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바둑사]
바둑이 맺어준 천생연분
1981년 공식 바둑연맹이 탄생한 벨기에
한상대 교수2011-05-08 02:54:24
▲브뤼셀 시청 앞. 김선기, 홍승희, 에넌베어, 필자, 홍준범, 조창삼
1. 브뤼셀 바둑클럽
벨기에 바둑회장 에넌베어(Jean-Denis Hennebert)씨가 브뤼셀 시청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기로 했다. 주차하고 시청 앞에 가니까 키 190cm의 에넌베어씨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긴다. 저녁 바둑클럽 행사까지는 아직 3~4시간 여유가 있다. 나는 그에게 그 동안 브뤼셀 구경부터 먼저 시켜 달라고 했다. 사실은 우리가 서 있는 그랑플라츠가 '관광 1번지'다. 내가 1983년 처음 이 곳을 와본 후 반해서 브뤼셀에 올 때마다 찾는 곳이다. 12세기부터 개발된 이 광장은 중세에는 각 종 시장(市場)이 섰고 상업의 중심지였다.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폴랑드르로 한 나라였을 때는 유럽무역의 중심지였다.
광장에 들어서면 중세의 큰 건물들이 걸어 들어 오는 사람을 압도한다. 바로크 식 화려한 장식을 한 큰 건물이 브뤼셀 시청사다. 1401~55년 사이에 지었다고 한다. 세로 110미터, 가로 68미터의 이 광장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다. 노트르담의 꼽추와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이 곳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칭송했다. 네덜란드가 실시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 뽑기 투표에서도 그랑플라츠가 우승,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이 2위를 한다.
광장 주변 골목에는 생음악과 분위기 있는 식당, 카페들이 많다. 몇 년 전 비 오는 날 나 혼자 광장에 갔더니 전체가 꽃으로 덮여 있다. 자세히 보니까 우리 집 응접실에 있는 벨기에 카펫(Rug)과 같은 무늬다. 수 만개의 화분을 늘어 놓아서 거대한 그림을 그렸다.
▲그랑플라츠(Grand Place). 꽃으로 된 카펫. 왼쪽 건물이 시청
▲브뤼셀 시청(95 미터) Brood huis(빵집)
선기가 이 광장에 들어 오더니 놀라며 처음 왔다고 한다. "작년에 왔잖아!" 하니 "여기는 안 왔어요" 한다. 2003년 페테르부르크 유럽대회가 끝나고 나는 18명의 명지대 팀을 인솔하고 여기에 왔다. 선기도 그 중 한 명이다.
내가 옆 골목에 버스를 주차한 후 전원에게 그랑플라츠를 돌아 보라고 1시간을 주었다. 대부분 학생들은 나를 따라 이 광장으로 들어왔는데 이광구씨, 이기봉 사범, 김선기 3 명은 맥주로 목을 추기러 근처 팝에 들어갔다. 그들은 맥주를 마시다가 우리 일행이 돌아 오는 걸 보고 거기에 합류해서 버스로 돌아왔다. 결국 그 세 명은 자기네가 맥주 먹은 곳이 글랑플라츠로 알고 있었다. 선기가 “다시 와서 이 곳을 보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 했네요” 하며 웃는다.
▲김선기, 에넌베어, 필자, 홍준식, 조창삼. 시청 앞
▲여행을 같이 한 5명/ 벨기에 회장이 환영사를 하고 있다.
2. 운명의 장난
우리는 에넌베어 회장의 안내로 왕궁과 박물관에 가고 브뤼셀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도 갔다. 관광이 끝나고 바둑클럽에 오니까 바둑인 약 20명쯤이 우리를 반긴다. 그 중 김사장(Pierre Kim)이라는 3단 두는 우리 동포도 있다. 이 곳에 산지 20년이 넘는다고 한다. 친선대국을 할 때 벨기에 챔피언 얀 라몬(Jan Ramon)은 선기에게 선으로 대국하도록 하고 나머지 사람은 되도록 다면기를 두도록 했다. 나중에 저 뒤에 청년 두 명이 서 있길래 승희에게 “젊은 친구들이니까 네가 가서 한 수 지도해라” 하고 보냈다. 바둑 TV PD인 승희는 4단이다. 그런데 그 순간이 승희의 운명을 바꿀 줄이야……. 그 중 한 명인 벤자민 지고(Benjamin Gigot)와 승희가 눈이 맞은 것이다. 인간의 운명은 뜻밖의 장소에서 묘하게 방향을 바꾼다.
▲승희/ 벤자민(우측)
▲벤자민(우측)/ 벤자민(좌측 안경)
나중에 유럽여행이 끝나고 승희에게 “어디가 가장 인상적이었니?” 하니까 서슴지 않고 “브뤼셀이요” 한다. 파리를 비롯하여 그 많은 도시를 돌았는데 대답이 너무 확고해서 나는 내심 의아하게 생각했다. 나중에 벤자민이 승희를 찾아서 한국에 왔을 때야 눈치 없고 둔한 나도 앞뒤를 알게 된다. 내가 이 글을 여기까지 쓰고 있는데 승희가 전화했다. 내가 "지금 너하고 벤자민 얘길 쓰고 있는데 이런 우연이 있니?" 라고 했더니 "정말이요? 벤자민과 3월 26일로 결혼 날을 잡았어요. 전통혼례로 하려고요. 교수님 그 때 외국 안 나가시면 모시려고요. 이번 금요일에 댁으로 인사 드리러 가도 되요" 한다.
3. 인간승리
얀 라몬(Jan Ramon) 얀은 인간승리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시각 장애자로 모든 사물이 뿌옇게 보이는 얀은 바둑을 둘 때 얼굴을 판에다 5~10cm 나 가까이 대야 한다. 저렇게 해서 "어떻게 판 전체의 형세를 알 수 있을까?" 생각 되지만 그는 정확히 판단한다. 그는 현재 5단으로 벨기에 챔피언이다. 또 컴퓨터 분야에서 벨기에를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그의 부인 린도 컴퓨터 전문가다.
내가 몇 년 전 그의 아버지와 전화로 애기 하면서 얀의 인간승리 얘기를 했더니 그의 아버지가 너무 좋아하면서 나와 한번 만나고 싶다고 한다. 한번은 내가 운전하고 얀네 집에서 30km 떨어진 브뤼셀로 갔다. 얀이 지도를 읽느라고 사용하는 돋보기는 글자가 수 십 배 크기로 보이는 특수제품이다. 내가 운전하면서도 읽을 수 있었다.
얀이 제 1회 국제바둑학술대회 벨기에 대표로 왔을 때다. 홍익동 한국기원 뒤편 한식집에서 식사를 하는데 내가 외국대표들에게는 다 비빔밥을 시켜주었다. 나중에 안내를 맡은 여학생이 웃느라고 말을 잘 못 한다. 알고 보니 얀이 비빔밥에서 반찬 하나씩 따로 먹고 매운 고추장도 땀을 흘려가며 다 먹더니 끝으로 밥을 반찬 없이 먹었다고 한다. 비비는 걸 아무도 안 가르쳐 주어서 그 주위 외국 사람들은 다 그렇게 먹었다고 한다. 신경을 못 쓴 내 실수였다. ^^
▲브뤼셀 바둑클럽 회원들. 필자 옆이 챔피언 얀 라몬 교수.
조금 후 식당 종업원 한 명이 오더니 도와 달라고 한다. 외국인 한 명이 부엌에 들어와 그릇마다 얼굴을 갖다 데고 있다고 한다. 가서 보니까 얀이 그러고 있다. 내가 “뭐하느냐?”고 묻자 “화장실을 찾는 중”이라고 한다. 누가 이 편으로 가라고 했는데 눈이 안 보이는 얀이 부엌으로 잘못 들어온 거다. 2001년 얀이 자기가 3단이라고 하길래 내가 속으로 이 친구는 눈이 안 보이니까 약할 거라고 생각해서 “5점을 깔라”고 했다가 내가 6연패를 하며 치수가 석 점으로 삽시간에 내려가 체면을 구긴 적이 있다.
▲선기와 얀 라몬/ ‘미친 할머니’란 별명의 바둑협회 재무
4. 미친 할머니 재무
이름은 잊었지만 ‘미친 할머니(Mad nanny)’란 별명으로 불리는 바둑협회 재무가 있다. 67세인데 벨기에 바둑인 중 명물이라고 한다. 직업이 시나리오 작가라고 하는데 담배 피우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지적 수준이 꽤 높다.
그녀가 식사하면서 나에게 어느 프랑스 영화 얘길 하는데 꼭 내가 1970년대 초에 서울에 있는 프랑스 대사관에서 본 영화 같다. 내가 “혹시 인간혐오(misanthropy)란 영화냐?" 했더니 너무 놀란다. 자기 외에 그 영화를 본 사람을 처음 만난다고 한다. 사실 나는 그 영화가 17세기부터 유명한 연극을 영화화한 거라고 해서 봤는데 쓸데 없이 심각하고 재미 없어서 지루했다. 이 할머니는 그게 그렇게 명화라고 한다.
이날 밤 그녀가 회장에게 말해 내 숙소를 자기 집으로 바꾸어 놓더니 바둑 모임이 끝나고 나를 한 시간 이상 왕궁, 유명한 거리로 함께 다니며 쉬지 않고 설명한다. 나는 오늘 새벽부터 500km를 차로 달려오고 오후에 관광, 식사, 친선대국으로 피곤해 죽겠는데 이 할머니는 아랑곳을 안 한다.
그녀의 집에 가니까 응접실에 인간혐오 포스터가 붙어 있다. 거기서도 홍차를 한잔 타 내오더니 시나리오 얘길 시작한다. 내가 잘못 걸렸다. 그래도 차에서 한 5분 깜박한 덕에 훨씬 나아졌다. 나에게 최선을 다하는 할머니를 실망 시키지 않기 위해 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밤이었다.
▲왕궁
5. 여행 일정
폴란드 투홀라(Tuchola)에서 열린 ‘2004 유럽바둑대회’가 끝난 후 나는 스웨덴 렉산(Lesand)에서 열리는 바둑대회도 참가하고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자동차로 돌아 보기로 했다. 프랑스제 르노(Renault) 9인승 미니버스를 한대 빌리고 내 제자 중 김선기와 홍승희가 같이 가기로 했다. 두 명 다 재학생 시절에 나와 해외여행을 해 본 경험이 있다. 다음 날 오로미디어 측에서 조창삼 사장과 홍준식씨가 합류했다. 나는 독일,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로 여정을 잡고 가는 길에 있는 도시의 바둑클럽에 미리 연락을 해 두어 우리가 가면 바둑행사를 준비하도록 하고 Home-stay도 같이 부탁했다. 운전은 주로 선기가 했다.
벨기에에 들어와 주유소에 들렸는데 밖에 나갔던 홍준식씨가 싱글벙글 웃으며 차로 온다. 골초인 그가 담배를 불과 2유로에 사 오더니 "여기는 담배 값이 다른 나라의 반도 안 되네요. 벨기에가 좋은 나라네요."라고 한다. 조금 후 그가 라이터로 불을 붙이는데 담배 끝이 녹아 내린다. 내가 보니 담배 모양의 초콜릿이다. 얼굴이 일그러진 그를 보고 우리는 통쾌하게 웃으며 초콜릿을 나누어 먹었다.
벨기에의 위치가 서구유럽 어디나 통하는 곳에 있다. 나는 자동차 여행을 즐기는 편이라 유럽에 10여 번 온 중에 한해원, 이하진 사범과 2006년 기차여행을 한 걸 빼곤 나머지는 다 자동차로 했다. 여행을 브뤼셀에서 차를 빌려서 시작하고 여기서 끝낸 적이 많다. 여기가 아닐 땐 유럽의 관문이라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시작한다. 벨기에는 인종, 언어가 다양해서 문화도 그 영향을 받았다.
브뤼셀에는 유럽연합(EU), 나토(NATO)를 비롯 국제기구가 많아 ‘세계의 수도’라고 불린다. 브뤼셀 시내를 운전하고 다니다 보면 갑자기 창문이 무식하게 많은 휘어진 큰 건물이 앞을 가로막는 걸 경험한다. 도시의 다른 부분과 잘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다. 이 곳이 바로 유럽연합 본부다. 지금도 이 건물을 미워하는 브뤼셀 시민이 많다. 이 도시의 분위기를 망친다는 게 이유다.
▲EU본부
6. 벨기에와 식민지
벨기에는 서유럽에 있는 입헌군주국이다. 영어 이름은 벨지움(Belgium). 일인당 소득은 4만 5천불쯤 된다. 벨기에 왕국은 3만 평방km로 남한의 3분의 1쯤 되는 작은 나라다. 인구는 천백50만 명이고 수도 브뤼셀에 백만이 산다. 벨기에는 중세부터 유럽의 상업, 문화의 중심지로 잘 사는 나라였다. 유럽의 중요한 전쟁이 이 곳에서 많이 일어나 '유럽의 싸움터'란 별명도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에 둘러 쌓여 있고 서쪽 바다 건너에는 영국이 있다. 도시만한 크기의 작은 나라 룩셈부르크도 벨기에와 독일 국경 사이에 붙어 있다.
베네룩스(Benelux)는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세 나라를 통틀어 부르는 말이다. 세 나라 정부가 2차대전 때 영국에 망명 중 1944년 3국간 관세동맹을 맺고 상품, 노동, 자본의 자유로운 왕래를 약속한다. 이 베네룩스 경제연합이 유럽연합의 시발점이 된다. 벨기에의 공용어는 네덜란드어(Dutch)와 불어다. 남쪽 프랑스와 접경지대는 불어를 쓰고 동쪽 독일과 접경지대는 독어를 쓴다. 나머지는 네덜란드어 방언에 속하는 플라망어(Flemish)를 쓴다. 여러 나라말을 잘 구사하는 사람도 꽤 많다. 벨기에는 초콜릿과 맥주가 유명하고 다이아몬드 커팅, 카펫(Rug), 레이스(Lace)도 유명하다.
가톨릭을 믿는 이 지역은 개신교를 믿는 네덜란드로부터 1830년 독립전쟁을 통해 분리됐다. 오페라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시위를 시작하며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우리는 1919년 왕(고종)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이 3.1 독립운동을 시작했다고 했다. 이 사람들은 성공했는데 우리는 성공 못한 게 아쉽다.
▲레오폴드(Leopold) 2세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
1878년에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는 아프리카 식민지 경쟁에 뛰어들어 스탠리라는 탐험가를 앞 세워 벨기에 보다 76배나 큰 콩고를 그의 사유재산으로 만든다. 1차 대전 후에는 루안다, 우룬디도 차지한다. 당시 콩고는 상아, 고무, 다이아몬드, 구리 등의 산지였다. 식민지에 주어진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고문을 하고 손목을 자르는 처벌이 뒤 따랐다. 수 많은 콩고 어린이들의 손목이 잘려 나간다. 기아와 질병에 시달리던 원주민이 항거를 하면 무차별 학살을 한다. '고무테러'라고 불리는 사건으로 당시 콩고 인구의 절반인 천만 명 정도가 죽었다고 한다.
유럽이 다윈의 진화론을 변형시킨 사회진화론을 앞세워 "인간도 우월종이 열등종을 지배하는 건 자연법칙이다."라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정당화 시키던 시절이다. 이렇게 착취한 자원은 벨기에를 부자로 만들었다. 1916년 르완다를 점령한 후 투치족에게 차별정책을 편다. 벨기에가 물러간 뒤 후투족과 투치족 간에 르완다 내전이 일어나고 여기서도 자기네끼리 수 백만 명을 죽인다. 인간처럼 잔인하고 한심한 동물이 또 있을까? 아프리카는 유럽에게 철저히 유린당한다. 콩고는 1960년에, 르완다와 부룬디는 1962년에 벨기에로부터 독립한다.
▲백화점이 모인 Neuve 거리 de la loi 거리
7. 벨기에 바둑 역사
벨기에에는 1960년대에 벌써 바둑 두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끼리 만나서 두었다. 1980년에 그린위치 카페에서 정규 모임이 생기나 그냥 모여서 두는 수준이었다. 일본인 난또(M. Nanto) 5단과 중국인 창(M. Tchang) 3단이 선생이었다. 모이는 사람이 작가, 여행가, 철학자 등으로 낭만파 시절이었다. 그 당시는 이상하게 컴퓨터, 수학 같은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2~3년 후 바둑계는 낭만파가 물러나고 자연과학을 하는 사람들로 대체된다. 1981년 10월 공식 바둑연맹(Belgian Go Federation)이 탄생한다. 창립멤버는 15 명. 초대회장은 바둑모임의 주역인 질베어(Michel Gilbert)가 된다.
그러나 낭만파들이 빠져나간 협회는 존폐위기에 처한다. 이를 구한 사람이 길베어 회장이다 그는 1984년 워털루(Waterloo)에 클럽을 차리고 보급에 나서 곧 20명의 회원을 확보한다. 워털루는 나폴레옹이 마지막 전쟁을 치르고 망한 곳이다. 우리를 지금 안내하고 다니는 에넌베어 회장이 당시 학생으로 워털루 클럽에 가입한다.
당시 제일 강한 길베어가 2급이었다. 그 무렵 일본인 마수다(Matsuda) 프로 초단이 나타나 모두에게9점 접바둑으로 지도대국을 해주는 행운이 찾아온다. 그가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2년 간 지도를 받으면서 멤버들의 실력은 일취월장한다. 벨기에는 그에게 큰 빚을 졌다. 당시 멤버들을 ‘벨기에 연구생 1기’라고 지금도 농담으로 부른다.
그 해에 브뤼셀, 루벤에도 바둑클럽이 생긴다. 1985년 첫 벨기에 바둑대회가 열린다. 두사소이(Guy Dusasoy)가 예상을 깨고 길베어를 누르고 초대 챔피언이 된다. 한편 협회는 ‘벨고(Belgo)’라는 바둑 계간지를 발행한다. 2005년 한국 아마바둑협회가 개최한 세계 ‘팀 챔피언대회’에 참가한 벨기에 선수 3명의 대국 명이 벨가(Belga), 벨기(Belgi), 벨고(Belgo)였다. 85년 처음 국제 바둑대회 ‘브뤼셀 오픈’ 을 개최하여 86명이 참가한다. 콜메즈(Pierre Colmez) 5단이 초대 챔피언에 오른다. 88년에는 유종수 사범, 최근 몇 년 동안은 연구생 출신 조석빈 아마 7단이 단골 우승자가 된다.
▲제 23회 브뤼셀 오픈 바둑대회
1986년 브뤼셀에 바둑클럽 두 군데가 더 생긴다. 첫 클럽 대항전이 열렸는데 워털루 클럽이 압도적인 차이로 우승한다. 이 해 벨기에 챔피언 전에서는 바둑을 배운지 10개월 밖에 안 되는 르메뜨르(Vincent Lemaître) 4급이 깜짝 우승을 한다. 이렇게 단 기간에 자기네 나라 챔피언이 된 예는 세계 어디에도 없는 기록이다. 87년엔 회원이 45명으로 늘었고 지누(Marc Ginoux)와 베타크(Alain Wettach) 1급이 강자로 군림한다. 벨기에 선수들의 국제대회 성적도 서서히 올라가기 시작한다.
88년 네덜란드 강자 폴락(Ron Polak) 4단이 정기적으로 벨기에에 와서 강의를 한다. 그는 벨기에의 두 번째 스승이다. 이 무렵 지노가 초단으로 승단해 축하를 받는다. 드디어 벨기에가 유단자 시대로 돌입한다. 불어지역에서 플라망어 지역으로 바둑이 퍼진 게 이 무렵이다. 이전에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바둑인은 한 명 밖에 없었다. 세게(Frank Segers)가 대학촌인 루벤(Leuven)에 바둑클럽을 연다.
89년에 브뤼셀대학 클럽이 문을 닫는다. 주역들이 다 졸업했기 때문이다. 더 불행한 일은 어려운 시절에 바둑협회를 결성하고 끌어 오던 길베어 회장이 회원들과 불화로 바둑을 접는다. 이 사건으로 계간지가 중단 되고 바둑계가 움추러든다.
그러나 다음 해 1990년에는 바둑계가 불사조처럼 다시 살아난다. 세베농(Pierre Sevenants)회장이 그 중심 인물이다. 그는 유럽대회(EGC)를 작은 나라 벨기에로 유치하는게 성공한다. 이 무렵 한국인 이동욱 4단이 자기 집에 바둑 회원들을 매주 초청하여 접바둑을 두어 준다.
10월에 중국 여자프로 궈주안 5단이 혜성처럼 나타나 브뤼셀 오픈을 우승하며 유럽 신고식을 마친다. 그녀는 지금도 ‘유럽의 바둑 스승’으로 네덜란드에 거주하고 있다.
91년은 벨기에가 유럽대회를 개최하는 영광을 얻는다. 220명이 참가하여 중국인 슈타이(Zhang Shutai) 7단이 오픈 팸피언에 오른다. 준우승한 러시아의 라자레프 6단은 유럽 챔피언이 된다. 벨기에는 유럽대회를 치르고 여러모로 자신감을 얻는다. 벨기에의 제 2도시 앤트워프(Antwerpen)에도 바둑클럽이 생긴다. 제 3회 벨기에 챔피언 전과 브뤼셀 오픈을 루벤대학 클럽 주관하에 치른다. 어느새 벨기에 협회는 회원 65명, 초단이 8명이 되었다. 이 중 5명이 벨기에 인이다.
▲제 1회 앤트워프 대회
유럽대회를 개최한 후 벨기에에 바둑판, 돌, 시계가 충분히 생긴다. 팜플렛도 5천부를 인쇄하여 배포한다. 그러나 벨기에 메스미디어가 신문사 한 군데를 빼놓고는 유럽대회를 취급하지 않아 홍보는 기대에 못 미친다.
다행히 협회회장이 프랑스 TV에 출현하여 유럽대회를 소개한다. 93년에 일본에서 유명한 바둑서적 저자 나가하라 6단을 비롯하여 가노 9단, 아베 9단, 수기구찌 여류 8단, 등이 방문하고 중국 프로 장 밍주 7단이 온다. 여러 명의 프로가 한꺼번에 방문하는 행운의 해였다. 제 7회 국내 클럽 대항전에서 브뤼셀 클럽이 우승한다.
94년에 리에쥬(Liège)와 겐트에 클럽이 둘 더 생기고 벨기에가 첫 국제대회를 우승한다. 얀 보게어(Jan Bogaerts) 초단이 틸버그(Tilburg) 대회에서 네덜란드 2단 여섯 명과 3단 두 명을 꺾으며 우승해 다들 놀라게 만든다. 95년에는 세베농(Pierre Sevenants) 회장이 개인 일로. 회장직에서 물러난다. 그는 회원 증가와 재정을 확보하는데 공이 많았다. 새 회장으로 얀 보게어씨가 선출 되는데 그는 유명한 체스 선수이기도 하다. 그는 클럽대항전을 부활시켰는데 부뤼셀이 다시 우승한다. 이 무렵 회원 85명에 유단자 8명으로 성장한다.
8. 바둑 강자
1. 얀 라몬(Jan Ramon) 5단 교수
2. 얀 보가에(Jan Bogaerts) 4d 통계학자
3. 프강솨 곤제(Francois Gonze) 3d 학생
4. 올리버 드루오(Olivier Drouot) 3d 직업 미상
5. 알랑 웨타쉬(Alain Wettach) 3d EU 행정요원
▲ 공항에서 기다리는 지루한 두 시간. 필자와 강경낭
9. 2007년 방문
2007년 우리는 영국 대사배 바둑대회를 마치고 예약해 놓은 비행기를 타러 10시 45분 런던 히드로 공항에 갔다. 우리 일행은 나 외에 프로기사 안영길, 이강욱, 여자연구생 강경낭이다. 그런데 70유로짜리 저가 항공이라 그런지 오후 2시에 출발하기로 한 비행기가 세 번이나 출발을 연기한다. 오후 세 시부터 프랑스 청년 파비앙 4단이 브뤼셀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텐데 큰 일이다.
내가 카운터에 가서 우리 사정을 얘기하고 언제 떠나느냐고 묻는데 여직원 태도가 영 불손하다. 내가 "비스 업에 종사하는 사람 태도가 이게 무어냐."고 홧김에 언성을 높이자 그제야 수그러진다. 5시 30분에야 출발한 비행기가 브뤼셀에 도착하니까 저녁 7시다. 우리 도착이 세 시간 이상 늦었는데도 파비앙(Fabien)이 기다리고 있다. 파리에 사는 그가 이 곳에 1시에 도착했다니까 꽤 오래 기다렸다.
▲ 저녁 7시에 브뤼셀 도착/ 우리를 반기는 파비앙
브뤼셀 공항에서 볼보(Volvo) 5천CC짜리가 하루 25불 특가로 나와 있다. 나는 얼른 그걸 빌렸다. 차를 빌릴 때 여러 군데 렌터카를 다니며 조건을 잘 살펴야 한다. 이 차가 다른 렌터카에선 하루 75유로다. 우리는 부지런히 차를 몰아 브뤼셀에서 20여 km 떨어진 대학 촌 루벤으로 갔다. 루벤에 도착하니까 얀 라몬이 기다리고 있다. 그가 우리를 안내해서 바둑클럽에 가는데 눈이 불편한 얀이 휘청휘청 하니까 영길이가 불안해 한다. 전봇대를 향해 곧장 돌진하는 얀을 영길이가 뛰어가 팔을 잡으려고 하면 전봇대 바로 코 앞에서 성큼성큼 걷던 그가 귀신같이 방향을 바꾼다. ^^
클럽에서 약 30명의 회원들이 우리를 맞는다. 팝과 식당을 겸한 곳이다. 우리 모두가 바둑을 먼저 한판 두어준 후 영길이에게 다면기를 두라고 맡겨놓고 나는 강욱이와 경랑이만 데리고 저녁 먹으러 나왔다. 대학 촌의 골목들이라 활기차고 낭만이 넘친다. 내가 호주대학에 있던 시절 생각이 난다.
어느 식당엘 들어갔더니 학생들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데 분위기가 생동감과 낭만이 넘친다. "저 나중에 여기서 공부하고 싶어요." 이 날 분위기 때문에 경랑이는 유럽에서 루벤을 제일 살고 싶은 곳으로 꼽게 된다. 우리가 식사 후 클럽에 와서 바톤을 이어받고 영길이는 몇 사람들과 자기가 좋아하는 케밥을 먹으러 나갔다. 식사 후 영길이가 다시 돌아와 우리 일행 전체가 바둑을 몇 판 더 두어주고 숙소로 갔다.
▲ 루벤 대학촌
▲ 루벤 광장은 작은 그랑플라츠로 불린다
숙소를 정하는데 얀이 자기 집에서 3명만 재울 수 있다고 하여 혼자 사는 총무 집에서 영길이와 강욱이가 잔다. 그런데 침대가 없어서 고무매트에 슬리핑백을 깔고 둘이 자게 된다. 누가 몸만 뒤척이면 매트가 쏠려 둘이 몸이 겹쳐지는 매트였다. 우리 세 명은 얀네서 방 하나씩 차지하고 잘 잤는데 두 총각은 밤 새 얼싸안고 잤다. 다음 날 내가 “게이(Gay)가 된 기분이 어떻니?” 하며 놀렸다.
▲ “침대가 없고 고무매트만 있다고?”/ 화재의 고무매트와 슬리핑 백
이 날 바둑클럽에서 강욱이가 지갑을 잃어버린다. 가진 돈을 다 잃어버린 강욱이가 며칠 동안 속을 끓인다. 그런데 우리가 독일여행 중 얀이 전화해서 자기가 지갑을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누가 주어다 주었다고 한다. 강욱이가 싱글벙글하자 우리는 '지갑 찾은 턱'을 쏘도록 강욱이를 윽박질러 얻어 먹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우리 일행에게 그랑플라츠를 보여주려고 서둘러 나갔다. 시청 내부까지 보고 비교적 자세히 광장을 돌아본 후 중국집에서 점심을 먹고 룩셈부르크로 향했다. 그 곳에 자기 누이가 산다며 파비앙도 우리를 따라 나선다.
▲ 시청 안 뜰
▲ 주차 후 그랑플라츠로 향한다/ 그랑플라츠에 도착
▲ 어디에 가서 뭘 먹을까? 중국집으로 결정. 식당으로 향한다
▲ 화제가 만발한 식사 시간
▲ 즐거운 식사 시간/꽃보다 남자
▲ 우리가 먹고 지나간 자리는 남아나는 게 없다
벨기에 2편에 계속….
한상대(전 시드니대 교수 sdha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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