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바둑사]
해외보급하며, 결혼까지!
폴란드 바둑보급, 그 두 번째 이야기
한상대 교수2012-12-23 11:49:26

▲ 폴란드 최대 타트라 산맥(Tatra Mountains)
폴란드 그 두번째 이야기
폴란드는 한반도의 1.4배쯤 크고 동쪽으로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러시아, 우크라이나가, 남쪽으로는 체코, 슬로바키아, 서쪽으로는 독일과 접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발트해가 있다. 수도 바르샤바는 폴란드 중앙부 약간 동쪽에 있다. 인구는 4천만, 일인당 국민소득(ppp)은 2011년 말 현재 2만불이 조금 넘는다. 원래 지금의 폴란드 땅에는 10세기 경 서슬라브족에 속하는 폴라니에족을 중심으로 나라가 형성되어 민족과 국토의 명칭이 생겨났다.
슬라브족이라 폴란드 사람 중엔 큰 사람이 많다. 폴란드는 966년 카톨릭을 받아들여 피아스트왕조가 성립되었고 크라쿠프가 정치적 중심지로 발전했다. 200여년의 공국 분할시대를 거쳐 중앙집권 국가를 이루었다. 1385년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연합 왕조인 야기에오왕조(14∼16세기, 수도 크라쿠프)가 탄생하였다. 조선왕조가 1392년에 시작되었으니까 7년이 빠르다. 16세기에는 폴란드가 유럽의 곡창지대로 최대 전성기를 맞는다.
1. 유럽바둑연맹 정기총회
유럽대회는 언제나 7월 마지막 주와 8월 첫주에 걸쳐 열린다. 2주간 하는 동안 첫주 주말에 정기총회가 열린다. 회장단 선거가 있고 새 집행부는 사업계획을 놓고 모임을 갖는다. 이번 투홀라 유럽대회 기간 중에도 유럽바둑연맹 정기총회가 열렸는데 간부 중에는 총무만 핀란드 바둑협회장에서 네덜란드 바둑협회장(Jan Rongen 3단)으로 바뀌었다. 필자가 새 총무와 인터뷰 하고 있는 중에 집행부회의가 시작이 되자 그들이 나에게 권유하여 집행부 회의에 참가할 기회를 얻었다.
▲ 유럽연맹이사회를 야외에서 형식없이 한다.
회의 동안 그들이 나에게 한국 바둑계에 보인 제일 큰 관심사는 인천세계대회가 계속되느냐였다. 당시는 인천시가 첫 바둑대회를 개최한 후 예산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이 회의에서 나에게 물어 보길래, 나는 내가 들은 바로는 금년에는 개최를 안하며 격년제로 하는 문제, 다른 도시로 개최권을 넘기는 방법, 스폰서를 유치하는 문제, 대회성격을 바꾸는 문제 등을 연구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대회 성격을 바꾸는 데에 대해 내 개인생각은 어떻냐고 묻길래 나는 "일본과 똑 같은 방식의 세계대회는 일본이 세계대회를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은 팀대항, 클럽대항, 여성대회 등 다른 성격의 대회를 개최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들도 사스 때문에 일본이 개최를 안 하자 한국이 그 공백을 매 꾸기 위해 인천이 개최한 것으로 들었다고 했다. 회의에서 한국이 제 1회와 같은 성격의 대회를 개최하는 경우 유럽대회를 1년에 두번 개최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 유럽바둑연맹 이사회. 신임 총무 롱엔씨가 나에게 자료를 보여주고 있다.
여름, 겨울 휴가철에 한번씩 개최하고 두 대회 우승자 중 한명은 일본, 한명은 한국에 보낸다는 계획이다. 두번 개최하자는 이유로는 유럽대회를 치르는 주최측이 수입이 생기므로 유치경쟁이 심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바둑 보급차원에서도 좋다는 의견이었다. 한 예로 금년도 유럽대회 우승자인 독일의 겔라크(Christop Gellach) 6단은 일본세계대회 출전권을 반납했는데 그 이유는 한국대회에 가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한국이 개최를 안 한다고 하자 자기는 붕 뜨고 말았다고 나에게 하소연 한다.
2. 치열한 유럽대회 유치경쟁
2005년 제49회 유럽대회는 프라하, 2006년 대회는 로마로 결정이 되어 있다. 그러나 2007년 개최지 선정을 이번 대회 기간 중에 했는데 오스트리아와 스웨덴이 올림픽 유치를 방불케 하는 불꽃 튀는 경쟁을 했다. 막후교섭도 치열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가 11대 10의 승리를 하여 51회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들은 웃으며 나에게 "오스트리아가 반집승을 했다"고 말한다. 스웨덴 회장은 나에게 아쉬운 마음을 표했다. 이 숨막히는 경쟁 뒤에는 명지대가 주최하는 학술대회가 큰 이유가 되었다.
▲ 신임 유럽바둑연맹 총무 롱엔(Jan van Rongen – 네덜란드 바둑회장)씨와 인터뷰
명지대 주최로 제1회 바둑학술대회를 2001년에 한국에서 개최했는데 주최측에서 앞으로 학술대회는 격년제로 하고 Home & Away 방식으로 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2년 뒤인 2003년에는 러시아 상페테르부르크에서 제 2회 대회를 개최했다. 유럽인들은 계산하기를 바둑학술대회가 2005년에는 다시 한국, 2년 뒤인 2007년 대회는 유럽, 이런 식으로 해서 2007년 학술대회가 열리는 유럽대회에 무게를 더 두어 치열한 경쟁을 한 것이다.
금년도 폴란드 대회장 말리노프스키가 바둑학술대회 의장을 맡았던 필자에게 금년 대회 폐회사를 부탁한다. 그만큼 학술대회에 비중을 준다. Home & Away로 학술대회를 주최하는 명지대 입장에서 보면 Away 경우 여러 나라가 참가하는 유럽대회가 물론 유력하지만 미국, 호주 등 다른 후보지도 많은데 유럽인들이 김치 국부터 마신다. 오스트리아 바둑회장이 나에게 와서 "국제바둑학술대회를 오스트리아 2007년대회에서 개최할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고 부탁한다.
3. 바둑 TV 보급
역시 회의에서 들은 얘긴데 한국측 실수로 유럽에서 인터넷을 통해 한국바둑TV를 한동안 봤다고 한다. 비록 한국말로 나왔지만 프로기사들의 바둑복기는 서양 바둑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한번 맛을 본 이 들은 나에게 "유료로라도 볼 수 있겠느냐?" "영어화 시키려면 돈이 많이 드느냐?"는 등 계속 질문한다.
그리고 보니까 왜 바둑 TV를 세계화 시키는데 우리 바둑계가 여태까지 게을렀는지 나도 궁금하다. 2012년 현재 호주바둑 국가코치인 안영길사범이 주최측 부탁으로 바둑 TV대국을 연구생 출신이며 영어성적이 좋았던 오치민과 같이 영역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 유럽대회 기간이 여름철이라 아무데서나 편안한 자세로 바둑을 둔다
4. 홍승희 PD, 운명을을 만나다
한국이 주최하는 학술회의도 겸해서 한국인 40여명이 최초로 2003년 러시아 유럽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물론 대회 성적도 1~4 위를 휩쓸고 10 위 내에 6명의 한국인이 입상을 했다. 작년에 한국인들이 처음으로 대거 유럽에 진출한 이 사건을 유럽인들은 'The first Korean invasion' 'Koreans are coming' 이란 표현을 썼다. 나는 러시아 대회가 끝난 후 3명의 7단을 포함한 명지대팀 18명을 인솔하고 버스를 대여하여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 체코,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의 유럽 도시들을 돌며 교류전을 가졌는데 한국팀이 80%가 넘는 승률을 올렸다.
금년에도 이 대회 후 내가 인솔하고 한국 바둑팀이 프랑스,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등을 돌며 교류전을 가졌다. 이번엔 강자들이 없어 승율이 안 좋았다. 이런 교류전이 미치는 한국 바둑의 이미지는 생각보다 크다. 이번 한국팀 일행 중에는 월간지 바둑세계 조창삼사장(5단)과 최준원 기자(6단)가 바둑서적판매와 취재를 겸해 참여했고 바둑TV의 홍승희 PD(3단, 25세)는 모든 과정을 영상에 담아 취재하기도 했다. 특히 이 여행 중 홍 PD는 벨기에 부룻셀에서 현재 자기 신랑인 벤자민을 만났다. 승희는 결혼해서 브룻셀에 살고 있다.
▲ 홍승희와 필자. 오슬로 뭉크박물관 바둑 TV에 출연한 필자와 벤자민
▲ 옛 수도 크라쿠프(Kraków)엔 이런 건물이 많다. 바벨 성(Wawel Castle)
5. 유럽대회 한국 연속 석권
유럽대회에서 승부를 중요시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6단 이상으로 구성된 수퍼그룹(Super group 32명) 멤버들 정도이다. 다른 사람들은 바둑잔치에 참여해 같이 바둑을 즐기고 주변 관광을 하고 사람을 사귀는 일에 열심이다. 이번 대회 결과는 작년에 홍슬기 7단이 우승한데 이어 금년에도 윤광선 7단(연구생 출신, 청아모 총무)이 우승하고 10위 이내에 이홍복, 이기봉, 이승현등 한국인 4명이 포진했다. 그러나 비유럽인은 오픈조에서만 성적이 반영되어 오픈챔피언 상금이 유럽챔피언 보다 훨씬 적다.
바둑대회 진행방식은 스위스 맥마흔 제도. 모든 참가자가 15일 동안에 10 라운드(10판)를 두도록 한다. 제한시간은 각자 두 시간 반이고 하루에 한판씩 두며 주말은 쉰다. 한국 아마추어에겐 하루에 한판 두는 건 고문이다. 차라리 20판을 두라고 하는 게 훨씬 좋다. 내가 시간좀 줄이는 게 어떻겠냐고 했더니 회장단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웃기만 한다. 자기네도 아직 좋은 해결책을 못 찾은 거 같다.
▲ 이정애, 이승현 자매, 필자, 윤광선(우승컵), 오규철 프로 9단
6. 주말 여가선용
대회기간 중간에 쉬는 주말에는 수도 바르샤바나 고도(古都)이며 항구도시인 그단스크에 관광 다녀오는 사람, 대회장 근처 호수에서 물놀이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남아서 Side Event 바둑대회에 몰입하는 사람들도 있다. 윤광선 7단과 이승현, 이정애 자매 3명은 폴란드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옛 수도 크라쿠프에 가서 중세 폴란드, 아우슈비츠히 수용소, 소금광산을 돌아보고 오기도 했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 제 11동(Auschwitz -"Block 11")
쿠라쿠프에서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진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있다. 나치가 유태인을 6백만명을 학살(genocide)했는데 그 중 150만명을 이 곳에서 처형했다. 이 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유태인 외에도 소련군 포로, 정신질환자, 동성애자와 나치에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수용소 생성 후 새로 지어진 몇개 건물들 외에는 원래는 전부 폴란드 군의 벽돌 막사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전체 28동으로 되어 있다. 1945년 1월 27일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해 해방되었다.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7. 옛 수도 크라쿠프
17세기초반에 바르샤바로 수도를 옮길 때까진 크라쿠프가 폴란드 왕국의 수도였다. 많은 중세유적들이 남아 있고 도심(都心)의 왕궁과 대학은 문화 유산이다. 폴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가운데 하나이고 폴란드의 공업, 학문, 문화의 중심지이다. 인구는 140만으로 바르샤바 다음으로 크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크라쿠프 구도시 지역
▲ 크라쿠프 광장
8. 그단스크
나는 두번째 휴일에 북쪽으로 발틱해 항구 그단스크(Gdańsk)에 다녀왔다. 원래 그단스크는 1차세계대전까지는 서프러시아 수도 단치히(Danzig)였다. 1919년 1차대전이 끝나고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폴란드령이 되었고 폴란드의 발트해를 면한 제일 큰 도시가 되었다. 독일은 항상 이 도시를 빼앗긴 일을 억울하게 생각하다가 히틀러가 2차대전을 일으키고 제일 먼저 가서 점령했다. 2차대전 후 다시 폴란드령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 폴란드 최대 항구 도시그단스크

▲ 1939년 나치에게 저항하다가 포로가 된 우체국직원들. 처형되기 직전
최준원 기자는 첫 서양도시를 그단스크에서 경험하였다. 중세건물들이 늘어선 거리, 보석상 골목, 시장, 항구를 나와 같이 돌아 보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자기가 가본 곳 중 제일 좋은 곳으로 그단스크를 꼽는다. 내가 "최기자가 세계를 아직 못 봐서 거길 꼽는 거야" 하며 놀렸다. 최기자가 여러 곳을 더 가보면 순위가 바뀌겠지만 그단스크도 아름다운 곳이다. 바르샤바는 전쟁 중 폭격피해가 많았으나 이 곳은 피해가 없어서 중세건물들이 잘 보관 되었다.

▲ 그단스크 항구 – 안내원, 필자, 방영부 6단
▲ 필자와 광주에서 온 두 명 - 김사장(4단), 오규철사범
▲ 중세 도시 그단스크
9. 바웬샤
바웬사(Lech Wałęsa 1943~)는 좋지 못한 환경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위한 노동조합운동을 벌이다가 쫒겨나 1976년부터 4년간 실업자가 된다. 1980년 그가 일하던 레닌 조선소로 들어가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이들을 이끌고 파업으로 대정부투쟁에 들어갔으나 구속된다. 이 사실은 폴란드의 민주화 인권운동으로 전세계 뉴스가 된다. 영국여왕은 국빈방문으로 그단스크 항구에 와서 바웬샤를 석방 안하면 배에서 내리지 않겠다고 폴란드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구속된 그를 서방측의 압력으로 석방시켰고 바웬샤는 1983년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설마 그가?" 하는 반응을 당시 유럽 여러나라에서 보냈다고 한다. 1990년 압도적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1994년 폴란드 대통령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초등학교만 졸업한 그가 좋은 대통령이 되는데는 한계를 보인다. 바웬샤는 구소련과 동유럽 공산권에 항거하는 운동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패거리 정치, 섣부른 개혁 등으로 경제난을 가중시키고 말았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실각과 정계 은퇴였다. 은퇴한 바웬샤는 자기가 일하던 옛 조선소 전기기사로 돌아간다.
▲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는 바웬샤
10. 한국행을 꿈꾸는 유럽 영재들
이외에 유럽바둑 영재교육을 한국이 맡아달라는 부탁도 있었다. 독일의 14살 소년 토스텐 크나우프(Torsten Knauf 2단)의 아버지는 한국 유명 바둑도장에서 자기 아들이 1년쯤 바둑수업을 받고 결과를 보아서 그 다음 행마를 하고 싶다고 희망했다. 나에게 주요도장들과 얘기하여 비싸지 않게 제자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역할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소년의 부친, 독일 바둑협회 부회장과 필자가 한 시간 이상 앉아서 한국에 가는 경우 학교문제, 한국어 배우는 문제, 아이의 장래 문제 등에 대해 의논을 했다.
내가 양재호 9단(現한국기원 사무총장)과 자기 도장에 외국인을 데려오면 월 100만원에 해주겠다고 합의를 보고 와서 경비 문제는 말하기 쉬웠다. 이 때 토스텐 본인이 슬그머니 나에게 다가와서 자기가 탁구와 축구를 좋아하는데 한국 도장에도 그런 운동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겠느냐고 묻는다. 내가 독일보다 더 많을 거라고 하니까 수즙은 웃음을 띄고 사라진다. 귀국해 보니까 소년의 아버지로부터 온 이 메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소년이 받아지는 경우 여러 나라에서 희망자들이 생길 수 있다고 독일 부회장이 말한다. 네덜란드, 노르웨이에서도 나에게 비슷한 희망을 전해왔다. 그러나 2004년 당시 한국 바둑계는 서양 바둑영재를 받아드릴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였다.
▲ 민속의상
11. 오랜만에 만난 크라체크(Janus Kraszek)
대회장에서 누가 나를 보고 웃으며 다가온다. 아는 얼굴인데 누굴까? 잠시 당황했는데 앞에까지 와서 보니까 전설의 챔피언 크라체크다. 그는 초기 일본 세계대회에 폴란드 대표로 8번인가 연속 출전을 해서 최다참가 기록을 세웠다. 호주 경우는 내가 한번 세계대회에 나가면 그 다음해는 우승을 해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여 기회를 나눠 갖기로 했는데 폴란드는 그런 제도가 없이 우승자가 계속 나가도록 되어 있었다.
79년 2월 제 1회대회에서 내가 크라체크를 만나 쉽게 이기고 내 방에 온 그를 두점 접어주고도 내 승율이 압도적이었다. 81년에 만났을 때 벌써 그는 훨씬 강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유럽챔피언들은 한국계를 만나면 싸움바둑에 혀를 내두르곤 했다. 그는 나보다 약 10년쯤 젊다. 그와 나는 세계대회가 끝나고 같이 일본을 여행하면서 자주 대국을 했다. 한국 아마국수 챔피언은 세계대회가 끝나면 단장의 지시에 따라 곧장 귀국을 하곤 했다. 한번은 내가 대구에서 온 이학용선수를 귄해서 오사카 여행을 같이 한 일은 있었다.
83년의 일이다. 내가 4승 2패로 마지막 판에서 크라체크를 만났다. 나는 속으로 "어? 이친구가 용케 여기까지 올라왔네" 하며 만만한 그를 만나 기뻤다. 그런데 바둑이 진행되면서 그가 반발하는 것이 예전 그가 아니다. 결국 내가 졌다. 끝내기가 진행되면서 관전자가 늘어난다. 초읽기에 몰렸는데 형세 판단이 안 된다. 한 두집 다투는 계가 바둑인 것만 알겠다.

▲ 폴란드 어린이 바둑교실
내 딴엔 판을 복잡하게 끈다고 패감을 제대로 읽지 않은 상태에서 패를 걸었고 그 패를 져서 한집 반을 진다. 조선생이 "패를 안했으면 한집 반이 남는 바둑을 괜히 패를 써서 아까운 바둑을 지셨구먼그랴" 하며 나를 보고 크게 웃는다. 나에게 이긴 크라체크는 너무 흥분해서 거의 2미터가 되는 덩치가 괴성을 지르며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그는 7위를 했고 그날 아프기까지 했다. 자기 방에 들어가 저녁도 먹으러 안 나왔다.
나는 크라체크 보다 더 강자들을 물리쳤기 때문에 내가 이겼으면 5위가 된다. 크라체크는 나를 이긴 여세를 몰아 그 해(1983) 유럽챔피언에 오른다. 그의 전성기였다. 20 년이 넘어서 만난 그도 이젠 중년이 되었다. 폴란드 8 강이 겨루는 수퍼그룹에도 못 끼었다. 그러나 대회에 나와 바둑은 열심히 두고 있다. "오! 세월의 무상함이여~" 그를 보니까 나를 보는 거 같다. 그러나 나는 바둑팀을 끌고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고 수학박사인 크라체크는 당시 세계에서 제일 강하다는 컴퓨터 바둑 "폴란드의 별"을 만들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맥아더 장군 말처럼 "노병은 죽지않고 사라져갈뿐이다"
크라체크의 바둑제자이며 이번 대회장인 말리노프스키의 "나의 스승 크라체크에게 바친다"라는 글에서 유럽 챔피온이며 수학자인 크라체크의 가르침을 소개하고 있다. "나의 스승의 견해에 의하면 바둑은 침착한 성격, 심리적 안정, 인내심을 길러 준다. 그 걸 통해 얻은 사고의 틀이 우리가 바둑의 본질을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들어 준다. 또 우리가 한 차원 높은 대국을 할 수 있도록 해 준다. 바둑은 인생의 행복을 위한 노력을 반영한다"
12. 바둑보급 방법
인터넷 바둑은 유럽인 거의가 일본에서 운영하는 KGS를 사용한다. 나이 든 사람 중에는 IGS 사용자도 있다. 이 Site들은 영어와 Java를 사용하고 유럽 인터넷과 호환성이 좋아서 편리하다. 우리나라 Site 는 용량이 커서 입력 시키기 힘들다는 얘기를 한다. Tygem은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우리도 영어화 시키고 호환성이 높은 인터넷 Site로 유럽 시장을 공략해야 하겠다.
유럽에는 대략 바둑인이 10만 명쯤 된다고 한다. 유럽인구는 8억쯤 된다. 그들은 '고스트 바둑왕'의 판권을 사서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12억원 정도를 투입하여 작업하고 있다고 한다. 유럽 바둑인의 입에서 일본 발음으로 "망가(만화)" "히카루노 고" 란 말을 누구나 하고 있었다. 노르웨이 오슬로 클럽에 갔더니 Sennes(4단)씨가 나에게 이 만화를 보고 바둑을 배우겠다는 어린이 몇 명이 생겼다고 한다.
▲ 방영부, 최준원, 송중택, 하호정, 필자, 김민희, 조창삼, 강승희, 이기봉, 윤영선, 스베타
독일 출신 프로기사 한스 피치가 사망한 사실을 유럽 바둑계에 큰 손실이라며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한스피치 컵'이란 어린이 대회를 매년 개최한다. 한국바둑에 대해서는 "수읽기에 의존하는 전투형 바둑으로 자기들 실력으로도 변화의 무궁함에 재미를 느끼게 해 주어서 고맙다"고 입을 모은다. 하수들이 뭘 안다고 "일본바둑은 이론에 너무 집착해 한계가 있다"는 말을 나에게 한다.
"한국 바둑인이 유럽에 많이 오고 유럽인도 한국에 자주 갈 수 있는 교류프로그램이 있으면 좋겠다"고 하길래 내가 "바둑인 끼리 서로 Home-stay 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니까 쌍수를 들어 환영한다. 작년에 한국에 와서 10일간 휴가를 바둑두는 일로만 보내고 간 독일인 컴퓨터 박사 룽거(Runger)씨는 "한국은 바둑인의 드림랜드(Dream land)다"라고 말한다. "한국의 바둑클럽들이 유럽국가들과 10대 10 정도로 안터넷 친선대국도 좋은 방법일 거 같다"고 한다.
▲ 엣킨스(Tony Atkins) 유럽연맹 회장과 필자 아기 엄마도 대회에 참가했다
작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Home-stay 한 것이 인연이 되어 이기봉 7단(명지대 바둑학과 강사)을 초청한 다니엘라가 있다. 이들은 두 달 동안 이사범과 독일 15개 도시의 바둑클럽을 순회 하고, 루티아니아 대회, 투홀라 유럽대회, 그 후 2차 독일투어를 하며 지도기를 두도록 알선하고 안내해 주었다. 다니엘라는 바둑에 대한 순수한 헌신을 보여준 본보기였다. 참고로 독일에만 약 200개의 바둑 클럽이 있다. 이기봉 사범은 과거 유종수 사범처럼 담박에 유럽 바둑 계에서 유명 인사가 됐다. 다니엘라는 명지대 바둑학과에 와서 공부했는데 나도 그녀를 가르쳤다.
유럽인들은 한국 아마강자가 유럽에 사범으로 오는 방법도 좋겠다고 했다. 아마 7단 정도의 강자가 와서 클럽을 도와주면 당장 수입은 불충분 하겠지만 학생수를 늘려가며 자리를 차츰 잡을 수 있을 것으로 말한다. 문제는 영어를 수준급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태권도 사범이 처음 해외로 진출 할 때는 영어를 몰라도 몸으로 시범을 보여가며 가르쳤는데 바둑은 설명이 필요하므로 영어구사는 필수조건이다.
세계기도 보급은 그 동안 일본이 혼자 해왔는데 이제는 한국과 중국이 나서고 있다. 바둑최강국이 된 한국이 이제는 계획된 작업을 할 때가 되었다. 나는 이번에 느낀바가 많아 한국에 돌아와서 '한상대 바둑영어교실'을 열고 7년 동안 200여명의 바둑고수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그 중 유럽에 파견한 사범은 스페인에 오은근 사범, 독일에 황인성, 홍슬기, 오치민 사범, 영국에 강경낭 사범 등이 있고 윤영선 사범은 결혼해서 갔지만 역시 내 제자다.
▲ 대회장 근처에서 물놀이 하는 사람들
13. 내가 눈치채지 못한 영선이와 라스무스의 사랑
윤영선, 하호정, 김민희, 강승희 4명의 여류 프로가 아일랜드 유럽콩그레스부터 4인방이 되어 유럽을 돌아다녔다. 이들은 자연히 유럽 젊은 바둑인의 눈총을 받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 중 누가 서양 바둑인과 서로 좋아하는 일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 거 같다. 나는 폴란드 대회에서 이들 4인방이 서양 친구들과 앉아 있으면 바둑을 가르치고 있으려니만 생각했다.
라스무스가 한국에 왔을 때 내가 그와 영선이를 압구정 삼원가든에 초청하여 저녁을 냈다. 내가 독일에서 받은 대접의 감사표시였다. 라스무스가 갈비와 매운 한국음식을 너무 잘 먹는다. 그 때 둘이가 나에게 결혼하겠다고 한다. 이 고백을 듣고 나서 나중에 당시 투홀라대회 사진들을 보니까 영선이 건너편에는 언제나 라스무스가 있었다. 영선이가 폴란드 대회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내 영어교실에서 필사적으로 영어를 공부한 이유가 이제야 무언지 알겠다.
▲ 라스무스와 필자 – 하노버 역 앞 라스무스와 필자의 대국
영선이의 영어 느는 속도가 빨라 "저러니까 여류국수를 4번이나 우승했지" 하고 주위에 얘기했는데 보니까 라스무스라가 더 큰 이유였다. 내가 폴란드대회 후에 하노버에 갔을 때 이틀 동안 라스무스가 나를 정성을 다해 돌보아 주었다. 그는 당시 하노버대학교 학생이었다. 그러나 라스무스는 영선이 이름을 입밖에 내지도 않았다. 그 후 내가 스카이 바둑팀과 윤영선, 강승희 여류와 함께 유럽에 갔을 때 나는 부친상을 당해 도중에 귀국하게 된다.
▲ 하호정 왼쪽 옆이 라스무스 오른쪽 옆이 윤영선
▲ 여기서도 영선이 건너편에 라스무스가 앉아 있다.
14. 부친상과 한상대식 방내기 대회(Hahn System Tounarment)
우리가 베를린에 도착했는데 'Go to innovation' 이란 제목으로 바둑대회를 혁신적으로 재미있게 하는 방법에 대해 아이디어를 모으고 있었다. 150개의 아이디어가 들어왔는데 동양 3국에선 한명도 아이디어를 제출한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내가 궁리 끝에 우리나라 방내기를 변형시킨 방법으로 아이디어를 하루 종일 써서 저녁에 제출했다. 대회를 싸움판으로 만드는 게 목적이다. 다음 날 아침 내가 당선된 걸 알았고 독일 바둑협회 간부들이 모인 회의에서 내 제도에 대한 질의응답을 하고 있을 때 한국에서 집사람이 전화하여 "아버님이 돌아가셨어요" 한다.
▲ 베를린 문화센터
나흘전에 내가 모시고 우래옥에 가서 냉면을 사드릴 때 유럽 얘길 밝은 목소리로 하시던 분이 그날 아침 "오늘은 내가 몸이 않좋다" 하시더니 저녁에 돌아가셨다고 한다. 92세 셨다. 내 표정을 보더니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기에 부친상을 당했다고 하자 그들은 회의를 곧 중당하고 나에게 “무얼 도와주면 되겠느냐?"고 한다. 내가 "한국으로 가장 빨리 가는 길을 도와달라"고 하자 두명은 항공사에 전화하고 한 명은 나에게 자기가 공항에 가장 빨리 가는 길을 아니까 차를 문앞에 대기 시켜 놓겠다고 하며 나간다.
누구나 나에게 와서 애도의 뜻을 표하고 내가 인솔하고 온 스카이 바둑팀은 자기네가 하노버로 가는고속도로 입구까지 바래다 주고 가는 곳 마다 미리 이메일과 전화로 "리더가 부친상을 당해 한국으로 갔으니까 영어가 부족하더라도 한국팀을 잘 돌봐주라"는 메시지를 전하겠다고 한다. 나는 베를린에서 우선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내 자리가 제일 앞에 편한 자리로 잡혀있고 기장이 나와 나에게 위로의 인사를 하고 돌아간다.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모든 편리를 봐주고 한국으로 갈 때까지 비행기 안에서 빈틈 없이 돌보아 준다.
다 베를린 바둑협회에서 전화로 수배를 해 놓아서 그렇다. 나는 이 일을 경험하면서 새삼 선진 독일을 강하게 느꼈다. "바둑 때문에 맞아들이 아버지 임종도 못 지켰다"고 말하는 친척도 있었으나 상주인 내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 날 문상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편 나를 믿고 모든 경비를 대고 유럽취재를 결정한 스카이바둑 대표가 문상을 와서 나에게 위로의 말을 할 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장례가 끝나고 내가 없는 바둑팀 유럽순회에 대해 걱정을 하면서도 그 전 해에 나와 함께 유럽을 같이 돈 김선기가 있어서 그가 잘해 주기만 바랐다. 그러나 나중에 라스무스가 유럽을 같이 돌며 돌보아 주었다고 들었다. 내가 할일을 그가 덜어준 것에 대해 고마워만 했지 모두가 영선이를 위해 했다는 걸 그 때까지도 눈치 못챘다. 나는 그만큼 둔하고 그 두 놈은 그만큼 엉큼했다. 라스무스와 결혼한 영선이는 함부르크에 살면서 바둑보급에 올인하고 있다. 독일어도 많이 늘어 이제는 독일어로 강의한다. 영선이는 유럽에서 진정한 바둑전도사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 독일의 윤영선 사범 지다면기
내가 만든 'Hahn System' 바둑대회는 베를린에서 1년에 두번씩 유럽에선 제일 큰 상금을 걸고 열리고 있다. 그 대회 참가자들은 "한국 싸움 바둑을 두러 가자"며 참가한다고 들었다. 나는 나중에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바둑 좋아하는 아들에게 선물로 '한상대식 방내기 제도(Hahn system)'를 주고 가신 거 같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이 대회가 열리기전 어느날 베를린 황인성사범이 나에게 전화하여 "교수님, 이 대회 Side Event로 순장바둑을 넣으면 어떨까요?" 하길래 "너무 좋은 아이디어다. 그렇게 하자" 하여 이 바둑대회를 완전히 한국판으로 만들었다. 두 방식 다 싸움을 피할 수 없는 특징이 있다 ☞Hahn system 바로가기
▲ 우승후보끼리 대국. 온드레(체코)와 오은근사범. Hahn system 대회. 뒤에 벤이 웃고 있다
15. 2012 제 15회 Go to Innovation(Hahn system) 바둑대회
제 15회 Go to Innovation(Hahn System) 대회가 지난 11월 16~18 사흘간 베를린에서 열렸다. 이 대회는 우승이 천유로지만 10등 밖에까지 골고루 상금을 나누어 주는 대회로 유명하다. 내가 만든 '한 점수제도'는 한방 이기면 승자 60점, 패자 40점을 받고 두방 이기면 승자 70점, 패자 30점 하는 식으로 다섯방 이상 이겨야 승자가 100점을 얻는다. 패자도 점수를 받기 때문에 조금 이기고 있는 사람이 점수를 더 얻기 위해 무리를 하다가 뒤집히는 경우도 많다.
끝까지 바둑을 포기할 수가 없어 감정소모가 훨씬 많은 대회라고 한다. 황인성이 빠져 이번엔 오사범이나 온드레 중 우승자가 나올줄 알았으나 중국인 조우(Zou) 6단이 우승을 차지했다. 온드레 준우승. 스페인에서 온 오사범은 4위에 그쳤다. 사진에 보니까 온드레가 인사법을 제대로 배웠다. 베를린 한국교민 최용식씨는 13위를 했다.
▲ 유럽연맹부회장 흐르코바와 최용식 3단. 그는 택시 기사인데 베를린 명물 콧수염이다
폴란드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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