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심신라면배]
쾌검, 허공을 가르다
-제13회 농심배 참관기
중국 상하이 - 김종서 작가2012-02-23 08:45:03
▲다양한 빵이 눈에 띄는 화팅호텔 조식 뷔페.
S#1. 아침 식당에서
농심배가 열리는 화팅호텔의 조식은 서양식 뷔페 코스다.
객실에서 식당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씨에허와 조우했다.
마치 필자가 맞서야 하는 숙적으로 느껴져 좀 어색했다.
중국 팀의 최종 수문장인 씨에허.
8:2가르마 아래 훤칠한 이마, 그리고 안경렌즈 이면에 번뜩이는 눈빛이 확실한 천재 형이다. 뒤를 따르며 그가 고르는 식단을 살펴본다.
빵 한 조각과 버터, 샐러드, 그리고 땅콩볶음을 접시에 담는다.
음, 두뇌에 좋다는 견과류를 섭취한단 말이지!
그리고 익힌 청경채와 중국라면을 한 그릇 가져온다.
적지 않은 분량인데 깔끔하게 접시를 비우고 후루룩 시원하게 면발을 흡입한다.
▲구리의 바둑을 검토 중인 씨에허
이상하게 조식섭취 장면에서 강기가 느껴진다.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그에 비해 우리의 호프 김지석은 간단하게 빵과 계란프라이로 때웠다.
전날에도 김지석은 점심을 맥도널드에서 햄버거로 해결했다.
씨에허는 침착하고 책임감이 강해 보인다.
전날 구리의 바둑을 처음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한 번도 일어서지 않고 위빈 감독과 함께 관전 복기를 했었다.
▲씨에허와 김지석(오른쪽)의 대국 모습.
S#2. 대국실과 검토실 스케치
김지석과 씨에허.
예상대로 지석은 쾌검을 휘두른다.
쾌검이란 발검에서 목표지점까지 최단거리로 가장 빠르게 휘두르는 것.
우변으로 흘러온 백 말을 가차없이 공격하기 시작한다.
다소 무모하다 싶지만 돌이 놓여지고 보니 그림이 된다.
직도황룡, 태산압정!
그냥 수직으로 내리꽂는 검법이 연발한다.
모든 바둑사이트의 해설자들은 김지석의 공격력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말한다.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체 생각 중인 김지석.
그러나 지석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난전을 유도하는 게 아니고 제 딴에는 계산을 합니다. 가장 이기기 유리한 쪽으로 발상하는데 남들은 그렇게 보는가 봐요. 저는 인파이팅이라고 보진 않는데."
냉정한 씨에허는 참고 참는다.
중앙에서 패가 발생하자 검토실의 중국기사들이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모두 어두운 그림자를 이마에 달고 침묵한다.
격산타우! 산을 때려서 반대편에 있는 소를 친다.
지석의 가공할 무공이 판을 뒤덮는다.
한국과 중국의 모든 바둑사이트 베팅그래프가 흑으로 완연하게 기운다.
심지어는 무배당에 이르기도 한다.
▲검토실 한 켠에 놓여 있던 꽃. 김지석의 승리가 예상되자 준비해 논 것이다.
"끝났네!”
누군가 잘라 말하자 농심 관계사 및 한국기원 담당자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진다.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 내일 귀국 항공 편 좌석 유무를 확인한다.
시상식 준비를 하기 위해 꽃다발과 상금보드 판을 준비한다.
▲구리를 주축으로 검토했던 중국 검토실.
검토실의 중국 테이블은 늘 침통하다.
구리 9단 주위를 가득 둘러싼 응원진.
칙칙하고 음침한 공기 속에서 그래도 혹시 하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반상에 수없이 많은 참고 도를 그려본다.
농심배를 향한 그들의 염원은 깊고도 강하다.
국가대항전에서 한국의 기를 꺾고 싶은 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언젠가 창하오가 우승을 이뤘을 때 상하이가 난리 났었잖은가?
패기 넘치게 달리던 지석이 좌변에서 삐끗 실족하고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됐다.
쏼라쏼라~ 갑자기 검토실이 소란스러워졌다.
프레스센터의 기자들은 그 소음만으로도 상황의 유불리를 짚는다.
"시끄러운 걸 보니까 역전됐나 보네."
▲종국 모습.
바둑은 그 것으로 끝이었다.
두 기사가 손끝으로 수화를 나눈다.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그들만의 손가락 대화가 있다.
바둑판 눈금들을 휘리릭 짚으며 승부의 분수령이 어디였는지 확인하는 절차다.
그리고 나서 서로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다.
멋진 청년들이다.
S#3. 승부 이후
연극이 끝난 무대는 허허롭다.
분주히 돌아가던 세트도 멈추고 관객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
대국장과 검토실이 텅 비어도 기자들의 방은 자판치는 소리로 어지럽다.
타이젬. 오로, 한게임, 넷마블 기자들이 벽을 바라보고 앉아 기사를 전송하느라 여념이 없다.
"에이 원고 쓸 기분이 안 나네!"
누군가 푸념을 뱉는다.
김지석에 대한 기자들의 사랑은 각별했으니 이해할 만도 하다.
그들 모두 저녁식사 시간을 놓친다.
그들과 함께 호텔 건너편 푸드 코너에 가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로비에서 김지석이 서 있었다.
"어? 저녁식사는?"
"하고 왔어요. 형들이 방에서 휴식을 취하는 중이라 그냥 바람 쐬러 내려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작가님 방에 전화를 했는데 안 계시더라고요."
"헉, 그럼 나를 찾았단 말이지!"
"네, 심심해서요."
"오케이! 그럼 황포 강으로 바람 쐬러 가자고."
그와 함께 택시를 타고 상하이 최고의 관광명소 와이탄으로 향했다.
"아쉽지?"
"네. 후반에 잠깐 집중력을 잃었어요."
"그래도 잘 했어. 4연승했으니까 제 몫은 한 거야."
"사실 어제 구리9단 대국은 컨디션이 별로였지만 오늘은 정말 이길 것 같았어요. 처음부터."
입 무거운 김지석이 모처럼 솔직한 발언을 한다.
그냥 기분이 이길 것 같았다는 거다.
그 기분이 반상에 그대로 드러났던 게 사실이다.
"성진이 형한테 세이브 기회를 준 것도 나쁘지 않아. 이제 바둑 이야기는 잊자고."
▲와이탄.황포 강변의 와이탄.
식민지 시대 서구 열강들의 조계지역이었던 까닭에 유럽 풍의 석조 건물들이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으며 위용을 자랑한다.
강 건너에는 동방명주 타워와 마천루가 보인다.
"와아, 동양 같지가 않아요!"
▲와이탄 주변 거리를 걷는 필자 김종서 작가(왼쪽)와 김지석.김지석이 감탄사를 터뜨린다. 사흘내내 내리던 안개비가 멎었다.
바람이 상쾌하다.
김지석의 표정도 홀가분해 보인다.
와이탄에서 대륙 중국의 저력을 읽는다.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지닌 중국, 인정한다.
그러나 적어도 바둑에서만큼은 중국도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리라.
김지석이 강 건너 신천지를 응시한다.
춘란배와 잉씨배가 또 기다리고 있다.
오늘 패배를 잊어도 좋으리.
지면서도 마음을 얻는 바둑이 있고 이기면서도 마음을 잃는 바둑이 있다.
미혹에 흔들려 막판 실수를 범했으나 오늘 바둑의 기세는 당당했다.
멀리 올려다 보자.
언젠가 저 건너 동방명주 타워처럼 우뚝 정상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 볼 때가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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