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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내 관덕정 옆엔 지금은(99년 3월 당시) 그 흔적만 찾아볼 수 있는 목관아지의
흔적만 남아있다.
넓은 평지 곳곳에 주춧돌의 흔적, 기와를 쌓아올려놓기도, 혹은 언젠가는 제자리를 찾아갈
여러비석들을 모아놓고 있기도 하다. 예전 제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지였던 그 영광은
사라지고 지금은 그 쇠락의 길을 그렇게 고목들과 돌무더기로만 남겨 목관아지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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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공사가 한창인 목관아지는 이후 공원으로 개방되어 지역사람들에게 많은 혜택을 안겨줄 예정이다.
지금 목관아지를 보고난 후 몇 년이 지나 다시 제주를 찾게되면 아마 또다시 지금의 흔적은 사라지고 깔끔하게
다듬어놓은 제주목관아지 공원을 보게 될 것이다.
관아는 관청, 관서라고도 불리며, 크게 중앙관아와 지방관아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지방관아는 다시 관찰사가 도의 행정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된 감영과 군현의 수령이 해당 읍을 다스리기 위해 설치된
관아로 나누어진다. 예를 들어 중앙의 경우, 최고 통치자인 왕이 거주하는 궁궐을 중심으로 중앙관서가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현의 경우도 수령의 관아인 동헌을 중심으로 많은 관아시설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궁궐이 중앙통치의 산실이라면
지방통치의 산실은 동헌이라 할 수 있다.
지방관아의 소재지를 읍치라 한다. 읍치의
주위는 대개 성곽으로 둘러 있고 그 안에 거의 모든 관아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따라서 읍성은 곧 지방관의 거처인 동시에
지방정책의 산실이고 명령을 집행하는 곳이었다. 1416년(태종16) 제주도 행정구획이 개편된 이후, 제주도의 행정은
제주목성, 대정현성, 정의현성의 읍성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제주목의 관아라 할 때, 그 대부분은 제주목성(주성이라고도 함) 안의 관아시설을 지칭한다. 현
사적지로 지정된 곳은 옛 대촌현 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제주목의 관아가 집중 분포했던 곳이며,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탐라국의 관아 터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이 지역은 1416년 제주도를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으로 구획할 당시
제주목의 본 읍으로 정해지면서 더욱 번성하였고, 후에 면리제가 발달하면서 제주목 중면의 1도리, 2도리, 3도리로
구분되어진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제주도의 중심도시로 발전된 곳이다.
제주목의 관아시설을
살피기 위해서는 고려후기부터 검토해야 하겠으나, 현존하는 사료로서는 1435년(세종 17) 이전의 관아시설에 대한 추정은
대단히 어렵다. 1435년에 최해산 목사가 제주목 관아건물이 모두 불에 타 버리자, 영청인 홍화각을 건립하면서 종루,
침실, 욕실, 독서방, 금당, 정당, 약고, 독소, 낭사, 영고, 등 모두 206칸의 관아 건물을 새롭게 시설하였다. 당시
공역은 죄수와 번을 서는 사람을 동원하였고, 재료는 도내 무너진 사찰의 재목과 기와를 이용하였다. 최해산 목사의 도임이
1434년 10월이고 홍화각기가 쓰여진 것이 1435년임을 감안해 볼 때, 공사기간은 수개월에 이른 것으로 생각되나 동원된
인원수는 알 수 없다. 또한 재목과 기와를 가져온 무너진 사찰이 어느 사찰인지도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종루에 달았던
종이 묘연사의 종이었다는 것으로 보아, 무너진 사찰은 제주성에서 서남 20리에 있었던 묘련사로 추정하고 있다. 주목할만한
점은 후일의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건물을 서로 닿지 않도록 건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담장을 쌓았다는
것이다.
제주목 관아시설은
관덕정을 중심으로 좌우인 남쪽과 북쪽에 치중되어 있었다. 특히 좌측인 북쪽에는 주로 목사의 동헌과 관아시설, 우측인
남쪽에는 판관과 관련된 관아시설이 있었다. 주요시설로는 영주관(객사), 홍화각, 연희각(목사), 종루, 망경루, 애매헌,
귤림당, 찬주헌(판관) 등이다. 그러나 제주목의 관아지는 한말,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제주도에 대한 일제의 식민통치는 제주인의 얼과 혼이 담긴 건축과 유적을 말살하는 데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1907년에 영주관 자리에 학교를 설립하고, 1909년에는 세병헌 자리에 경찰서를
설치하였으며, 1912년에는 이아터에 자혜의원을 설치하였다. 또한 1913년부터는 성문, 망경루, 동성문, 서성문,
간성문, 소민문, 북성, 포정사, 남성문루 등을 차례로 헐었으며, 1924년에는 연희각을 헐어버렸다. 이어
부임한 일본관리는 1924년 관덕정을 중수하면서 본래의 관덕정의 모습에 많은 손실을 입혔다. 1926년에는 제주읍성을 헐어
산지항 축항을 쌓고 이아가 헐리었으며 1940년에는 홍화각이 철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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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목관아란?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濟州牧) 관아는 지금의 관덕정(觀德亭)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이미 탐라국(耽羅國)시대부터 성주청(星主廳) 등 주요 관아시설(官衙施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아시설은 1434년(世宗 16) 관부(官府)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 타 없어진 뒤 조선시대 내내 중·개축(重·改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집중적으로 훼철(毁撤)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제주시에서는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제주목 관아를 원래의 양식(樣式)으로
복구(復舊)하고자,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發掘調査)를 마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文化層)과 함께 문헌상(文獻上)에 나타난 중심 건물인
홍화각(弘化閣)·연희각(延曦閣)·우련당(友蓮堂)·귤림당(橘林堂) 등의 건물터와 유구(遺構)가 확인되고 유물(遺物)도
출토되었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국가사적(國家史蹟)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석·기단석(礎石·基壇石) 등을 토대로 하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覽)』 등 당대(當代)의 문헌(文獻) 및 중앙문화재위원·향토사학가·전문가 등의 고증(考證)과
자문(諮問)을 거쳐 관아지 복원(官衙址 復元) 기본설계를 완료하였다. 특히, 제주역사의 정체성(正體性)과 중심을 설정하는
이 뜻깊은 복원사업에 소요되는 기와 5만여 장 전량(全量)을 헌와(獻瓦)해 준 30만 제주시민의혼(魂)을 담은 사업이기도
하다.
민관(民官)이 합심하여
복원하게 된 이 장대(壯大)한 제주목 관아는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년 9월에 시작하여 새로운 세기인 2002년
12월에 복원(復元)을
완료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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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림당(橘林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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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곳이 이번 대국이 벌어질 장소입니다. 너무
멋지지않나요^^::?]
귤림당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詩)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귤림당중수기(橘林堂重修記)'에 의하면, "이 땅에 귤명(橘名)으로 된
국과원(國果園)이 모두 36곳인데, 홀로 이 귤림당(橘林堂)만이 연희각(延曦閣) 가까이에 있다. 입추(立秋) 이후가 되면
서리가 내려서 많은 알갱이가 누렇게 읽는다. 공무(公務)를 보는 여가(餘暇)에 지팡이를 짚고 과원(果園)을 산책하노라면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지에 열매 가득한 나무들을 쳐다보노라면 심신(心神)이 다 상쾌해진다. 그러나 귤림당의
창건(創建) 연대는 알 수 없다 " 고 하였다. 1743년(英祖 19) 안경운(安慶運) 목사가
개건(改建)하였고, 1769년(英祖 45)에 다시 중수(重修)한 뒤 건물이 노후(老朽)하여 이원조(李源祚) 목사가
1842년(憲宗 8)에 다시 중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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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참 이쁘지요^^::? 지붕의 선이 예술인데..소나무는 좀
아슬아슬해보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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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각(延曦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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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각은 목사(牧使)가 집무(執務)하던 곳으로, 상아(上衙)의 동헌(東軒), 목사의
정아(正衙) 등으로도 불리웠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연희각기(延曦閣記)'에 의하면, "연희각은 예전에 기문(記文)이 없어서 건치(建置) 연월일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 현판(懸板)도 누가 명명(命名)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座臺)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延曦)라고 한 것은 외신(外臣)이 충성(忠誠)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精誠)을
표현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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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각(弘化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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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화각은 예전에 절제사(節制使)가
사무를 보던 곳이다.
1435년(世宗 17) 최해산(崔海山) 안무사(按撫使)가 창건한 뒤 1648년(仁祖 26)에
김여수(金汝水) 목사(牧使)가 중수하였으며, 1713년(肅宗 39)에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되어 별도로 정아(正衙)를
설치함에 따라 이 홍화각은 영리청(營吏廳)이 되었다. 그 뒤 1772년(英祖 48) 양세현(梁世絢) 방어사(防禦使)가
중수(重修)하였고 1829년(純祖 29)에는 이행교(李行敎) 방어사가 개건(改建)하였다.
홍화각이라 명명(命名)한 것은 왕(王)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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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진선 한마디]
제주시에서 세계 바둑계의 빅스타 "이창호, 이세돌" 도전기를 이곳으로
유치하기 위해서 무척 공 들였고 나름대로 준비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홍보성 기사좀 올려주십사 하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이 정도면 만족하실지...걱정이네요...ㅠ.ㅜ:: 저도 제주도를 무척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왕 제주도까지 간 김에 대국이 끝난후에 바둑팬들과의 만남의 시간을
마련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타와 팬은 자주 '스킨쉽'을 해야
더욱 친밀 해진다고 하더군요. 이창호 이세돌이면 세계 바둑계의 대
스타 아닌가요? 팬들은 만나보는 것 만으로도 무척 기뻐하고 행복해
할 것 입니다.
(에효..힘들다ㅠ.ㅠ::...원 기사에는 사진은 없습니다. 제가 군데군데
첨부했습니다. 자료 설명중에 너무 길거나 장황한
것은 생략하거나 손질
했습니다.)
16일에 대국시에 제주도 바둑팬들 많이 가셔서 격려 부탁
드립니다.
(혹시 알아요^^::? 짜장면 한 그릇이라도 사줄지
ㅋㅋㅋㅋㅋ)
많이 가셔서 축하도 해주시고 참여도 해주셔야, 앞으로
이런
행사가
더욱 활성화 될 수가 있습니다.
꾸벅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