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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타]

21세기의 조선통신사(2)

유창혁 9단과 이다혜 4단이 다녀와

이다혜 4단2011-10-11 14: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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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통신사, 유창혁 9단(왼쪽)과 이다혜 4단.

(이 글은 9월 30일부터 10월 3일까지 조선통신사 자격으로 일본에 다녀 온 이다혜 4단이 작성한 글 입니다.)



10월 2일 일요일

호텔 옥상의 노천온천이 새벽 6시부터 개장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마음 먹고 6시에 기상하였습니다. 노천온천에서 바라본 바다는 잔잔하고 고요해서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평온해졌습니다. 이때 한 아주머니께서 말씀을 걸어오셨습니다. 이 풍경은 일본인에게는 굉장히 멋지게 느껴진다고.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인에게도 이 풍경은 멋지게 보인다고. 자연 앞에서 국적은 중요치 않은 것이겠지요. ^^


▲ (왼쪽부터) 이다혜 4단, 유창혁 9단, 만나미 2단.

아침식사를 마치고 한국에서 대여해 온 한복을 차려 입습니다. 어제는 퓨전한복, 오늘은 전통한복입니다. 한복은 초등학생 때 입은 이후로 처음입니다. 조금은 쑥스러워하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자 모두들 예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빈말이 아닌 진심어린 칭찬이란 것이 느껴져서 기쁩니다. 물론 저보다는 한복을 칭찬한 것이겠지만,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만나미 2단은 한국에 가면 살 수 있냐며 진지한 눈으로 가격을 물어보네요. 한복을 입은 제 자신이 자랑스러워집니다. 앞으로 행사가 있을 때 종종 한복을 입어야겠습니다. *^^*


▲ 애니매이션 '벼랑 위의 포뇨'의 한 장면. 윗쪽에 있는 나무집이 '원복사'.

오늘은 저와 만나미 2단의 대국이 있는 날입니다. 대국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 '벼랑 위의 포뇨'의 모티브가 된 원복사(円福寺)에서 열립니다. 조선통신사가 토모노우라에 왔을 때 묵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원복사는 벼랑 끝에 위치해서 여기서 바라보는 풍경은 정말 멋지지만 한편으로는 아찔하기도 하죠.

대국 전, 대회 관계자가 격렬한 바둑을 부탁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네요. 순간 저와 만나미 2단의 눈이 마주칩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저희는 바둑팬들을 위해서 격렬한 바둑을 두기로 무언의 합의를 했습니다.

오늘 대국은 각자 30초 10회의 속기입니다. 흑의 포석을 연구해 왔는데 아쉽게도 백이네요. 첫수를 두자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집니다. 이렇게 주목받는 대국은 오랜만이라 살짝 쑥스럽네요. 특이하게도 바둑팬들이 바로 옆에서 대국을 지켜본다고 합니다. (20여명의 바둑팬들은 약 30분 정도 숨소리도 안 들릴 정도로 조용히 있다 나갔습니다.)

만나미 2단과의 첫 대국은 난전으로 문을 열었습니다. 좌하귀에서 시작된 전투는 중앙, 우변으로 옮겨 갑니다. 저는 전투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 대국은 지켜보고 있는 바둑팬들을 위해서 재미있기 두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싸움을 걸어갑니다. 만나미 2단도 같은 마음으로 바둑은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납니다. 30초 안에 완벽한 수읽기를 하는 것은 프로에게도 힘든 일입니다.


▲ 이다혜 4단과 만나미 2단의 기보.

서로 실수를 주고받으며 결국 좌하귀쪽의 패가 승부가 되었습니다. 하나, 둘, 셋, 넷???. 바둑판 전체를 재빠르게 살펴보며 팻감을 셉니다. 아슬아슬하지만 팻감이 하나 많을 것 같습니다.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네요. 그 순간,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팻감이 하나 나옵니다. 상대방이 팻감을 올바르게 쓰면 오히려 내가 팻감이 하나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붉어집니다. 제발 그곳에 두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상대의 실수를 바라는 것은 비겁한 일이지만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다행히(?) 확실한 팻감을 두고 불확실한 팻감을 씁니다.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패를 해소하고, '괜찮아, 아직 기회는 있어!' 라며 투지를 불태웁니다. 상대방의 약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자 또 다시 이기는 길이 보이네요. 이제야말로 확실히 이겼다는 생각이 들자, 순간 마음이 느슨해집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절대 긴장의 끈을 늦추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니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186, 이 수가 패착입니다. 189를 당한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눈앞이 깜깜해집니다. 자책해보아도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렇게 이 바둑은 끝이 났습니다.

▲ 공개해설회. (왼쪽부터) 만나미 2단, 이다혜 4단, 다케미야 9단.

공개해설회가 열리고 있는 곳으로 가니 바둑팬들이 박수로 저와 만나미 2단을 맞아줍니다. 해설을 맡은 다케미야 9단은 정말 재미있는 바둑이었다며 즐겁게 해설했다고 말합니다. 확실히 오늘 바둑은 재미있는 바둑이었습니다. 승부처에서는 짜릿함과,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최후의 순간에 방심해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승패가 중요하지 않은 이벤트 대국이라지만 역시 지는 건 싫습니다. 프로기사에게 패배의 열매는 언제나 씁니다.

▲ 100인 다면기 행사에 참여한 이다혜 4단.

오후에는 항구에서 100인 다면기가 열립니다. 야외에서 하는 다면기라니 신선하네요. 한복을 입었기 때문인지 기자들이 유독 저를 많이 찍는 것 같습니다. 최대한 의식 안 하는 척 하면서 행동거지를 우아하게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지금 저는 한국기사 대표로서 이곳에 있는 것이니까요. 저의 행동에 따라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달라진다고 생각하니 어깨가 무겁습니다.

대국이 끝난 뒤에는 한 분씩 복기를 해 드렸습니다. 어설픈 일본어 실력이지만 뜻이 통하네요. 역시 배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일본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을 알고 많은 분들이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분들과 같이 사진도 찍고 사인도 해 드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단지 바둑을 조금 잘 둘 뿐인데 나에게 사인을 받고 좋아해 주는구나. 나 스스로를 조금은 더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되겠구나.' 앞으로 프로기사라는 것에 대해 좀 더 자긍심을 갖고, 바둑팬들께 잘 해야 겠다고 다짐했습니다.


▲ 100인 다면기에 참여한 이다혜 4단과 유창혁 9단의 모습이 보인다.

100인 다면기를 끝으로 「日東第一形勝300주년 21세기 조선통신사 한일정상바둑대국」행사는 막을 내렸습니다. 이번 행사는 공개해설회는 무료였지만 다면기는 약간의 참가금이 있었습니다. 대국을 옆에서 관전하는 것은 3500엔을 내야했죠. 이렇듯 일본의 바둑문화는 한국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번에 유사범님과 동행하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일본바둑계 사람들이 행사를 진행하는 방법, 일본프로기사들이 바둑팬들을 대하는 태도 등에 대해 알려주셨는데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일본프로기사들이 바둑팬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誠意'라는 말이 떠오르며 그동안 제 자신은 어떠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현재 일본바둑계는 침체기이고, 세계 대회에서 일본기사들의 활약은 미비합니다. 개인적으로 한중일 삼국의 기사들이 좀 더 치열하게 세력경쟁을 하면, 삼국의 바둑계도 더 활기를 띌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최후의 승자는 한국이 되어야겠죠. ^^

이것으로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부족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읽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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