에 응하겠습니다.”
빛고을지도 시샵의 포부도 건강하다.
우리는 늘 사색한다.
바둑은 과연 무엇일까?
예도일까? 스포츠일까? 승부일까? 게임일까?
바둑으로 피 말리는 승부를 거듭하고 인생의 전부를 건 사람들이나 아무렇게나 줄바둑을 두고 하루의 피로를 씻는 사람들이나 사실 다를 건 별로 없다.
바둑은 저 건너편의 누군가와 만나 인생의 길을 묻고 답하는 지적 퀴즈게임이다.
그러므로 바둑은 곧 사람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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