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바둑사]
'북의 베니스' 페테르부르크
대규모 한국 팀과 함께 간 러시아
한상대 교수2011-04-10 10:16:24
▲페테르부르크 운하 유람선. 김종수, 박성균
1. 대규모 한국 팀
“교수님, 지금이 밤 열한 시 맞아요?”
“그래, 맞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환해요?”
“너 백야현상 모르니? 여기가 북위 60도라 여름엔 낮이 길어져서 그렇다” 7월 마지막 주인데도 밤 11시에 대낮처럼 환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이후 페테르부르크)의 백야(白夜)는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최유진이 오더니“교수님 화장실에서 붉은 물이 나와요. 또 방이 너무 더러워요” “그건 물을 한동안 안 써서 녹물이 나오는 거고 여기는 시골 대학 기숙사라 그렇다”
우리가 도착한 페트로보레츠(Petrodvorets) 주립대학 기숙사는 환경이 더럽고 열악했다. 처음엔 학생들이 못 있겠다고 하더니 이틀 후부터 적응하고 지금은 거기를 그리워한다. 2003년 여름은 유럽 역사상 가장 더운 여름으로 기록된 해였다. '동토(凍土)의 나라’ 러시아까지 폭염이 찾아와서 우리가 있는 보름 동안 내내 더웠다. LG에서 러시아에 에어컨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가끔 학생들이“교수님, 저희 스웨터 언제 입어요?”한다. 내가 오리엔테이션 시간에 “러시아 여름은 가끔 스웨터를 입어야 하니까 준비해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 곳은 페테르부르크에서 버스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다. 유명한 여름궁전 페테르고프가 여기서 버스로 15분 거리다.
▲ 기숙사 복도와 방
페테르부르크는 1703년에 세워져서 2003년 도시 설립 300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그 행사의 하나로 제 47회 유럽바둑대회를 유치하고 그 일환으로 제2회 국제 바둑학술대회도 열린다. 나는 학술대회 의장 겸 한국팀 단장으로 러시아에 갔다. 이전까지 유럽대회는 한국인이 안 오거나 1~2명이 오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명지대 주최 바둑학술대회를 계기로 명지대생을 비롯 40 명의 한국인이 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대규모 한국인을 맞은 유럽대회는 ‘한국인이 몰려온다(Koreans are coming) '한국인 내습(Korean Invasion)' 이란 표현을 쓰며 관심을 보인다. 우리 등록이 끝나자 다음 안내지도를 한 장씩 준다.
▲ 대회장 내부 안내도/ 대회장 입구간판
2. '물의 도시' 페테르부르크 300주년
페테르부르크란 도시가 300년 전에 탄생한 배경을 알려면 먼저 표트르 1세란 사람을 알아야 한다. 그는 유럽에 비해 뒤처진 러시아를 개혁한 차르(황제)다. 그래서 원로원에서 대제란 칭호를 받는다. 그러나 표트르(Pyotr)는 놀라운 에피소드를 일생 몰고 다닌 사람이다. 그는 러시아가 유럽에 비해 뒤처졌다는 생각에서 선진 유럽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그는 신하들에게 수염을 깎게 하고 러시아 전통의상을 벗어 버리도록 명령한다. 창녀를 해방시키고 키릴문자를 쓰게 했다. 표트르는 유럽으로의 빗장을 열고 바다로 나가는 길만이 러시아의 살길이라고 판단했다. 흑해로 나가려면 터키와 전쟁을 해야 하고 발틱해로 나가려면 스웨덴과 전쟁을 해야 한다. 강대국 스웨덴 보다 터키를 택해 작은 전쟁을 해 봤으나 곧 패배한다. 표트르는 낙후된 러시아 군대의 현 주소를 실감하고 그 힘을 키우기로 결심한다.
표트르는 서유럽에 선박건조 기술을 배우러 250명의 연수단을 보내는데 자신도 그들 중 한 명으로 위장 잠입한다. 그는 홀란드의 선박공이 숙소 좁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조선소에서 목재운반 꾼으로 열 달 동안 쉬지 않고 일한다. 나중에 이 집은 “위대한 남자에게는 아무 것도 작지 않다”는 팻말이 선다. 이 얘기는 로르칭(Lortzing)의 오페라 ‘황제와 목수’로 작품화된다. 그는 일이 끝나면 밤에 학자, 과학자들의 연구소를 찾아가 공부했다. 현미경을 들여다 보고 해부실에서 시체 내부를 보고 엔지니어와 기계학 강의를 들었다. 치아 뽑는 법을 배워 자신의 신하 중 아무나 불러서 생 이빨을 뽑으며 실습했다.
▲ 네바강 삼위일체(Trinity) 다리
표트르는 새로운 연장과 기계들을 열차로 러시아에 보내고 수 많은 선장, 장교, 의사, 요리사를 보내 국민을 개화시킨다. 그는 런던과 빈을 방문한 후 오는 길에 폴란드 왕 아우구스트의 궁전에 머물게 된다. 그들은 즉석에서 친구가 되는데 그 이유는 마음껏 보드카를 퍼 마시고 은 그릇을 우그러뜨리는 능력을 서로 입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의기투합하여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는 스웨덴을 치기로 한다. 덴마크도 이 동맹에 합류하여 북방전쟁(1700~1721)을 일으킨다.
▲ 표트르의 서명(사인)
천재적 야전 사령관인 스웨덴 왕 카를 12세는 스웨덴의 한니발이었다. 그는 러시아의 겨울과 싸우면서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다. 러시아, 폴란드, 덴마크 연합군은 카를의 적수가 아니었다. 한번은 카를이 8천명의 병사로 4만 명의 연합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어 거의 전멸시키기도 한다. 카를은 먼저 아우그스트를 폐위시키고 러시아로 진군한다.
카를의 실력을 아는 표트르는 ‘공간할애작전(초토)’으로 대항한다. 표트르는 러시아의 도시를 불 태우고 카를 군대를 황량한 내지 쪽 깊숙한 곳으로 유도한다. 그 다음에 겨울이 오고 유난히 극심한 추위가 왔다. 스웨덴 군인들의 손과 발이 동상으로 잘려 나갔다. 이로써 카를은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따라올 길을 먼저 걷게 된다.
▲ 카를(Karl) 12세/ 카를의 시신을 병사들이 옮기고 있다
마침내 카를 12세가 격퇴 되었을 때 세상은 변해 있었다. 발트해 연안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땅이 되고 러시아는 어느새 유럽에 다다라 있었다. 폴란드의 아우구스트는 표트르의 은총으로 다시 왕위에 오른다. 카를 12세는 터키로 도주해 터키 군대로 다시 표트르를 위기에 몰아 넣었지만 술탄이 그를 귀찮게 여기기 시작한다. 카를은 러시아를 지배한 바이킹 시대의 영광을 거의 재현할 뻔했으나 그가 36세 나이로 전사하자 무산된다. 결과적으로 카를은 스웨덴의 무덤을 파고 강대국 러시아의 산파역만 하게 된다.
표트르는 네바강 습지에 유럽으로 통하는 화려한 도시를 세우기로 한다. 새 도시를 짓기에는 이 지역의 자연환경이 좋지 않았다. 연 평균 기온은 4.2도에 일조량은 31일 정도다. 또 매년 한번씩 홍수가 발생해서 곤혹을 치른다. 원래 습지였던 이 지역에 도시를 짓기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양의 돌을 쏟아 부어 습지를 메워야 했다. 표트르 대제는 도시에 들어오는 모든 선박과 사람들에게 돌을 가져오라는 칙령을 내린다. 선박은 크기에 따라 30kg이상의 돌을 10~30개 가져와야 했으며, 육로로 들어올 경우에는 15kg이상의 돌을 세 개씩 가져와야 했다.
▲ 표트르 대제가 발틱해를 바라보며 유럽 도시보다 화려한 도시 건설을 구상하고 있다(그림)
전국에서 차출된 농노들과 스웨덴 포로들이 습지를 메우는 데에 혹사당한다. 가혹한 자연과 고된 노동을 이기지 못하고 많은 노동자들이 사망한다. 이때 죽은 12만 명의 노동자들을 습지로 던져버렸기 때문에 이 도시에는 ‘뼈 위에 세운 도시’라는 별명도 얻는다. 이런 슬픈 역사를 뒤로하고 드디어 101개의 섬이 500개의 다리로 연결된 아름다운 ‘물의 도시’ 페테르부르크가 탄생한다. 표트르는 1713년 모스크바에서 수도를 이리로 옮긴다. 구 귀족과 종교세력은 표트르가 러시아 정신을 유럽에 팔아 먹는다고 주장하며 반발한다. 표트르는 비밀경찰에게 지시하여 그들을 잡는 대로 처형한다. 그들과 뜻을 같이한 그의 아들 황태자 알렉세이까지 아버지를 배반한 죄로 1718년에 무자비하게 처형당한다.
▲ 표트르 대제 / 표트르가 황태자를 직접 문초하고 있다.
표트르가 1725년 52세로 사망했을 때 온 국민이 기뻐한다. 그는 잔인하고, 정력적이며, 끈질긴 목표 추구형이고, 환상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는 인정사정이 없었다. 이런 형은 주위를 피곤하게 만든다. 더구나 그가 절대권력을 쥔 황제가 되면 골 때리는 상황이 연출된다. 그래서 표트르는 친 아들에게까지 배반 당한다. 그러나 표트르의 그런 성격이 러시아를 근대화 시키는 추진력이 되었다. 성군 세종대왕이 아니라도 폭군 표트르도 역사를 발전시킨다. 아이러니컬하지만 현실이다. 나는 표트르를 읽으며 영국의 헨리 8세가 생각났다. 어느 점에서 둘이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3. 유럽대회(European Go Congress)
유럽대회는 1957년에 시작되었다. 매년 7월 마지막 주와 8월 첫 주에 2주간 열린다. 월, 화, 목, 금 4일간만 대회 바둑을 두고 수요일과 주말은 쉰다. 그 동안 주말대회, 속기대회, 강의, 관광 등 다른 활동을 한다. 대회 사용시간은 한 사람이 두 시간 반이고 1일 1회전으로 진행된다. 아마추어대회를 이렇게 치르기 때문에 하루에 몇 판씩 둘 수 있는 한국사람들은 답답해 한다. 18급도 하루에 한판을 둔다. 스위스제도를 사용하여 누구나 2 주 동안에 8회전을 둘 수 있게 했다. 바둑대회라기 보다는 바둑축제란 말이 어울릴 정도로 1년 휴가를 이용하여 가족, 친지가 같이 와서 바둑 두고, 여행하고, 여러 나라 사람들을 사귄다.
▲ 바둑카페/ 대회장
심각하게 승부를 하는 수퍼그룹(Super group)도 있다. 우승을 노리는 아마 6단 이상의 강자들이 두는 곳이다. 수퍼그룹에는 유럽에서 바둑으로 한 가닥 하는 사람들만 모이기 때문에 하수들에게 이들은 경외의 대상이다. 여기에 속한 고수들은 얼굴 표정부터 달라진다. 많은 서양 바둑하수들의 꿈은 일생에 한번이라도 수퍼그룹에 들어가 보는 것이다. 이 번에는 한국 7단들이 대거 수퍼그룹에 속하는 바람에 32 명이 두는 이 그룹에 끼지 못한 6단들이 여러 명 생겼다.
▲ 점심시간에 다 나갔는데 이 두 명은 배고프지도 않은가 보다 ^^
대회가 시작된 첫 수요일에 나와 학생들은 같이 모여 회의준비를 하기로 했다. 내가 아침 9시에 회의장으로 모이라고 하고 나는 8시 반부터 나가서 기다리는데 9시 15분이 되어도 학생 열 명 중 한 명도 안 보인다. 9시 30분이 되니까 저기서 한 명이 뛰어 온다. 내가 “어떻게 된 거니?” 하니까 “죄송합니다. 저희가 어제 밤 다른 나라 선수들과 새벽 5시까지 맥주를 마셔서요. 다들 못 일어났어요” 한다. 이 말을 듣고 내가 열을 받았다.
"뭐라고? 중요한 국제회의를 앞 두고 어린 놈들이 술을 마셔서 못나와? 이 놈들 두고 보자. 너희들은 한 명도 안 쓸 테니까 이젠 아무도 필요 없다."
나는 화를 내면서 아래층 바둑카페로 내려갔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도 도저히 화가 안 풀린다.
잠시 있다가 학생들이 살며시 들어온다.“교수님 죄송합니다."라고 하지만 이미 화가 많이 난 내가“너희들 나를 더 이상 열 받게 하지 마라.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다 내 앞에서 꺼져라!”라고 소리지르니 할 수 없이 다들 카페에서 나간다.
▲ 바둑학과 학생들
조금 후에 이승현이 혼자 들어 온다. "교수님, 저희들이 해외에 나와 신이 나서 도가 지나쳤어요. 용서해 주세요.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면 앞으로는 절대 실수를 안 하겠습니다”라며 나에게 용서를 빈다. 계속 내가 화를 내도 물러서지 않고 “한번만 기회를 주세요”라며 끈질기게 기다린다. 난 승현이에게 이런 면이 있는 걸 몰랐다.
결국 내가 졌다. 학생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 한번만 더 실수하면 용서 안 한다” 했더니 합창으로 "네!" 한다. 결국 첫 주말인 27~28 양일에 걸쳐 학술대회는 성공적으로 열렸다. 테마는 ‘바둑 문화와 역사’다. 미국, 프랑스, 호주, 독일, 한국 등에서 논문발표가 있다.
4. 바둑학술대회
토요일 아침 학술대회가 시작되었다. 이번 세미나를 하면서도 느꼈지만 학문으로서 바둑은 이제 시작이다. 서양은 '학문화'의 능력이 뛰어나고 우리는 바둑이 강하다. 이것을 접목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서양인들은 바둑을 지구상에서 가장 지적인 게임으로 인정한다. 그들은 바둑 두는 대국자세부터 아주 진지하다. 서양 바둑인들은 바둑과 동양철학의 관계, 그리고 한국바둑이 어떻게 단시일 내에 세계최강이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나에게 제일 많이 한다.
▲ 발표자 소개/ 청중
개회사를 한 후 내가 발표자 한 사람씩 소개했다. “발표자 중 가장 나이가 어리고 프로기사”라고 소개 받은 남치형 교수가 박수를 가장 많이 받는다. 발표논문을 테마 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알렉세이 라자레프(Alexey Lagarev) 페트로자보스크대 수학교수
- 러시아 바둑의 역사 -
2. 얀 라몬(Jan Ramon) 벨기에 루벤대 컴퓨터학 교수
- 바둑의 컴퓨터 처리과정에 있어서의 주요 이슈 –
3. 에른스트 스트로할(Ernst Storouhal) 오스트리아 비엔나 예술대학 교수
- 바둑과 체스: 유사성과 차이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 –
4. 최일호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김진환 교수 공동연구)
- 좌표방식에 대한 연구 -
5. 드미트리 보가츠키(Dmitriy Bogatskiy) 우크라이나 대학 교수
- 바둑 데이터베이스의 이론과 실제 -
6. 클라우스 하이네(Klaus Heine) 독일 통계학 박사
- 유럽에서의 급수체계 시스템 분석 -
7. 율리히 샤들(Ulrich Shadle) 스위스 게임박물관 관장
- 게임의 성쇠: 유럽에서의 바둑보급 한계 -
8. 조전혁 인천대 경제학과 교수(정수현 교수 공동연구)
- 착수결정의 경제학적 설명: 이론과 분석 -
9. 트리스탄 까자네프(Tristan Cazenave) 프랑스 컴퓨터 공학 박사
- 바둑 교육을 위한 세 가지 프로그램 -
10. 남치형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 순장바둑의 기원 -
11. 스티븐 더프(Stephen Duff) 미국 오레곤 대학 건축학과 교수
- 바둑의 공간적 접근: 건축과 지각의 문제 -
12. 플루쉬치 유리이(Pluyshch Yuriy) 우크라이나 대학 심리학 박사과정
- 바둑에 있어 개인적 스타일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
▲의장 인사 말/ 국제회의참가자
미국 유진에 있는 오레건 주립대에서 바둑이 교양과목으로 채택되었다. 학점이 있는 서양 최초의 바둑강좌다. 스티븐 더프 교수가 강의 중이다.
그는 강의 준비 차 여러 해 전에 명지대 교수관사 내 옆방에서 열흘간 묵으면서 나와 친해졌다. 스티븐의 발표 때 영국의 옥스포드대 해리 펀리 교수가 반론을 펴길래 재미있어서 의장인 내가 둘의 논쟁을 의도적으로 부추겼다. 두 명 다 친한파에 나와 친하다. 그런데 둘이 정말 얼굴이 뻘개져서 언성을 높이며 나중엔 인신공격까지 하질 않는가? 나는 얼른 발언권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서 둘의 싸움을 떼어 놓았다.
몇 년 전 호주 웨스턴 시드니대학에서도 바둑을 교양과목으로 채택하고 한국에 강사를 요청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영어와 바둑이 강자인 사람을 구하기가 생각 보다 어려웠다.
저녁에 스티븐 교수가 나를 찾아왔는데 낮에 해리와 논쟁을 한 게 좀 찜찜한가 보다. 내가 “당신은 원래 친한 파니까 한국 팀 일원으로 들어오는 게 어떻겠나?" 했더니 얼굴이 환해지며 좋아한다. 자기는 여기에 온 미국, 캐나다 선수단이 마음에 안 들어 어울리지 않고 있다고 한다.
▲ 저녁 류식시간. 이광구, 박성균, 스티븐 뒷줄- 김종수, 정연주(얼굴 2분의1), 윤상현, 최유진
이 후부터 스티븐은 식사도, 관광도 한국팀과 같이 하고 축구경기에서 한국팀 골키퍼를 맡았다. 198cm의 거구가 몸을 날려 공을 막으니까 골인을 못 한다. 경기가 끝나고 피부가 까져서 피가 난 팔꿈치를 나에게 보이며 ‘영광의 상처’라고 자랑한다. 42세 노총각 스티븐은 42세의 노총각인데 미국의 26세의 대학원생에게 사랑 고백을 해 성공하면 나에게 연락을 하고 실패하면 연락을 안 하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간 후 아직 연락이 없다. 그가 짝을 찾아 나에게 연락이 오길 바란다.
▲ 14. 정연주, 스티븐, 필자, 이혜정/ 김상우, 필자, 박영진, 이기봉, 이광구
5. 페테르부르크 관광
주말에는 제정러시아의 수도였던 페테르부르크로 관광을 갔다. '북의 베니스'로 불리는 이 아름다운 도시에서 학생들은 마음껏 즐긴다. 암울한 잿빛의 페테르부르크가 바둑학과 학생들이 뿜어내는 생명력 앞에선 밝아 보인다. 젊음이 좋다. 우리는 과거 겨울궁전으로 러시아 역사의 현장인 에르미타지(겨울궁전) 박물관, 예술의 중심 마린스키 극장에도 가고 배를 타고 운하도 돌았다.
이 곳 출신인 문호 도스토에프스키, 시인 푸시킨, 음악가 차이코프스키가 활약하던 거리와 장소들을 우리 일행이 휘 젖고 다녔다. 현재 활약하는 이 곳 출신도 많다. 1941년부터 3년간 독일군과 싸우고 살아남은 남녀가 결혼하여 난 아이가 푸틴으로 러시아 대통령이 된다. 메드베데프 현 대통령도 페테르부르크 출신이다. 고려인 가수 빅토르 최가 한국인으론 가장 유명하다.
▲ 장비 & 이승현/ 신나게 놀더니 약골 강나연이 코피 터졌다.
표트르가 독일에 호감을 갖고 있어 '표트르의 마을'이란 뜻으로 페테르부르크가 된다. 부르크는 독일어로‘성곽’이란 뜻이다. 그러나 1914년 독일과 적대관계가 되면서 이름을 페트로그라드로 고쳤다가 레닌이 1924년 사망하자 그의 이름을 따서 레닌그라드로 고친다.
1991년 다시 옛 이름인 페테르부르크가 된다. 인구는 5백만 명으로 러시아에서 두 번째, 유럽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다. 학술, 문화기관이 많고 시내 중심 부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페테르부르크엔 도시 미관상 높은 건물을 못 짓게 하고 있다. 러시아 정교 중 피의 성당, 성 이삭성당, 카잔 성당 등 아름다운 교회가 여러 개 있다.
▲ 피의 성당/ 성 이삭 성당
▲ 지하철
▲ 네바 강(江) 하구
▲ 네바 강의 밤
6. 모스크바 방문
두 번째 주 수요일에 나는 학생들에게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를 구경시켜 주기로 결심한다. 학생들이 세미나를 위해 고생도 많이 했고 러시아에 왔으면 모스크바를 구경해야지 못하면 한국에 와서 서울을 구경 못한 거나 다름 없다. 그런데 한국 사람, 러시아 사람 누구나 나를 말린다. 수요일 하루만 쉬는데 1천 km가 넘는 곳에 어떻게 가서 구경을 하고 돌아올 수 있겠느냐며 나에게 '무리 수(Over play)'를 두지 말라고 한다.
나는 경상도 사람은 아니지만 ‘하면 한다’는 고집으로 수 읽기를 거듭했다. 나는 그만큼 학생들에게 모스크바를 보여주고 싶었다. 무리수가 통할 때 쾌감을 예상하면서…….
▲ 내가 표를 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김종수씨, 필자
계속 여기저기 알아 보면서 나는 학생들이 젊으니까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는 월요일 대회가 끝난 후 학생 10명을 인솔하고 버스로 페테르부르크로 갔다. 화요일 밤 야간열차를 예약하여 표를 사서 나누어 주고 나는 그 길로 모스크바행 기차를 탔다.
학생들이 모스크바에 올 때까지 55세의 늦깎이 학생 김종수씨에게 인솔책임을 맡겼다. 그는 영어도 잘하고 외국경험도 많다. 그에게 수요일 새벽에 모스크바역에 도착해서 레닌 동상 앞으로 학생들을 데려오라고 했다.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같은 큰 도시는 자기네 만의 개찰구가 역마다 따로 있다.
▲ 페테르부르크 기차역/
모스크바에 먼저 온 나는 버스를 한대 예약하고 러시아 안내원도 구했다. 모스크바 강 유람선 표도 미리 사 두었다. 한국 민박집에 수요일 아침밥상 10여명 분을 차려 놓도록 했다. 그 집 깍두기와 국이 맛이 있어서였다. 나는 수요일 새벽 6시 반에 모스크바 역에 나가 '정말 잘들 올까?' 하고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다.
아침 7시에 멀리서 학생들이 오는 게 보이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그런데 여학생 한 명이 나에게 와서 "밤새 오는 열차 안에서 이승현이하고 홍슬기가 커플이 됐어요" 속삭이는 말로 일러바친다. 나는 곧 민박 집에 가서 일행에게 아침부터 먹였다. 열흘쯤 한식을 못 먹은 학생들이 허겁지겁 맛있게 먹는다.
▲ 모스크바 역
식사 후 내가 잘 아는 예술의 거리 '아르바트'에 먼저 가서 학생들과 걸어 다녔다. 이후 붉은 광장, 굼 백화점을 비롯해 모스크바 유명관광지를 다 돌아 보고 모스크바 강을 도는 유람선도 두 시간쯤 탔다.
'그리스도 성당’에 갔을 때 장비가 반바지를 입었다고 걸렸다. 나는 누가 먼저 얼른 보고 나와서 바지를 빌려주라고 해서 해결했다. 다만 크레믈린 궁이 수리 중이라 못 들어간 게 아쉬웠다. 버스 안에서 내가 안내원에게 ‘톨스토이’ 집에 가자고 하니까 장난감 가게에 버스를 댄다. 안내양이 ‘Toy’ 만 알아 들었다. 내가 소설가 톨스토이라며 이름을 쓰자 깜짝 놀라며 “오! 딸스뚜이” 한다. 그리고 보니까 러시아어로는 발음이 그렇게 된다.
▲ 모스크바 관광버스 최유진, 김종수, 안내양, 이혜정/ 모스크바 강 표트르 동상. 서재학
▲ 모스크바 강 유람선에서 보는 모스크바
▲ 러시아교회/ 모스크바 강
89년에 내가 왔을 때에 비해 러시아는 다른 나라가 되었다. 자본주의 영향을 받아 모든 게 변했다. 특히 물가가 너무 비싸다. 내가 물가대조표를 보니까 89년에 비해 4천 3백배 이상이 올랐다. 그래도 아직은 서구유럽 보다는 싸다. 그러니 1989년에는 물가가 얼마나 쌌는지 짐작해 보라. 미화 100불만 있으면 재벌처럼 행세할 수 있고 미화 만 불이면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좋은 아파트를 한 채 살 수 있었다. 지금은 다 백만 불 이상이다. 아직도 '그 때 한 채 사둘 걸'이라며 후회된다. 우리는 하루 종일 모스크바 시내를 누비고 다닌 후 밤 11시에 무사히 페테르부르크 행 기차를 탔다.
▲ 모스크바
다음 날 새벽에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대회장에 오니까 아침 9시다. 시간이 내가 수읽기 한 그대로다. 학생들은 각자 방으로 가서 씻고 아침도 먹고 무사히 대회장에 시작시간 열 시까지 전원 착석했다. 이날은 우리 팀의 승률이 유난히 좋은 날이기도 했다. 나는 모스크바 여행에 대해 보람을 느끼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우승 홍슬기/ 준우승 장비/ 시상식
7. 한국인 유럽대회 석권
2003년 유럽대회는 한국인 잔치였다. 2주간 대회가 끝나고 성적이 나왔다. 홍슬기가 우승, 장비 준우승, 박성균 3위, 이기봉 4위 등 우리가 상위는 휩쓸었다. 사샤는 5위로 유럽인 중 제일 성적이 좋아 유럽챔피언이 되었다. 상금도 오픈 챔피언 보다 훨씬 많이 받는다. 사랑하면서 서로 기(氣)를 받았는지 이승현도 7위에 올랐다. 오랜 연애 끝에 슬기와 승현이는 2010년 내 주례로 결혼한다. 김선기 8위, 강나연 11위, 서재학 14위, 박영진 16위, 윤상현 17위를 한다.
▲ 사샤/ 스베타/ 자오페이
유럽대회 참가자 중 유명한 인물들이 있다. 프로기사는 타라누 5단, 사샤 3단, 스베타 초단이 선수로 참가한다. 사샤와 스베타는 카잔 출신으로 동갑이고 한국에서 프로가 되었다. 천풍조 사범이 그들을 발굴하여 한국에 데려왔다. ‘유럽 바둑의 꽃’이라는 자오페이 독일챔피언도 있다. 그녀는 중국 소년/소녀 위기단 출신으로 14세에 가족과 함께 독일로 이민 왔다. 그녀는 바둑도 강하고 미모도 뛰어나 인기를 한 몸에 모으고 있었다. 명지대 바둑학과에 다닌 프랑스 청년 크리스토프의 여자친구다.
이혁 6단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연대를 나온 후 러시아에 유학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41회 유럽대회부터 3회 우승하고 러시아 1인자로 군림하며 한국바둑의 위력을 알리고 있었다. 그는 키가 커서 덩치 큰 슬라브족 사이에서도 큰 편에 속한다. 7년 후 2010년 유럽대회에서 다시 한국이 1~4위를 석권한다. 내 제자들인데 다 연구생 출신이다. 서로 물고 물리며 다른 나라 사람에게는 한 판도 안 내주고 나란히 6승 2패를 한다.
▲ 2010 그로닝엔 유럽대회를 석권한 얼굴들. 좌로부터 오치민, 김준상, 황인성, 김은국(우승)
▲ 분수궁전으로 불리는 페테르고프궁전. 박영진
8. 페테르고프 여름궁전
표트르대제가 별궁으로 지은 여름궁전. 1723년에 완성되었다. 건축가는 프랑스인 장 바티스트 르블롱이다. 표트르는 페테르고프 여름궁전을 파리의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더 아름답게 꾸미기를 원했다. 이런 황제의 뜻에 따라 밟으면 물이 나오는 ‘장난꾸러기 분수’, 사람이 내부로 들어가면 물에 커튼이 쳐지는 ‘우산 분수’ 등 147개의 분수와 고대 그리스 신들과 신화에 나오는 영웅들의 조각상을 260여 개나 만들었다. 그래서 여름궁전을 분수정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1770년 예카테리나 여제가 대대적으로 개수공사를 하여 표트르 당시 모습은 조금만 남았다.
▲ 분수광장
9. 예카테리나 여제
엘리자베타 여제는 표트르의 무능한 손자 표트르 3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대신 그녀는 그에게 머리가 좋은 소피아(Sophia)를 배필로 삼아서 그 결점을 보완했다. 궁정의 소요와 반역사건이 일어났고 그 와중에 무능한 표트르 3세가 쓸모 없는 목숨을 마감한다. 남편 대신 소피아가 여차르에 올라 예카테리나 2세가 된다(재위 1762-96).
정통성이 부족한 예카테리나 2세는 높은 지능 외에도 여자로서의 자기 몸을 투입하여 흔들리는 지위를 확고히 한다. 이로서 역대 총리들과 많은 외교관들은 그녀의 애인이 됐다. 일설에는 250명 가량이었다고 한다. 그녀의 애인 중 특히 영주 포템킨은 세트 마을을 만들어서 화사한 신기루의 경치를 여차르 앞에 펼쳐 놓음으로써 후세에 까지 유명해 졌다.
예카테리나는 우수한 인간이고 볼테르의 기질이 섞인 계몽철학자였다. 그녀는 볼테르를 비롯한 수 많은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서신을 왕래한다. 정치적으로 그녀는 표트르대제의 개혁을 속행시킨다. 그녀는 고문을 폐지하고 종교자유를 주었으며 많은 학교 특히 여성학교를 세운다. 병원을 세우고 몸소 먼저 천연두 주사를 맞았다. 본인이 직접 오페라, 시, 희곡을 쓰고 역사 책을 편찬했다.
▲ 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내부
▲예카테리나 여제/ 재위 6개월 만에 사망한 표트르 3세
예카테리나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와 스웨덴의 크리스티나와 나란히 역사상 위대한 여성 통치자 중 하나로 꼽힌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와 예카테리나 2세의 치하에서 근대화 작업을 치르고 강대국으로써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 Group photo 1
▲ 러시아 바둑협회가 마련한 한국팀 환송만찬
▲ 러시아 회장(중앙) 환송사를 부회장이 영어로 통역/ 여학생들도 건배 “위하여!”
▲ 9X9 줄 바둑 8강전. 이광구씨를 만나다/ 버스 이동
▲ 친선 대국 팀이 우리를 맞는다/ 친선대국 중
▲ Pair Baduk 이승현/ 정연주 VS 최유진/ 스위스 챔피언
▲ 러시아에선 초보자는 무료로 가르친다. 10개의 바둑대회 중 여성대회, 어린이대회도 있다.
▲ 시베리아 개 썰매
10. 러시아 대평원
러시아 대평원은 모스크바에서 파리까지 1천 km미터 이상 높은 산이 없다. 자연 장애물이 없어 북극한파를 막지 못하고 산, 강과 같은 자연국경이 없어서 외부 침공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지리적 조건은 ‘외국인 공포증(Xenophobia)’을 야기 시킨다. 독일도 이런 점에선 비슷하다. 이런 공포증을 가진 국가는 자기네가 힘이 세어지면 주변국가를 먼저 침략하는 성향이 있다. 러시아의 서편 아시아 쪽으론 높은 산도 있으나 페테르부르크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1만 km를 겨울엔 개 썰매로만 갈 수 있다.
▲ Group Photo 2
▲러시아 국기/ 국장
1989년 내가 처음 왔을 때 러시아는 역사의 진통기를 맞고 있었다. 모든 게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나는 1개월 반 동안 러시아에 대해 좀 더 많이 알아 보는 일에만 열중했다.
그러나 이번엔 바둑 팀과 24시간 밀착 되어 있어서 바둑활동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다만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벗어 버린 러시아는 KGB출신 푸틴이 대통령이 되어 사회를 잘 통제하고 있는 걸 느끼겠다. '강한 러시아'를 표방하고 나선 푸틴이 이끄는 러시아가 어디로 갈지 두고 볼 일이다.
여기서 러시아 편을 마친다.
한상대(전 시드니대 교수 sdha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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