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총걸음]
패자가 없는 아름다운 승부
제3회 비씨카드배 결승을 지켜보며
김지은2011-04-27 22:11:23
영화 관람을 좋아하는 기자가 영화를 선택할 때 작품성 못지않게 중요시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출연하는 배우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영화 속에서 작품보다 등장배우에 반해서 나온 기억은 누구나 있지 않을까. 영화를 본 후 "아. 저 배우는 어떻게 저 캐릭터를 저렇게 멋지게 소화할까?" 호감을 갖게 된 그 배우에 대해서 찾아보게 되고 그래서 익숙해지면 나중에는 그 배우가 출연하는 작품에는 자연스레 호기심이 생긴다.
조금 더 그 배우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되면 싫어하는 장르의 영화라도, 흥행과는 거리가 먼 영화라도 그 배우가 출연하기 때문에 꼭 보게 된다. 여기에 영화의 작품성까지 더해지면 정말 그날은 종일 행복해진다.

비유 대상이 조금 다르지만 지난 3월 23일부터 치러지고 있는 제3회 비씨카드배 월드바둑챔피언십 결승전을 눈여겨보는 많은 바둑팬 또한 기자와 비슷한 마음이 아닐까.
세계 최다 우승상금 3억원이 걸려 있는 무대도 무대이지만 한국과 중국을 대표하는 기사들이자 현재 세계최강자로 꼽히는 이세돌과 구리의 대결이기에, 또 그들이 바둑에 녹여내는 그들의 존재감 때문에 기자를 비롯한 많은 바둑팬은 그들의 대결 자체를 기대하고 열광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듯이 예상만큼이나 그들이 펼치는 반상드라마는 바둑팬들을 점점 더 결승전에 몰입하게 하고, 아니 한 발 더 나아가‘바둑’이라는 존재 자체에 열광하게 하고 있다.
아마추어들이 신처럼 여기는 프로기사들조차 쉽게 맞추지 못할 정도로 자유로운 발상. 큰 승부에 임하고 있음에도 국면의 유불리를 떠나 자신의 수읽기를 믿고 전투를 진행하는 대범함, 마지막 공배가 메워지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해서 승부를 확인하게 만드는 치열함.
바둑을 보는 데 가슴이 설렌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대국은 또 다른 상황을 맞이하고, 이제 정리가 됐겠지 싶으면 또 다른 전쟁터에서 피가 튀긴다. 어느 한 쪽이 유리해 보이다가도 불과 몇 수 뒤에 어떻게 전개될지 지켜보게 되고, 어떻게 저런 수를 생각해낼 수 있을지, 과연 그들의 수읽기의 한계는 어디까지일지 궁금해지는 이번 대결.
이렇게 쉽게 눈을 떼기 어려울정도로 재미있고, 마지막까지 검토하는 프로기사들에게 ‘누가 좋아요?’라고 닦달(?)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점입가경은 아무래도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특히, 3국과 4국은 정말 뒤집힐 것 같지 않은 승부가 뒤집혀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착각에 들게 만들었다. 구리의 끝내기 착각을 잘 포착한 이세돌의 대역전 반집승(3국), 초읽기 속에서도 이세돌의 집요한 공격을 피해 멋지게 살아낸 구리….
▲중국 검토단. 오른쪽 맨 앞이 장주주, 그 옆이 루이나이웨이.
끝까지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이 드라마 같은 바둑에 타이젬 회원들의 관심도 점점 높아져 동시접속자 3만명을 뛰어넘었다. 결승 1~4국이 치러지는 내내 검토실을 지키던 장주주-루이나이웨이 부부는 "우리는 이세돌과 구리를 가장 좋아한다. 그들의 바둑은 어렵지만, 너무나 재미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2:2 팽팽한 줄다리기. 이제 우승에 대해 단 한 판만이 남았다. 28일 오후 1시 같은 장소에서 치러지는 최종국에서 이세돌과 구리 중 과연 어느 기사가 승리할까. 4국 현장에 있던 전문가들에게 의견을 물어봤다.
최종국을 누가 승리할지 장담하기 어렵다. 정말 예상하는 자체가 힘들다. 5번 승부를 해 본 기사로 4국이 이기는 사람이 유리한 것이 기세상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국이 너무 난전이라 예상하기 어렵다. - 유창혁 9단
팽팽하다. 당일 컨디션은 이미 올 때까지 온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다만 이세돌은 자신을 극단적인 위기 속에 넣었을 때 괴력을 발휘한다. 그의 냉철한 승부호흡을 믿는다. - 진재호 바둑평론가
3국에 대역전패를 당한 구리가 4국에서 냉정을 찾고 대국에 임해 승리했다. 최종국 전 대국을 이긴 구리가 심리적으로 유리할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대국에 임한다면 마지막 대국에서도 승리하지 않을까. -중국 체단주보 씨에루이 바둑전문기자
명승부답게 전문가들의 승부예측도 다양하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번 비씨카드배의 상징적인 승자는 있을지는 모르나 패자는 없다. 확실한 것은 잠시 멈췄던 서로를 인정하는 그들의 승부가 이제 막 시작된 것 뿐이며, 이 글을 읽고 있는 바둑팬은 세월의 흐름 속에 더욱 성숙해질 그들의 명승부를 감상하는 일만이 남았다는 것이다.

구리와 많이 두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많이 두어야 할 기사이고…. 구리는 너무나 즐겁게 둘 수 있는 기사다. 이전 나에게 이창호 9단이 목표고, 즐겁게 둘 수 있는 기사였다면 지금은 구리가 그렇다. 그래서 이번 비씨카드배는 승패를 떠나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이세돌
나 역시 이세돌 9단과 함께 대국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LG배에서 내가 우승했지만 운이 따르는 등 여러 요소가 있었다. 이후 이세돌이 휴직을 선언해 이세돌을 따라가야 할 목표로 생각하고 있던 나로서는 상실감이 컸다. 그래서인지 지난해 성적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이제 이세돌이 돌아왔고 성적도 좋아 기쁘게 생각한다. 나도 즐기면서 열심히 두겠다. -구리
지난 결승 직전 기자회견 인터뷰다.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이미 이세돌과 구리는 승패를 떠나 서로를 진짜 라이벌로 인정하고 대국 자체를 준비하고 있었다.
▲구리가 인터뷰하는 사이 홀로 복기를 하고 있는 이세돌.

▲인터뷰 후 다시 이세돌 앞으로 향하는 구리.
매판 끝날 때마다 수많은 변화도를 놓아보며 반상에서 소통한 이세돌과 구리. 제4국에서도 이세돌이 패배를 선언한 순간. 언어의 소통이 원활하지 않음에도 이세돌과 구리는 빠른 손놀림으로 그들만의 대화를 나눴다.
바둑TV 승자 인터뷰로 잠시 그들의 대화가 중단되기도 했지만, 구리는 인터뷰를 마친 후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다시 이세돌이 복기하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패배 때문에 아쉬워하던 이세돌은 복기가 마무리될쯤 표정이 굉장히 밝아졌다. 복기까지 마친 이세돌과 구리는 "2:2가 되었으니 최종국에서 멋지게 둬보자"라고 악수하며 일어섰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진정 승부를 즐기고 있는 그들의 대결에 패자는 없다. 이제 몇 시간이 남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마음은 서울 홍익동 바둑TV 스튜디오에 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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