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특집]
그 섬에 가고 싶다
-21세기의 조선통신사 유창혁9단
김종서 작가2012-09-30 21:29:30
S#1. 일본 포구 토모노우라의 추억 해마다 가을이 열리면 그는 바람이 되어 남쪽 바다로 떠난다.
여름의 이마는 너무 뜨거웠지.
격랑의 해협, 무정의 시간을 건너는 마음의 여로에는
아직도 미열(微熱)이 남아있다.

푸른 잎사귀로 찰랑였던 어린 날의 노래도
흐드러진 꽃무더기, 천리를 흐르던 젊은 날의 향기도
이제는 자꾸 멀어지는 그리움일 뿐이다.
걸어갈수록 사는 일은 무겁고 적막한 것 같아.

그러나 가을 바다에 서면 알 수 없던 예감이 보일 듯싶다.
저녁 하늘을 보면 문득 세상의 이치도 神의 한 수로 읽혀진다.
모든 것이 부둥켜안고 한 덩어리로 풍경이 되어 어둠을 기다리거든.
그래, 우리는 왜 그리 조급했을까?
한 걸음 쉬어 가도 길은 늘 그대로 기다리는데.

▲ 21세기 조선통신사로 참여한 유창혁과 김혜림
S#2. 세 번째 찾아가는 그 바다
유창혁은 올 가을에도 히로시마 현(縣) 후쿠야마 시를 찾았다.
재작년부터 시작한 ‘21세기의 조선통신사’ 바둑축제의 주인공으로 3년 연속 초빙됐기 때문이다.
그 사이 여류기사들은 이민진, 이다혜, 김혜림으로 바뀌었지만 유창혁만큼은 고정으로 통신사 역할을 맡았다.
세계타이틀을 획득한 이름값과 역할에 어울리는 나이, 한국 바둑계를 대표할 만한 무게감(한국기원 상임이사) 등이 캐스팅의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들보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 왼쪽부터 토모코, 고바야시, 김혜림, 유창혁
“고바야시 9단을 비롯해 일본기사들은 참 건전합니다. 바둑 이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아요. 후쿠야마 시민들의 바둑에 대한 애정도 볼수록 감동적입니다. 그곳을 찾아가면 생각이 많아져요.”
생각이 많아진다는 말뜻, 무슨 느낌인지 알 것 같다.
21세기의 조선통신사는 다름 아닌 바둑통신사다.
조선시대에 수륙 1만 리길을 건너 문물교류와 평화유지를 위해 힘썼던 그들의 존재를 후쿠야마 시는 한일 바둑교류 이벤트로 되살렸다.
몇 백 년 전 그들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 남녘 바다 주민들은 현대의 바둑통신사에게도 존중과 경외심을 보여준다.
반도와 열도 간에 영토문제로 언론이 요란하지만 후쿠야마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3년 내리 이 곳을 방문한 유창혁은 정상 급 기념대국이나 복기, 다면기와 사인회, 만찬 등에서 바둑통신사로서 최선을 다해왔다.
▲ 토모노우라 시민들과 지도대국 중인 유창혁
항상 빠듯한 스케줄로 진행되어 피곤하지만 낯 찌푸린 적 없고 동행한 후배들을 도닥이며 제 역할을 해왔다.
그런 모습이 현지 관계자들의 눈에 듬직하게 보였으리라.
필자는 그와 일본에서 꽤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어쩌면 바둑 이벤트보다 기나긴 여로(旅路)를 동행하며 가슴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떠났는지도 모른다.
일지매 유창혁.
어려서부터 화사한 천재 형으로 알려진 그를 보고 있으면 왠지 쓸쓸한 느낌이 묻어났다.
많은 성취를 이뤘으며 지금도 바둑계의 중심에서 태풍의 눈으로 활약하는 프로기사 유창혁.
항공편과 고속열차를 타고 함께 흐르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바둑 글을 쓰는 관찰자와 대화할 때 아무래도 의식되는 구석이 있을 법도 한데 그는 기풍처럼 거리낌 없이 바둑계의 풍향계를 짚는다.
묻기 껄끄러운 개인사까지도 정도껏 풀어놓는다.
수습은 관찰자의 몫으로 남는다.
“이 번 여행은 힐링 투어로 만듭시다. 일정이 바쁘긴 하지만 대화를 많이 나누고 힐링 캠프처럼 마음의 때를 벗고 가는 거, 괜찮죠?”
▲ 조선통신사 대표로 참가한 유창혁, 김혜림, 박상진
오사카 간사이 공항에서 후쿠야마까지 신칸센을 타고 가면서 바둑통신사 일행(유창혁, 김혜림, 박상진)에게 힐링 투어를 제의했다.
남녀와 어린이 대표로 캐스팅된 세 사람은 바둑 인생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상징한다.
바둑 외길을 택했고, 택하고, 택할 세 사람의 어깨에는 어떤 짐들이 얹혀있을까?
▲ 바둑 토크쇼
S#3. 바둑통신사 프로그램
일본에 도착한 첫날은 장거리 이동이었다.
저녁 무렵 후쿠야마에 도착해 도시락을 먹고 토크 쇼에 출연했다.
조선통신사의 유적지에서 기념대국을 하게 될 유창혁과 고바야시, 김혜림과 토모코를 패널로 사회자 기타니 마사오 씨가 진행하는 바둑 토크 쇼였다.
▲ 대조루에서 고바야시와 유창혁의 기념대국
이튿날 아타미(熱海) 해안의 아름다운 포구 토모노우라 누각 대조루에서 추억의 거인들 대국이 마련됐다.
유창혁 : 일본에서 유일한 명예3관 고바야시 선생과 대국하게 되어 영광스럽 게 생각한다. 사실 그 동안 대조루에서 성적이 좋지 않았다. 너무 자꾸 지면 바둑통신사로서 자격을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에는 최선을 다해 둘 생각이다.
고바야시 : 도쿄에서 인터넷으로 유창혁9단과의 역대전적을 살펴봤었다. 1승 2패로 내가 밀린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 열심히 두어 균형을 맞춰 볼 생각이다.
두 거인은 유머러스하면서도 날이 선 임전소감을 밝혔다.
같은 시각 토모노우라 공민회관에서 공개해설이 진행됐다.
언제나 그렇듯 해설 장은 유료인데도 만원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뜨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바둑은 의외로 싱겁게 초반에 결정나버렸다.
고바야시의 무리수를 유창혁이 응징하면서 이후 수순은 무의미했다.

▲ 시민들과 함게 한 만찬
▲ 도미회 : 토모노우라의 명물 도미
다음 날 저녁 토모노우라의 시 사이드 호텔에서 만찬이 차려졌다.
메인 메뉴는 도미회.
토모노우라의 특산물이 바로 도미다.

▲ 기념 휘호
현지 바둑애호가들이 한국 손님들에게 선물을 증정하고 참가기사들은 한 획씩 붓을 놀려 ‘友’ 자를 완성했다.
S#4. 그 섬에 가고 싶다
19세기 개화기 범선을 재현한 토모노우라 명물 철선을 타고 취선도(醉仙島)에 들어갔다.
화산도 특유의 절경을 간직한 섬이다.
▲ 명승지로 유명한 취선도
“가벼운 등산 코스가 좋겠네요.”
유창혁이 해변 일주도로보다 산을 넘는 횡단 코스를 택했다.
명승지인데도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가파르지만 난대림으로 우거진 섬의 숲길은 걸을 만 했다.
피톤치드의 상쾌한 기운이 가득해 몇 번이고 탁월한 코스 선택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 철 지난 바다에서 유창혁과 필자, 박상진
“이런 곳에 흙집을 짓고 살면 건강은 찾겠네.”
“여건만 된다면 저는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데요.”
그가 뜻밖의 대답을 한다.
이 고적한 곳에서 생활하고 싶다고?
다시 반문해도 고개를 끄덕인다.
“바둑 제자 몇 명 길러내고 오붓하게 생활하는 꿈, 우리 같은 기사들의 로망인지도 몰라요. 아이들도 이런 데서 햇빛과 바람 맞고 커야 하는데.”
자녀와 제자를 말하는 그의 눈빛이 아련해 보인다.
“아이들이 몇이죠?”
그의 아픈 결혼생활을 알기에 조심스레 묻는다.
“네 명입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집사람이 무척 고생하고 있습니다. 제가 일본에 있으니 아마 지금은 더 힘들겠죠.”
그 정도 설명으로 그의 마음을 적당히 읽고 싶다.
화려한 이력을 감안하면 그에게 야심찬 도시생활이 어울릴 듯싶은데 의외로 소박한 전원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고바야시의 절제된 삶을 부러워하고 있었다.

▲ 유창혁과 박상진
가장 높은 고지에 올라 바다를 보았다.
험한 산길을 씩씩하게 따라 온 박상진이 바다를 보고 감탄사를 터뜨렸다.
유창혁이 빙그레 웃으며 상진이와 포즈를 취했다.
“왕년에 세계대회 그랜드슬램했던 사범님의 기를 받아서 팍 입단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내년에 해버리겠습니다.”
초등학생 5학년인 상진이는 명랑 상쾌 발랄한 캐릭터다.
유창혁 옆에 상진이 들어가자 아까 고백했던 그의 꿈이 풍경으로 인화된다.
태평양의 바람을 쐬고 온 유창혁에게 가을이 풍성했으면 좋겠다.
[PS. 10월 2일은 김혜림의 힐링 투어가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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