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중국의 최고 기사는 누구인가?(1부)
중국인들은 자국의 최고 기사였던 사람으로 섭위평 마샤오춘 그리고 창하오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세 기사는 어떤 성적을 거두었길래 중국인들이 손꼽는 기사로 되었을까? 그리고 오늘의 중국 바둑계에서 최고 기사는?
이들 세 기사와 중국 랭킹 1위라는 "구리"를 비교해보면서 , 오늘의 중국 바둑계의 고민을 엿보도록하자.
섭위평은 불과 36살의 나이로 중국기원에서 공식적으로 "棋聖"이라는 칭함을 받았다. 그의 바둑은 전성기 시절에는 거의 천하 무적에 가까웠다.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그의 명성에 흠집을 줄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섭위평의 성적은 화려하다. 그러나 그는 세계기전에서는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하여, "棋聖"이라는 칭호에 걸 맞지않은 아쉬움을 남겼다.
섭위평이 우승 또는 준우승 한 기록을 살펴보자.
1.중국 전국 개인전 우승(1975,1977,1978,1979,1981,1983년)
2.중국 신체육배
우승(1979,1980,1981,1982,1983,1988,1989,1990년)
3.제2회 기왕전 우승
4.제6회 천원전 우승
5.제1회 국수전 우승
6.중국 국수전 우승(1981년)
7.십강전 우승(1987,1988,1989등 6차례)
8.제1회 응시배 준우승
9.후지츠배 준우승(1990년)
10.제5회 중일 천원전 우승
11.제4회,5회 동양증권배 4강
12.제6회 동양증권배 준우승
13.마효춘과 7번기 특별대국에서 승리(4:3)
14.재9회 천원전 도전권
15.1995년 보성배 우승/제5회,9회 CCTV배 우승
여기에 일중 슈퍼 대항전의 기적에 가까운 성적까지 더한다면 과연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위의 모든 성적을 합하여도 "일중 슈퍼 대항전의 11연승"에 비하면,아무것도 아니다.
하여간 70년대부터 80년대에 이르는 전국 개인전과 신체육배에서의 성적은 놀랍기는 하지만,
사실 이 기전들은 지금의 중국 프로 기전과는 사뭇 다르다. 90년대 중반기 까지는 중국 바둑이 프로기전이 정착되지 않은 상태여서, 놀라운 기록이기는 하지만 지금의 중국 기사들의 입장과는 차이가 많이 난다. 그의 실력에 필적할 만한 강호가 중국 대륙에서는 아직 없어서 그가 출전하는 대회마다 우승한다는 것은 마치 그의 입장에서는 "땅집고 헤엄치기" 만큼이나, 어렵지 않게 놀라운 성적을 기록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수 많은 강자가 득세하는 중국 바둑계에서 한 기전도 우승하기 힘든 것이 섭위평의 오늘의 모습이다.
그에게는 일생일대에 두 가지의 전환 점이 있었다.
하나는 일중 수퍼 대항전에서의 모습이고,또 하나는 응씨배에서의 준우승이었다. 하나는 일본 바둑의 쇠퇴를 예고하였으며, 또 하나는 한국 바둑의 부흥을 촉진시킨 바둑사에 길이 남을
대 사건이었다. 일중 수퍼 대항전에서 파죽지세의 11연승은 일본 바둑계를 초상집으로 만들었
으며, 일본 기사들이 모두 머리를 삭발하는 일을 벌어지게 하였다. 그는 중국의 자존심이고
영웅이었다. 그가 가는 곳에는 수 많은 중국인들이 몰려 들었다. 그 어떤 중국인 보다 존경과
대우를 받았다. "그는 일본을 이긴 중화영웅이다!"
그러나 두번째 전환점이 되었던 제1회 응씨배에서 조훈현9단에게 유리한 바둑을 지고 그의 명성에 큰 흠집을 내고, 한국 바둑이 세계 무대에 당당히 데뷰를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자신은 쓸쓸히 퇴장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일본 바둑을 박살낸 그가, 한국 바둑 앞에서 무릅 꿇다니!!!!
하지만 그 이후에도 현재의 중국 어떤 기사에 부끄럽지 않은 좋은 성적을 거두긴했다.
세계 기전에서 준우승만 세 번!
건강과 사생활이 문제가 되어서, 그의 발전에는 한계가 있으나, 그는 "일중 슈퍼 대결"로 중국 대륙을 진동 시켜, 자신의 영웅적인 모습이 중국인들 가슴속에 각인시켰으며,중국 바둑이 오늘에 이르게한 큰 공로자라 할 수 있다.
어쨋든 간에 "현대 중국 바둑"은 "섭위평"으로 부터 시작했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중국 바둑의 발전과 한계도 그로 부터 시작하여 아직까지 마무리 되지않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중국 바둑이 한국 앞에서 벌벌 떠는 공한증은 알고보면, 16년 전 섭위평으로 부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조훈현 9단은 제 1회 응씨배 세계바둑 결승에서 그를 꺾고, 40만 달러(당시 환률비와 물가상승률을 감안한다면, 지금 돈으로 6억이 넘는 @.@:: )이란 거금을 손에 쥐며 세계 바둑정상에 우뚝 섰다. 이 후 한국 바둑은 각종 국제기전을 차례 차례 석권하였고, 세계 바둑을 호령하는 한국의 기세에 눌려 중국은 변방으로 밀려나야 했다. 그 동안의 대표적 희생양은 섭위평 9단을 비롯해 마샤오춘 9단 조다위안9단 위빈 9단. 창하오 9단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의 최강자들을 연이어 물리쳤던 그는, 한국의 조훈현9단에게 패퇴하여, 몰락의 길을 걸었고, 그의 후계자 뻘인 마샤오춘은 조훈현의 제자인 이창호의 벽을 끝끝내 넘지를 못하여 하향새를 기록하고 있으며, 포근한 인상의(앞의 두 사람에 비하여) 창하오 마저, 이창호 해법을 찾지 못하고, 중국의 고수로서만 남아있다.
중국 현대 바둑의 모든 것은 섭위평으로 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바둑의 "공한증"은 섭위평으로 부터 시작하였고, 그 이후 그 누구도 "공한증"의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있다.
중국 바둑은 아직까지 섭위평 바둑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계속)
[타이젬 명예 기자 i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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