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창호9단의 광팬이다.
만약,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균형잡힌 시각을 가진 건전한 팬과 말이 안통하는 무조건적인 광팬,
이
렇게 두가지 부류의 팬으로 구분할 수 있다면 나는 분명히 광팬일 것이다.
왜냐하면 나 스스로 광팬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광팬과 건전한 팬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
겠지만.....
[컬럼] 어느 광팬의
고백
2005.01.26
- 몇가지 기억들 -
그 때는....
박종환감독이 재임하던 그 시절,
일화 축구팀이 참피언결정전에서 포항팀을
2:1로 꺽으며, K리그 사상 처음으로 이 대회 3연패를 달성
하게 되었을 때였다.
홍명보, 황선홍, 라데...등 젊고 잘생긴
스타들을 보유한 포항팀의 팬들은, 그래서 더더욱 그들이 아
저씨팀이라고 부르며 싫어하던, 일화의 우승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하였다.
누군가 우리에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들은 일화팀의 팬이요? 아니면 박종환 감독 개인의 팬이요?
-
아마 매우 열받아서 였을것이다.
그때 우리들은 점잖게 이렇게 반문했다.
- 일화축구팀의 팬이 바로
박종환감독의 팬이고, 박종환 감독의 팬이 일화팀의 팬 아닙니까? 그걸 구
태여 구분할 필요가 있는건가요? -
이 교과서적인
대답은 질문자의 입을 막는데는 아주 효과적이었다. 밉지만 딱히 뭐라고 반박하기가 마
땅치 않았으므로....그리고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도 내가 일화의 팬인지 박종환감독의 팬인지 정확
하게 모르고 있었다. 그때는.....
처음 학원강사라는
직업에 뛰어들었을때는,
그러니까 그때가 90년대 후반부였는데, 틴에이져 그룹 H.O.T 의 전성기였다. 특히 여중, 여고
학생들
에게 있었서 H.O.T 의 인기란 가히 상상을 불허할 때였다.
내가 이 일을 잘 알고 있는 것은 잊지못할 하나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어느날 수업시간중
에 H.O.T에 관한 얘기가 나왔었고, 곧바로 반은 H.O.T의 논쟁장으로 변했다. 재미있게 지켜보던
나
는 평소처럼 꺼리낌없이 농담삼아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 H.O.T ? 에쵸티는 쓰레기잖아? 뭘 싸울게 없어서 쓰레기를
갖고 싸우고들 그러니? -
(혹시 이 글을 보시는 분들중에 H.O.T의 팬들이 계신다면, 용서를 구한다....)
모두 같이
웃고 지나갈거라 생각했는데, 그 말이 나오자마자 반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날 나는 결국 원장실로 불려갔다.
여학생들이 울고불고 학원 그만둔다느니 하면서 난리를 쳤으니까....그 당시 여중고생들앞에서 H.O.T
에 대한 비난은 절대로 해서는
안될 일중에 하나였던 것이다. 먹고 살아야 하니까....
지금은 개인적으로 H.O.T 에게 감사한다. 아무리 쓰레기라도 남이 좋아하는 것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으므로....
그렇게 1-2년이 지난후에, 에쵸티는 결국 헤체를 하게
되었다.
헤체한 후에도 그들의 인기는 한동안 계속 지속되었다. 솔로로 독립한 강타와 롸커 문희준....그리
고 J.L.T 인지
J.T.L 인지(난 이거 매번 말할때마다 헷갈린다. 근데 이걸 정확하게 알려고 인터넷 등에
서 찾아볼 생각은 전혀 없다).... 하여간 그
시절이었다.
어느날 교무실에 찾아온 H.O.T 열혈팬이었던 여고생에게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서 물어봤다.
- 너는 강타가
좋으냐? 아니면 J.T.L 이 좋으냐? -
그 여학생은 그런 질문 정도는 많이 받아봤다는 듯이,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
선생님 그런 질문이 어딨어요? 당연히 둘다 좋아하죠....
교과서적인 대답....그러나 그 여학생은 한가지 모르는 것이 있었다.
그녀를 가르치고 있는 그 수학
선생이 얼마나 교묘하고 집요한 사람인지를....
- 좋아 그럼 이렇게 물어볼게....만약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강타하고 J.T.L 하고 동시에 콘서트를 연
다면, 너는 어디를 가겠니?
- 강타요!
대답해놓고 나서
그 여학생은 자기도 멋적었는지 나를 보고 웃었다. 물론 그 교활한 수학선생도 의미
심장한 미소를 띄며 함께 웃고
있었다.
- 바둑신문 361 -
1997년 '바둑 361' 이라는 주간 바둑신문이 처음으로 나왔다.
매주 나오던 이 바둑신문은
한 1년정도 나오다가 결국 재정란으로 폐지되었지만...
그때는 지금보다 더 바둑에 대해서 읽을거리가 없었던 시절이었다. 이창호
홈페이지가 99년도에 처음
으로 만들어졌을 정도니까....인터넷은 물론이고 당시의 유일한 읽을 거리는 월간바둑밖에 없던
그시
절..... 당연히 이창호팬이었던 나는 이 신문을 매주 사보는것이 대단한 즐거움이었다.
이 신문은 매주 월요일날
나왔는데, 그러나 고속터미날의 자판대에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일요일 오
후에 하루먼저 이 신문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일요일오후는 일부러 집에서 고속터미날까
지 가서 이 신문을 하루먼저 사보고는 했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의 즐거움은
스크랩이었다.
집중적으로 이창호9단에 대한 기사들만 스크랩해가던 그때가....지금 생각해보면 참 행복했던 시절이
었던 것 같다.
알다시피 신문이라는 것이 양면으로 인쇄되어 나오므로 모아두고 싶은 기사가 한장의
앞뒤면에 다 있을 경우 나는 같은 신문을 하나를 더
사고는 했었다. 스크랩을 해야하니까...
다음 사진들은 바로 이때의 신문기사들이다.
언젠가 한번 실어볼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마침 이번에 기회가 되었다.
<
1997년
10월 9일
제 2회 삼성화재배 준결승은 역사에 길이남을 명국중에 명국이었다.
그 유명한 313수만의 반집역전승....
이미
결승전에는 고바야시 사토루 9단이 올라가 있는 상태.
1회대회때 요다 9단에게 우승컵을 넘겼던 주최측에서는, 이번에도 한국기사가 자국에서
개최하는 대회
에서 우승을 못하면 격년제로 이 대회방식을 바꿀거라는 말이 떠돌때여서 더더욱 우승이 절실하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이창호를 제외하면 무서울게 없다던 당대의 마샤오춘.....이 2회 삼성배대회는 3; 0으
로 싱겁게 끝난 결승전보다는
바로 이 준결승전이 훨씬 인상적이었던 대회였다.
<
1998년
5월 26일
이창호9단은 제 9회 동양증권배 세계대회결승 5번기에서, 당시 양창시대를 열였던 유창혁9단을 3대 1
로 꺽고 이 대회
통산 4번째 우승컵을 안게 되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이 동양증권배라는 국제대회는 이창호9단에게
있어
서 세계대회로 나가는 발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이 대회의 결승전은 모두 이창호팬들에게 있었
서는 기억에 남을
명승부들이었다.
1992년 제 3회 결승전에서는 당대의 이중허리 임해봉 9단을 3대 2로 역전승을 거두며 생애처음으로
16살의 나이에 세계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게된다. 그리고 이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 피말리는
끝내기 싸움....이 대국을 지켜봤던 사람들은 모두 이창호라는 이
세글자를 평생 잊지 못하게 되었다.
1993년 제 4회
결승전에서는 바둑팬들이 가장 보고 싶어했던 결승5번기가 벌어졌다.
바로 '목숨을 걸고 둔다' 는 당대의 카리스마 조치훈 9단과 결승
5번기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결승전
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3: 0 으로 이창호 9단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1,2국을 졌을
때만 해도, 조훈현9단에게 스승이 좀 더 엄하게 가르쳐야한다고 충고를 하던 조치훈 9
단은 그러나 이 후 다시는 그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1996년 제 7회 동양증권배는 세계 대회사상 가장 관심을 끌었던 대회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 전 해에
동양증권배와 후지쓰배를 동시에 거머쥐며 세계랭킹 1위를 달리던 중국의 '요
도' 마샤오춘과 처음으로 세계대회 결승전에서 만나서 벌이는
5번기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천하
를 놓고 벌이는 챔피언 결정전과도 같은 5번기였다.
이 결승전에서 이창호 9단은 마샤오춘을 3대
1로 제압하며 이창호 1인천하 시대를 선포하게 된다.
후에 마샤오춘은, 이 결승시리즈 제 3국에서 당했던 반집이 너무나 뼈져리게 아팠다고
회고하기도 했
었던 바로 그 대국이었다.
<
1998년
8월 1일
이창호 9단은 창하오9단을 꺽고 제 11회 후지쓰배에서 우승을 하게 된다.
이전까지 아직 1승 3패의 전적을 가지고
있었던 중국이 자랑하는 신예 창하오는, 그러나 종반까지도
절대유리라는 판정을 받았던 이 바둑을 1집반 역전패 당하고 만다. 이 바둑은
그야말로 끝내기의 교
과서라고 불릴만한 대국이었다. 또한, 이 해는 창하오의 시련이 시작하게 된 해이기도
하였다.
<
1998년
8월 27일
한.중 천원전에서 이창호9단을 만난 창하오는...그러나 또다시 2대 0으로 이창호에게 패배함으로써
그 유명한
'살숙불살생'의 징크스에 시달리게 되었다.
<
1998년
10월 26일
제 3회 LG배 8강전에서 이창호 9단은 대만의 저우쥔쉰을 흑불계승을 제압하며 4강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4강의
나머지 세자리는 모두 중국기사들.....위빈, 샤오웨이강, 그리고 바로 마샤오춘이었다.
결국 이 다음해에 열렸던 결승전에서 이창호9단은
마샤오춘9단을 3대 0으로 제압하며 우승컵을 안았
고 이후, 세계대회 결승무대에서 마샤오춘은 볼 수 없게
되었다.
<
1998년
11월 2일
제 3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대회 준결승전에서 이창호9단은 또다시 조치훈9단을 꺽으며 결승전에 진
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결승전 상대기사는 ......운명처럼 마샤오춘.....
3승 15패라는 그때까지의 전적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모두 이창호9단의 압승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결승전이, 세계대회 결승전 사상 숱한 화제를 남기며, 역사에 길이남을 최고의 결승 시리즈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1998년 11월 26일 결승 제 1국에서 예상을 뒤엎고 마샤오춘은 흑 불계승을 거둔다.
게다가 바둑내용
또한 이전과는 다르게 두터우면서도 한치의 빈틈없는 바둑을 보여주어 한국바둑팬들의 간담을 서늘하
게 만들었다.
이후 2국에서 이창호9단은 흑번으로 승리하였으나, 그러나 3국에서 다시 마샤오춘의 흑번승리로 인
해 스코어는 2대 1 .....
제3회 동양증권배 결승5번기 이후에 이창호9단이 세계대회 결승5번기에 이
처럼 밀리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두번을 연속 이겨야만 우승을 할
수 있는 절대불리의 상황...그러
나 마샤오춘은 이 결승시리즈에서 정말 훌륭한 대국을 보여주고 있었다.
4국에서 이창호9단은 시종내내
불리하던 바둑을 1집반승으로 역전시키며, 흑번필승이라는 이 결승시
리즈 징크스를 만들게 되었고, 곧 사람들은 마지막 5국에서 누가 흑을
쥘까 주목하게 되었다.
마침내 시작된 역사적인 5국의 돌가리기....여기서 이창호9단은 처음으로 흑돌을 2개를 올려놓는 보
기힘든
장면을 연출하였고....결과는 원했던대로 이창호9단의 흑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5국은 마샤오춘 전성기의 마지막을
알리는 대국답게 종반까지 흑은 내내 절망
적인 형세로 바둑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순간에 역전되어버린 바둑...결과는 흑 2집반
승
이때 TV해설을 하고 있던 조훈현9단도 언제 이 바둑이 역전되었는지 설명을 못하고 감탄할 수 밖에
없었던 이 바둑.....아직도
그때 TV에서 말했던 조훈현9단의 멘트가 기억에 생생하다
- 이창호9단이 마술을 부린건가요? -
- 어느 광팬의 고백 -
- 당신은 일화팀의 팬입니까? 아니면 박종환 감독의 팬입니까? -
이 대답하기
어려웠던 질문의 정답은... 그러나 막상 박종환감독이 온갖 불명예를 안은채 축구계를 떠
나게 되자.....저절로 알게
되었다.
나는....
박종환감독의 팬이었던 것이다. 일화팀이 아니라 아예 한국축구 자체에 관심이 없어져 버리게 된
것
이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어쩔 수 없는 나의 성격을....
당연히 우승할 것이라고 여겼던 이번
LG배 준결승전의 패배를 보면서....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렇게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이창호9단을
좋아하는 이유는 뛰어난 성적이 아니라 사람됨이 좋아서라고....
그리고 지금처럼 이세돌, 최철한 등의 훌륭한 신예기사가 이창호9단의 뒤를
이어 세계최강 한국바둑
을 이어가는 모습이 자랑스럽다고....
한국바둑을 사랑하며, 이창호9단만큼은 아니지만...다른기사들도 다
좋아한다고....
그런데........아주 솔직하게 말해서, 내가 저렇게 말한다면.......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만약 이창호9단을 볼 수 없게 된다면, 이제 바둑에 대한 나의 모든 열정은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라
는 것을.....이창호9단이 있기에 한국바둑을 좋아하는 것이며, 이창호9단이 있기에 다른기사들에게
도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그래서....
그러한 이창호9단이 이제 저무는 시점이 되었다는 그 말을.....나는 너무나 가슴아파서 도저히 받아
들일
수가 없다.
이성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못한 광팬이기에...
여기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내 속마음을 말하고는 다시
이창호9단의 광팬으로 돌아가기
로 결심하게 되었다.
정말....
만약 정말, 이창호9단의 시대가 이제
끝날때가 되었다면.....
더 이상, 예전에 보여주었던 그 설명할 수 없는 이창호 특유의 바둑을 이제는 기대하기 힘들게
되었
다면.....
조훈현 9단처럼 어느새 서서히 승부의 뒤안길로 물러서게 될 때가 온 것이라면.....
그러면 나는 어떻할
것인가?
물론 나도 알고 있다.
그가 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며,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단지 스포츠의 한면일 뿐이라는 것 역시 나한테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
다.그렇지만...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 동안 내가 타왔던 이 이창호 호를 갈아 타거나 내릴 생각이 전혀 없다.
그 동안...10년이 넘는
세월동안
이창호 9단의 바둑을 보면서 그의 승리에 나는 너무나 기뻐했다.
마치...다른 사람들이 피곤과 무료함에 지쳐 쉬고 있을때,
나 혼자 귀에 이어폰을 끼고 아름다운 음
악에 홀로 흥얼거리듯이.....
마치...지금 현실의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그의 승리로 인해
위로받는 듯한 착각을 하듯이....
그렇게 그의 승리는 나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었다.
그 순간들을, 그의 승리와 함께 기뻐하며 그의
패배와 함께 아파했던 그 수많은 시간들을,
잊어버릴 수도, 다른 즐거움으로 대신할 수도 없을 뿐더러.... 그럴 마음도
없다.
그렇기에
정말 이창호9단이라는 거대한 배가 서서히 침몰하게 된다면....
내 인생에 있어서, 바둑이라는 것과
관련된 모든 부분 역시 이 배와 함께 묻혀져 버릴 것이다.
이창호9단이 아니라면 내가 글을 쓸 이유도 없으며,
이창호9단이
아니라면 굳이 일부러 시간을 들여 번역을 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이창호9단으로 인해서 늦은 나이에 글쓰는 즐거움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창호9단으로 인해서 그동안 그 어려웠던 시기에도, 내 마음속에서 누구도 뺏어갈 수 없었던 즐거움
을 간직할 수
있었기에....
한국바둑을 여전히 사랑한다느니, 한국 신예들의 선전을 기뻐하면서 다른 곳에서 글을 쓴다든지 하는
그런 일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편협하다고 비난받아 마땅한 광팬이지만....
그러나 광팬은 광팬 나름대로의 삶의 방식이 있는
것이니까....
모르겠다...
어쩌면 누구말대로 조훈현9단의 홈페이지처럼 나중에 이곳이 황폐해지고 썰렁해지게 된다면,
아무도 관심을 가지고 읽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동안 이창호9단이 거쳐왔던 그 짜릿한 명승부들을 혼
자 않아서 줄줄이 시리즈로 엮어서
연재하게 될지도....
그럼에도...내 마음속에서는
지금 이 순간도 이창호시대가
서서히 저문다는 말을 인정할 수가 없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고백을 끝으로
내일부터 나는 다시, 평소의 그 편협한
이창호 광팬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는 고개 빳빳하게 들고 이창호9단의 몰락론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도 동의한다고.....
지금이 이창호9단의 전성기는 아니라는 당신들의 말에 나도
동의한다고.....
왜냐하면...
이창호9단의 전성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패배의 아픔을
딛고, 이 고난의 시간을 극복해 낸 후에....
그리고 그 모든것을 가슴속에 담고,
다시 일어나서 새롭게 시작하는 챔피언이어말로
진정한 챔피언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이창호9단의 전성기는 바로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fools1
[i진선 한
마디]
이창호가 4강에서 패배하여 저 역시 힘이 쭈욱 빠져서
중국 반응이니 어쩌구 하는 것도 번역해서 올리기도 싫고 짜증나고
명예기자고 뭐고 다 때려 치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fools1님의 글을 보니 조금 힘이 납니다.
물론 크게 힘난 것은 아니구요...ㅠ.ㅜ:: 쬐금...
하도 크게 실망을 해서요..ㅠ.ㅠ::
윗 글에서 나온 '바둑 361' 그립네요..참 좋은 주간지였는데...
뒷 소식이 궁금하신 분이 있을 것 같아서...참고자료 올립니다.
|
..이광구님은 이광구 바둑 칼럼으로 유명하신 분 입니다.
바둑 출판물에 관심이 무척 크신데요..관련 자료2 보셔요.
|
[관련자료2] 이광구 바둑 칼럼의 바둑 주간지에 관한 자료 입니다. 1992년 10월,한국 최초의 바둑전문 주간지가 선을 보였다."주간목요바둑신문"이라는 다소 이상하게 긴
이름이었다. 그동안 바둑전문 주간지로는 일본기원에서 발행하는 "슈칸 고"(주간 기)가 유일한 것이었다. ㅅㅅㅅㅅ "슈칸 고"는,지금은 일본 바둑계가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분위기여서 발행부수도 예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져 있지만,한창 잘 나가던 때는 발행부수 15만부를 자랑하는 주간지였다. 일본기원은 "슈칸 고"가 먹여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그 "슈칸 고"가 타블로이드 24면 이었는데,"주간목요바둑신문"은 타블로이드 48면이었으니 일단 볼륨에서는 "슈칸 고"를 압도한 것이었다. ㅛㅛㅛㅛ 바둑신문은 바둑팬들의 갈증을 달래 주는데 성공했다.그동안 한국의 바둑팬들이 바둑 소식 과 프로기사들의 기보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개의 월간지를 구독하는 것이었다. 한국기원의 "월간 바둑"과 조치훈후원회의 "월간 바둑세계",그것이 전부였다. ㅛㅛㅛㅛㅛㅛ 그런 상황에서 나온 바둑신문은 시의적절한 바 있었다.깊이에서 월간지에 뒤지지 않았고,속보성에서는 일간지를 앞지르는 경우도 많았다. 일간지라고 했자 1주일에 한 번 바둑 뉴스를 몰아서 소개했기 때문에,때로는 바둑신문에서 뉴스를 간접 취재해 싣기도 했다. ㅅㅅㅅㅅㅅㅅ 강철수 화백의 연재만화는 그중에서도 단연 인기였다.사업으로 입신양명을 꿈꾸던 이 땅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저서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를 패러디한 "바둑판은 넓고 잡을 돌은 많다"는 1주일 동안 바둑팬의 술 안주가 되었다. ㅎㅎㅎㅎㅎ 강철수 화백의 짱짱한 아마5단의 바둑실력과 수많은 명국.묘수의 스크랩,그리고 지칠 줄 모르고 감칠 맛도는 입심을 적절히 블렌딩해 성인 바둑만화의 새 장을 열었다. ............ ㅎㅎㅎㅎㅎㅎ "주간목요바둑신문"은 그 인기에 비해서는 발행부수가 쑥쑥 신장되지 않았다.기대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그래도 성장의 속도는 빠른 편이었다. ㅛㅛㅛㅛㅛ 그러나 한국 최초의 바둑전문주간지는 1년 반을 버티다가 94년 4월,결국 자진 휴간에 들어갔다.과잉투자가 첫 번째 원인이었다.바둑팬의 호응을 믿었던 것이다. 바둑팬이 전국적으로 1천만이라는데,그걸 반만 계산하더라도 5백만의 잠재시장인데,거기서 주간지 하나가 살아남지 못하겠는가 -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바둑TV 때도 나온 얘기지만,광고가 따라 주지 않은 것도 치명타였다.늘어가던 부수는 어쩐 일인지 2만 언저리에서 왔다갔다할 뿐 더 이상 올라가지 않았다. ㅅㅅㅅㅅㅅㅅ 바둑신문은 휴간 5개월 후에 다시 문을 열고 신문을 발행했다.사장이 바뀌었다.창업자이기도 했던 초대 사장은 약 8억의 부도를 내고 외국으로 잠적한 상황이었다.투자자,원고필자 등 줄잡아 1백명 정도가 피해를 보았다.그러나 휴간의 상처를 치유하고 수습하기에 5개월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던 것인지,두 번째 바둑신문은 95년 3월,불과 6개월만에 휴간공고를 내게 되었다. ㅎㅅㅎㅎㅎㅎ 두 번의 실패 후,한동안 바둑주간지 얘기는 물밑으로 가라앉았다.나오기 전에는,일단 나오기만 하면 금방 히트를 치고 돈방석에 올라앉을 것 같았지만,막상 나와서 두 번 모두 불계패로 끝나는 것을 보고는 그게 그렇게 만만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다. 1천만 바둑팬이라는 것이 다분히 거품이며 허상이고 숫자놀음이었다는 것을 또한 실감하게 되었다. ㅎㅎㅎㅎㅎㅎ 지금도 그렇지만,당시는 물론 우리 바둑팬은 1천만이 아니었다. 아주 엉터리 계산으로도,우리 인구가 4천만,그 중에 남자가 2천만,그렇다면 갓난아기부터 80대 할아버지까지,모든 남자 가운데,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바둑을 두어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1천만은 허상의 숫자였다.
........
원문을 다 보고 싶으신 분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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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진선 한 마디] 중국이 위빈이 이창호를 이기고 무척 좋아하네요. 관련 소식과 중국 바둑 팬들의 반응을 올리고 싶지만.. 아직 마음이 정리가 안되어서...ㅡ.ㅡ:: 업글 하겠습니다. 꾸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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