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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젬스페셜]

한류(韓流)의 원조(元祖), 조선통신사

조선통산사의 길 1만리, 바둑으로 통하다 제2부

김종서 작가2010-10-23 19:4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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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뱃길에서 기성 슈사쿠(秀策)를 만나다/인노시마 - 바로가기
[제2부] 한류의 원조, 조선통신사/토모노우라
[제3부] 통신사 VS 본인방/교토
[제4부] 또 다른 세계를 보다/히코테
[제5부] 19로, 1만 리/관서일대
[제6부] 20세기의 영웅들/도쿄
[제7부] 기타니를 기억하는 1천명의 대국/히라츠카 


S#1. 무엇이 그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나?

조선통신사가 부산을 출발하면 현해탄에 흩어져 있는 일본의 모든 섬들이 봉화 릴레이를 펼치며 북방의 귀빈이 떴음을 알린다.
쓰시마 도주는 500척의 선단에 호위병 3,600명을 이끌고 바다로 나가 손님을 영접한다.
그때부터 일본내해를 따라 이어지는 뱃길에 놓인 모든 번(藩)에 비상이 걸린다. 번은 지금의 현(縣)에 해당하는 지역단위인데, 번(藩)의 한자표기가 암시하듯 1만석 이상 소출을 내는 봉건영주 다이묘(大名)의 영지를 뜻한다.
당시 일본은 그런 번을 나라(國)로 불렀다. 규슈(九州) 섬은 아홉 나라가 있었고, 시코쿠(四國)는 네 나라가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각 지역의 영주들은 저마다 만만찮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어 쇼군은 영주들을 전부 수도인 에도(江戶)로 불러들였다.
이를테면 인질인 셈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귀빈들이 경유하는 지역의 영주들은 그 기간 동안 귀향할 수 있었다. 번의 영주로서 접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영주들은 심혈을 기울여 조선통신사를 맞이했다.
대략 번 고장의 1년 예산과 맞먹는 비용이 접대비용으로 지출됐다.
실제로 당시 일본 막부 전체 1년 예산이 100만냥 정도였는데 조선통신사 접대비용도 100만냥이었다고 한다.



불과 몇 년 전에 반도를 침략해 불바다를 만든 그들이 왜 그토록 조선통신사의 방문에 예를 갖추고 성의를 다했을까?
그 극단적인 양면의 표정은 일본의 정치적인 상황에서 비롯된 거였다.
조선침략은 쇼군 도요토미가 각 지역 영주들의 반란을 억제하고 영지를 나눠주기 위해 일으킨 것이며, 그 뒤 통신사 접대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영주들의 힘을 분산시키고자 기획한 이벤트였던 것이다.
국빈을 영접하는데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투입되므로 반란을 획책할 여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쇼군의 의도가 그렇거나 말거나 일본의 민중들은 제 고장에 찾아오는 조선통신사를 흠모하고 존경했으며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학식이 높은 조선의 외교관들로부터 글을 받기 위해 고관은 물론 마부와 상인에 이르기까지 길게 줄을 섰다.
그렇게 받은 글은 책으로 엮거나, 가보로 전해지곤 했다.
또 통신사와 시를 주고받고 필담창화를 나눈 일본의 학자들은 단기간에 명성을 얻곤 했다.


S#2. 대조루(對潮樓)에서 바둑을 두다

10월 2일.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 토모노우라 언덕에 위치한 후쿠젠지(福禪寺)에서 유창혁9단과 야마다9단의 기념대국이 마련됐다.
후쿠젠지는 일본 전역에서 가장 조선통신사의 유적이 짙게 남아 있는 곳으로 귀중한 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곳이다.


▲ 후쿠젠지 대조루


▲ 대조루에서 본 바다

그래서 대국자와 취재진 외에는 출입이 통제됐다.
에도시대의 고찰 후쿠젠지는 언덕 위에 지어져 전망이 일품이라 조선통신사의 수뇌부가 묵었으며 일본의 학자들과 시문을 나눴던 명소다.
그 누각이 바로 대조루.
토모노우라의 풍광에 반한 조선통신사들이 많은 글을 남긴 곳이다.



바로 그 자리에 유창혁9단과 야마다9단이 마주 앉았다.
대국 전에 도모노우라 시민들의 전통악기 연주가 흐르고-


▲ 대국장면


▲ 민속연주

돌을 가리자 유9단의 흑번.
우상귀에 첫 수를 놓자 축포처럼 카메라 플래쉬 세례가 터진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언론사의 기자들이 좁은 누각 위에 가득 모였다.
그 장면만 보면 세계대회 결승전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첫 수의 포토타임이 끝나자 누가 강제하지 않았는데도 약속이나 한 듯 기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대국자를 우선적으로 존중하는 취재의 관습이다.


▲ 공개해설을 하고 있는 이민진 5단.


▲ 자리를 꽉 메운 일본 바둑 팬.

같은 시각. 토모노우라 공민회관 강당에서 공개해설이 진행됐다.
관전객들이 꽉 들어찬 실내에서 한일 여류기사(이민진, 만나니)들이 친절하게 한 수씩 해설하고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대국진행이 소개됐다.
한 수가 놓일 때마다 탄성을 터뜨리는 청중들의 분위기가 진지했다.
그들은 나중에 대국이 끝나고 한 번 더 복기를 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고 무려 네 시간 동안 바둑에 빠져있었다.





이튿날인 10월 3일.
여류기사 대결은 토모노우라 민속기념관에서 벌어졌다.
역시 공민회관에서 유창혁, 야마다 9단이 해설을 했고, 2차전이 끝난 후 시민 100명과 다면기 행사가 열렸다.



다면기에 참여하는 바둑팬은 1만엔의 참가비를 냈고, 공개해설장에 들어가는데도 소정의 입장료가 책정되어 있었다.
공짜가 없는 바둑행사. 팬들은 그렇게 바둑 이벤트의 주인이 되어 즐기고 있었다.


S#3. 에도시대의 마지막 도시 토모노우라

토모노우라 시가지는 주민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았다.
특산물인 도미와 함께 에도 시대의 시가지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일본인들이 즐겨 찾는 관광지다.
2008년 개봉된 애니메이션 영화 <벼랑 위의 포뇨>가 대히트하면서 토모노우라의 주가가 급상승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바로 이 항구의 벼랑을 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벼랑 위의 포뇨를 낳게 한 언덕의 집


▲ 벼랑 위의 정원

더불어 토모노우라를 상징하는 인물은 사카모토 료마.
료마는 19세기 인물로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 막부권력과 기존의 계급사회를 전복해야 한다고 주장한 혁명가다.
그는 검술에 능한 사무라이였지만 사회개혁을 꿈꾼 풍운아였다.
거친 바다를 누비면서 메이지 유신이 성공하는데 몸을 바친 그는 자객에 암살되어 최후를 맞는다.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역사인물 1위가 바로 사카모토 료마다.
료마는 시코쿠 섬 출신인데 격변기 때 이 곳 토모노우라를 항해하다 사고를 당해 머문 적 있었다.
그 인연을 토모노우라는 전폭적으로 확대해 료마의 항구라고 외치는 것이다.


▲ 버스


▲ 범선

토모노우라의 교통수단인 버스와 유람선도 복고풍이다.
개화기 메이지 시대를 연상할 수 있도록 가급적 현대의 편리를 사양한다.
료마의 흔적을 보면서 다시 조선을 생각한다.
흡사한 인물로 김옥균이 떠오른다.
갑신정변을 주도했다가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 개화파의 리더 김옥균은 1884년 일본 남쪽의 절해고도 오가사와라 제도로 유배된다.
그를 흠모한 본인방 슈에이(秀榮)는 본토에서 1천 킬로 떨어진 섬으로 찾아가 수담을 나눴다.
5점 접바둑을 두었는데 그 기보가 한국인이 둔 최초의 현대바둑 기록이다.
김옥균은 조국의 개혁을 끝내 이루지 못하고 타국에서 숨졌다.
료마와 김옥균의 존재에서 근대사의 명암이 엇갈린다.
아시아권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
척화의 쇄국정책을 고집하다 마침내 열강의 샌드백으로 전락한 조선의 운명이 두 풍운아의 초상에 투영된다.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와 도미, 사카모토 료마와 더불어 조선통신사는 토모노우라를 빛내는 상징이다.
이를테면 관광자원이라는 이야기다.


S#4. 그 바다를 보면서

료마라는 인물을 한 번 더 생각해본다.
그는 최고의 검사였지만 습격을 당해도 절대 상대를 베지 않고 칼등으로 제압했다고 한다. 성격은 호방했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로맨티스트였다.
목적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무라이의 경지를 넘어선 정신세계의 소유자였다.
조선 선비의 미덕과 와 일본 사무라이의 용맹을 겸비한 느낌이다.
그래서 계보를 훑어본다.
료마의 스승은 카츠다.
카츠가 존경하는 인물은 요코이 쇼난(橫井 小楠), 주자학자로 메이지 유신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카츠는 료마를 요코이에게 보내 한 수 배울 것을 권유한다.
료마가 막부의 무인정권을 타파하고 인의(仁義)를 주장하는데 요코이의 영향이 컸으리라.



그 요코이의 사상은 퇴계학이 뿌리를 이룬다.
1590년 조선의 사절단 중에 서장관 허성(許筬)은 퇴계 이황의 직계 제자였는데 그가 교토에서 일본의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 주자학 중 퇴계학의 진수를 전해준다.
후지와라는 일본 주자학의 지평을 연 시조(始祖)가 되고, 그 학맥에서 요코이가 나왔으며, 요코이로부터 사상적 감화를 받은 료마는 기존의 사무라이 혼(魂)에 선비의 도를 더하지 않았을까 추리해보는 것이다.

토모노우라 시가지를 한 바퀴 돌고 나서 방파제를 걸으며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있는데 손자를 업은 할머니가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한국인이죠?”
“네, 맞습니다.”
한눈에 그렇게 보이는 모양이다.
“저 한국 너무 좋아해요.”
서툴지만 진솔하게 들리는 우리말이다.
“욘사마, 뵨사마, 박용하 너무너무 사랑해요.”

아, 한류 팬이다.
일본의 방송 중에 24시간 한국드라마만 방영하는 채널이 있다.
연기력 좋고 가창력 좋은 한국의 배우, 가수들이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할머니는 한국드라마의 매력에 빠져 친한파가 되어 늦은 나이에 한글을 배운다고 했다.
한국인에게는 일본인에게 없는 뭔가가 있다고 했다.
그게 무엇일까?
늘 우리가 당하고 지낸 것 같지만 삼국시대 이래 지금까지 그들의 정신 저 깊숙한 곳에 한반도 문화의 DNA에 대한 동경이 있는 듯싶다.

(다음 화에 계속)

내일은 제3부 [조선통신사 VS 본인방] 편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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