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젬스페셜]
따뜻한 바둑세상 만들기
(주)알룩스 백정훈 회장
김종서 작가2011-02-03 22:37:04
타이젬은 바둑지도를 그리기 위해 후원자 시리즈를 연재 중이다.
설 연휴를 맞이해 바둑을 아껴 다양한 형태로 바둑계에 기여하고 참여하는 인물들을 매일 소개하고자 한다.
2월 2일(수) - 지지옥션 강명주 회장
2월 3일(목) - (주)알룩스 백정훈 회장
2월 4일(금) - 나남출판사 조상호 사장

S#1. 바둑동네 분당을 위하여
초저녁 성남시 분당의 한국기원.
기원 경기 썰렁하다는 말이 무색하리만큼 사람이 많다.
한때 아마추어 바둑계에 강펀치의 소유자로 이름을 날렸던 강영일 7단이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그가 운영하는 기원이라 그런지 손님 중에 강자들이 많았다.
임동균, 김동섭, 심우섭 7단을 비롯해 분당지역 애기 가들이 결성한 분당기우회의 베이스캠프가 바로 이곳이다.
지자체 바둑협회도 아닌 일반기우회가 전국 규모의 바둑대회를 해마다 개최하는 곳은 아마 분당 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대회예산 규모는 대략 3천만원.
대회가 열릴 때마다 바둑계의 거목(김인, 조훈현, 서봉수, 최규병, 양재호)들을 차례로 초청해 영접하고 아마추어들과 소통하는 기회를 만든다고 한다.
분당기우회 백정훈 회장은 손님들 틈에 끼어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는 초대 성남시 바둑협회장을 맡아 이끌다 지금은 그보다 규모가 작은 분당기우회장으로 바둑 양산박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이다.
연매출 300억에 달하는 자동차 휠 생산업체 (주)알룩스의 오너로 그 쪽 업계에서는 ‘마이더스의 손’으로 통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바둑 쪽에 절대 회사 이름을 걸지 않는다.
철저하게 그 자신의 이름으로 활동한다. 개인의 취미생활이므로 바둑으로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개인이 써야 옳다는 철학이다.

▲ 백정훈 회장. 현재 분당기우회장으로 기우회장배 바둑대회를 열고 있다.
“아이고, 후원자라니요? 저는 후원자가 아니라 그냥 애기가일뿐입니다. 공식적으로 쓰는 돈이 없어요. 분당기우회장배 바둑대회도 우리 기우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기금으로 운영합니다.”
백정훈 회장은 그런 의미에서 인터뷰를 사양했다.
그냥 편한데 가서 술이나 한잔 나누자고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기우 한 사람이 거든다.
“하하 맞긴 맞습니다. 회원들이 모으고 부족한 만큼 회장님이 채우십니다.”
백정훈 회장의 스타일은 으레 그런 식이다.
공식보다 비공식을 선호하고 그저 바둑과 바둑 인들이 좋아 여유 있는 만큼 바둑마당의 멍석을 까는데 들어가는 비용을 표시나지 않게 지불하는 쪽이다.
1946년생으로 올해 65세.
그가 바둑 후견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서른 살 때부터였다.
70년대 당시 고향의 포항에서 제철화학 과장으로 일할 때 포항기우회장을 맡으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월급쟁이지만 바둑모임에 지갑 여는 걸 아끼지 않아 기우회가 활성화되었다.

▲ 포항 출신의 백정훈 회장. 영덕게와 과메기를 즐겨 먹는다.
지역의 기우회지만 행사에 프로기사들을 초청해 자리를 자리답게 연출했다.
한 번 알게 된 바둑 인들과는 인연의 끈을 놓지 않고 이어와 지금은 바둑계에서도 마당발로 통할 정도다.
많은 바둑 인들과 격의 없이 호형호제하며 어울리길 좋아하는데 몇 년 전부터 사업과 바둑만 즐기기로 결심한 뒤 퇴근하면 무조건 분당의 기원으로 달려와 여가를 즐기고 있다.
“좋잖아요. 바둑 두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심성이 맑습니다. 경제계 사람들은 계산이 밝아 사교에도 물밑에서 수읽기가 치열하지요. 그러나 바둑동네 사람들은 반상에서 싸우되 밖에서는 따뜻하잖습니까? 그게 너무 좋아요. 낮에는 회사 일에 몰두하고 밤에는 바둑으로 스트레스를 풉니다. 이런 노후의 인생을 늘 꿈꿔왔거든요.”
그의 기력은 타이젬 6단. 꽤나 짱짱한 실력인데 방내기에 일가견이 있어 싸움바둑으로 알려져 있다.
S#2. 브랜드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
이튿날 토요일이었다.
강남의 한일바둑판 전시장인 일품기원에서 백정훈 회장을 다시 만났다.
경북고 동창들의 바둑모임이 있었는데 역시 그가 멍석을 깐 자리였다.
“판사, 변호사 출신 동창들이 꽤 많지요. 지금은 은퇴해서 시간 여유가 있어 그런지 많이들 모였네요.”

▲ 경북고 동문 바둑대회.
한 기수 바둑 모임이라는데 얼추 서른 명 가까이 모인 듯싶다.
백 회장의 초청으로 김영환 9단이 찾아와 동창들과 지도대국을 나누었다.
바둑 두는 사람들로 가득 찬 기원 풍경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분당에서도 그렇고 서울에서도 그렇고 백 회장이 움직이는 곳에 바둑 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이 시대에 결코 쉬운 일은 아닌데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다.
그는 중심을 사양하면서도 중심이 되어 작은 바둑사회들을 가꿔가고 있었다.
인터뷰 도중에 어디로부턴가 전화가 걸려와 통화를 하는데 수첩을 보면서 스케줄을 확인하곤 했다.
옆에서 힐끔 수첩을 훔쳐봤는데 깨알 같은 글자들이 계가를 마친 바둑판처럼 빼곡하고 정연하게 적혀 있었다.
일일금전출납현황과 시간약속, 그리고 알 수 없는 암호들이 가득했다.
- 이 글자들은 뭔가요?
“하하 오페라 축배의 노래 가사입니다. 입에 완전히 붙게 한글로 발음 그대로 적었지요.”
부끄러운 듯 일부러 호탕하게 웃는다.
언젠가 대기업 사장으로 재직할 때 일본의 닛산자동차에 영업차 방문했는데 중역들과 회식자리 가라오케에서 오페라 한 곡을 시원하게 뽑아 환심을 샀고 마침내 200억 짜리 계약을 성사시킨 적 있다고 했다.
그 일화가 바로 그의 지론인 ‘브랜드 가치창출’과 관계있다.

▲ 동문바둑모임에 김영환 9단이 초청되었다. 백정훈 회장이 대국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바둑과 바둑인, 바둑대회 모든 것이 브랜드라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브랜드의 가치를 높여야죠. 사업상 술자리에서 노래를 한 곡 하더라도 가창력이 천부적으로 뛰어나지 않다면 선곡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겁니다.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없는 노래, 한 번 들으면 귀에 팍팍 꽂히고 중독성 강하게 울리는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이상하게 흥미로워 보이거든요.”
그래서 그는 후배 바둑 인들을 만날 때마다 ‘브랜드 론’을 외친다.
모드 바둑 인이 각자의 재능과 성품에 맞게 브랜드를 특화하고 활동하다 보면 파이가 저절로 확장된다는 이야기다.
샐러리맨으로 출발해 기업의 오너가 된 입지전적의 인물 백정훈 회장의 성공담 역시 그런 철학의 기반이 있기에 가능했으리라.
포항에서 자라 경북고,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나온 그는 삼성그룹의 TBC에 엔지니어로 입사했다.
그런데 PD쪽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사표를 쓰고 말았다.
다음 직장은 대한석유공사(현SK), 당시 명함만 내밀면 아무 가게에서나 외상을 주고 딸까지 주겠다던 직장이었지만 전자직에서 2년을 근무하다 현대중공업으로 스카우트됐다.
아파트 한 채를 받고 이적했다니 꽤 능력 있는 전문가로 추정된다.
그곳에서 대형선박을 만들다 다시 제철화학의 계측제어 담당으로 옮겼다.
그 회사를 대우에서 인수해 GM과 합작으로 자동차 부품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샐러리맨 백정훈은 과장, 차장, 부장을 거쳐 공장장 겸 이사로 고속 승진한다.
그 다음 한국타이어로 이직해 전무를 맡아 탁월한 영업성과를 올리고 자동차 휠 생산업체인 ASA 사장이 되어 대우, 기아, 쌍용자동차와 르노 닛산 다이하쯔 등에 자동차 휠을 대규모 납품해 세계적인 회사로 키웠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을 두루 횡단하면서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면서 가는 곳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히 입증시킨 백정훈의 노하우는 역시 ‘브랜드 가치’에 있을 것이다.
S#3. 바둑동네가 따뜻하다
백정훈 회장은 마음이 통하는 바둑 친구 앞에서 달변가로 변한다.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언어를 추스르다 보면 그 안에 번뜩이는 뭔가가 있다.
“얼마 전에 라스베이거스 모터쇼에 가서 대형공연을 봤습니다. 수천 명이 들어 찬 극장이라 소란스러웠는데 사전에 삐에로가 나와 슬랩스틱 몸 개그를 선보였습니다. 그 순간 모든 관중들이 무대로 몰입했지요. 그리고 메인 공연이 시작됐습니다. 우리 바둑대회에도 그런 아이디어를 도입했으면 좋겠어요.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주목!’을 외칠 게 아니라 사전에 모든 이들의 눈을 집중시킬 수 있는 이벤트를 선보인 후에 막이 열리고 초대한 프로기사를 소개하는 순서로 넘어가는 거죠.”

그런 마음이 간절해 아끼는 바둑인 후배를 미국 여행에 데리고 가기도 했다. 바둑 인들도 다른 세계를 보고 광각(廣角)의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는 거였다.
“현재 분당기우회장배 바둑대회는 시니어들을 위한 잔치입니다. 올해부터는 시니어 프로기사들을 초청해 프로아마 오픈전으로 확대해볼까 합니다. 물론 상금도 대폭 올려야 할 테고 한국기원과 협의해야 하겠지만 운영의 묘를 살리고 의지가 있다면 어떻게든 진행되리라 믿습니다.”
백정훈 회장이 아마바둑사랑회 신년 모임에서 던진 인사말이 귀에 들어온다.
그가 바둑의 후견인으로 열심히 뛰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저 바둑이 좋고 바둑동네가 따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크게 얻을 명예도 없고 부귀 또한 없을 터.
19로 안에서 지혜를 겨루고 수담을 통해 인간끼리의 체온을 나누는 것만으로 족할 뿐이다.

지난해 아바사 바둑대회가 송추계곡에서 열렸다.
마침 장마철이어서 폭우가 쏟아져 내렸는데 참가한 수십 명의 아마기사, 명사들 중 축축히 젖은 자리를 불평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백정훈 회장도 선수로 참가했는데 한 판을 끝내고 다음 판을 두기 위해서 계곡을 건너야 했다.
그는 건너편 대국장을 눈으로 확인한 다음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며 뚜벅뚜벅 다리를 건너갔다.
그리고 흠뻑 젖은 채 바둑을 두었다.
바둑에 대한 그의 순정을 가늠할 수 있었던 한 장면.
바둑으로 사람을 불러 모으는 힘을 따진다면 백정훈 회장은 천하장사급일 것이다.
우리 바둑계가 어렵다어렵다 해도 끊임없이 굴러가는 근원에 바로 이런 순정파 애호가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있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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