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저수첩]
부산은 추억을 먹고 산다
1박 2일간의 부경교류전 취재일기
김종서 작가2010-08-17 15:42:38
S#1. 별들이 떴다!
8월 13일 정오 무렵의 서울역. 바둑계의 스타들이 하나둘씩 모인다.
유창혁, 최철한, 서능욱, 양상국, 김수장, 정수현, 김일환, 강훈, 백성호, 이홍렬, 김영환, 서무상 등 얼핏 헤아려도 단수의 합이 100단을 넘는다.
몇몇 시민들이 프로기사들을 알아보고 오래 눈길을 던진다. 부산으로 가는 KTX 176열차 허리께에 옹기종기 앉은 기사들이 반갑게 환담을 나눈다.
대부분 70년대 입단해 한국 바둑의 미드필더로 활동했던 시니어 기사들인데 그들이 이처럼 한 자리에 모이기란 어려운 일이다.
점점 스포츠화되는 바둑인지라 젊은 기사들을 감당하기 어렵고 그러므로 승부의 현장에서 비켜서있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부산행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 부경 프로기사 초청 교류전을 마친 뒤 내년을 기약하며 화이팅을 외치고 있는 협회 관계자들과 프로기사들. 아래 줄 가운데가 부산바둑협회 이철승 회장(흥우건설 대표)이다.
벌써 18년째 일관되게 이어져 온 부경바둑대회는 부산과 서울 출신 기사들이 수담을 나누는 단체전이다.
이 대회가 만들어진 동기는 사실 프로기사들을 시원한 부산 바닷가로 초청해 머리 좀 식히라는 의도에서였다.
그렇기에 대회는 다분히 친선의 성격이 강하지만 승리한 팀에 승리수당이 주어지고 모처럼 만난 옛 라이벌들과 한칼을 겨루는 마당이라 2차전에 걸친 바둑승부는 뜨겁게 펼쳐진다.
꽤 많은 인원을 초청하는 대회인데도 주최 측 부산바둑협회는 홍보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냥 추억의 스타들이 부산에 모여 바닷바람을 쐬고 싱싱한 해산물을 맛보고 부산 사람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으로 만족한다.
세상에 알려지는 걸 오히려 머쓱해하니 이것이 부산 사람들의 스타일이다.
적지 않은 예산인데 무려 18년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져 온 부경바둑대회.
필자는 이 대회를 바둑사랑의 순도(純度) 면에서 국내 최고의 대회라고 감히 표현하고 싶다.
그래서 5년 내리 종군기자로 참가하고 있다.
타이젬의 취재 팀이 대거 달려가 인터넷 중계를 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 부산바둑협회 이사들과 프로기사들의 교류전 모습. 제일 앞에 보이는 사람이 김대욱 부회장이다. 올 가을 시니어바둑대회를 개최하겠다고 밝혔다.
S#2. 오픈 게임
올드스타들이 부산에 도착하면 부산바둑협회 이사들이 마중을 나온다.
맨투맨 마크로 한 사람씩 파트너가 정해져있다.
프로기사 VS 지역명사 초청대국인데 워낙 오랜 세월 함께 하며 친분을 쌓아온 까닭에 격의가 없다.
가요계의 프로 함중아 이사는 차수권 사범으로부터 한 판을 뚝딱 배우고 나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내가 여섯 점으로 안 된다 말입니꺼? 한 판 더 두입시더.”
그리고는 지갑을 열어 지폐 몇 장을 꺼낸다.
“하하하 깔면 깔수록 사석만 늘어난다 아닙니꺼!”
관전객들이 반대쪽에 놋돈을 건다.
차 사범은 두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콜을 받는다.
내기의 마왕 함중아 이사는 다른 이들 한 판 둘 시간에 도합 세 판을 패배하고 씩씩거리며 검토실로 들어왔다.
“그냥 공손하게 한 수 배우실 것이지 왜 내기를 걸어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필자가 한 마디 살짝 긁자 그가 유쾌하게 웃는다.
“수업료는 내야 안 되나? 프로 사범한테 그냥 두는 건 실례거든. 김 작가 오랜 만에 한 수 썰어야지?”

▲ 함중아 이사와 양상국 9단의 대국 모습.
내기의 마왕이 프로한테 뺨맞고 필자한테 화풀이할 셈이다.
필자와는 호선으로 부산에 올 때마다 밤새워 내기를 두는 라이벌이다. 둘이 돌을 가리는데 갑자기 이철승 협회장과 프로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온다. 그리고 바둑판 옆에 앉아 돈을 거는 것이다.
서능욱 9단을 비롯해 부산협회 이사들이 함중아 씨 쪽에 건다.
필자의 그량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타이젬의 하부장과 이정환 기자가 상대 편 판돈에 키를 맞춘다.
두 대국자 모두 통산 2만 판을 기록한 마니아들인 만큼 포석 하나는 거의 오청원 급이다.
사실 필자의 주특기는 속임수 포석인데 고수들이 두 눈 뜨고 지켜보는 바람에 함부로 구사할 수 없었다.
포석 이후 타이젬 3단 실력의 두 사람이 뻑수와 속수를 번갈아 두기 시작한다.
“에이 된장바둑들이네!”
이철승 회장은 시종일관 옆에서 매서운 비평을 한다.
“우와 기민한 선수 활용입니다.”

▲ 김영환 9단과 부산바둑협회 이수명 부회장의 대국에 이철승 회장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사진 - 부산바둑협회 김영순 이사)
서능욱 사범은 필자의 떡수에 속으로 킬킬거리며 과대칭찬을 때린다.
결국 사활 착각으로 필자는 돌을 던져야 했다.
그러자 함중아 이사 판돈을 얼른 꺼내들고 배당금을 분배한다.
“보소. 내는 큰 승부에 강하다 아입니꺼!”
분하다. 앞으로 다시 만날 때까지 함중아 씨는 이 판의 승전보를 두고두고 여기저기 해설할 것 아닌가!
“그 실력으로 어떻게 바둑소설을 쓰시지?”
프로기사들이 죄다 필자를 측은하게 내려다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부산 최대의 봉 함중아 이사한테 졌다카믄 말 다한기라!”
부산 이사들이 입을 모아 필자를 탄핵한다.
아, 정말 싫다. 이런 분위기.
그러나 여기서 풀이 죽으면 안 된다.
“제가 왜 져야만 했는지 이 밤이 지나면 모두 알게 되실 겁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기분 좋게 대승을 거둔 함중아 씨는 다음 날 자신이 경영하고 출연하는 업소에 모든 이들을 불렀다.
“오늘은 제가 다 쏩니다. 즐겁게 놀다 가이소.”
그제야 그 자리의 관전 객들은 필자의 논개 형 희생바둑을 이해했으리라. 믿거나말거나!

S#3. 추억은 꿈을 잉태한다
‘부산은 추억을 먹고 산다‘라고 했지만 추억이 과거지향을 가리키는 건 아니다.
과거의 미덕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 강하다.
올해 봄 부산바둑협회는 전국에서 세 번째로 체육회에 정가맹했다.
부산시민바둑대회를 성대하게 치렀고, 8월에는 일본청소년을 초청해 교류전도 치렀다.
각계각층에서 활동하는 협회의 젊은 이사들이 적극적으로 활동해 바둑문화를 활성화하는데 애쓰고 있다.
“부산바둑 요즘 움직임이 좋습니다. 1세대 바둑애호가들이 고령화되면서 잠깐 부산바둑이 생기를 잃었는데 최근에 살아나는 분위기입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조타수 역할을 할 생각입니다.”
이철승 회장이 회식자리에서 젊은 이사들의 활동을 자랑했다.
그러자 김대욱 부회장이 시원하게 한 방을 터뜨린다.
“올 가을에 시니어 프로기사 전원(60여명)을 위한 대회를 만들겠습니다. 그때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참가해주시기 바랍니다.”
김대욱 부회장이 7천만원을 후원해 시니어 대회를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바둑계가 꼭 실력 위주의 대회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비록 광채가 덜하더라도 별은 별이다.
우리 바둑계를 끌어온 시니어들을 잊지 않는 부산.
부산은 참 독특한 곳이다.

▲ 대한생명배에서 우승을 차지한 신진서 군. 현재 부산지역연구생이다.
올해 대한생명배 어린이 바둑대회에서 깜짝 우승을 거둬 화제가 된 소년 신진서는 부산바둑협회가 키워낸 보석이다.
지금 초등학교 4학년에 불과하고 연구생 7~8조 실력인데 전국의 걸출한 형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우승컵을 차지했다.
바둑교실을 하는 아버지 신상용 원장의 가르침 아래 6세때 바둑을 배워 1년 만에 타이젬 2단 실력을 갖춘 진서는 유치원에 다닐 때 부산시장배 저학년부 우승을 기록했다.
기재가 보이자 권병섭 사범이 트레이너를 맡아 기본기를 가르쳐 재목으로 가다듬었다.
대한생명 배 우승 후 많은 이들이 서울로 올라가 본격적인 바둑수업을 권했으나 신상용 원장은 부산을 고집했다.
“진서는 타이젬에서 중국의 강자들과 대국하면서 공부를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진서의 타이젬 아이디는 수미성모 9단이다.
회원 여러분들께서도 수미성모 9단이 대국을 하면 응원해주시기 바란다.
아직 어린 소년이니까 베팅은 삼가시고 그냥 어린 천재의 바둑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지켜보셨으면 좋겠다.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신진서처럼 꿈나무를 키워내는 부산바둑인들에게도 타이젬 회원들의 진정성 가득한 박수를 듬뿍 보내드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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