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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바둑사]

서名人, 네덜란드에서 소름돋는 접바둑 펼쳐

한국 바둑의 매운 맛을 유럽 바둑계에 보여주고 온 서봉수 명인

한상대 교수 2011-10-26 16: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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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와 튤립의 나라 네덜란드(The Netherlands) 차례다. 이 나라를 홀란드(Holland)라고도 부른다. 인구는 1천 7백만명, 나라 크기는 4만 1천 평방km로 남한의 반도 안된다. 거기에다가 전 국토의 27%가 바다 보다 낮아 제방(둑)으로 막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오렌지군단 축구와 히딩크감독, 하이네켄 맥주가 알려져있다. 네덜란드를 좀 잘 아는 사람이라면 나막신, 청어, 화가 반 고흐와 렘브란트, CD를 처음 개발한 필립스(Philips) 전기제품회사를 거론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필립스 한 회사의 예산이 우리나라 전체 예산과 맞 먹었다.

이 작은 나라가 17세기에는 세계 제일의 해양무역국으로 황금기를 누렸다.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80년 전쟁에서 승리한 후 주로 과거 스페인 식민지들을 접수해 나갔다. 이 전쟁의 지도자 오렌지 공은 나중에 왕에 오르고 네덜란드 국가 색(色)이 오렌지가 된다. 암스텔담(Amsterdam)은 해외로부터 온 향료, 차, 후추 그 밖에 많은 물건의 유럽 창구가 되고 네덜란드는 유럽의 은행 역할을 하게 된다. 네덜란드에서 융자를 받아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을 짓고 전쟁경비로 썼다. 영국은 식민지 건설자금을 지원받았다. 홀란드가 세계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그런데 이 나라의 바둑수준이 유럽최강이다. 나는 이 나라에 1983년 4월 내 가족, 서봉수사범과 처음 갔다. 서사범은 조훈현 9단에게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명인마저 빼앗긴후 무관으로 전락하고 조사범은 전관왕에 올랐을 때다. 의기소침해 있는 서사범에게 내가 유럽여행을 쏘겠다고 해서 같이 여행 중이었다 ☞ 관련 기사 바로가기

나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BMW 한대를 빌려 40일 동안 독일, 오스트리아, 이태리, 스위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을 돌았다. 하루에 몇 백 Km씩 달리는 강행군이었다. 운전은 나 혼자했다.

우리는 당시 유럽바둑연맹 회장이었던 얀 프랑켄하우센(Jan Frankenhuisen) 집에서 4박 5일 동안 체류한다. 일본 동경에서 나와 친해진 얀이 내가 가족을 데리고 유럽에 간다고 하니까 네덜란드 있는 동안은 꼭 자기집에 와 있으라고 했다. 그는 네덜란드 항공사인 KLM의 이사(理事)라 암스텔담 한 복판에 3층짜리 저택에서 살고 있다. 부인과 두 딸이 있다.

이틀째 되는 날 얀이 암스텔담 바둑클럽에 가자고 한다. 클럽에서 얀이 우리를 소개하자 회원들이 나는 알고 서사범은 모른다. 나는 일본 세계아마추어대회를 몇번 나갔기 때문에 그들이 책을 통해 알고 있다. 한국인은 조치훈과 조훈현 두명만 안다고 한다. 내가 "지금 한국 바둑을 조-서 시대라고 하는데 그 중 서가 이 사람이다." 라고 알려주었다.

▲ 홀란드 페스티발.

우리는 곧 지도다면기에 들어갔다. 내가 "여기 유단자들은 손들어 보라"고 했더니 4명뿐이다. 4단이상은 로테르담에서 열리고 있는 바둑대회에 갔다고 한다. 내가 유단자 4명은 서사범에게, 유급자는 7명은 전부 내가 맡아 다면기를 두었다. 내가 "치수는 모두 9점"이라고 하자 반론이 거세다. 그 중 3단 두는 친구가 "나는 세계 최강 사카다 9단에게 두 달전 6점으로 대국했다. 이 건 말도 안되는 치수다" 한다.

내가 "그럼 이기면 될거 아니냐? 서사범은 얼마전 사카다와 대국에서 이겼다" 하니까 "몇점에 두었느냐?"고 한다. 내가 "물론 호선이었다"고 하자 의아스런 표정이다. 얀이 "호주챔피언은 서양사람 실력을 누구보다 잘안다. 그가 9점이라면 그대로 두라"고 하자 마지 못해 9점씩을 놓는다. 내가 서사범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이겨야 한다"고 하니까 서사범 특유의 염세적 표정을 지으며 다면기를 시작한다.

내가 유급자들과 바둑을 끝내고 보니까 서사범이 아직도 나머지 한명과 대국 중이다. 가서 판세를 보았다. 서사범이 어림잡아 150~200 집쯤 지고 있다. 거기에다가 서사범의 거대한 대마가 아직 눈이 하나뿐인데 화란친구가 지금 그걸 죽이러 쫓아다니고 있다. 안잡고 지켜도 많이 이긴 바둑인데 이 친구가 기어코 대마를 잡으려고 한다. 관전자가 많아졌다. 서사범이 쫓기다가 어느 곳을 건너 붙인다. 그 친구가 대마를 쫓느라고 수비에는 덜 신경을 쓰고 있는 사이에 갑자기 바둑은서로 끊겨 대마상전으로 바뀌었다.

한참 수순이 진행된 뒤 보니까 서사범이 한 수 빠르다. 그쪽 대마가 몰살당했다. 대국자, 관전자 전부가 충격에 휩싸였다. 누가 중얼거린다. "It’s horrifying(소름 끼친다)." 서사범이 서양 친구들에게 하늘 높은 걸 가르쳐 주는 순간이었다. 종합성적 3승 1패. 서양 유단자들을 9점 접고 거둔 성적이다. 서사범이 “매판 힘들었어요” 한다. 서사범이 자기 바둑인생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국으로 이 바둑도 꼽는다. 유럽 바둑계는 소문이 빠르다. 이 일은 얼마후 유럽 전체가 알게 된다. 한국 프로가 유럽 3단을 9점 접고 이겼다고…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수리남 등 많은 식민지를 갖는다. 미국 동부도 뉴 네덜란드라는 식민지였다. 뉴욕의 첫 이름은 뉴암스텔담이었다. 영국이 전쟁에서 이기고 '새로운 요크'란 뜻으로 뉴욕(New York)이라고 개명한다. 네덜란드는 영국과 전쟁에서 지고 프랑스와도 전쟁에서 패하면서 영광의 시대가 저물기 시작한다. 해양 주도권은 영국에게로 간다. 2차대전에는 독일군에 점령당하고 네덜란드에 살던 유태인들이 희생당한다. 우리가 아는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암스텔담에 살고 있던 한 유태인 소녀가 쓴 책이다.

▲ 비행기에서 보는 암스텔담. 수로(水路)와 많은 다리가 보인다.

아침에 얀이 출근하면 우리끼리 튜립밭과 꽃시장에도 가고 얀의 부인이 우리를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한번은 자기네 민속촌(Dutch folk village)에 가서 청어를 통체 날로 먹는 곳이 있는데 비위가 좋은 나만 먹었다. 주말에 얀의 안내로 반 고흐 박물관에 갔다. 2층으로 통하는 공중계단이 있는데 내가 올라가려니까 얀이 나를 잡는다. “이 박물관의 설계자가 우리 형인데 내가 누구 보다 형을 잘아는데 절대 그리로 올라가지 말고 엘레베이터를 타자”고 한다. 자기 형이 무언가 하날 빠트렸을 거라고 한다. 그러나 내가 이 박물관을 그후 30년 동안 가끔 오는데 아직도 계단이 멀쩡하다.

▲ (왼쪽)네덜란드 민속촌, (오른쪽) 민속 춤.

83년만 해도 유럽 바둑이 약했다. 83년 유럽챔피언 하시베더가 동경에서 나에게 3연패를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로날드 슐렘퍼(Ronald Schlemper)가 일본 원생으로 2년간 지내고 돌아오면서 바둑수준이 올라간다. 그가 나를 이기기 시작하고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왠만한 나라 챔피언이면 나를 이기거나 호선으로 들어온다. 헝가리, 체코 챔피언들은 80년대 초에는 나에게 두점 놓고도 지다가 10년 후에는 호선으로도 나를 꺽는다. 그들이 열심히 공부하는데다가 나이도 나보다 2~30년씩 젊었기 때문이다. 유럽 바둑수준의 성장속도는 내가 체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83년 세계대회가 끝나고 일이다. 23명의 유럽챔피언이 나와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에 있는 동안 많은 친선대국을 하는데 슐렘퍼만 전승이었다. 한국기원에서 프로와 대국하는데 윤기현사범과 만난 슐렘퍼가 일본에선 9단과도 정선으로 두었다며 선으로 두고 싶다고 한다. 그러나 윤사범이 "어디 감히 아마추어가?" 하며 두점을 놓으라고 한다. 할 수 없이 슐렘퍼가 두점을 놓고 불계승을 한다. 이 때 나는 프로 강자에게 두점 놓고 거뜬히 이기는 슈렘퍼를 보고 "이 친구 정말 강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다음 날 우리는 충암중고등학교에 갔다. 대진표를 보니까 나와 유창혁, 바둑지도교사와 슐렘퍼로 되어있다. 내가 가서 대국자를 슐렘퍼와 유창혁으로 바꾸어 달라고 했다. 당시 중학생인 유창혁이 몸이 작아 마치 국민학생 같았는데 슈렘퍼에게 완승을 한다. 저녁에 내 방에 찾아온 슈렘퍼가 낮의 바둑을 복기하면서 자기가 어떻게 그렇게 작은 아이에게 졌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하면서 유창혁과 한번만 더 대국을 하도록 주선해 달라고 한다. 나는 충암의 이홍식이사장에게 전화했더니 "마침 창혁이가 우리집에서 묵고 있습니다 내일 호텔로 보내드리지요." 한다.

다음 날 시청앞 프라자호텔 내 방에서 유창혁 대 슐렘퍼의 재대국이 벌어졌다. 백을 쥔 유창혁이 또 다시 완승을 거둔다. 판 전체의 급소를 눌러가며 서서히 조여오는 스케일이 큰 공격 바둑이었다. 슈렘퍼가 할말이 없어졌다. 유창혁이 간 뒤 커피숍에서 슐렘퍼가 나에게 연구생도 아닌 저 작은 아이에게 두판을 완패 당하고 자기의 바둑관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 때 슐렘퍼는 25세로 의과대학생이었다. 몇년 후 유창혁이 후지쓰배 세계챔피언에 오르자 유럽에서 나를 만난 슐렘퍼가 "내가 왜 유창혁에게 졌는지 이제야 답을 찾았다"며 웃는다. 그 슐렘퍼가 90년대 중반부터 안 보인다. 내가 물어보니까 "지금은 의사생활에만 충실하고 있다"고 한다. 서양에선 자존심 충돌이 일어나면 발을 끊어 버리는데 그 케이스인 거 같다.

2002년 나는 6명의 명지대 교수팀 중 일원으로 명문 레이든(Leiden) 대학에 갔다. 1575년 오렌지 공에 의해 세워진 가장 오래된 대학이고 최고 명문이다. 레이든은 영국의 옥스포드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다. 우리는 과학공원(Science park)을 시찰하고 하루 밤 대학에서 묵었다. 나는 당시 인구 10만의 이런 대학촌에 바둑클럽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러나 다음해인 2003년에 나는 레이든 바둑클럽이 유럽최강이란 사실을 알고 놀란다. 레이든에 제자들과 가서 여러명과 알게 되고 지금까지 30년 가까이 계속 친하게 지내고 있다. 나는 2003년 명지대 바둑학과 팀 18명을 인솔하고 네덜란드에 간다.

▲명지대 바둑학과 팀 환영식(암스텔담 클럽)

▲ (왼쪽) 반더 슈텐(Van der Steen) 회장의 환영사, (오른쪽)친선대국.

암스텔담 바둑회장인 슈텐씨는 명지대에서 주최한 제 1회 바둑학술대회에 네덜란드 대표로 왔던 사람이다. 일본 부인과 장인의 도움으로 인터넷 사이트 'gobase.org'를 운영하고 있다. 'American Go Journal'이 나오기 전까지는 세계 제일의 바둑사이트로 명성을 날렸다. 슈텐씨는 명지대 바둑학과 학생들의 바둑 실력을 누구 보다 잘 안다. 또 허장회도장과 교류전에서 당시 12세의 가련미 넘치는 김세실양에게 3집을 지고 나를 만날 때마다 그 얘길한다.

▲ (왼쪽) 슈텐씨와 강나연, (오른쪽) 유럽 바둑문화센터에서 인사말 하는 필자.

암스텔담클럽과 친선바둑을 둔 후 우리는 유럽바둑문화센터를 방문했다. 유명한 암스텔담 전차를 타고 우리 전체가 시내에서 30분 가량 떨어진 센터로 갔다. 건물이 크고 훌륭하다. 내가 전에 소개 했듯이 이 곳 바둑센터는 이와모토 9단이 전 세계에 세운 4개의 바둑 센터 중 하나다. 이와모토 가오루 9단(1902-1999)은 혼인보 "훈화"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동경 외곽에 바둑 도장을 할 목적으로 땅을 넓직하게 사 두었는데 나중에 이 곳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부자가 된다. 그는 이 돈을 국제바둑보급에 쓰기로 한다. 브라질 상파울로, 미국 뉴욕과 시애틀, 유럽 암스텔담에 바둑센터를 짓는다. 이 센터들이 서양에 바둑을 보급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한다.

▲ (왼쪽) 이와모토 9단, (오른쪽) 유럽바둑문화센터.

이와모토 9단은 1945년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 될 적에 하시모토 우타로 9단과 본인방 도전기 2국을 두고 있었다. 원폭투하 시 섬광, 굉음과 함께 그들은 기절하고 판은 흐트려 진다. 다시 일어난 대국자들이 다시 제 자리에 돌을 찾아 놓고 대국을 끝낸 일화는 유명하다. 여기에 얽힌 일화가 있다. 원래 히로시마 시내에 대국장을 정했는데 그 지역 담당 경찰관이 와서 히로시마 외곽으로 대국장을 옮기라고 했다. 사정을 해봐도 그는 막무가내로 장소변경을 강요했다. 그런데도 그의 태도는 겸손했다. 할 수 없이 대국장을 옮긴 바둑인들은 살아 남고 그 경찰은 원폭에 희생된다.

역사에는 'if'란 가정이 없다지만, 만일 그 경찰이 아니었으면 이와모토 9단도 없고 서양의 4대 바둑센터도 없었을 거다. 이와모토 9단은 중국에 가서 소년 오청원과 바둑을 두어 보고 그를 일본에 데려 오는 역할도 했다. 그의 저서 "Go for beginners"는 서양 바둑인이라면 한번씩은 거친 책이다. 이와모토 9단은 생전에 본인방을 지낸 것 보다 바둑 국제보급으로 훨씬 위대한 일을 했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96세까지 이 곳 암스텔담에 와서 바둑해설을 왕성하게 했다고 한다. 이 센터의 매니저 얀센(Frank Janssen) 6단은 수시로 이와모토 9단 사진 앞에 와서 합장을 하며 감사해 한다.

▲ (왼쪽) 특별대국실, (오른쪽) 일반대국실.

▲ 출판물 소개

▲유럽바둑센터 복도(앞: 이광구씨) 바둑센터 안에 있는 '바둑 카페(Go cafe)'


학생들이 이 센터를 돌아본 후 "한국기원 보다 시설이 더 좋은 데요." 한다. 이 날밤 학생들이 바둑회원들 집에 묵었는데 서재학이는 새벽 3시까지 주인집 사람들과 자전거로 암스텔담을 돌아다니는 등 누구나 많은 얘기거리와 추억을 만들었다. 주로 학생들 영어가 안 통해서 웃지못할 일이 많이 벌어졌다. 네덜란드는 인구의 75%이상이 영어를 완벽히 구사한다. 시골에 사는 노인 정도가 수준 높은 영어를 구사 못한다. 네덜란드 바둑인이면 누구나 영어로 농담하고 깊은 네용의 대화를 나눌 수 있다.

▲ (왼쪽) 암스텔담 거리 장비와 김재광, (오른쪽) 여학생 두명. 머리 뒤만 보인다. 누굴까?

헤어질 때 네덜란드인들이 “한국 대학생들의 바둑은 센데 영어는 너무 약하다. 영어만 보충되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다”고 한다. 우리는 국립박물관을 본 후 시간 여유가 별로 없는데 학생들이 그 근처에 있는 반 고호 박물관에는 꼭 가자고 나에게 조른다. 특히 여학생들이 “교수님, 거기 안가시면 뒤가 좋지 않을 거에요” 완전히 협박조다. 할수없이 나는 우리 일행을 데리고 고호 박물관에 갔다. 그런데도 미술관에서는 설명을 열심히 듣는 학생이 몇 안 되었다.

▲ (왼쪽) 국립미술관으로 가는 우리 일행, (오른쪽) 반 고호 미술관 입구.

▲ (왼쪽) 고호의 방, (오른쪽) 추수.

2004년 나는 다시 레이든을 방문한다. 오로미디어에서 조창삼사장과 홍준범씨가 왔고 내 제자 중 김선기와 홍승희가 왔다. 이번엔 그들과 친선대국, 식사, 관광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바둑클럽은 옛 요새 옆에 있는 팝에서 만난다. 바둑 두기전 한잔하고 있는데 요새위에서 왁자지껄 하는 사람 소리가 들려 "저기가 뭐하는 곳이냐?"고 하니까 "옛날 이 지방을 지키던 요새"라고 하면서 "바둑이 끝나고 올라가자"고 한다. 야외대국을 끝낸 후 우리는 요새에도 올라가고 저녁식사는 네덜란드가 자랑하는 홍합(Mussel) 요리를 먹었다. 우리나라 탕처럼 국물이 많고 푸짐하여 우리 입맛에 맞았다.

▲ 요새 위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려서 올려다 보고 있다.

▲ (왼쪽) 왼 편 언덕이 요세, (오른쪽) 요세로 올라 가는 길.

▲요새에 올라간 필자

▲ (왼쪽) 요새위에서 하리와 홍승희, (오른쪽) 요새에서 내려다 보이는 레인든.

▲ 홍합식당(바둑클럽 회비로 대접하는 거라 절약하느라고 한명(필립)만 나왔다)

▲ 홍합은 껍질로 꺼낸다. 다른 걸 시킨 김선기(6단 명지대 바둑교실 운영)가 침삼키며 보고 있다.

▲ 암스텔담 클럽 슈텐회장이 우리가 온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네덜란드인들은 게르만 족에 속하여 덩치가 크다. 레이든 회원 중 안드레아스는 2m이고 필립, 빔, 테오는 190cm 이 넘는다. 하리나 아놀드는 크지는 않지만 대신 옆으로 벌어졌다. 네덜란드인들은 전통적으로 상인이다. 중국, 아랍, 유태인이 상인 민족으로 유명하지만 이 사람들도 못지 않다. 유럽인들은 "네덜란드인들과는 동업을 말라" 또 "이 사람들과 거래해서 손해만 안 보면 크게 번 거다"라고 한다. 'Dutch treat(pay)'란 말도 자기가 쓴 거만큼 낸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거품이 없고 검소하다. 나는 평소 이메일만 주고 받던 이 곳 회원들에 대해 이번에 자세히 알게 된다. 서양바둑인은 대개 지식인, 전문인이다. 그들의 프로필을 소개하면 서양 바둑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 같아 여기에 레이든클럽 회원 몇명만 소개한다.

먼저 17년간 네덜란드 바둑회장을 지낸 얀 롱엔(3단 Jan van Rongen)씨다. 그는 유럽 바둑연맹의 총무로 오랜 동안 유럽바둑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첨퓨터 전문가로 바둑 외 취미는 요리다. 그는 친한파로 조치훈9단의 팬이다. 'my Friday Night Files'(http://rongen17.home.xs4all.nl/)란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는데 조치훈 9단의 활동을 주로 다룬다. 얀이 2007년에는 한국에서 나와 함께 아리랑 TV에 출연해 30분 동안 바둑을 소개하기도 했다. 얀은 지도자 답게 포용능력이 좋은 사람이다. 평소 몸이 뚱뚱한 편인데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60세에 은퇴했다.

▲ (왼쪽) 바둑TV PD 홍승희(4단)와 롱엔 회장, (오른쪽) 필자와 인터뷰.

▲ (왼쪽) 바둑학술대회에서 필자의 환영을 받는 네덜란드 팀, (오른쪽) 얀 반 롱엔.

다음은 네셔날 지오그라피의 사진작가 하리(3단 Harry van der Crogt)다. 하리는 우리 일행이 갈 때마다 레이든을 도보로 소개하는 일을 맡는다. 한국팀 때문에 시작하여 지금은 1시간부터 3시간까지 다양한 시내관광 프로그램을 준비해 놓고 있다. 하리의 작품세계는 몬드리안의 '황금분할법'에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네덜란드는 "신(神)이 14세기에 렘브란트를, 19세기에 반 고호를, 20세기에는 몬드리안을 보내주었다"고 한다.

몬드리안 (Piet Mondrian, 1872-1944)의 추상화는 신조형주의 (Neo-Plasticism) 라고 불린다. 그의 작품 모티브는 빨강, 파랑, 노랑 등의 원색을 가진 직사각형 면과 그와 섞인 흰색 공간과 검정색 선들이다. 하리는 바둑판과 바둑알의 단순한 기하학적 선과 흑백의 소재를 가지고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 부기 우기'처럼 우리에게 사진으로 '바둑 부기 우기(Baduk boogie woogie)'를 보여 준다.

▲ (왼쪽) 하리 반더 크록트, (오른쪽) 몬드리안의 '브로드웨이(뉴욕) 부기우기'


▲ 하리의 '바둑판 부기우기'

▲ (왼쪽) 몬드리안의 빅토리 부기 우기. (오른쪽) 옆 작품과 같은 3각 구조(유럽바둑연맹 회의)

하리는 몇 년 전 성격이 괴팍하여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옛 상사를 매일 병원에 찾아 가서 1년 이상 간병을 해 주었는데 그 사람이 죽으면서 유산을 4백만 불이나 하리에게 남기고 죽었다. 하리는 "그 사람이 그렇게 부자인 줄 몰랐다"고 한다. 거부가 된 하리는 지금도 바둑을 두고 사진을 찍으며 평범하게 살고 있다. 아직도 매주 하루를 형무소에 자원봉사 하러 다니고 있다. 그의 부인은 계속 중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레이든 시의원을 거쳐 부시장이 되었다.

▲ (왼쪽) 왼 편 건물이 레이든 시청, (오른쪽)저 뒤 풍차가 렘브란트의 집

빔(Wim Hoffman)은 기타리스트다. 전설의 기타리스트 세고비아의 제자의 제자다. 빔은 레이든대학 음대 기타과를 졸업하여 그 곳 교수직을 맡았으나 배우는 학생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교수직을 그만 두고 소수 정예에게만 개인 레슨을 하고 지낸다. 그는 30세에 시부미(Shibumi ? 오다케 9단을 모델로 했다는 영어 첩보소설)를 읽고 바둑에 호기심이 생겼다. 빔은 일본책을 사서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그 후 바둑클럽이 있는 걸 알고 열심히 나가 3단까지 이르렀다. 바둑을 배우면서 일본문화에 관심이 생겨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해서 지금은 꽤 잘한다.

빔의 관심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기우는 몇가지 일이 생긴다. 우선 한국 여류미술가와 친해져서 여자친구로 몇년간 사귄다. 또 부산 여류바둑인 김향희(2단)씨가 내 바둑영어교실에서 공부하면서 빔과 이메일로 친분을 맺었다. 그녀의 도움으로 빔은 타이젬에 아이디가 생기고 바둑 TV를 인터넷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빔의 집에는 인터넷 바둑을 보기위해 바둑인들이 자주 모인다. 우리집 사람에게는 빔이 불고기 만드는 법을 배워 사람들이 모이는 날이면 자기집 뒷 마당에서 불고기 대접하는 일이 상례가 되었다. 빔이 거둔 최고의 성적은 네덜란드대회에서 8위에 입상하여 최강 8명이 겨루는 수퍼그룹에 한번 들어간 일이 있다.

▲ 필자와 빔의 대국

▲ 회장 롱엔씨가 초대한 식사 필자와 빔

필립(5단 Filip Vanderstappen)은 원래 벨기에 태생이다. 한번은 네덜란드 대표로 세계대회에 나갈 기회가 생겼는데 네덜란드 여권이 없다는 이유로 취소 당했다. 나에게 "네덜란드에 20여년 살았는데 여권을 미리 못 만들어서 기회를 놓쳤다"며 안타까워 했다. 세계대회는 참가국 여권소지자만 참가가 가능하다. 우리나라가 이걸 소홀히 해서 한국 여권으로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사람이 그 나라 대표로 참가해서 우승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필립은 자기 아버지가 유명한 맥주회사 사장인데 후계자 코스를 안 밟고 바둑만 두고 살고 있어서 아버지를 속상하게 만든다. 그는 맥주회사 사장으로 재벌이 되는 것보다 컴퓨터 전문가로 돈을 벌고 본인이 좋아하는 바둑을 두며 사는 길을 택했다.

▲ 필자와 필립이 나란히 앉아 바둑을 두고 있다

▲ 레이든 풍차위에서(필립, 필자, 홍승희, 조창삼, 홍준범)

▲홍승희와 풍차 7층인 풍차 내부구조


마지막으로 테오(Theo van Ess)다. 그는 네델란드 정부 문서보관소 연구원으로 있다. 그는 드물게 바둑역사를 공부하는 학자다. 특히 바둑이 동양에서 서양까지 전해진 과정은 누구보다 잘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명지대가 주최하는 국제바둑학술대회에 참가하여 인도나 네팔에서 발견된 바둑판의 부분이나 문서의 기록을 추적하여 오래전 그 곳에 바둑이 있었다는 가설을 내 놓기도 했다. 프로기사 안영길이 네덜란드에 갔을 때 적극 도움을 주기도 했다.

내가 이번 편에 네덜란드 바둑역사를 소개 않는 이유는 테오가 타이젬에 소개될 역사를 준비 중이라고 해서다. 그가 너무 많은 분량을 보낼까봐 걱정이다. 이 밖에도 안드레아스, 아놀드 또 몇명이 더 있으나 지면관계상 생략한다. 2006년에는 내가 여류 프로기사 한해원, 이하진과 함께 네덜란드에 가고 몇 달 후엔 레이든 클럽 회원 여섯명이 한국으로 나를 찾아 온다. 그 얘기들은 다음편에서 하겠다.

한상대(전 시드니대 교수 sdhah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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