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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신라면배]

상하이에서 길을 잃다

-제13회 농심 배 참관기

중국 상하이- 김종서 작가2012-02-25 08:3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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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와 씨에허의 농심배 최종국 모습.

S#1. 神은 없다!

그는 끝까지 돌을 거두지 않았다.
어떻게 수순을 그려봐도 이기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단체전이라서 쉽게 던지지 못하는 거라고들 말했다.
중반 이후 알게 모르게 주도권을 뺏기면서 그는 길을 잃고 말았다.
1시간 짜리 바둑이 5시간 넘게 진행되는 경우도 보기 드문 장면.
나중에는 바둑 돌이 부족해 사석을 교환하기까지 했다.
냉정한 씨에허가 잘 둔 바둑.
미세한 균열을 발견하고 그 틈에 쐐기를 박아 야금야금 파고들어오는 잠행술. 아팠다.

시상식이 끝난 후 주최사 농심에서 한국 팀을 위해 만찬을 마련했다.
버스를 대절했는데 퇴근 러시아워에 걸려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이창호는 중간 좌석에 깊숙히 몸을 묻고 앉아 창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동생 영호 씨에 의하면 지난 밤부터 체한 증상으로 속이 거북했다고 한다.

20여 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이창호가 앞 쪽의 원성진과 김지석에게 묻는다.
"거기서 날 일 자로 뛰면 중앙 쪽이 애매해지잖아?"
그러자 원성진이 검토실에서 진단했던 수들을 설명한다.
이창호는 다시 허공으로 눈길을 주고 상념에 빠진다.
만찬 장까지 가는 40분 동안 모두 침묵했다.
어색한 정적이었다.
그는 만찬을 즐기지도 못 했다.
볶음밥과 야채 정도만 마지 못해 입으로 가져갔다.
국면이 어려워진 이후 끝날 때까지 그는 얼마나 끔찍한 통증을 느꼈을까?
검토 실에서 지켜보는 관전 객들도 그리 아팠거늘 당사자의 아픔은 오죽했을까?


▲착점하는 한국 주장 이창호

이제는 미안할 뿐이다.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도 그를 응원하기 위해 농심배의 수호신이라고 찬양했던 것을 사과하고 싶다.
그는 아주 사람다운 사람일 뿐이다.
바둑의 진리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기 위해 누구보다 많은 노력을 쏟은 인간일 뿐이다.
그래서 그가 걸어가면 곧 길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뒤를 따라 걸었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앞서가던 그가 잠깐 길을 잃었다고 의아해 할 일이 아니다.
이미 그가 걸어왔던 길만으로도 가치는 무한하므로.

▲3차전으로 향하는 길. 왼쪽부터 원성진, 이창호, 김지석

S#2. 삼형제의 통과의례

상하이로 함께 출격한 한국기사 트리오를 볼 때마다 삼국지의 인물들이 오버랩 되곤 했다.
기풍으로 볼 때 이창호는 유연한 유비, 원성진은 묵직한 관우, 김지석은 화통한 장비 스타일 아닌가?
같이 어울려 다니는 모습을 봐도 캐릭터의 궁합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다.

▲중국 주장 씨에허

이들 삼형제를 차례로 물리친 씨에허는 중국의 영웅이 되었다.
조조와 제갈량, 여포의 이미지를 두루 합쳐놓은 것처럼 대단했던 씨에허.
84년생으로 적은 나이가 아닌데 갈수록 기량이 단단해지고 있으니 놀랍기만 할 뿐이다.
최종전을 앞두고 중국 선수단이 가진 회식자리.
"김지석, 원성진을 꺾은 것만으로도 씨에허는 정말 장하다. 이제 이창호에게는 져도 괜찮다. 부담 없이 즐겨라."
단장은 그렇게 씨에허를 격려했다.
전성기의 컨디션이 아닌데도 그들은 아직까지 이창호에 대한 경외심을 품고 있는 듯 보였다.

중국이 우승 컵을 가져가는 순간 타이젬 대화 창이나 한국 측 검토실이나 공통으로 떠오른 한 마디가 있었다.
"김지석이 끝냈어야 했는데!"
틀림 없는 이야기다.
김지석이 절정의 기세로 씨에허를 질식 직전까지 몰고 갔던 국면이 아쉽고 아쉽다.
호텔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지석은 머리를 긁으며 부끄러워 한다.
아쉽기는 누구보다 그 자신이 아까울 것이다.
결과로 놓고 볼 때 지석은 7천만 원을 놓친 셈이다.
실착 하나의 대가치고 엄청난 액수 아닌가?

각각 나이 차가 있는 삼 형제 모두 상하이에서 극심한 통증을 공유했다.
이럴 때 해줄 수 있는 말은 '통증도 승부세계에서는 보약이다.'라는 말밖에 없다.
항상 이길 수는 없다.
강한 적이 눈 앞에 있어야 극복의 의지 또한 강해지는 법이다.
며칠 뒤 아버지가 되는 이창호, 군 입대를 앞둔 원성진, 일류에서 초일류로 도약을 꿈꾸는 김지석 모두 저마다의 갈래 길에서 한 번쯤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이런 시련은 잘 나갈 때 자신의 엔진을 점검해보라는 쉼표와도 같은 것.

▲상하이 와이탄,

S#3. 상하이 블루스
역사는 되풀이된다.
100여년 전 아시아의 대표적인 현대도시 상하이가 오랜 침잠을 딛고 다시 눈부신 발전을 하고 있다. 바둑 사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발전했다가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가 꽃을 피웠다.
그리고 새천년의 교체기와 맞물려 부흥의 기운이 대륙으로 선회하는 중이다.
올해 들어 중국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
황룡사쌍등 배와 엘지 배, 농심 배까지 퍼펙트로 접수하고 있잖은가?
상하이에서의 마지막 밤.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이 밤은 필시 잠을 이루지 못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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