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바둑사]
뗏목타고 태평양을? - 노르웨이 편
1977년 바둑협회 설립 … 34명 적극 활동
한상대 교수2010-12-25 21:55:34

▲ 피오르드(Fjord)
<스칸디나비아의 물가>
스웨덴 렉산(Leksand) 바둑대회에 갔을 때다. 영선이가 와서 “교수님, 저희들4명(윤영선, 하호정, 강승희, 김민희)이 노르웨이에 갔다가 구경도 못하고 돌아 왔어요” 한다. “왜?” 하니까 “너무 비싸서요. 저희가 오슬로에서 모텔 값을 물어 보니까 1인당 90유로(약17만원)래요. 4명에 360유로나 돼요. 거긴 물가가 장난이 아니에요. 그 길로 기차역으로 가서 돌아왔어요” 한다. 노르웨이에 갈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비상이 걸렸다. 노르웨이는 2010년 1인당 소득이 88,600 불로 거의 9만 불이다. 세계 제 2위 국가다. 다른 나라에서 번 돈으로 쓰려면 자연 벅찰 수 밖에.
나는 이 대회에 참가하고 있는 노르웨이 챔피언 새너스(Pal Sannes)를 찾아갔다. 그에게 “내가 오슬로에 있는 콘티키 박물관에 꼭 가고 싶은데 그 곳은 숙박비가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 내겠다. 우리 일행이 4명인데 숙소를 해결해 줄 수 있겠는가?” 했더니 새너스가 놀라며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콘티키 저자 헤이어달 교수인데 어떻게 그를 아느냐?” 고 한다. 내가 “콘티키를 읽었다”고 하자 샌더스는 반가워 한다. 그는 “동양인이 올 때마다 콘티키 박물관을 추천했으나 콘티키를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고 한다. 새너스가 나에게 “숙소는 걱정 말라. 내가 바둑인들 집에 분산 시키던지 안되면 우리 집에서 다 잘 수도 있다. 다만 침대가 하나뿐이라 나머지는 매트 깔고 바닥에서 자야 한다” 하길래 내가 “한국 사람은 바닥에서 자는 게 더 편하니까 그 건 걱정하지 말라” 고 했다.

▲덴마크와 스웨덴 사이 바다를 질러 가는 다리 ▲스웨덴 예테보리

▲바둑대회장 안내

▲랙산에서 필자와 윤영선 ▲김선기(아마 6단)의 야외대국
다음 날 나는 렉산 근처에 있는 유명한 야외음악당 달할라(Dalhalla)에 갔다. 네 명의 여자프로, 김선기, 홍승희 등을 데리고 갔다. 3억년 전에 이 곳에 운석이 떨어져 커다란 웅덩이를 만들었다. 그 걸 노천음악당으로 쓰고 있는데 좌석이 4천 석이나 된다. 이런 커다란 웅덩이를 음악당으로 쓰겠다는 발상이 멋지다. 달할라에 도착하니까 입구엔 나비부인, 라트라비아타 등 오페라 포스터가 붙어 있다. 안에 들어가니까 더 멋지다. “천정은 하늘, 벽은 바위인데 어떤 울림이 나올까? 이런데 오면 음향을 실험해 보고 싶은 것이 음악 하는 사람들의 생리다. 내가 매니저에게 허락을 받고 무대에 가서 노래를 했는데 음향(Acoustics)이 너무 훌륭하다.

▲달할라 무대

▲4천 좌석에 윤영선, 홍승희, 강승희, 하호정과 저 뒤에 관광객 30여명이 청중 전부이었다.

▲달할라(렉산 Leksand) ▲3억년 전 운석으로 생긴 웅덩이를 음악 홀로 쓰고 있다.
2008년 유럽바둑대회(EGC)가 랙산에서 열렸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많이 갔다. 그런데 다녀온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아무도 달할라에는 가보질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왜 안 갔느냐고 하니까 그 중 내 제자가 “교수님, 거기는 바둑으로 갔기 때문에 관광은 일부러 안 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가 나에게 구박을 받았다. “인간은 정신세계를 살찌우고 문화수준을 높일 기회가 오면 그걸 잡아야지 바로 옆에까지 가서 안 간 게 자랑이냐? 그게 얼마나 소중한 기회인데” 하니까 내가 선생이라 그런지 더 이상 대꾸를 안 하고 쑥 들어간다.
<오슬로(Oslo)를 향하여>
다음 날 새벽. 우리는 오슬로를 향해 떠났다. 가도가도 숲만 계속 된다. 그러다가 몇 백 km만에 마을이 하나씩 나타난다. 호주와 상황이 비슷하여 나에겐 익숙하다. 우리 일행은 “무슨 나라가 이렇게 텅 비어 있어요?” 하며 놀란다. 유럽 다른 지역에 비해서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인구밀도가 희박하다. 노르웨이도 한반도 보다 1.7배 정도 큰데 인구는 5백만 명이다. 마을이 나타나면 우리는 그 곳에서 식사, 화장실, 주유를 해결했다.
우리는 오후 늦게 오슬로에 도착했다. 오슬로 수도권 인구는 145만 명, 전쟁, 화재로 여러 번 파괴되었으나 그때마다 다시 복구되었다. 도심지도 서울과 달리 한적한 분위기다. 강을 끼고 달리는 계곡 드라이브가 아름답다. 새너스는 이 날 밤에나 오슬로에 도착한다. 우리는 오슬로 시내를 구경하고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에야 그와 통화가 되었다. 새너스가 전화로 알려 주는 대로 길을 따라 운전했더니 한 시간 후쯤 그의 집에 도착한다.

▲옛 건물이 많은 크리스티아나 광장 ▲에커스후스 요새

▲우리가 걸어 다닌 궁(宮) 서쪽 거리 ▲자전거 빌려 주는 곳

▲항구 ▲바이킹 전통가옥
새너스의 집에 들어 갔더니 한국 바둑 책이 책장에 많이 꽂혀있어 우리를 놀라게 한다. 그가 자기는 한글은 못 읽어도 그 책으로 공부한다고 한다. 우리도 서둘러 바둑서적을 영역(英譯)을 해야겠다. 새너스는 이곳 지질연구소의 운석(Meteorite) 연구원이다. 우리는 첫 날 새너스와 차를 마시며 천체, 우주, 블랙홀, 바둑에 대해 대화를 한 후 내일을 위해 일찍 잤다. 새너스가 나에게 자기 침대를 내주고 나머지는 매트리스를 깔고 바닥에서 잤다. 우리는 이틀 동안 이 집에서 잔다. 아침이면 새너스가 빵으로 아침을 만들어 주었다. 홍승희(바둑TV프로듀서, 아마 4단)는 부엌엘 들어가서 열심히 구경도 하고 돕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이 재미있는지 계속 웃는다. “너 혹시 저 친구가 마음에 있니?” 하니까 “아니요” 하고 펄쩍 뛴다. “그냥 서양 부엌이 신기해서요” 한다.

▲ ‘박물관 반도’라고 불리는 비그도이(Bygdøy). 콘티키 박물관도 여기에 있다
<콘티키와 뭉크 박물관>
다음 날 아침 새너스는 출근하고 우리는 내가 보고 싶어 하던 콘티키 박물관에 갔다. 주위에 박물관이 여럿 있다. ‘박물관 반도’라는 지역이다. 콘티키 박물관에서 헤이어달 교수가 얼마나 위대한 모험가였는지 나는 다시 한번 실감했다. 내가 1975년 멜본 대학원에 있을 때 일이다. 다른 원생들이 나에게 “헤이어달 교수 강연회에 가자”고 한다. 내가 “헤이어달이 누구냐?”고 하니까 “콘티키 저자” 라고 한다. 내가 “콘티키가 뭐냐?”고 하니까 서로들 쳐다보며 “세상에 헤이어달과 콘티키를 모르는 사람도 있다”며 웃는다. 내가 상식이라면 남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이 친구들이 여지없이 구겨 놓는다. 우리나라에는 당시 콘티키가 소개되지 않았을 때였다.
다음은 콘티키를 읽고 내가 간추린 내용이다.
<콘티키(KONTIKI)>
헤이어달(Thor Heyerdahl 1914 - 2002)은 잉카(Inca)인이 폴리네시아로 진출한 걸 증명하기 위해 1947년 3개월 반 동안 ‘콘티키’란 이름의 뗏목(Raft)을 타고 8천km 이상을 항해한다(콘티키는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헤이어달은 어려서 잉카의 태양 신 비라코차(Viracocha)의 신비한 전설을 읽고 잉카문화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다. 이런 배경이 그를 인류학자(Anthropologist)가 되게 한다. 그는 비라코차의 원래 이름이 콘티키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콘티키’가 ‘카리’라는 추장의 공격을 받아 태평양 건너 사라졌다는 전설도 듣게 된다. 헤이어달은 남태평양제도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콘티키가 그 곳에서 시조로 받드는 태양의 아들 ‘tiki’와 같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또 태평양 해류가 언제나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것도 알았다.
그가 학회에 나가 남태평양 제도의 원주민 폴리네시안(Polynesian)이 1천 5백 년 전쯤 동남아시아에서 왔다는 기존학설을 우선 부인했다. 역류로 항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은 오히려 페루에서 왔다고 주장했다. 뉴질랜드를 포함한 태평양 제도가 태양중심 문명으로 남미의 잉카유물과 공통점이 많은 점을 강조했다. 신의 이름도 콘티키로 같다는 점을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잉카로부터 이주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누구도 페루에서 남태평양 제도까지 갔다는 그의 이주설을 믿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 당시 잉카제국의 해상교통수단은 뗏목 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그럼, 뗏목으로 8천 km가 넘는 거리를 항해했다는 말이냐”는 질문에 답이 막힌 헤이어달은 학회에서 웃음거리가 된다. 열 받은 그는 자기의 학설을 증명하는데 ‘올인’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먼저 뉴욕으로 간다. 그는 뉴욕 선원클럽(Seamen’s Club)에 몇 개월간 출입하면서 선원들로부터 태평양과 항해에 대해 정보를 얻는다. 그는 목숨을 걸고 모험을 같이 할 동료 5명을 어렵게 구한다. 그들 6명은 페루 쿠스코에 잉카시대 뗏목을 만들러 갔다. 고원지대에만 있는 발사(Balsa)나무, 나무껍질로 만든 밧줄, 전통방법의 접착제를 썼다. 뗏목은 1521년 잉카제국을 멸망시킨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그린 뗏목 그림을 보고 그대로 만들었다.
그들은 그 뗏목으로 페루의 카야오 강에서 출발하여 항해를 시작한다. 이런 원시적인 뗏목을 타고 태평양횡단을 하는 건 자살행위라고 주위에서 말렸다. 당시 언론에서는 ‘발사나무는 속이 비어 있어 한달 내로 속에 물이 차서 가라 앉을 것이다’ ‘뗏목을 묶은 밧줄이 파도에 흔들릴 때마다 마찰에 못 이겨 2~3주 내로 끊어져 12미터 나무 9개가 따로따로 바다에 떠 돌아 다닐 것이다’ 등의 예측기사를 실어 이들 항해에 찬물을 껴 얹었으나 이들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물은 잉카인들처럼 대나무 속에 저장했다. 대나무 사이에 구멍을 뚫고 물을 넣은 다음 끝은 송진으로 막았다. 이 대나무들은 뗏목에 매달아 스스로 뜨게 했다. 그들은 발사 나무로 만든 뗏목을 타고 아무도 결과를 알 수 없는 항해를 떠난다. 이 무모한 시도는 당시 세계적인 뉴스거리가 된다.

▲콘티키(Kontiki)
그들은 항해과정 중 20m가 넘는 파도를 만나 자신들을 밧줄로 뗏목에 묶어 두었는데 높이 떴다가 바다 속 깊이 곤두박질을 반복하는 동안 모두 기절했다. 죽은 줄 알았는데 깨어보니까 주위가 햇빛이 쨍쨍한 고요한 바다로 변해 있는 경험도 한다. 이 외에도 폭풍,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늘과 바다에 그들은 용기와 기지로 대처해 나간다. 또 고래상어, 도깨비 눈 고등어, 날라 다니는 오징어 등을 최초로 본다. 한번은 큰 고래가 뗏목 밑에 딱 붙어 있었다. 고래가 꿈틀하면 뗏목이 날아갈까 봐 숨도 못 쉬고 있는데 다행히 고래가 장난 하듯이 잠수하면서 빠져나가 안도의 숨을 쉰 적도 있었다. 생선 고기 중 돌고래가 제일 맛이 있었다.
이들은 어느 영화나 소설보다 더 무섭고 짜릿한 모험을 경험한다. 나중에 물 문제는 어느 물고기를 잡으면 아가미 옆에 민물이 좀 있다든지, 며칠에 한번씩 비가 온다든지 하여 짠물만으로 둘러 쌓인 바다에서 이들은 용케100일 이상을 생존한다. 뗏목 밑에 달라붙은 플랑크톤만 뜯어 먹어도 비타민 C가 충당되어 괴혈병에 걸리질 않았다. 이들은 102일째 되는 날 남태평양의 투아모토(Tuamoto) 섬에 있는 산호초를 들이 받고 뗏목은 부숴지고 6명은 상륙한다. 이들이 살았다는 뉴스는 전 서양국가들의 정규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방송되었다. 이들은 헬리콥터로 하와이로 와서 곧장 백악관으로 날라가 미국 대통령의 환영을 받는다. 이 항해 일지를 적은 책이름이 ‘콘티키’다. 이 책은 출판된 후 세계 50개국 말로 번역 소개된다.

▲콘티키 박물관 입구(사진: 헤이어달교수)
“국경이라고? 나는 한번도 본 적이 없다. 다만 사람들 마음 속에만 존재한다고 들었다”
헤이어달과 그의 동료 5명의 목숨을 건 모험은 인간의 상상력과 한계를 뛰어 넘은 용기로 칭송된다. 헤이어달 교수는 자기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이런 모험을 했다. 이렇게 용감한 지식인이 또 존재 할 수 있을까? 그는 꿈과 낭만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있다. 콘티키 항해 성공 후에 헤이어달 교수는 학회에 다시 나타난다. 그를 비판하던 학자들이 기립박수로 이 영웅을 환영했다. 그가 이번에 발표할 때는 반론이 전혀 없었다. 헤이어달의 ‘집념의 승리’ 였다. 이 탐험을 다룬 다큐먼타리 영화는 1951년 아카데미 상을 탄다. 헤이어달 교수로부터 영감을 받아 영화 ‘인디아나 존스’는 ‘행동하는 고고학자’를 탄생시킨다.
다음은 항해에 참가한 6인 명단
- 토르 헤이어달(Thor Heyerdahl 1914–2002) 리더. 고고학자
- 에릭 헤셀버그(Erik Hesselberg 1914–1972) 항해사며 미술가. 뗏목에 거대한 콘티키를 그려 넣는다.
- 벵트 다니엘슨(Bengt Danielsson1921–1997) 스웨덴 사회학자. 인간 이주이론을 연구. 스페인어 통역관, 식사 공급책.
- 쿤트 호그랜드(Knut Haugland 1917– ) 라디오 전문가.
- 톨스타인 라비(Torstein Raaby 1920–1964) 무선 연락책
- 허만 바징어(Herman Watzinger 1910–1986) 기술자

▲콘티키 박물관 내부

▲드디어 내가 콘티키 앞에 섰다

▲ 콘티키(Kontiki). 이런 뗏목으로 태평양을 건널 엄두를 냈다니 놀랍다. 이 뗏목 항해에 가져간 현대문명의 이기는 무전기, 칼, 낚시도구, 손목시계, 만년필 등이었다.

▲콘티키 선상 ▲ 제자 홍승희와 김선기

▲갈대 배 ‘라(Ra)’ ▲콘티키의 바닥
콘티키 항해에서 성공한 헤이어달 교수는 갈라파고스(Galapagos Islands) 제도와 이스터 섬(Easter Island) 등도 탐험했다. 1969년에는 고대 이집트 인의 태양숭배사상이 남미까지 전달 됐다는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라마호(갈대배)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하여 남미에 가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다. 다음은 1980년 ‘호주VS뉴질랜드 국가바둑대항전’에서 뉴질랜드 선수들에게서 들은 얘기다. 뉴질랜드의 원주민 마오리(Maori) 족은 하와이쪽에서 내려온 ‘폴리네시안’ 이라는 게 정설이다. 그러나 헤이어달 교수의 영웅적인 모험 때문에 ‘잉카후예 설’에 눌려 주춤하고 있다가 요즘에 와서야 정설로 바뀌었다고 한다.
“나는 목숨을 걸고 뗏목으로 태평양을 건널 용기는 있어도 담배를 피울 용기는 없다” 헤이어달 교수는 말년에 금연운동을 활발히 전개한다. 그는 1911년에 인류 최초로 남극을 탐험한 아문젠(Amundsen 1872-1928)과 함께 노르웨이가 배출한 2대 탐험가로 불린다. 서양에서는 ‘콘티키’가 고등학교, 대학교의 필독 추천서로 자리 잡고 있다.

▲진화설의 보고(寶庫) 갈라파고스 섬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 이스터 섬
우리는 콘티키 박물관을 나와 점심을 먹은 후 시내 반대 편에 있는 뭉크(Edvard Munch 1863–1944) 미술관에 갔다. 표현주의 미술가 뭉크는 사랑,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주제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한다. 뭉크의 대표작 ‘절규(Scream)’는 실존고통을 시각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는 이도 같은 감정을 자아내게 한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 더니 우리가 다녀 간 다음 날인 2004년 8월 24일 복면 무장강도에게 ‘절규’와 ‘마돈나’가 도난 당한다. 우리가 하루만 늦게 갔어도 못 볼뻔했다. 내가 선기에게 “왜 하필 그걸 집어갔니?” 하며 놀렸다. 그 전날 미술을 좋아하는 선기가 그 그림에 가서 만지기 까지 하길래 내가 못하게 말렸다.

▲뭉크 박물관 입구
그 때 내가 “무슨 미술관 보안이 저런 유명한 작품을 만질 수 있게까지 허술하지?” 라고 우리 일행에게 말했다. 그림 도난사건 후 미술관은 10개월 간 문을 닫고 6백만 불짜리 보안장치를 새로 한다. 미화 3백만 불이 넘는 현상금이 걸린 범인은 2005년 5월에 잡힌다. 그런데 그림은 도난 후 2년이 지난 2006년 8월 31일에야 돌아온다. 범인체포 후 1년 이상 더 걸린 이유는 경찰이 발표를 안 해서 아무도 모른다. 미술품은 상하지 않고 잘 보관된 상태로 돌아온다.

▲절규 ▲ 마돈나
<비겔란 조각공원과 바둑클럽 방문>
둘째 날 우리는 새너스의 안내로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조각가 비겔란(Gustav Vigeland 1869-1943) 공원에 갔다. 그의 작품 2백여 점이 전시된 공원시설이 훌륭해서 부럽다. 책에서만 보던 ‘121인의 나체상 오벨리스크’도 실제로 보니까 더 멋지다. 그의 조각작품이 거의가 화강암이고 일부가 동으로 만들었다. 새너스는 저녁에 있을 바둑모임에 가져간다고 바둑세트 두 개가 든 가방을 들고 다닌다. 나무 돌 통만 네 개다. 내가 가방을 들어 보니까 꽤 무겁다. 거기에다가 새너스는 노르웨이 사람 치곤 작다. 우리가 나눠 들자고 해도 막무가내로 두 시간 이상 자기 혼자 들고 다닌다. 우리는 조각공원을 나와서 오후에는 시내관광을 했다.

▲ 비겔란 조각공원

▲ 조각공원 內(내) 꽃밭. 저 가방 안에 바둑세트 두벌이 있다.


▲ Screaming baby

▲ 121인의 나체 오벨리스크

▲ Opera House
저녁에는 이 곳 바둑인들과 교류 전을 갖기 위해 오슬로 대학에 갔다. 바둑모임은 대학교 구내식당(Canteen)을 빌려서 사용하고 있는데 대부분 회원이 이 대학 학생이거나 교직원이다. 오슬로 대학은 1811년에 설립 되었는데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되고 제일 좋은 대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홍경래 난’이 일어 났던 해다. 바둑회원들 실력이 만만치 않다. 우리에게 접바둑이지만 승률이 더 높다. 노르웨이 친구들이 장고를 하는 바람에 밤 늦게야 우리 모임이 끝났다.

▲노르웨이 챔피언 새너스 4단 ▲3단 두 명에게 다면기(오슬로 대학)
새너스가 오늘 우리 안내도 할 겸 저녁 바둑모임 때문에 하루 휴가를 냈다고 한다. 우리에게 최선을 다 하는 새너스가 고맙다. 셋째 날은 아침에 출근하는 새너스와 작별하고 시내에 나가 세일로 파는 물건 두어 개를 샀다. 국토가 좁고 긴 나라 노르웨이는 30%가 북극권에 속해 있다. 북쪽 여름엔 白夜(백야)현상으로 밤이 없다. 백야축제가 멋있다는데 나는 아직 경험을 못해 봤다. 노르웨이는 1905년에야 독자적인 왕을 갖고 입헌군주국이 된다. 그 전에는 덴마크나 스웨덴에 병합되어 있었다. 1970년에 석유가 발견되어 부자가 되어 1인당 국민소득이 곧 10만불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총 길이1,750㎞나 되는 피오르드
‘인형의 집’ 작가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의 다른 작품으로 ‘페르귄트(Peer Gynt)’가 있다. 추운 날씨, 깊은 숲을 배경으로 나온 북유럽의 신화나 전설을 읽으면 우리와는 이질적이라 놀란다. 결과가 너무 잔인하기도 하고 인간속성을 바닥까지 솔직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입센이 노르웨이의 민간설화를 토대로 쓴 환상시극 ‘페르귄트’는 북유럽의 정서를 알아 보는데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여기에 줄거리를 소개한다.
제 1 막: 어려서 부친을 잃은 페르귄트는 편모 슬하에서 자란다.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게으름이 몸에 밴 그는 허황된 꿈만 좇는다. 모친 오제의 살림은 말이 아니다. 그는 솔베이그라는 연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마을 결혼식에 나가서 다른 남자의 신부 잉그리드를 빼앗아 산속으로 달아난다.
제 2 막: 페르귄트는 얼마 되지 않아 잉그리드를 버리고 산중을 방황하다가 푸른 옷을 입은 아가씨를 만난다. 곧 눈이 맞아서 그녀 부친 있는 데로 간다. 그녀는 마왕의 딸이었다. 마왕이 페르귄트에게 그의 딸과의 결혼을 강요하므로 그는 놀라서 그곳을 빠져 나오려 한다. 마왕은 화가 나서 부하인 요괴를 시켜서 그를 죽이려 든다. 그때 마침 아침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린다. 마왕의 궁전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페르귄트는 살아 돌아온다.
제 3 막: 산에서 돌아 온 페르귄트는 잠깐 솔베이그와 같이 산다. 어느 날 모친 생각이 나서 어머니가 살고 있는 오두막으로 돌아온다. 모친은 중병으로 앓다가, 아들을 본 후 운명한다. 모친을 잃은 페르귄트는 다시 모험을 찾아 해외로 떠난다. 그는 빚 독촉을 받으나 최후까지 영혼을 팔아 넘기지 않았기 때문에 살아 남는다.
제 4 막: 각지를 돌아다니는 동안에 큰 부자가 된 페르귄트는 어느 날 모로코 해안에 닿는다. 그러나 사기꾼에게 걸려서 빈털터리가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언자 행세를 하여 거부가 되어 아라비아로 들어간다. 거기서 베드윈족 추장의 파티에 초대된다. 페르귄트는 추장의 딸 아니트라의 춤과 미모에 빠져 다시 전 재산을 탕진한다.
제 5 막: 그 뒤 페르귄트의 생활은 여전히 파란만장. 마지막에는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으로 큰 부자가 된다. 이제 늙어버린 페르귄트는 고국의 산천이 그리워서 그 동안에 번 제물을 싣고 귀국길에 오른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육지를 눈앞에 두고 풍파를 만나 그의 배는 재물을 실은 채로 물에 갈아 앉아 버린다. 다시 무일푼이 된 페르귄트는 거지나 다름없는 꼴로 산중 오두막에 다다른다. 그곳에는 이미 백발이 된 솔베이그(쏠베지)가 아직도 페르귄트를 기다리고 있다. 페르귄트는 그녀를 껴안고 “그대의 사랑이 나를 구해주었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 쓰러진다. 늙고 인생에 지친 백발의 페르귄트는 솔베이그의 무릎을 베고 그녀가 부르는 자장가를 들으면서 그의 인생을 마감한다.
국민음악가 그리그(Edvard Hagerup Grieg 1843–1907)는 입센의 작품을 토대로 모음곡인 ‘페르귄트 조곡’을 작곡한다. 입센과 그리그. 이 두 명이 서쪽도시 베르겐(Bergen)에서 활동한다. 나는 이번 여행에 베르겐과 북부에 있는 세계 최대의 피오르드를 못 가본 아쉬움이 남았으나 언제나처럼 중얼거렸다. “다음에 와서 가기로 하지”
☞듣기: http://kr.blog.yahoo.com/jjh1512/13789.html?p=16&t=2)

▲입센(Henrik Ibsen) ▲그리그(Edvard Grieg)

▲베르겐
10불 내기 바둑
1982년에 노르웨이가 세계바둑대회에 첫 출전한다. 레오(Leo Solleveld) 초단이 챔피언이다. 세계대회에서 80년대 초 내가 그와 두어 봤는데 치수는 5점으로도 그가 잘 안 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와는 잊지 못할 일이 있다. 나와 캐나다 챔피언 백준기씨가 10불 내기 바둑을 두고 있을 때다. 중반 무렵 내가 10집 이상 유리했다.
그 때 구경꾼 중 한명인 레오가 갑자기 간질병이 발작해 바둑판으로 쓰러지질 않는가? 나는 우선 그의 가슴을 한 손으로 막고 옆 사람들에게 그를 잡으라고 했다. 그 때는 내가 유리한 바둑판이 흩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무도 선뜻 그를 안 잡는다. 옆에 있던 미국 챔피언 김진우씨는 몸무게가 100kg이 넘는 거구다. 내가 그에게 “빨리 이 사람을 잡으라”고 소릴 질렀더니 마지 못해 잡는다. 덩치에 비해 겁이 많았던 것 같다. ^^
그 바둑은 내가 집중력을 잃었는지 큰 실수를 했으나 운 좋게 반 집을 이긴다. 10불을 쥐고 웃고 있는 나에게 한국계 챔피언들이 “환자 보다 돈 10불에 눈이 어두운 교수님 행동에 놀랐습니다” 하면서 이죽댄다 ^^ 당시 세계대회에 참가한 한국계 챔피언은 한국, 호주(필자), 미국, 캐나다, 스웨덴, 브라질 등 6 명이었다. 그들이 나를 ‘한국계 챔피언 팀’ 단장으로 뽑아 우리는 오사카의 관서기원, 일본 서해안 지방으로 열흘 간 여행을 같이 하게 된다. 그 날 밤 레오가 나를 찾아와 “미안하다”고 하길래 나는 아무 말 않고 그를 포옹하고 등을 두드려 주었다. 이번에 노르웨이에 오니까 그가 안 보인다. 물어보니까 “외국에 있다”고 한다.

▲피오르드 2

▲피오르드 3 ▲피오르드 4
1) 바둑역사
베르겐 대학에서 1976년에 처음 바둑을 두기 시작한다. 노르웨이 바둑협회(Go i Norge)는 1977년에 설립된다. 78년에 첫 전국 바둑대회가 남쪽 해안 도시 릴레산(Lillesand)에서 열린다. 이 무렵 오슬로 클럽을 비롯 7 개의 클럽이 전국에 생긴다. 초기 20년 간은 일본대사관, 미스비시 같은 대기업이 후원을 해 주는 덕에 노르웨이 바둑은 성장한다. http://goinorge.no/history.html
2) 회장단
테리 크리스토퍼슨이(Terje Christoffersen)이 2009년 협회가 재편 될 때까지 오랫동안 협회장으로 일을 한다. 현 회장은 오프스타드(Morten Ofstad)이고 재무는 베스트가르덴(Øystein Vestgården)인데 두 명 다 우리가 오슬로 대학에 갔을 때 우리와 같이 바둑을 두던 사람들이다.
3) 바둑인구
유럽대회 등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인원이 34 명이다. 그 나라의 바둑인구는 유료회원(Paid members)의 10 배로 잡는 게 보통이다.
4) 클럽
오슬로(Oslo), 스타방게르(Stavanger), 트론헤임(Trondheim), 베르겐(Bergen) 등 4대 도시에 바둑클럽이 있다.
5) 대회
두 개의 주요 대회가 있다. 4월 부활절 후 봄철에 여는 ‘오슬로 오픈’과 10월 말 가을에 여는 ‘노르웨이 챔피언대회(Norwegian Championship)’다. 2009년 세너스는 오슬로 오픈과 노르웨이 챔피언전 둘 다 우승한다. 4년에 한번씩 북유럽대회(Nordic Championship)를 4 나라가 돌아가며 개최한다. 4 개국은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이다. 2010년과 2014년에 노르웨이가 개최한다.

▲ 오로라(Aurora) - 하늘이 신비하게 변화한다.
6) 강자
현재 최강자는 중국계 지에린 샤(Xia Jie Lin) 5단이다. 그는 지난 4년간 챔피언 자리를 지켰다. 그이 누이 동생 지에리 샤 3단은 여류최강이다. 2위는 새너스(Pål Sannes) 4단이다. 그는 1986년 처음 챔피언이 된 후 20여 년 간 유럽대회의 단골 참가자다. 우리가 갔을 때는 새너스가 기분전환으로 미국대회에 참가하고 오는 길이었다. 3위는 플루드(Jostein Flood) 4단인데 새너스의 강력한 라이벌이다. 4위는 현 회장 오프스타드(Morten Ofstad) 4단이다.
7) 기도보급
오슬로 클럽이 일본문화 ‘하나미’ 축제일에 학생 바둑대회를 열고 있다. 장소는 역시 일본 소유의 ‘아니메’ 센터에서 개최한다.
8) 바둑 캠프, 세미나
한, 중, 일에서 프로기사가 올 때마다 바둑행사를 갖는다. 2008년에 중국 프로 리앙(Li Ang) 3단이 와서 지도다면기와 강의를 베르겐에서 했다. 2009년에는 중국 아마 5단이 쑤양(Su Yang)이, 2010년에는 역시 중국 프로 3단 류유안보(Liu Yuanbo)가 와서 보급행사를 가졌다.

▲노르웨이 마스터스 2010 년 10월 ▲ 준결승에 오른 새너스 4단

▲2010 오슬로 오픈 ▲오슬로 오픈 결승(새너스 4단 VS 샤 5단)
9) 출판물
1992년부터 북유럽 뉴스레터(Nordic Go magazine)를 스웨덴 혼자 계간지로 발행하다가 1998년부터 노르웨이와 공동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편집인(Björn Wendsjö)이 그만두자 후임자가 없어 현재는 휴간 상태다. 나도 2003년에 러시아 상페테르부르크에서 이 계간지와 장시간 한국바둑에 대한 인터뷰를 가진 일이 있다. 노르웨이 바둑역사에 기록된 한국인 방문은 우리 일행뿐이다. 다음은 그 기사다.
‘In August, a team of Korean amateurs visit Oslo as part of a roundtrip in Northern Europe, and plays a friendship match against players from Oslo Go Club. The Korean team is headed by Hahn Sang-Dae, professor at the MyongJi University, at present the only university in the world providing Go as a study.’

▲서부 노르웨이

▲국기/국장
가끔 프로기사 중 “어느 나라나 1인당 소득1만 5천불 이상 넘어가면 바둑인구가 줄기 시작한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바둑인구가 줄고 있고 선진국에 바둑보급은 헛수고다”. 라는 얘기를 한다. 어디에다 근거를 두고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그 이론대로라면 9만 불의 노르웨이 같은 국가는 아예 보급할 생각을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질 않는다. 보급하는 방법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선진국에 맞는 처방이 있고 그 걸 우리가 찾으면 성공이 꼭 따를 거다.
나한테 ‘未知(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한 세계 곳곳에 내 발길이 계속 닿을 것이다. 바이킹, 오로라, 백야, 피오르드의 나라 노르웨이를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스웨덴, 덴마크를 거쳐 독일로 간다. 거기에 있을 ‘새로운 만남’을 위해서 나는 오늘도 설레는 마음으로 떠난다.

▲스칸디나비아 지도. 왼쪽 노란색이 노르웨이
한상대(전 시드니대학 교수 sdha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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