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총걸음]
현재 내 심장이 향하는 곳은 바둑
루이와의 대결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는 김윤영
김지은2011-03-16 15:16:39
흑과 백이 연출하는 반상드라마는 어찌 보면 조화를 이루는 것 같이 보이면서도, 너무나 극명하게 대비되는 색 탓인지 한편으로는 승자와 패자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찡할 때가 있다.
그 날도 그랬다. 지난 8일 오후 4시 40분 서울 왕십리의 한국기원 특별대국실에 루이나이웨이와 김윤영이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7분 후, 특별대국실을 억누르고 있던 묘한 긴장감과 중압감은 김윤영이 패배를 시인하면서 한 순간에 풀려버렸다. 그렇게 루이나이웨이(이하 루이)의 통산 8번째 여류국수 우승이 결정됐다.
기자들의 카메라는 바빠졌고, 잠시, 말없이 반상을 응시하던 두 기사는 숙연한 분위기 속에 복기를 시작했다.

▲복기를 하고 있는 김윤영.
사진을 찍던 중 왠일인지 모르게 김윤영에게 시선이 향했다. 상기된 얼굴로 아랫 입술을 깨물고 아픔을 억누르고 있는 김윤영. 평소 밝고 명랑한 그녀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복기가 끝난 후 타이틀을 획득한 루이에게 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했고, 김윤영은 대국장을 떠났다. 인터뷰 후 기사를 마무리하고 있는데 우연히 김윤영을 만날 수 있었다.
“괜찮아요? 많이 아쉬울 텐데.”
“괜찮아요. 루이 9단과의 실력차이를 느꼈어요.”
진지하면서도 진심이 묻어나오는 저 한 마디를 말하기까지 김윤영은 얼마나 많은 생각에 잠겼을까.
23살. 이 어린 여류기성은 10년 넘게 한국여자바둑계를, 아니 30년 넘게 세계여자바둑계를 호령하고 있는 전설을 상대로 무엇을 배웠을까.
돌이켜보니 이번 여류국수전 결승전은 김윤영에게 생애 첫 번기승부(공식기전)였고, 3시간 바둑으로 여제 루이와 정정당당하게 대결한 꽤나 굵직한 승부였다.
또, 욕심이 나는 승부였다. 현존하는 국내 여자기전은 여류국수전, 여류명인전, 여류기성전 등 3개. 여기서 여류기성 김윤영과 여류명인 루이가 대결했기 때문에 김윤영이 승리했다면 여자최다관왕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한 번 시도해봤다. 패자인터뷰. 그 동안 승자에게만 포커스가 몰려 한 켠에 머물러 있던 패자를, 그것도 결승이라는 큰 무대에서 고개 숙인 승부사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예의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듣고 싶었다.
김윤영이 어떻게 그 대국들을 준비했는지. 끝난 후 느낌은 어떤지.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또 프로기사 김윤영의 다른 이야기를.
다행이 김윤영은 인터뷰 요청에 긍정적이었다. 단,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아 다음을 기약했다. 바람은 차갑지만 햇살만큼은 따사로웠던 어느 날. 왕십리 한국기원 근처의 한 카페에서 김윤영을 다시 만났다.

Part 1… 졌지만 얻은 것이 많은 승부
- 뜬금없이 인터뷰를 요청해서 놀랐죠.
무슨 인터뷰인가 했는데, 코너보니까 감이 오던데요?
- 지난 여류국수전 결승전을 돌이켜본다면요.
아쉽죠. 그런데 그 느낌보다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공부가 정말 많이 필요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패한 당일에도 그랬지만 점점 더 그 생각이 드네요.
- 2국이 끝난 날 기자에게 '루이 9단과의 실력차이를 느꼈어요.'라고 말했었는데 어느 부분이 부족해 보였나요.
많죠. 기술적인 부분부터 정신적인 부분까지요. 그 중 가장 크게 와 닿은 것은 바둑에 대한 마음 가짐이었어요. 대국하면서 루이 9단을 보는데 바둑에 심취해서 두시더라고요. 생각도 저보다 훨씬 깊고… 많이 배워야죠.
결승에 임하기 전 루이 9단은 내가 배울 것이 많은 기사이고, 승부욕이 생기는 기사였는데, 결승이 끝나고 나서는 루이사범님에 대한 생각보다는 스스로에 대한 생각이 더 많아진 것 같아요.

▲도전 2국이 종료된 후 두 기사가 복기를 나누고 있다.
- 내용적인 부분은요.
1국은 초반 안 좋았던 흐름이 중반에 풀리면서 괜찮아졌어요. 기회도 왔는데 제가 계속 버텼던 것이 무리여서 한 순간에 나빠졌어요.
2국은 초반 흐름이 좋았는데 상변 접전에서 빵때림을 당해서 나빠졌죠. 그 전에 교환을 하나 해 두었으면 확실히 좋았고, 이 후에도 잘 될 수 있었는데 이상하게 둬서… 국후 복기검토에서도 상변을 중점적으로 연구했죠.
프로기사 생활 3년 6개월에 접어들고 있는 김윤영이 공식시합에서 긴장하고 떨렸던 적은 3번. 그 중 한 번이 2008년 여류기성전 결승인 루이와의 대국이라고 한다. 당시 너무나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대국을 할 수 없었을 정도. 3년 후 결승에서의 재회. 김윤영은 이번에는 그러지 말자고, 후회없이 대국을 하자고 스스로 다짐하며 대국장으로 향했다.

▲결승 1국. 김윤영은 패했지만 즐겁게 둘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말했다.
- 이번이 첫 번기승부였잖아요. 무엇이든지 처음이면 떨리기 마련인데 임할때는 어땠습니까.
정말 이번에는 후회없이 두자는 마음으로 임했는데 첫 판을 패했어요. 그런데 정말 바둑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였죠.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서인지 후회는 없었어요.
2국에 임하기 바로 전, 읽고 있던 책에 '지금 인생을 다시 한 번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그런 마음으로 임했어요. 우승? 물론 욕심이 나죠. 하지만 그런 것보다 나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정말 결승전은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 지난해에는 여류기성 등극, 아시안게임 금메달 획득 등 본인 스스로 평가하기에 최고의 한 해를 보냈잖아요. 올해에는 황룡사가원배, 여류명인전 예선전에서 패하며 출발이 조금 좋지 않던데요.
제가 마인드 컨트롤이 잘 안 되요. 바둑이 좋다고 느껴지면 흥분해서 손이 빨리 나가기도 하고, 다른 생각도 들고… 무심으로 두어야하는데 잘 안될 때가 있어요.
여류국수전 1국에서 패하고 황용사가원배에서 국내선발전에 임했는데 평소 승부욕이 센 편임에도 묘하게도 그날은 의욕이 생기지 않더라고요. 결국 패했죠. 그 판을 지고 정말 결심했어요. 어떤 상황이 오더라고, 어느 바둑을 두더라도 몰입하겠다고요. 큰 승부이든, 그렇지 않든 이제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Part 2 … 여류기성 획득은 행운
- 앞서 마인드컨트롤 부분을 단점으로 꼽았는데 장점은 무엇입니까.
다른 기사들이 말하기를 수를 빨리 보고, 보통 생각하기 어려운 수를 잘 본다고 해요. 틀에 얽매이지 않는다나요. 그런데, 좋은 수가 될 때도 있지만 나쁜 수가 될 때도 있어요.(웃음)
- 바둑에 대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솔직히 제가 기재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단 한 번도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요. 보통에서 약간 뛰어난 정도 아닐까요.

- 여류기성 타이틀도 보유했고, 금메달도 목에 걸었는데 너무 겸손한 것 아닌가요.
여류기성전이 부안에서 열리는데 정말 별 생각 없이 내려갔어요.
사실 시합보다 기분전환이 더 절실했어요. 당시 제가 지지옥션배에서 옥집사건으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상태였어요. 잊을만하면 그 이야기가 계속 나와서 너무 힘들었어요. 바둑을 열심히 둬서 잊고 싶었어요.
집중이 잘됐어요. 루이 사범님을 이기고 4강에 올랐는데 우승이 보이기 시작하니 '우승해서 옥집사건에 대한 인터뷰를 하자'라고 생각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우승한 것이 정말 신기해요.

▲독서를 즐기는 김윤영. 아무리 바빠도 독서는 꾸준히 하려고 한다.
Part 3… 즐거움과 바꾼 늦은 입단
2007년 10월 30일 김윤영은 꿈에 그리던 입단에 성공한다. 당시 김윤영의 나이는 19살. 입단문 뚫기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만큼 힘들다는 것은 바둑팬이라면 다 아는 사실. 그러나 6살 때 처음 바둑알을 잡은 것을 감안하면 결코 빠르지 않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 입문 시기에 비해 입단이 상당히 늦었습니다.
빠르지 않죠. 제가 욕심이 많다고 할까요. 바둑이 좋지만 학교도 다니고 싶었어요. 그 때문에 부모님이 속 좀 끓으셨죠.
최근 체육특기자들에게도 오전 수업을 추진하는 등 흐름이 바뀌고는 있지만 김윤영이 입단을 준비할 때만 해도 프로지망생들은 정규학교 수업도 포기하고 오전부터 오후까지 바둑에만 전념하고 있다.
그러나 김윤영은 달랐다. 학교에서 배려해줬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3학년까지 오전 수업을 병행했다. 이유는 한 가지. 학교생활을 즐겼던 김윤영이 고집(?)을 피웠기 때문.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학원에 도착하면 오후 2시. 입단 경쟁자들에 비해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고, 입단이 늦어져 심적 부담이 적지 않았을 것인데도 김윤영은 그 때 그 시간을 후회하지 않는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이 너무 즐거웠어요. 수업도 재미있었고요. 학교생활 자체가 활력소였죠. 아직도 그 때 친구들과 연락하고 지내요."
도장으로 옮긴 시기도 굉장히 늦다. 양천대일바둑도장으로 옮긴 것은 17살. 그 전까지는 일반 학원에서 실전위주로 공부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신진구 원장님에게 배웠어요. 원장님이 저한테 헌신적이셨죠. 일반 학원이어서 저와 대적할만한 아이들이 없었는데 원장님이 정대상, 김석흥 등 많은 사범님들을 초청해서 스파링을 시켜주셨어요. 본격적인 입단준비를 위해 양천대일바둑도장으로 옮겼지만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여자단체전 금메달 결정전 모습. 김윤영은 국제전에 강한 송롱후이를 물리친다.
양천대일바둑도장으로 옮긴 지 2년 만인 2007년 프로 면장을 받은 김윤영. 1년이 채 되지 않아 여류기성전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2009년에는 정관장배 국가대표가 됐다. 그리고 2010년 여류기성전에서 생애 첫 타이틀 획득의 기쁨을 누렸고, 아시안게임 여자단체전 금메달결정전에서 송롱후이를 격파하고 한국이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 금메달 확정됐을 때 어땠나요.
금메달을 딴 것도 기뻤지만 중국을 이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훈련하면서 굉장히 스트레스가 많았거든요. 여류기성 우승과는 또 다른 느낌도 있었어요.
또 아시안게임이 엄청 큰 무대잖아요. 큰 자신감을 얻었죠. 뿌듯했고, 도와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한 생각도 들었고요.
- 예전 타이젬과의 인터뷰에서 아시안게임 후에 한 동안 의욕이 없었다고 밝혔었잖아요.
1년 동안 금메달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왔는데 대회가 끝나니 너무 허전했던 건 사실이에요. 한 달 정도 푹 쉬고 나서 무여회, 여자기사회, 또 여자상비군까지 활동하고 있죠. 바둑은 참 재미있어요.
Part 4… 23살. 바둑을 보면 심장이 뛴다
- 바둑이 너무 재미있다고 했는데요. 아무래도 직업이 되다보면 꼭 즐길 수만은 없지 않나요.
음…. 전 너무 재미있게 느껴져서…. 물론 바둑 외에도 좋아하는 것들은 많지만 지금은 바둑이 최우선이예요.
저는 즐거움을 느끼면 완전 몰입해서 올인해 버려요. 누가 봤을 때 '아 저 사람은 정말 저 일만하면 대책이 없다.'라고 느낄 정도로요. 좋아하는 것은 제대로 하고 싶거든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이 가슴이 원하는 삶이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운이 좋게도 결과가 좋게 나온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이런 말을 못했을지도 모르죠. 그래서인지 제가 평가하는 제 삶의 만족도는 아주 높아요.
- 언제까지 승부사로 활동하고 싶어요.
아마 20대가 아닐까요. 30대부터는 승부보다 다양한 일을 하고 싶어요.
지금 생각으로는 계속 바둑공부를 하다가 승부에 연연하지 않을 30대쯤 해외에 가서 보급을 하는 것이에요. 좀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미국대학교에 가서 바둑동아리를 만들고 싶어요. 바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강의도 하고, 바둑에 대해 알리는 거죠. 지인 분이 도와주신다고도 했고요.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여학우들과.- 현재 명지대학교 바둑학과에 재학 중이잖아요.
개인적으로 바둑 한 가지만 하는 것보다 다른 것도 시도해 보는 것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더 넓게 키울 수 있는 것 같아 좋은 것 같아요. 나중에 제가 더 나이가 들면 다른 일도 해볼 수 있는 것인데 몰라서 못하는 것과 안하는 것은 다른 문제잖아요. 선택할 수 있는 폭도 달라지고요.
대학생활도 마찬가지죠. 재미도 있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좋아요.

- 인터뷰를 하다보니 김윤영 프로는 굉장히 낭만파인 것 같아요. 금전이나 명예에는 전혀 욕심이 없는 것 같은 낭만파요.
그 부분은 그냥 제 생활만 유지할 정도면 되는 것 같아요. 제가 마음에 드는 것을 가질 수 있을 만큼의 여유만 있으면 좋겠어요. 명품 같은 것은 말고요.(웃음)
내 자신이 목표한 바를 이루다보면 명예는 따라오는 것이 아닐까요. 그 부분도 바둑팬들이 알아주실 정도로만 욕심을 부릴까 해요.
금전이나 명예보다는 제가 할 일에 충실할 뿐이에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바둑을 향해 달리는 것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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