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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여류국수전]

거북이, 깃발을 꽂다!

- 여류국수에 오른 김혜민

김종서 작가2013-03-14 09:2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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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류국수 김혜민.

S#1. 멀고 먼 길

“산티아고 가는 길을 동경해요.”
언젠가 그녀가 말했다.
페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서부 산티아고 성지까지 이어진 길고도 긴 여정을 오래도록 걷고 싶다고.
풍경이 아무리 수려해도 오래 걸어야 하는 길은 지겹고 지루할 텐데 그녀는 그런 길을 그리워했다.


김혜민. 86년생으로 스물 일곱 살.
99년 입단해 14년 만에 첫 타이틀을 따냈다.
참으로 멀고 먼 길을 뚜벅뚜벅 걸어온 끝에 봉우리에 오른 것.
그녀는 항상 여류기전의 본선 대진표에 들어 있었다.
4강에도 자주 들었고 준우승도 네 번이나 기록했다.
그만큼 꾸준한 멤버.

▲ 박지은(왼쪽) vs 김혜민 대국 장면.

그러나 결정적 한방이 부족했다.
기회가 왔을 때 힘을 응축해 몰아서 터뜨리는 폭발력이 좀 약했다.
김원 사범의 수제자로 어려서부터 기재를 인정받았는데 그 바람에 가족과 주위 사람들의 과잉기대로 몸살을 앓았다.
좀처럼 뜨지 못했다.
루이나이웨이의 철벽과 박지은, 조혜연의 쌍벽이 높았으며, 후배 박지연과 최정의 가속도가 눈부셨다.
이민진, 문도원은 정관장에서 불꽃타를 날렸고, 김윤영도 기성을 차지하며 존재감을 뽐냈다.
장거리 레이스에서 항상 상위권에 들었지만 테이프를 끊지 못하고 우승자의 등만 바라봐야 했다.
한계를 넘지 못하고 문턱에서 자꾸 걸려 넘어지자 스트레스가 심했다.
2006년 부모님들의 권유로 명지대 바둑학과에 들어갔다.
솔직히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다.
캠퍼스로 들어가서 또 다른 세계의 기운을 쐬며 진로를 모색할 참이었다.

▲ 2008년 국제마인드스포츠대회 여자단체전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런데 바둑 공부를 멀리 하고 대학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는데 엉뚱하게도 성적이 좋아지는 것이었다.
김혜민은 국제대회인 대리배 결승까지 올라갔다.
바둑은 그렇게 뭔가 비워낼 때 부드럽게 찾아오는 법.
부모님들의 기대가 느슨해지고 캠퍼스 생활을 만끽하면서 비로소 바둑을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2013년 3월 12일
가그린배 여류국수전의 고지에 깃발을 꽂았다.

▲ 결승 2국에서 불계승을 거둔 직후.

S#2. 그녀는 예뻤다

김혜민은 그 동안 크게 두드러진 적이 드물다.
스스로도 튀길 꺼려하는 체질이다.
항상 동료들의 뒷전에서 웃고만 있었다.
지난해까지 여류기사회 총무를 맡아 살림을 꾸렸다.
무여회에서도 맏언니 이민진을 도와 동생들을 챙겼다.

▲ 무여회 멤버들과 함께 찰칵!  

그런 김혜민을 모두가 좋아한다.
그녀가 여류국수에 오르자 많은 여류기사들이 박수를 쳐주었다.
결승상대 박지연 조차도 낯을 찌푸리지 않고 악수를 청했다.

▲ 입단 만 13년 5개월 만에 첫 타이틀을 따낸 김혜민은 덤덤하게 인터뷰에 응했다.

“지연이에게 정말 미안했지만 솔직히 우승이 결정됐을 때 너무 기뻤어요. 가슴이 짜릿하면서 이런 맛에 승부를 하는 거구나 싶었어요.”

- 입단한지 14년 만인데 울컥하지 않던지?
(웃음) 저는 조금 무딘 편이라 울컥할 정도로 감수성이 민감하진 않아요. 마냥 기쁘기만 했어요. 그 동안 마음 고생하신 부모님 생각이 났고요.

- 하루 일과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기원에 나가 무여회 멤버들과 공부를 해요. 어떤 경우에도 서로 시샘하지 말고 격려하면서 함께 하기로 했거든요. 그 친구들과의 시간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올해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바둑학을 근본적으로 공부해보고도 싶어서. 이론과 승부를 동시에 추구하는 기사가 되고 싶거든요.

▲ 무여회 멤버들과 사활풀이 중인 김혜민(맨 왼쪽).

- 자신의 기풍은?
저는 잘 모르겠고 동료들이 그러는데 기본이 튼튼하다던데요.

- 닮고 싶은 선배 기사는?
박영훈 사범님을 닮고 싶어요. 치밀한 계산이 놀라워요.

- 취미는?
야구광입니다. 뼛속까지 LG트윈스 팬이에요. 잘 생긴 선수들이 많아서(웃음) 바둑 지는 날이면 야구장을 찾아 갑니다. 그라운드를 내려보면 가슴이 뻥 뚫리곤 하죠.

- 잘 먹는 음식은?
고기라면 다 잘 먹어요. 육식동물이란 별명도^^;

- 별명이 '거북이'라던데?
도장 다닐 때 초록색 운동복 입고 나타났더니 민진 언니가 거북이 같다고 해서 붙여졌어요. 저는 거북이란 애칭을 좋아합니다.



별명 거북이처럼 그녀는 느릿느릿 목표를 향해 걸었고 14년 만에 기어이 정상에 섰다.
아직도 소녀처럼 밝고 마음 건강한 김혜민의 승부인생은 지금부터 새로운 출발을 예고한다.

S#3. 타이젬 대국실에서

그녀와의 인터뷰는 타이젬 대국실을 통해 이뤄졌다.
우리는 여기서 가끔 편하게 만난다.
아이디는 클럽킴(P) 9단이다.
그녀가 1:1을 걸어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여담.

▲ 무여회 멤버 김윤영(왼쪽)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  

- 남자 친구 있어요?
노 코멘트요 힛.

- 있다는 뜻이네 뭐.
저를 존중해주는 사람과 만나 서로 존중하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 최근에 김윤영과 둘이 배낭여행갔다면서요?
네, 싱가폴과 호주를 다녀왔어요. 너무 좋은 재충전의 시간이었지요. 아마 그 여행에서 좋은 기운을 얻어 국수 위를 차지한 것 같아요.

- 재미있는 에피소드는?
호주 골드코스트에 들렀을 때 배낭여행자 숙소에 묵었는데 같은 방에 남자가 두 명 있었어요. 투숙하는데 남녀 구분이 없는 모양이더라고요. 밤새 가슴이 콩닥콩닥해 진정하고 자느라 헤맸지요. 정작 그 남자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던데요. 문화적 차이겠죠?

- 치이, 그대들이 글래머였으면 상황이 좀 다르지 않았을까?
헉! ㅎㅎㅎ그럴 수도 있겠네요.

- 여류국수님께 지도대국을 청하면 실레일까?
무슨 말씀을! 지금 당장 신청하세욧!


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망설임 없고 유쾌하며 싹싹하다.
그래서 심야의 지도대국 한 판 시작했고 10분 만에 부드럽게 밀려 불계패했다.
중급자 바둑 팬들을 위해 그 지도대국 기보를 소개한다.
내용은 엉망이지만 김혜민의 인간성을 느낄 수 있는 기록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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