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바둑사]
‘아, 조치훈과의 대국이라니….’
전 시드대대학 한상대 교수의 주강배 참관기(上)
한상대2013-12-31 10:38:07
▲ 광저우 진주강변(珍珠 江邊)
지난 연말 내가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주강배 세계바둑단체전에 가겠다고 했더니 집사람이 말린다. 내가 9월에 큰 수술을 받고 아직 회복 중인데 무리라는 거다. 그래도 내가 고집했더니 집사람이 '그럼, 오람이를 데려가서 아버지를 돌보도록 하세요' 조건부 허락을 받아 나는 아들 오람이와 같이 광저우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나에겐 꼭 가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시드니에서 1년 뒤인 2015년 1월에 열릴 '호주 바둑 콩그레스'를 위해서다. 어느 날 내가 호주 바둑협회(AGA) 신명길 회장과 대화하다가 "지금 서양엔 유럽 콩그레스와 미국 콩그레스만 있는데 호주 콩그레스도 하나 만들어 야 할 거 아니야?" 했더니 신회장이 "못 할 것도 없지요" 해서 모든 일이 시작 되었다. 나는 그 준비를 위해 중국이 치르는 세계대회를 보고 싶었다.
호주 콩그레스는 내가 조직위원장을 맡았고 사업가인 신명길 회장이 스폰서가 되었다. 이 대회는 한국인 두 명이 의기투합해서 만들어낸 작품이 될 것이다. 벌써 15인으로 구성된 조직위원회가 두어 번 열렸다. 이 중 호주 바둑 인이 10명이고 그 중 6명은 교수다. 우리는 세계대회를 열기로 합의를 본 후 맥쿼리(Macquarie)대학에 장소 예약비로 1만 달러를 예치했다.
이번 대회에 가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내가 2004년 당시 한국 아마추어바둑협회 곽영필 회장에게 단체전 세계바둑대회를 열 것을 설득했다. 그래서 한 나라에서 세 명씩 출전한 단체전 세계대회를 2005년 서울 올림픽파크호텔에서 개최했다. 아이디어를 낸 내가 총 지휘를 맡아 조직위원장이었다. 이 대회에서 내가 개발한 '한 점수제도(Hahn System)'를 사이드 이벤트로 처음 실험했다. 'Hahn System'은 독일 베를린에서 2013년 말 현재 20회 이상 열리고 있다.
▲ 광저우 시 전경.
그 무렵 새로 출범한 대한바둑협회와 한국바둑협회가 통합하는 일을 진행시켰다. 결국 조건호 회장의 대바협이 한바협을 흡수했다. 그 과정에서 한바협이 대바협을 흡수해야 한다고 한 사람들은 다 대바협의 적이 되었다. 나는 대바협측에서 한바협이 주최했다는 이유 하나로 단체전 세계대회를 없애고 국무총리배 개인전 세계대회를 연다는 생각에 반대했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한국 국무총리배 개최에 대해 일본기원에서 불만이 많았다. 국제연맹 이사로 있는 내 30년 친구 네블스마이스(N. Smythe) 교수가 일본 흉내를 내는 국무총리 배를 한국이 하지 말게 해 달라는 편지를 나에게 두 번이나 보냈다. "다른 방식의 세계대회도 할 수 있을 텐데 한국이 구태여 일본과 똑 같은 성격의 세계대회를 고집한다면 일본이 세계대회를 포기할 수 있다"가 주 이유였다. 그런데 이번에 중국에서 내 아이디어를 그대로 살린 단체전을 개최한다길래 꼭 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와서 보니까 나와 다른 점들이 많았다. 우선 이번 대회는 프로, 아마를 안 가리고 그 나라 최강팀을 초청하는 것이다. 나는 아마추어만 초대했다. 또 한중일 세 바둑강국은 35세 이상 와일드 카드(Wild Card–WC) 팀이 있어 한 나라에서 두 팀씩이 나온다고 한다. 나는 한중일 WC팀은 생각도 못했다. 나는 한국WC팀은 내가 잘 아는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사범이 오리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이창호가 WC 팀에 낄 줄은 생각을 못했다. "이창호가 벌써 그렇게 되었나?" 세월이 빠르다.
이번 아마추어 팀은 예선전을 거쳐 9팀만 본선에 진출한다. 원래 프로 8팀, 아마 8팀으로 16팀이 겨루는 대회로 구상했는데 프로 팀이 7팀 밖에 안 와서 호주가 희생양이 된다. 결승전은 3명이 의논해서 합의 본 점을 두는 독특한 방식이다. 중국엔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아이디어들이 속출하고 10년 전 내 생각 보다 다양하고 한 수 위다.
▲ 광저우 탑에서 보는 신 도시. 그리고 바이윈(白雲) 호텔
▲ 선수등록을 하면 대형자석판에 한수를 두고 그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중국은 '춘절'이라 하여 설은 큰 명절로 쇠면서 서양의 가장 큰 명절인 크리스마스에 이번 대회 결승전을 두도록 해 놨다. 서양 선수 중에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이 있어 여럿이 못 왔다. 나도 크리스마스 선약들을 취소하고 오느라고 애 먹었다. 중국이 서양 명절을 깔 본 건 좋게 해석하면 주체성이 있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남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거다. 마지막 이유는 내가 중국엘 열 번 정도 가봤는데 광저우는 한 번도 못 가봤다. 언젠가 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가진 도시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광저우는 고층 건물, 높은 아파트들이 백운산 너머까지 꽉 들어찼다. 서울의 도봉산, 관악산 넘어 보이는 아파트를 연상시킨다. 광저우가 중국 남쪽 아열대 지방의 중심 도시라 나는 날씨가 따뜻할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나라 초겨울 수준으로 춥다. 반팔 옷을 가져오고 행여 몰라 얇은 파커와 내복 한 벌씩을 가져 왔는데 그 것만 입고 살게 되었다. 도착하니까 회색빛의 도시가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함께 우리를 맞이한다. 공항에 마중 나온 주최 측 차로 바이윈(白雲)호텔에 18일 체크인 했다.
거리는 퇴근 차량들로 몸살을 앓고 있고 메케한 매연이 코를 찌른다. 아열대 지방이 주는 낭만 보다는 산업화된 온대 지방 도시가 주는 음산한 분위기다. 오람이가 "아버지, 역시 호주가 살기 좋은 곳이네요" 한다. 호주 바둑협회 직원이 입국 날짜를 잘못 말해서 우리는 하루 일찍 도착하여 하루치 호텔비, 식사비를 지불했다.'흰 구름'이란 뜻의 이 호텔은 5성급으로 시설이 좋았다. 그런데 두 사람의 한 끼 식사 값이 150달러(약 16만원)이나 된다.
▲ 필자와 헤이자자.
▲ 이번 대회가 열린 광저우기원 입구
호주는 헤이자자, 구오이밍(郭二明), 나(韓相大) 이렇게 세 명이다. 나는 한국, 구오이밍은 중국, 헤이자자는 대만의 배경을 갖고 호주대표팀을 구성한 이색적인 멤버들이다. 여자 프로 한 명에 아마추어 두 명이다. 우리는 프로를 포함하고 있어 아마추어 팀 중에서 성적을 내도 상금엔 반영이 안 되는 불리한 입장이다. 호주 팀은 본선 진출을 하기 위한 예선전을 치렀다. 아마추어 중 우승 후보 세 팀인 우크라이나, 체코 등과 함께 호주 팀은 전승으로 본선에 올라갔다. 19세 헤이자자가 예쁘게 생겨서인지 대회 내내 팬들이 와서 같이 사진을 찍는다.
다음 날 당대의 전통의상을 입은 개막식에 우리나라에서 조훈현, 유창혁, 이창호 WC팀과 최철한, 강동윤, 박정환이 시드 팀으로 얼굴을 나타냈다. 여기서 한국팀을 보니까 반갑다. 한국의 WC팀은 물론, 중국의 구리, 창하오, 쿵제 조와 일본의 다케미야, 고바야시, 조치훈 조는 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얼굴들이다. 끊임없이 팬들이 와서 사진 찍고 사인을 받아 간다. "저 사람들도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 대국 장으로 향하는 각국 선수들
▲ 호주 선수단 입장
▲ 내 카메라에 잡힌 헤이자자
▲ 누구나 당나라 옷을 입고 개막식과 폐막식에 참석했다.
▲ 우리 호텔 식당(30층)에서 내다 보이는 가든 호텔
그 중엔 조훈현과 다케미야가 가장 사회성이 있어 보인다. 잘 웃고 경직되어 있지가 않다. 중국 팀에선 구리가 활달하다. 시드니에 사는 내 조카 진오(48세)가 4촌 동생 오람에게 "너 잊지 말고 내 이름을 넣어서 구리 서명을 꼭 받아 와야 돼" 신신당부한다. 진오는 바둑이 10급인데 구리 팬이란다. 내가 "10급 주제에 네가 어떻게 구리를 아니?" 하니까 진오가 "삼촌, 저 9급으로 한자리 수에요"한다.
본선 첫날 우리는 중국 시니어 팀을 만났다. 나의 상대는 쿵제를 만났다. 한 때 세계 일인자인 쿵제는 큰 키, 흰 피부, 준수한 용모에 진지하고 겸손하다. 수줍어하는 태도가 더욱 마음에 든다. 내가 참가자 중 최고령 선수라고 주최 측에서 얘기 한 후 더욱 겸손하다. 하긴 호주에서 우리 집사람도 나에게 "아직까지 선수로 뛸 연령이 아니시잖아요?"하며 말렸다. 내가 "바둑에 나이가 어디 있어? 그래서 바둑이 좋은 거지" 했다. 그러나 이번에 와 보니까 젊어서는 않던 실수를 자주하고 집중력 유지 시간이 짧은 걸 역시 알겠다.
▲ 쿵제와의 대국
쿵제가 영어를 전혀 몰라 내가 한문을 쓰면서 의사소통을 했다. 젊어서는 잘 쓰던 한문도 오래 안 쓰다 보니까 얼른 안 써진다. 복기, 국후 검토 같은 단어를 쓰는데 획이 조금 틀려도 그가 금방 알아본다. 이 때 타이젬 진재호 기자가 오더니 "와! 교수님, 쿵제하고 호선!"하며 부러워한다. 조국수가 오더니 나에게 "이 친구 혼 좀 내주세요!"하고 웃으며 자기 자리로 간다. 나에겐 혼 좀 나 보라는 소리로 들린다.
50여수까지는 쿵제도 지적이 없었으나 끝까지 양곤마 쪽으로 몰고 가는 위협행마를 했어야 하는데 전투로 내 영토가 잠식 되는 게 걱정이 되어 집짓기로 돌아선 게 잘못이었다. 그가 얼른 가일수 한다. 내가 하수들하고 둘 때는 공격의 끈을 늦추지 않는데 쿵제 앞이라 추위를 탔다. 형세를 보니까 아직 집은 내가 괜찮은데 내 바둑은 엷어지고 그의 바둑은 두터워졌다. 내 엷음을 찔러 오는 혼전 중에 나에겐 계속 악수, 완착이 속출하는데 그때마다 그는 계속 조금씩 착실하게 벌어들인다. 백 여수에 이르러서 확정 가, 두터움이 다 모자라게 된 내가 내 딴엔 흔드는 수라고 둔 수가 무리수여서 대마가 처참하게 죽고 나서 투석했다. 쿵제가 나에게 복기를 해 주며 몇 수를 지적해 준다.
호주의 다음 상대는 체코. 30년 전 나와 바둑 두던 체코 강자들의 아들이 두 명이나 아버지 보다 세어져서 대표로 왔다. 그 중 루카스(Lukas)는 9세 때 여행사를 경영하며 체코바둑협회 총무로 있던 그의 아버지(3단)가 자기 프라하 사무실에서 나에게 자기 아들을 양재호 도장에 보내는 문제를 의논했었다. 10년 전쯤 이니까 당시만 해도 사회주의 국가들은 달러가 부족했다. 월사금을 할인해주겠다고 했는데도 결국은 결국 못 왔다.
▲ 유럽 강자 체코 팀과 만났다
2011년 5월 내가 유건재 사범과 체코 한국대사배에 가서 유사범과 루카스를 대국시켰다. 루카스가 3점으로 유사범에게 두 판을 완벽하게 이겨 간다. 루카스가 두 점이나 선으로 더 배우고 싶다고 하길래 내가 유사범 입장을 생각해서 거절했다. 지난 2년 동안 훨씬 세어진 그가 체코 팀 선수로 나왔다. 최근 호주대회를 가장 많이 우승하는 구오이밍이 체코 선수에게 발목을 잡히자 호주팀에 위기가 왔다. 내가 지면 호주팀은 8강에 못 올라간다. 결국 내가 남은 체코 선수를 필사적으로 물리쳐 호주가 8강에 올라 갈 수 있었다.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헌이었다.
8강에 올라갔기 때문에 우리는 프로팀을 세 번이나 만나게 된다. 일본 팀과 할 적에는 헤이자자가 왕밍완을 잡았다. 자기도 기쁜지 나에게 오더니 “운이 좋아서 왕프로에게 이겼어요” 하며 미소 짓는다. 그러나 호주 팀은 본선 성적이 2승3패에 머무르고 말았다. 그러나 예선전부터는 아마추어 팀에겐 5전 전승을 했다. 헤이자자가 한 판은 반드시 이겨준 덕분이었다.
본선 3회전에서 우리는 일본 시드팀에게 3대0으로 졌다. 나는 미조카미를 만나 중-종반 행마에 밀려 한 번도 전투도 찬스도 없이 돌을 던지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원 없이 싸우기라도 해 볼 걸. 구오이밍은 프로와 둘 때도 끝까지 가는 접전을 벌이다가 지는 걸 보니까 나 보다는 확실히 센 것 같다. 그는 고바야시에게도 초읽기까지 몰리면서 2집 반으로 졌다.
구오이밍은 항저우 출신으로 원래 치과의사다. 호주에 와서 주식을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 그러나 주로 항저우에서 산다. 이 친구는 자기 바둑에 대해 자존심이 엄청나다. 나에게 "고바야시에게 반집을 이긴 판을 졌다." "천야오에게 다 이긴 바둑을 놓쳤다"고 아쉬워한다. 나중에 프로들이 복기해 보더니 "구오이밍에게 그럴 찬스가 없었다"고 한다.
▲ 구리 VS 조훈현
▲ 조훈현과 필자. 그리고 구리와도 한 컷.
나는 조훈현과 구리 대국을 한 동안 관전했다. 구리가 싸움 바둑으로 조훈현을 완벽하게 제압하는 걸 보며 "역시 구리가 세구나" 새삼 느꼈다. 내가 조국수에게 "조국수가 전성기에 구리하고 붙었으면 어땠을까요?" 하니까 "구리가 바둑을 잘 둬요" 한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조치훈과 대회장으로 가는 버스 옆 자리에 앉아 긴 대회를 나누었다. 그 내용은 네덜란드 바둑회장을 17년간이나 지낸 얀 반 롱엔 (Jan van Rongen)이란 사람에 대해서다. 컴퓨터 전문가인 그는 세계에서 가장 좋은 '조치훈 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이다. 그는 조치훈을 가장 존경한다고 공언을 한다. 조치훈 일생 성적, '목숨을 걸고 둔다' 등의 어록을 다 정리해 놨다.
내가 그 얘기를 서울에서 우연히 조치훈의 형 조상연 사범에게 했더니 감동을 받아 나에게 조치훈 부채 중 소수에게만 준다는 운림(雲林 구름 숲–높은 곳에 올라와 구름숲을 보며 느끼는 외로움, 감회 등을 표현)을 두 개 주며 하나는 내가 갖고 하나는 롱엔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다음 해에 내가 아스텔담에 가서 그 부채를 롱엔에게 전해 주었더니 그가 그걸 유리 케이스에 진열해 놨다.
또 '운림'의 뜻을 전 유럽에 내 보내는 바둑 뉴스와 자기 사이트에 소개를 했다. 조치훈도 그 얘길 들으며 그 분에게 감사하다는 표현을 두어 번 한다. 내가 2006년 한해원, 이하진 두 명의 프로를 데리고 암스텔담에 갔을 때 롱엔이 우리를 자기 집에 초청하여 자기가 요리를 해서 대접했다. 그러나 그 후 얼마 안지나 그가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바둑계에서 은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롱엔 연락처를 적어 주고 다음에 유럽 갈 기회가 있으면 내가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우리 앞자리에 앉아 그 얘기를 경청 하던 류시훈도 가끔 한마디씩 끼어들었다.
대회장에 도착하여 안으로 들어갔더니 나의 다음 상대가 조치훈이다. 우리는 서로 웃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조치훈에게 "언제부터 그 머리와 수염을 자기 스타일로 갖게 되었냐?"고 묻자 그는 자기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당기면서 "스타일이 아니고 나이가 먹으니까 머리가 제대로 놀아서 그냥 둔 것입니다" 하는데 나는 그 설명(?)을 잘 못 알아듣겠다. 조치훈의 한국말은 불편이 없었다.
▲ '아, 영광스럽게도…' 조치훈과 필자의 대국
대국 개시 선언이 있자 조치훈이 머리를 깊숙이 숙여 절을 한다. 서양인과 대국만 해서 인사에 익숙하지 않던 나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서양인들은 "Have a nice game"하는 게 인사다. 내가 조치훈이 전성기에 잘 쓰던 3연성에 걸치면 한 칸 협공하는 포석을 들고 나오자 조치훈이 미소를 짓는다. 바둑 실력 차이가 너무 나니까 진행 될수록 차이가 벌어진다. 나는 조치훈을 상대로 마음 껏 싸우고 두고 싶은 곳에 다 두고 졌다.
나는 26세에 바둑을 배워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른다"는 말대로 열심히 두어 그 다음 해에 아마5단이 되었다. 돈을 잃으면서 프로들에게 계속 덤벼서 힘을 키웠다. 나는 바둑을 정식으로 배워 본 일이 일생 한 번도 없다. 그래서 모르는 정석도 많고 행마도 내 수 읽기대로 한다. 바둑 배운 다음해인 1967년 1년 동안 미국에 가서 기회가 날 때마다 바둑 클럽을 찾아다니며 한국 힘 바둑을 자랑하고 다녔다. 겁을 주고 다녔다는 말이 더 가까울 것 같다. 특히 펜실베니아 대학 바둑 부에 가서 5급이란 회장을 9점 접고 이기자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얼굴들이 생각난다.
1975년 호주에 이민 갈 무렵 기원 1급 중 잘 두는 편이란 소리를 들었다. 호랑이 없는 곳에 가면 토끼가 왕 노릇 하듯 강자 없는 호주에서 나는 20년 동안 왕 노릇을 했다. 일본 7~8단들은 화초 바둑이라 대회에서 나만 만나면 깨지고 그나마 한국에서 1급 두던 사람이 10여명 있었는데 나 보다 조금 약하거나 나이가 나 보다 많아 내가 유리했다. 그래서 내가 호주에서 공식대국을 50연승을 한 일도 있었다. 그 덕에 호주챔피언도 12회나 했고 세계대회도 많이 나갔다. 나는 바둑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은 다 누렸다. 80년대 후반에 이민 온 바둑 강자 구오이밍, 성균관대학 선수였던 지보근, 프로가 되려고 공부했던 신명길 등 강자들도 나의 텃세 탓인지 처음 2~3년간은 나에게 호주대회에서 졌다. 그 후부터 그들이 나를 이기기 시작했다.
▲ 유창혁과 류시훈과 함께.
호주에 와있는 내 제자 중 프로기사 안영길, 연구생 출신 오치민, 김은국, 임미진 등에게 "너희들은 바둑이 아무리 세도 소용이 없다. 나처럼 기회를 잘 잡아야지 바둑 덕을 많이 보고 살지" 하며 내가 놀린다. 그러나 나에게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세계적 고수들과 공식전에서 호선 바둑을 두는 기회까지 주어지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바둑인으로서는 최고의 영광이다. 이번 대회에 전설의 와일드 카드팀을 출전시킨 아이디어는 절묘했다. 영길이가 얼른 시민권을 받아 호주 대표로 이런 곳에 오면 이 사람들과 좋은 승부를 벌일 텐데 아쉽다.
프로기사들이 승부의 긴장감 때문인지 무표정하게 조용히 있는 경우가 많아 생동감이 없어 보인다. 젊은 최철한 강동윤 박정환도 미소를 보기가 힘들다. 너무 조용하다고 할까? 아니면 맥아 리가 없다고 할까? 그 또래 내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와 너무 다르다. 최철한이 내가 버스에서 옆자리에 앉자 인사를 한다. "타이젬 기행문을 가끔 읽어요" 한다. 내가 만난 프로기사들은 대부분 내 글은 안 읽는다. 쉽지가 않거나 재미가 없어서 일 것이라고 추측 한다. 그래서 가끔 내 글을 읽는 프로를 만나면 반갑다.
내가 "왜 중국에게 세계대회는 다 빼앗기지?" 하니까 "우리가 성적이 좀 나빴어요. 저도 그렇고요" 하길래 "호주 바둑인 중 누가 나에게 말하길 최철환이는 중국리그 성적은 좋은데 세계대회에선 나쁘다던데?" 하니까 "네. 그 말이 맞아요. 그렇지만 올해 단체전은 한국이 다 이겼어요. 이번에도 이기면 단체전 우승은 한국이 다 하는 거예요" 한다. 내가 "잘 두어야 하겠네" 하니까 "열심히 두겠습니다"한다.
유창혁은 내가 중학생 때부터 예뻐하고 나와 친하다. 나에게 한국에선 농담도 잘하고 나를 놀리기까지 하는데 여기선 나에게 인사만 부지런히 하고 대화는 잘 않는다. 정신은 다른데 가 있는 걸 알겠다. 얼굴에 긴장감을 읽을 수 있다. "이러니까 바둑을 즐기기만 하는 나 같은 아마추어가 좋지." 24일엔 준결승인데 한국 대 한국, 중국 대 중국이다. 젊은 팀이 이기리라는 예상이 대부분이다. 내가 유창혁 사범에게 "와일드 팀이 우승할 수도 있겠네" 하니까 "운이 좋으면요" 한다.
▲ 강딩루(剛頂路) 그리고 필자 찍은 광저우 탑
▲ 광저우 탑에서 찍은 사진
결국 결승은 시드 팀끼리 치르게 되었다. 예상 대로다. 마지막 결승은 3명이 의논하여 착수하는 방식을 택했다. 10년 전 내가 생각해낸 단체전보다 더 다양하고 흥미 있게 대회를 만들었다. 이번 주강배는 내 생각 보다 한 수 위였다. 나는 준결승에서 한국 팀끼리 하니까 응원할 팀이 없어 이 날 오람이와 마카오를 다녀오려고 했다. 여기서 차로 두 시간도 안 되는 거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중국 비자가 1회용(Single entry)이라 한번 나가면 못 들어온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시내 관광을 택했다. 오람이가 64GB 전화 칩을 사고 싶어하길래 시내 한 복판 강딩루(剛頂路)란 곳의 전자시장엘 먼저 갔다. 꼭 용산전자시장에 온 것 같다. 오람이 64 GB 카메라 칩과 32GB짜리 내 USB를 사는데 430위안을 달라고 하는 걸 400위안에 깎아 샀다. "아버지, 호주에선 이 값의 두 배에요" 오람이가 값에 만족해한다.
다음은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광저우 탑에 올라갔다. 광저우는 차로 다닐 땐 답답했는데 걸어 보면 인도가 넓어서 시원하다. 서울 강남 신도시를 세울 때 길을 넓게 잡지 못한 점이 아쉽다. 하긴 현재 길도 너무 넓다고 70년대 당시 설계한 관계자들이 문책 받고 좌천 되었다는 애길 들었다. 긴 안목이 없는 사람들 속에선 생각이 앞서 가는 사람은 희생되기 마련이다. 진주 강변에 600여 미터에서 내려다보는 광저우는 현대 도시였다.
탑 아래 강변에 특수 디자인 초현대식 건물이 몇 보인다. 박물관인 것 같다. 중심가는 강남 보다 스케일이 크다. 탑에서 내려 와서 북쪽에 있는 한인 거리 옌징루(沿頂路) '전주집'에 가서 냉면을 먹었다. 이틀 전에 와서 먹었는데 맛이 좋아서 다시 왔다. 호주엔 이만큼 맛있는 냉면 집이 없다. 그러나 한국 거리는 북쪽 변두리 좀 후진 곳에 있다. 마지막 날 한국팀은 조국수만 빼고 다 이리로 와서 우승 뒤풀이를 했다.
▲ 옌징루 한국 거리
▲ 번화가 베이징루(北京路). 호주에서 자란 놈이라 아버지 어깨로 손이 막 올라온다
▲ 앞은 후진 아파트, 뒤는 현대식 아파트.
광저우 제일 번화가 베이징루 밤거리는 대낮처럼 밝고 사람 물결이 넘쳐 수천명이 한꺼번에 붐빈다. 호주 촌놈 오람이가 놀라운 감탄을 연발한다. "아버지, 서울서 12월 31일 밤 종각에 타종하는 걸 보러 온 인파 같아요. 여긴 그냥 보통 수요일인데요" 한다. 어제 낮에 왔을 때와 분위기가 전혀 딴 판이다. 우리는 스타박스에 가서 커피도 한잔하고 후진 뒷골목에 가서 사람들이 많이 먹는 음식도 사먹었는데 맛은 있는데 분위기 때문에 뭔지 기분이 찝찝하다. 커피 값이 택시비의 몇 배라 놀랐다. 우리 돈으로 6000원 이상이 한잔 값이다. 베이징루까지 우리 호텔에서 택시비가 14위안인데 스타벅스 커피 한잔 값이 27위안이다. 올 때는 택시 잡는 사람이 너무 많아 뚜껑 없는 세발 오토바이를 잡아타고 오는데 추워서 혼났다.
나는 오람이와 7시쯤 호텔에서 저녁을 먹고 나서 밤거리를 매일 한 시간 이상씩 돌아 다녔다. 호화판 건물 뒤편 골목에는 일부러 더럽히려 해도 그 만큼 더럽히기는 힘든 저층 아파트들이 서있다. 사방에서 그런 아파트를 허물고 그 자리에 현대식 20층 내외의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있다. 중국은 부와 빈곤, 현대와 과거가 혼재되어 공존하고 있고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육교에는 아직도 거지들이 있고 특히 애기를 데리고 추운 바닥에 누워서 구걸 하고 있는 엄마들이 보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기본 의식주(Basic Needs)가 해결 안 된 사람도 많고 부자도 많다. 중국은 우리나라 보다 빈부의 양극화 현상이 더 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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