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으로 돌아간다는 뜻의 서귀포. 유래가 어찌 됐건 들어오고 떠나가는 인연이 애틋한 곳. 서귀포의 어린이들에게 우리가 꿈 한 자락이라도 전해주었다면 다행스런 일. 비 내리는 와중에도 인코 배 제주 어린이 바둑대회는 무사히 막을 내렸다.
요즘 제주 어린이들의 바둑 열기가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제주도의 기원들이 하나 둘 문을 닫고 그나마 남은 곳도 바둑손님들이 많지 않아 지적 놀이터 구실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의 바둑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아 그 영향이 어린이들에게 미치고 있는 것. 그나마 최근 제주도 출신 오정아 양이 프로에 입단해 제주도의 잠재력을 떨쳤다. 이 아이들 중에도 제2의 오정아가 있겠지.
행사가 끝날 무렵 천천히 걸어서 새섬을 향한다. 새연교에서 바라본 서귀포 항은 비에 젖어 있었다.
서귀포에 몇 번이나 왔을까? 헤아리기 힘들 만큼 자주 들렀지만 기억의 포커스는 대학생 시절의 무전여행으로 맞춰진다. 영화학도였던 시절 단편영화 필름을 가득 들고 전국의 소극장을 순회하며 상영했었다.
그 마지막 여정이 서귀포였다. 여비가 바닥나 무작정 서귀포 항으로 내려가 멸치잡이 배를 탔다. 새섬과 외돌괴 연안을 돌면서 칸델라 불을 켜서 멸치를 유인해 그물로 잡는 근대적 어업의 아르바이트. 토박이 어부들에게 무진장 혼나면서 그물을 끌어올렸던 스무 살의 내가 생각난다.
S#2. 이중섭 거리에서
바람 불어 좋았던 스무 살의 그 시절, 서귀포의 거리는 소박했다. 시가지에서 항구로 이어지는 언덕길 어디에서나 바다가 보였고 바람이 들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 걸었던 그 길이 이중섭 거리로 단장되어 있었다.
천재화가 이중섭은 한국전쟁 때 원산에서 월남해 서귀포까지 피난왔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의 초가집에서 방 한 칸을 얻어 거주하며 낙엽과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일본여자 마사코와의 결혼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첫 아이가 디프테리아로 숨지자 이중섭은 울면서 아이의 관 속에 많은 그림을 넣어주었다. 아마도 그 부장품 그림이 발견된다면 엄청난 화제가 되리라. 아내가 둘째와 함께 일본으로 떠나자 이중섭은 그리움에 몸서리를 친다. 서귀포, 통영, 부산 등 가족이 보이는 바닷가를 전전하며 별리의 아픔을 화폭에 담았다.
1954년 친구들의 도움으로 미도파 백화점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성황을 이루고 많은 그림이 팔려 화가로서 가장 행복한 정점을 찍는다. 그러나 전시회를 통해 얻은 그림 값은 전액 술값으로 지불되고 파산하면서 폐인이 되고 만다. 그리고 1956년 마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중섭이 서귀포에 머물렀던 시기는 1951년의 7개월이 전부다.
그런데도 항구로 향하는 언덕길 한 블록에 그의 이름이 붙었고, 기념관이 지어졌으며 살던 집이 복원됐다. 모차르트의 존재로 잘츠부르크가 회생했듯, 이중섭의 자취로 서귀포도 생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이중섭, 자신도 그리움에 사무치고 훗날 우리에게도 그리움의 화두를 던진 아름다운 사람이다.
S#3. 슬퍼서 아름다운 누나
바로 그 이중섭 거리에 필자의 누나가 살고 있었다. 60년대에 돌아가신 큰아버님. 그래서 가문이 몰락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던 큰집의 누나다.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어떤 일을 하고 사는지도 몰랐다. 스무 살 시절 서귀포에서 멸치잡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바로 그 때였는데 부모님과 통화하다가 큰집 누나의 소식을 들었다.
▲ 누나와 두 조카며느리가 합세해 삼겹살을 굽고 있다.
서귀포의 포구라는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는 거였다. 간판만 보고 언덕길을 오르내리다가 마침내 ‘포구’를 찾았다. 늦은 밤이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니 그녀가 보였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물끄러미 나를 응시했다. 이름을 밝히니 눈동자에 가득 이슬이 고였다. 그리고 펑펑 울기 시작했다.
▲ 누나의 아들. 횟집 사장이다.
평생 처음 보는 사촌인데 저리 반가울까? 그땐 그녀의 눈물에 쉽사리 공감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서 핏줄을 처음 만났다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도 울고 말았다. 지나온 걸음마다 시련이 가득했던 누나. 그녀를 이번 바둑여행에서 다시 만났다. 바둑사절단이 머물고 있는 숙소 바로 앞 건물의 노래방 사장님이었다. 악착같이 일을 해서 횟집을 냈고, 어느 정도 성공한 뒤 식당은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 노래방을 낸지 한 달이 되었다고 했다.
▲ 호사를 누리고 있는 필자의 손.
아바사 사범님들과 찾아가 노래를 불렀다.
“누나한테 한 곡 불러줄래?”
그녀가 노래를 신청했다. 뭘 부르지? 문득 서귀포의 해당화와 스무 살의 첫 만남, 그리고 슬퍼서 아름다운 서귀포 누나의 청춘이 떠올랐다. ‘봄날은 간다’를 불렀다. 처음 그때처럼 착한 누나가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지켜보던 임동균 7단이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도 이북출신 실향민이라고 했다. 그러나 노래가 끝난 후 누나가 끓여온 라면을 먹으면서 우리는 활짝 웃었다.
S#4. 도민체전
다음 날 우리는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을 찾았다. 도민체전 바둑선수단을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120명이 참가한 바둑대회.
우리는 결승전이 진행되는 동안 탈락자들과 지도기를 두었다. 제주바둑협회가 마련한 만찬. 그 식당이 새내기 프로 오정아 양의 고모 집이라고 해 박수가 터졌다.
S#5. 우리들의 봄날
빠듯한 일정이지만 길 가는 틈틈이 우리는 차에서 내려 바람을 쐬었다. 제주도의 풍광은 동심과 닿아 있었다. 무엇인가를 전해주고 싶어 찾아왔다고 하지만 막상 오면 무엇인가를 얻어가는 게 여행이리라.
이제 아마추어 기사들의 판도도 많이 달라진 게 사실이다. 원생 출신 주니어 기사들의 기력은 프로와 버금간다. 시니어 기사들의 입지가 좁아졌지만 찾아보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가득하다. 제주 바둑여행이 그 길의 한 갈래가 아닐까?
젊은 아마기사들도 눈 여겨 봐야 할 풍경이다. 봄날은 대책 없이 흘러간다. 피었던 꽃이 지고 불렀던 노래는 바람으로 흩어진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라도 순정만 가득하다면 꽃의 향기와 노래의 기운은 또 다시 누군가의 봄을 따뜻하게 적셔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