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바둑사]
러시아의 바둑 르네상스
1975년 잡지에 난 사활문제에 2,500명 응모
한상대 교수2011-03-03 15:47:33

▲바질사원 - 러시아를 짙게 느낄 수 있는 건축물.
1. 전통 건축의 극치 – 성 바질성당
붉은 광장 한편에 우뚝 서있는 러시아 건축의 대표 작품인 성 바질 성당(the Saint Basil Cathedral)은 카잔과 아스트라잔(타타르족)을 합병시킨 기념으로 세워졌다. 내가 직접 가서 보니 규모가 엄청나다.'끔찍한 이반(Ivan the Terrible)'으로 알려진 폭군 이반 4세의 명령으로 1555~1561에 걸쳐 세운 건축물이다. 완공된 후 아름다움에 감탄한 이반 4세는 다시는 이렇게 아름다운 건축물을 못 짓게 하기 위해 건축가들의 눈을 뽑아 버렸다.

▲9 개의 다른 모양의 탑 / 전통 무늬의 내부
불꽃 모양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이 성당은 비잔틴 문명의 영향을 받았다. 988년 키예프공국의 블라디미르 1세가 동로마 제국에서 파견 나온 성직자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정교회는 러시아의 국교가 된다. 블라디미르 대공은 어느 종교를 믿을지 몰라 신하들과 논의 끝에 러시아인 기질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동방정교회로 정했다.
러시아는 비잔틴 동방정교회를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서 동로마제국의 비잔틴문명을 전수받게 된다. 이것을 바탕으로 러시아는 독자적인 문화의 꽃을 피운다. 러시아에 파견되었던 성 키릴루스 형제가 키릴문자를 발명하여 러시아는 문자도 갖게 된다. 프로기사 스베타가 명지대 내 교실 강의를 들을 때 하루는 그녀에게 “키릴문자로 네 이름을 써보아라” 했더니 곧 칠판에 나와 자기 이름을 쓴다.
2. 10분의 1 평가절하
소련에 입국하려고 영사관에 갔을 때 소련영사는 이렇게 말한다.“우리 정부는 11월 1일부로 루블화를 10배 평가절하 한다. 당신의 행운을 축하한다” 미화 10달러로 6루블 밖에 못 바꾸던 것이 갑자기 60루블을 받게 되었으니 기막힌 일이 아닌가. 여행비나 쇼핑이 10배 싸졌다. 저 유명한 소련제 밍크 코트도 1백~2백 달러면 충분하고 1백 달러면 소련일주 여행도 할 수 있다. 나는 흥분 속에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막상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나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평가절하 직후 보석과 털 코트는 물론 모든 물품에‘사재기현상’이 일어났다. 내가 크레믈린 옆에 있는 유명한‘굼’백화점에 갔더니 상점의 90%는 텅 비어 있다. 물건이 있는 상점 앞엔 사람 행렬이 한없이 늘어서 있다. 10배나 평가절하를 했다지만 거리나 시장에선 10달러에 1백 루블이나 바꿀 수 있으니 이것도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련의 발달된 기간산업과 높은 수준의 문화와 예술, 포장은 나빠도 질이 좋은 상품 등 도처에서 강대국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어떤 부분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이곳 소련은 친분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 무소불위의 친분도 소련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건에는 속수무책이다.
▲붉은 광장에 있는 굼(Gum)백화점
그것들은 베리오스카라는 외제상점에 가야만 구할 수 있다. 모스크바에만 약 30개의 베리오스카가 있고 대개는 일류 호텔과 같이 있다. 밍크코트, 보석류, 전자제품에서 담배, 초콜릿까지 없는 것이 없다. 가격은 서방세계의 백화점보다 약간 비싼 편인데 모스크바 시중가에 비하면 12배쯤 비싸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땐 일제 비디오가 가장 많이 팔리고 있었다.
소련인들은 전 서방세계를‘대형의 베리오스카’로 여기는 것 같다. 모든 부족함의 갈증을 해소시켜주는 곳. 그것도 최고급의 질로 꽉 찬 곳이다. 서방세계에 대한 동경심이 그들로 하여금 비싼 달러를 마련하여 베리오스카를 찾아가도록 만들고 있다. 내가 손톱깍기를 사기 위해 거리로 나와 상점, 백화점을 다 뒤졌으나 손톱깍이가 없다. 할 수 없이 베리오스카에 가서 7불이나 주고 샀다.
그런데 나중에 나를 안내해 준 니콜라이는 그 무슨 바보짓이냐며 7달러면 손톱깎이 50개는 살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는 친구가 많아 무엇이든 싸게 사고 외국에 소포도 부칠 수 있고 병원에 가서도 금방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런데 정말 호텔에서 20달러 하는 ‘볼쇼이오페라’ 관람표를 그는 30센트에 사다 주는 것이 아닌가? 국내인을 위한 가격에 비하면 외국인용 가격은 완전 바가지다. 내가 묵는 호텔이 5성급인데 내가 방을 빌리면 하루에 200불이다. 그런데 F회사가 빌려논 가격은 아침식사 포함해서 7불이다. 상 페테르브르크에 가는 침대칸 열차도 내가 사면 1인당 220불인데 니콜라이는 10불 미만에 사온다. 동양적인 인정과 북국의 열정, 그리고 권력에 의해 길들여진 무관심이 뒤엉킨 나라. 이곳 소련에 불어 닥친 자본주의의 바람은 새로운 깨달음과 새로운 탐욕을 마구 뿌려 놓고 있다.
3. 러시아 동포
1937년 만주 러시아 영토에 살던 우리동포들이 강제이주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이 1937년 중일전쟁을 개시하자 당시 소련의 스탈린 정권은 연해주에 있는 한인촌에 일본 스파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론 한인촌에 독립운동자들이 모여 살아 일본인은 발도 못 붙였다. 하룻 저녁 갑자기 러시아 군대가 들이 닥친다. 그들은 한인지도자 2,500명을 불러내어 먼저 총살한다. 불만, 불평을 미리 봉쇄하는 수단이었다.
그리고 18만명 이상의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를 시킨다. 9월에 시작한 강제이주는 한 달이 넘게 계속되었고 시베리아 횡단 화물 열차 속에서 한인들이 얼어 죽어 갔으며 하차한 중앙아시아의 반 사막지대에서 겨울을 나면서 한인들의 5분의 1이 죽어갔다. 당시 그들은 너무 겁을 먹어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후에도“우리가 왜 여기에 왔지?”하는 말조차 서로 물어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우리나라 해외동포사회의‘5대비극’중 하나다.

▲ 고려극장 연극공연 / 고려인 농민
그런 역경을 딛고 살아남은 소련교포는 약 55만 명. 대부분이 우즈베크 공화국 중심으로 중앙 아시아에 살고 있다. 사할린에 5만 명, 그 밖에 도시에 소수가 흩어져 있다. 스스로를‘고려인’이라 부르며 길에서 한국 사람을 만나면“고려인이오?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한다.
이들은 발전된 부자의 모습으로 출현한 모국의 반쪽 남한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남한은 선망의 대상이며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소원을 누구나 갖고 있다. 주분연씨를 만난 곳은 레닌그라드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푸쉬킨타운이었다. 이곳의'여름궁전'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예순쯤 된 부인네가 나에게“고려인입니까? 서울에서 오셨지요?”하고 묻는다. 그는 20대의 아들을 동반하고 있었는데 내가 며칠 후 서울로 돌아간다고 하자 나에게 자기 친척을 찾아 달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그녀는 충청남도 어느 마을에서 9세 때 부모와 함께 떠났는데 마을 모습은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이름은 모른다고 했다. 이모 이름이‘박명숙'인 것 외에는 기억이 없으나 많은 친척이 남한에 있다고 했다. 그녀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했다.
“죽기 전에 한번만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요”라고 말하는 어머니 곁에서 한국말은 못하지만 어머니 사정을 도와달라는 뜻으로 최선을 다해 친절을 보이던 아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주분연씨와 아들 정춘삼씨
레닌그라드 안내를 맡아준 정춘삼씨(64. 모스크바 방송 조선어 방송원)는 소련서 태어난 3세로 소련 이름이 텐발렌틴. 모스크바 대학시절부터 조선어를 배웠다는데 우리말이 유창하다. 레닌그라드 시내에서 식사를 할 때 나는 그에게 우리나라 TV가 중국 길림성 작곡가 한영수씨와‘아리랑'을 취재했던 얘기를 소일 삼아 해주었다. 만주의 우리민족이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아리랑, 그리고 한영수씨가 서울에 와서 울면서 KBS 관현악단과 아리랑을 지휘한 얘기를 하고 있는데 정선생이 갑자기 오열을 터트린다. 식당 손님들의 시선도 아랑곳 않고 그는 한동안 흐느낀다.
한국에 한 번도 안 가본 그에게 이렇게 짙은 민족감정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내가 러시아인과 의견충돌이 생기면 정선생은 자기 일처럼 나서서 그 사람에게 언성을 높이며 날 보호한다. 소련 이름이 오가이 유벤나리인 오선생(55. 레닌그라드 조선문화원 근무)은 한국이름 조차 없다. 이민초기에 소련관리가 “당신 성이 뭐냐”고 물었을 때 “오가 입니다”“최가 입니다”등으로 대답했고 이것을 이민성 관리는 “오가이(OGAI)”“최가이(CHOIGAI)” 등으로 받아 적어 성이 그렇게 등록돼 버린 것이다.
오선생은 러시아의 엘비스로 불리는 빅토르 최(Viktor Tsoi)의 아버지 막심 최와 같이 나를 찾아왔다. 최선생이 자기의 27세된 아들이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가수인데 한국에 불러 달라고 한다. 내가 한국에 와서 신문사 몇 군데 연락했으나 대부분 그의 지명도를 모르고 있어 선뜻 스폰서가 되겠다고 안 나선다.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데 다음 해에 빅토르가 28세의 나이로 아깝게도 교통사고를 만나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의 무덤에는 아직도 팬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 빅토르 최 팬들의 추모행렬이 아직도 끊이지 않고 있다
오선생도 망향의 설움이 조금만 자극 받으면 정선생 이상으로 분출되곤 한다. 그가 부인, 누이동생을 대동하고 기차역에서 영하 15도의 추위도 상관하지 않고 한 시간 이상 조국 얘기에 열을 올린다. 소련의 오랜 세월에 걸친 소수민족방해정책. 그리고 해외동포 문제를 전담하는 정부기관 하나 없는 우리나라의 해외동포 정책 속에서도 그들은 뿌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이 가진 짙은 민족감정이 나까지 비감에 젖어들게 한다.

▲ 열악한 환경에서도 높은 교육열을 보이는 우리 민족(초기 고려인)
나는 소련에서 많은 북한동포들을 만났다. 그러나 인사만하면 도망가버리기 때문에 변변히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모스크바 칼리엔스키 거리의 백화점에서 김일성 배지를 단 3명을 만났을 때 나는“왜 도망을 가느냐, 여긴 소련이니까 남한사람을 겁낼 필요 없지 않느냐”고 대뜸 항의부터 했다. 그들은 "우리가 왜 도망갑니까 우린 떳떳합니다. 누구나 반깁니다"한다. "그럼 식사나 같이 할까요? 제가 모시죠” 했더니 “우리 대사관에서 잘 차려주어 식사는 거기서 합니다”는 대답으로 피한다.
마산의 S무역회사 박사장과 붉은 광장 옆에서 북한동포 30여명을 단체로 맞닥뜨린 일이 있다. 내가 그들에게 말을 걸자 박사장이 소매를 잡아 끈다. 그의 얼굴은 완전히 겁에 질려있고 눈빛은 완강히 거절을 나타내고 있다. 나중에 박사장은“아이고 북한 사람들이 그렇게 몰려있으니까 추워서 혼났습니다.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이 소련 천지에서 어떡합니까” 하고 십 년 감수했다는 태도다.
나는 그들만 남한사람을 피하는 줄 알았으나 남한 쪽도 마찬가지였다. 두 쪽으로 쪼개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반공(反共)과 반제(反帝)를 극명하게 경험해 온 민족은 지구상에는 우리 민족 밖에 없을 것이다. 소련에서 나는 두 개의 상반된 에너지가 합해지면 만들어 낼 시너지 효과를 마음 속으로 그려 보곤 했다. 민족의 정이 그토록 깊은데 우리는 서양인들이 만들고 서양인들이 버린 이념의 허울을 왜 아직도 뒤집어 쓰고 으르렁거릴까? 같은 민족이 외국에서도 서로 피한다. 우리는 언제쯤 독일처럼 될까? 이념이란 버리고 나면 한낱 쓰레기와 같은 것인데……
내가 레닌그라드 역에서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를 탈 때 오(吳)가이 선생은 나에게 말한다. “백야제가 6월에 열립니다. 꼭 한번 오십시오. 반할 겁니다”
4. 러시아 바둑 역사
1902년에 러시아백과사전에 바둑이 소개되고 1914년 바둑 룰을 적은 브로셔가 저자의 이름 없이 출판된다. 1962년에 포스트니코프(Postnikov)란 수학교수가 바둑책을 써서 바둑이 많이 알려진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바둑 역사는 1965년부터 생겼다고 보아야 한다. 필라토프(Youri Filatov)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으로 바둑 서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1년 후에는 바둑 인구가 급증해 대회까지 치르게 된다. 1968년에는 레닌그라드 스포츠위원회가 바둑협회를 지원하기에 이르른다.
필라토프가 개인사정으로 바둑을 끊자 바둑계는 급속히 쪼그라들었지만 그 중 몇명이 끝까지 바둑을 포기하지 않았다. 1975년 그들이'생활과 과학'이란 잡지에 바둑을 소개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잡지에 난 사활문제에 2천 5백 명이나 응모하면서 바둑은 일약 유명해 진다. 그 결과 소련 전국 30개 도시에 85개의 바둑클럽이 생겨난다. 드디어 러시아에 바둑 르네상스 시대가 활짝 열린다.

▲ 자레프가 프로기사에게 지도를 받고 있다 / 기꾸치 내제자로 들어간 라자레프, 디아(우측)
실내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야 하는 추운 나라에서는 보드게임이 잘 맞는 것 같다. 러시아가 체스 세계최강국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바둑도 러시아가 현재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꼽힌다. 스페인, 이태리, 그리스가 바둑이 약한 것도 날씨 탓이리라. 1976~79년 사이에 러시아 바둑계를 끌어갈 대형 클럽들이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카잔, 페트로자보스크에서 문을 연다. 바둑대회는 각 클럽 별로 열다가 1977년에 최초의 전국대회가 개최된다. 여기에서 우승한 아스타쉬킨(Valery Astashkin) 3단은 유럽대회에도 출전하여 6위에 입상한다. 이무렵부터 러시아가 국제바둑계에 모습을 드러낸다.
< 러시아 바둑강자들 >
- 디너스타인(Dinerchtein 일명 사샤, 프로 3단, 현챔피언, 유럽대회 우승 7회)
- 일리야 쉭신 (Ilya Shikshin 러시아와 유럽 챔피언 수 차례, 스베타 동생
- 스베타 쉭시나(Svetlana Shikshina, 프로 초단, 유럽챔피언 1회)
- 알렉세이 라자레프(Alexey Lazarev, 유럽챔피언 2회, 러시아 챔피언 11회) - 나탈리아 코발레바(Natalya Kovaleva, 유럽 여자 최강자 중 한 명)
- 안드레이 쿨코프(Andrey Kulkov, 러시아 챔피언 1회)
- 디미트리 수린(Dmitrij Surin, 유럽 페어챔피언 수 차례 - 나탈리아와 한 조)
이상 강자 중 샤샤와 스베타는 한국에서 공부하여 프로기사가 되었고 한 명은 스베타 동생 일리야다. 라자레프는 교수인데 그도 찬한파에 속한다. 수린은 혼자 공부한 잡초류 바둑이라 '러시아의 서봉수'로 불린다. 한국이 러시아 바둑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또 하나 러시아 바둑의 특징은 카잔이란 도시가 러시아 바둑계를 주름 잡는 사실이다. 사샤, 스베타 등 강자들이 대부분 카잔 출신이고 러시아 바둑협회도 모스크바가 아닌 카잔에 있다.

▲ 노보데비치 국립묘지(Novodevichy)
5. 노보데비치 국립묘지
노보데비치 성당묘지는 소련의 유명인사만 묻히는 곳이다. 안내를 맡은 니콜라이가 이 사람은 화가 누구, 저 사람은 음악가 누구, 하는 식으로 설명을 해 주는데 예술에 대한 정보가 많은 내가 모르는 사람투성이다. 니콜라이는 어떻게 이런 대가를 모르느냐고 어리둥절해 한다. 그래서 내가 헤밍웨이나 보들레르등을 물어보니까 이번엔 니콜라이가 모른다. 이날 니콜라이와 내가 느낀 의아스러움은 혹시 남한과 북한사람이 만나 느껴야 할 의아스러움은 아닐까?
노보데비치 성당의 묘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흐루시초프 무덤’ 이었다. 그의 동상은 외곽을 검은 돌과 흰 돌로 양분하여 장식했는데 이것은 양 극단을 달리던 그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기습적인 ‘스탈린비판’으로 혜성처럼 등장했던 흐루시초프는 숙청에 무자비하고 정책은 즉흥적이었다. 하지만 50년대 말에 이미 동서해빙정책을 폈던 흐루시초프, 그는 오늘날 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을 지켜보며 저 무덤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후루시초프 무덤/국립묘지

▲ 안내원 니콜라이, 스베타와 필자 ‘귀여운 여인’ 저자 안톤 체호프 무덤 앞
노보데비치 묘지를 나와 붉은 광장 레닌 무덤에 갔는데 눈에 익은 얼굴이 보인다. 자세히 보니까 비틀즈의 존 레논 부인 오노 요코다. 러시아에선 아무도 그녀를 알아 보는 거 같지 않다. 내가 가서 반기니까 자기도 반가워 한다. 잠깐 나눈 대화에서 그녀는 정신세계가 성숙하고 진지하다고 느꼈다. 그 전 날에는 영화 쿼바디스에서 네로황제역을 맡았던 피터 유스티노프가 나와 같은 호텔에 묵고 있길래 그와 커피숍에서 같이 커피를 마셨다. 그는 러시아계 영국인인데 러시아를 소개하는 다큐멘타리를 찍고 있었다. 그는 머리가 좋고 특히 유머감각이 뛰어나 나를 많이 웃긴다. 그가 해설하는 영국 ABC 다큐는 지금까지도 최고의 명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 살해당하기 열흘 전 존 레논이 공개한 부부사진 / 쿼바디스에서 네로황제 역의 유스티노프
6. 러시아 150주년 사진전
크레믈린 입구의 전시관에서 ‘사진 1백50년 전’을 관람했다. 작품은 제정 러시아 말기부터 현대까지 역사적인 것과 예술작품이 망라되어 있다. 그때 소련인들이 자기네 혁명사에 보이던 관심은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이순신장군 얘기를 소상히 알고 있듯 그들은 혁명에 관련된 인물과 사건들을 빠짐없이 알고 있다. 얘기하는 자세는 숙연함 마저 풍겼다. 혁명당시 러시아의 2인자였고 스탈린에게 권력 다툼에서 축출된 트로츠키 사진은 기술적으로 다 빼버렸다.

▲150주년 사진전 출품 작 1 & 2
여자 나체작품 앞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말해 주듯이 에로티시즘에 대한 관심도 가히 폭발적이다. 요즘 일부에서 레닌 재평가 작업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레닌그라드는 여전히 레닌의 도시였다. 키로프 기념극장. 푸쉬킨 기념극장, 고리키 문화궁전, 10월 혁명때 동궁(冬宮) 진격신호의 포성을 울렸다는 순양함 오로라호(지금은 10월 혁명 기념관), 여름궁전을 구경하고 내가 레닌그라드를 떠날 때는 혁명의 와중에서도 과거의 유산을 잘 관리해 낸 소련인들의 저력이 대단하다고 생각되었다.

▲150주년 사진전 출품작품
사진전에서 나와 모스크바대학 세르게이 교수와 저녁을 먹었다. 그는 열정적인 언변으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소련의 생필품 품귀현상은 생산량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수요 공급의 균형을 잃은 탓”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타슈켄트의 창고에서 야채가 썩고 있는데 모스크바에선 야채를 사려고 긴 줄을 서야 한다. 이건 무능한 행정 탓이다. 또 소련 제일의 신발공장의 1년 생산목표가 1억 켤레라면 그 해에 8천만 켤레가 소비되고 2천만 켤레가 남아 돌아가도 그 이듬해엔 또 1억 켤레를 만들어 낸다.
여기서 남는 힘을 다른 데로 돌리면 좋을 텐데 소련은 이 뻔한 사실에 아무런 신경도 안 쓰고 살아왔다. 이걸 처음 인정한 사람이 고르바초프다” “현재 소련의 희망은 고르바초프뿐이다” 한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치는 고르바초프는 생각은 합리적이나 대가 약한 인간처럼 보여 걱정이다.
7. 러시아 예술
적어도 소련은 예술에 관한 한 최선진국이며 미술, 음악 애호가에겐 천국과 같은 곳이다. 한국에서도 인기를 끌었던 영화 ‘닥터 지바고’의 광경처럼 러시아 겨울은 하얗고 황량한 눈 벌판이 끝 없이 펼쳐진다. 모스크바에서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기차 창밖으로 보이는 눈 벌판에서도 느낄 수 있다. 블라디보스톡까지 시베리아 벌판을 기차로 관통하면 지구관이 달라진다는데 정말 그럴 거 같다. 사실은 내가 그 표를 사려고 하는데 왠일인지 주위에서 너무 말려서 그 여행을 그만 두었다.
내가 동경에서 모스크바로 올 때다. 러시아 항공기를 탔는데 보통 제트기는 약 1천Km로 나르는데 이 기종은 두 배인 2천Km로 나른다. 전투기를 겸해서 만든 거라고 한다. 때 마침 시베리아 벌판에 황혼이 찾아와 하늘이 붉게 물들었는데 해와 같은 방향인 서 쪽으로 날아가는 이 비행기의 속력 때문에 석양이 한 없이 계속 된다. 나는 비행기 창문 밖의 노을을 넋을 잃고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보는 광활한 시베리아의 처녀지는 여행자의 마음을 아득한 고독함과 깊은 사색으로 몰아넣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탄압이 심한 농노사회를 거쳐 지난 70년 동안은 전체주의 사회인 공산주의를 경험한 나라. 단체로 모여있을 때 그들이 보여주는 조용함,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아무리 줄이 길어도 무표정하게 몇 시간씩 서 있는 모습에는 드넓은 시베리아의 대륙적 기질과 끝없는 동토(凍土)의 숙명적인 체념이 뒤엉켜 있다. 잿빛 하늘 아래 늘어선 긴 사람의 저 행렬은 풍요로움에 대한 열망과 서성거림이 있다. 이런 모든 배경이 러시아 예술에 반영된다.

▲비행기에서 보는 시베리아
< 음악 >
클래식음악의 대중화. 이 것도 공산주의 소련이 만들어낸 독특한 현상이다. 미국의 클래식 음악홀에 가면 관객은 주로 상류층인데 이곳 소련은 청바지나 평상복을 입은 노동계급이 더 많다. 클래식음악이 대중화 한 것이다. 이 운동의 시작은 1850년대 국민음악파 5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예술의 사명은 숭고하다”란 모토를 내 걸고 “음악은 인간의 감정과 생각을 정확히 표현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이 민속음악을 토대로 예술의 대중화를 지향한다.
모스크바의 음악인들을 만났을 때 나는 “소련의 1급 오페라단을 한국으로 초청하고 싶으니 초청조건을 조사해 달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러나 이 음악가는 고개를 외로 꼰다. 그의 말이 “당신의 오페라라는 말이 너무 막연하다. 소련 오페라, 이탈리아 오페라, 독일의 바그너오페라 등 각자 전문 오페라단이 있고 소련 오페라만 해도 전통오페라, 현대오페라 등 여럿으로 다시 나뉜다. 무슨 오페라인지 알아야 골라볼 것 아니냐” 는 얘기다.
오페라단이라고 하면 베르디나 푸치니, 모차르트 음악만을 연상해 왔고 이곳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게 내 잘못이었다. 소련엔 많은 종류의 오페라단이 자기 전문분야 노래만 부르고 있다. 약 50개의 오페라-발레 전문극장이 있고 다른 장소에서도 헤아릴 수 없는 공연이 이뤄지고 있다. 이 중에서도 볼쇼이 오페라와 무용단은 세계최고 수준이다.

▲볼쇼이 극장. 이 곳에 볼쇼이 오페라, 발레단이 있다
▲볼쇼이 극장 내부
모스크바는 세계최초의 어린이 음악당, 인형극장, 극장 등을 갖고 있고 어린이들을 위한 오페라, 연극, 음악, 작가들이 따로 있다. 어린이 인형극장에 가서 ‘돈키호테’란 작품을 봤는데 어른인 나도 즐길 수 있었다. 소련인들은 소련인형극이 세계 제일이라고 자랑했으나 내 눈에는 미국의 퍼핏 쇼(Puppet Show)에 비해 기술이 좀 처지는 것 같았다.
한번은 나에게 영광스러운 일이 생겼다. 소련 최고급의 전통음악 연주자들이 모여 만든 ‘러시안 페스티벌’의 한국 초청문제를 의논하고 있는데 이곳 단장이 볼쇼이 오페라 주연 바리톤 ‘에프게니 폴리카닌’이 자기네 단원으로 러시아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자기네 극장에 오면 공연을 보여주겠다고 한다.
나는 약속대로 일요일 오후 2시에 극장으로 갔다. 극장 앞이 한산한 것이 약간 이상했다.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단장의 안내를 받으며 극장에 들어서니 관객은 나 한 사람뿐이다. “어떻게 된 거냐” 고 묻자 “우리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한 명만 놓고 공연해도 만족합니다” 는 대답이다.
문득 70년대 초 서울에서 연극을 보러 갔다가 텅 빈 극장 안에서 혼자 죄지은 듯 앉아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소련 최고의 전통예술단인 ‘러시안 페스티벌’이 나 하나만을 위해 공연하다니……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일어나는구나. ^^ 더구나 나는 청바지, 파카, 운동화를 신고 있는데 공연자 전원이 연미복 차림으로 무대를 꽉 채우고 앉아있다.
첫곡으로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중 피가로의 아리아를 2미터 거구의 폴리카닌이 부른다. 고음 A도 거침없이 지른다. 그가 ‘볼가강 뱃노래’나 ‘스탠카라진’을 부를 때 자기네 노래라 감정표현이 자연스럽다. 이후 두 시간 동안 그들은 정성을 다하여 연주하고 춤췄다. 순서가 끝날때마다 나 혼자 일어서서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들의 공연, 특히 합창은 드넓은 시베리아처럼 야성적이며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러시아 오페라 / 무용
< 미술 >
러시아에서 미술관 같은 건물의 실내로 들어가면 겨울에는 온도를 20도로 유지한다. 밖은 영하 20도라 안에 들어서면 누구나 옷을 벗어 맡긴다. 그래서 어느 건물이나 ‘옷 보관소’가 운영되고 있다. 이곳에 오버코트, 모자, 목도리, 장갑, 가방 등을 무료로 맡긴다. 나는 모스크바에서 푸쉬킨미술관, 트레티아코프(현대)미술관, 레닌그라드의 러시아미술관, 에르미타지미술관 등을 방문했다. 대부분의 미술관은 석조 건물로 시설이 좋다. 아무나 공짜로 들어가서 안내원의 친절한 해설까지 들을 수 있다.

▲러시아 미술관 – 칸딘스키 등 러시아 예술가 작품들만 있는 곳(레닌그라드)
러시아 미술관은 러시아 화가들 작품만 모아놨다. 서양에서 풍미했던 화풍을 따라 러시아의 화풍도 시대에 따라 같이 변천하고 있는게 재미있다. 소련도 결국은 서양 문명권에 속한 것을 실감나게 해 준다. 그러나 같은 고흐풍, 고갱풍을 그려도 러시아 특유의 짙은 색깔을 가미해 러시아적 강렬함을 표출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칸딘스키 그림은 4~5점 밖에 눈에 안 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지난주 미국에 특별전시를 하러 떠났다고 한다.
에르미타지 미술관 안에 들어서면 눈이 번쩍 뜨인다. 현 국제미술 시장에서 가장 비싼 것이 고흐와 렘브란트 작품이다. 보통 서양 유명 미술관이 1~2개 갖고 있는 게 고작인데 에르미타지엔 렘브란트 원화만 30여 점이 있어 따로 홀을 차지한다. 에르미타지는 소장품 3백 만점이 넘는 세계 최대의 단일 미술관으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보다 훨씬 크다. 이에 비해 러시아 미술관은 러시아 작품만 50만점을 소장하고 있다.

▲과거 겨울궁전이었던 에르미타지(Hermitage) 박물관 – 네바 강변에 있다
옛날 차르가 살던 궁전을 개조한 화려한 실내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티티얀 등 르네상스 작품부터 루벤스, 렘브란트, 고호, 르누아르, 마티스 등 무궁무진이다. 그뿐인가? 조각을 보면 미켈란젤로, 로댕 등의 작품이 한없이 이어지고 타페스트리, 보석, 도자기 등 끝이 없다.

▲카노바(Canova)의 ‘우아한 세 여인’/이탈리아 관(자연체광)

▲고흐(Gogh)의 마지막 그림 ‘하얀 집의 밤’

▲마티스(Matisse)의 ‘춤’

▲루벤스(Rubens) 관
나는 처음 3시간 정도는 이 기회를 놓칠 새라 천천히 감상하며 지나갔지만, 이런 식으로 다 보려면 며칠도 모자랄 것 같다. 그래서 빨리 걷기 시작했다. 걷다가 피로해서 쉬려고 앉았더니 보통 의자가 아니다. 차르시대에 쓰던 의자인데 금테가 화려하다. 소련은 모든 물건을 공유해야 한다는 원칙을 이런 본보기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모스크바의 푸쉬킨미술관도 에르미타지와 비슷한 성격과 규모다. 중세, 르네상스, 인상파, 현대화, 아방가르드까지 다 있다.
역시 소련이구나 하는 구석도 있다. 이곳의 미술관은 미술품을 더욱 빛내줄 수 있는 액자나 조명, 벽에 거는 방법 등엔 신경을 안 쓰는 거 같다. 실내장식이 한 몫 하는 미국 미술관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또 설명서도 러시아어로만 돼있고 현세계어인 영어는 무시돼있다. 국제화에 신경 안 쓰는 폐쇄사회의 잔재이기도 했고 ‘소련이 이제 막 문을 열었구나’ 하는 증명이기도 했다.
▲트레티아코프(Tretyakov) 현대미술관
< 현대미술 >
모스크바 트레티아코프 현대미술관은 영화제목으로도 유명했던 ‘고리키공원’ 바로 길 건너에 있다. 들어가는 입구, 계단 등이 전혀 미술관 같지 않아 “잘못 들어왔나?” 생각했는데 2층 홀 안으로 들어서니 갑자기 본격적인 미술의 세계가 펼쳐진다.
러시아의 역사, 현 사회의 풍자, 꿈과 현실의 대조, 새로운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 등이 섬뜩한 색깔과 테크닉으로 표현돼 있다. 한마디로 예술분야도 ‘사회의 문제점’을 주로 다루고 있었고 작품들이 강렬하고 적나라하여 아직도 나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다. 추운 회색 빛 날씨, 통제사회에 억눌린 내재된 감정이 예술을 통해 뿜어내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마주치는 레닌이란 인물, 재미있었던 북한영화 홍길동, 평양식당 벽에 걸렸던 ‘념원’ 이란 글귀, 가게 앞에 늘어선 긴 행렬, 페레스트로이카의 폭풍, 정 많은 고려인들, 높은 문화수준,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시베리아 벌판의 흰 눈과 광대무변함. 나의 첫 소련여행은 이렇게 여러개의 파편적 이미지를 나에게 심어 주고 한달 반만에 끝났다.
러시아 3편에 계속……
한상대(전 시드니대 교수 sdhahn@gmail.com)
총 댓글수: 0
관련 뉴스
Copyright © 컴투스타이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