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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한국 바둑의 어버이, 조남철 선생님

[추모] 한국 바둑의 어버이, 조남철 선생님

i진선2006-07-02 20:4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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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계 원로 조남철 9단, 노환으로 별세(종합)

[연합뉴스 2006-07-02 19:25]
조남철 9단, 노환으로 별세

(서울=연합뉴스) 천병혁 기자 =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9단이 2일 강남구 일원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8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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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유해는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유족들은 장례절차를 논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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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전북 부안군 줄포면에서 출생한 조남철 9단은 1937년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

니 미노루(木谷實) 9단의 문하생으로 입문한 뒤 1941년 한국인 최초로 일본기원 전문기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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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프로기사로 활동하다 1944년 귀국한 조남철 선생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1월 서울

중구 남산동에 한국기원 전신인 '한성기원'을 설립해 현대 바둑의 효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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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또한 국내 최초의 신문기전인 1956년 국수전에서 초대 우승자가 된 뒤 9연패를 이룩

하는 등 1950-60년대 무적시대를 구가하며 한국 바둑의 초석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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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보국(棋道報國)'의 원대한 뜻을 품고 현대 바둑 개척에 나선 조남철 선생은 초창기 숱한

난관에 부딪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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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변한 후원자를 찾지 못했던 한성기원은 1948년 조선기원으로, 이듬해 대한기원으로 개칭

했으며 1954년 사단법인 한국기원, 1969년 재단법인 한국기원으로 4차례나 명칭이 변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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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바둑판만 챙겨 피난길에 올랐던 조남철 선생은 1968년 종로구 관

철동에 한국기원 회관이 건립되기까지 무려 16번이나 이사를 다녀야 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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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이 안정을 찾아가는 동안 선생은 국수전 9연패를 비롯해 최고위전 7연패, 초대 명인 등

통산 30회 우승을 기록하며 한국 바둑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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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애기가들이 대국 도중 "조남철 9단이 와도 못 이겨" "조남철 9단이라면 몰라도.."라고

언급할 만큼 그의 명성은 바둑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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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선생은 1955년 최초의 바둑교제인 '위기개론(圍碁槪論)'을 출간하는 등 다양한 바둑책

을 출판해 한국식 바둑용어가 정착하는 데도 큰 기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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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 만 아니라 선생은 김인, 윤기현, 하찬석, 조훈현, 조치훈 등 후배들의 일본 유학을 적극

추진해 국내 바둑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며 한국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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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은 바둑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9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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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족으로는 부인 최충순(80) 여사와 딸 영수(54), 영민(51)씨, 아들 송연(49)씨 등 1남2녀가

 있다.

shoeless@yna.co.kr

(끝)

 

 

 

[관련자료1]

영원한 국수 입신 조남철


1941년 가을 일본기원. 갓 프로가 된 18세 소년이 승단 대회에

 처녀 출전합니다. 조선 출신인 소년의 이름은 조남철. 열전을

 펼치던 수십 명의 동년배 초년병들이 점심시간을 알리는 벨

소리에 우루루 일어나 대국장을 빠져나갔습니다.

드넓은 홀 한가운데 소년 혼자만 덩그러니 남게 됐죠. 따사로운

 햇살이, 식사를 마친 소년들의 떠들썩한 담소 소리와 함께 유리

창을 넘어와 바둑판을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문득 고개를 쳐 든

소년의 눈자위가 붉게 물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화장실로 달

려갔습니다. 문을 걸어 잠그고도 모자라 자신의 입까지 틀어막

은 채, 소년은 꺼이꺼이 참았던 울음을 토해냈습니다.

도일 유학 4년 째. 처음엔 밥 한 끼 함께 할 가까운 벗 하나 없다는 외로움뿐이었는데, 그 모든

것이 결국 나라가 없어 생긴 일이란 데 생각이 미치자 설움이 폭발했던 거죠. 웬만해선 잘 울

지 않는 조남철에게 그 것은 평생의 첫 눈물이었습니다. 그는 1944년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 이듬해 해방을 맞습니다. 22세 청년으로 성장한 조남철은 본격적인 바둑 보급에 온 몸을

 던집니다. 1950년 6월 20일, 갖은 고초 끝에 마련된 낙원동 대한기원에서 단위 결정 시합이

시작됐습니다.

은은히 들려오는 포성(砲聲) 속에서 대회는 27일까지 계속됩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조남철은 그제서야 가족들과 함께 피난에 나섰지만 이미 한강 다리는 폭파된 후였죠. 거리엔

붉은 마크의 탱크가 굴러다니고 있었습니다. 할 수 없이 집으로 되돌아 온 조남철은 기원이

궁금해 견딜 수 없어 거리로 뛰쳐나옵니다. 목숨을 건 행동이었지만, 기원은 그에게 바로 목숨

이었기 때문이죠. 회관은 치안대의 임시숙소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아아! 마구 내 팽겨 쳐지고 버려진 바둑판들…. 구석의 일본식 화로에선 더욱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검은 잿더미 속으로 흑 백 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을은 바둑

알들이 파묻혀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는 바둑알을 몇 개 꺼내 옷으로 문질러 닦아보았습

니다. 하얀 얼굴을 드러낸 채 비로소 미소 짓는 바둑알들. 조남철은 바둑알이 그렇게 예쁜

것인지 처음 깨달았다고 훗날 술회하죠.

바둑알들을 주섬주섬 꺼내 쌓으면서 조남철은 마침내 오열합니다. 어떻게 마련한 바둑알,

바둑판인데…. 시커먼 잿구덩이 속에서 바둑알을 꺼내는 작업은 그에겐 불에 타죽은 자식을

찾아내는 것과 다르지 않았죠. 조남철의 평생 두 번째 울음, 그의 나이 27세 때였습니다.

피눈물 속에 바둑판과 알들을 얼추 추스린 조남철은 여명기 개척자 중의 한 분인 김명환

(김재구 8단의 선친)의 도움을 받아 이 기물(棋物)들을 바둑계 유지에게 맡깁니다. 두 사람

이 바둑판을 실은 리어카를 함께 밀고 끌며 옮기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1968년 관철동에 한국기원의 거대한 신축 건물이 들어섰을 때 조남철은 세 번 째 눈물을

뿌립니다. 1945년 한성기원으로 출범한지 22년, 부산 피난 시절을 포함해 무려 16번의

이사(移徙) 끝에 얻은 ‘내 집’에서 그는 축사를 하다가 기어이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 조남철 선생의 올해 연치(年齒)는 81세. 인생을 하루에 비유한다면 석양(夕陽)도 서산

너머로 숨고 땅거미가 깔리며 초저녁에 진입한 시점입니다. 바깥출입은 엄두도 못 내고

산소(酸素) 호스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니까요. 최근엔 청력이 많이 떨어져 보청기 없이는

대화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 조선생의 지금 소원이 뭔지 아십니까.

“아직 단 한 가지의 소망이 남아있다. 프로와 아마가 동락(同樂)할 수 있는 바둑회관의 건립

이다. 노욕이라 욕해도 좋다. 나는 이 마지막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눈을 감고 싶다.”

최근 한국기원서 출간한 [한국바둑의 대부/조남철 회고록 ]

서문에서 선생은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토록 한 평생을

오직 바둑에서 시작해 바둑으로 끝낸다는 게 아무나 흉내낼

수 있는 것인지…. 한국 바둑의 개척자란 사실에 앞서 이 같은

 외길 정신이야말로 제가 선생을 존경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해 숱한 위인들이 배출됐지만 한눈팔지 않고 자기

 분야에 완벽하게 투신했던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그에게

바둑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신앙이자 종교였던 셈이지요.

그러고 보면 선생은 소위 팔방미인 형은 아닙니다. 하지만 바둑

 한 분야에서만은 그가 안 해본 일이라곤 없습니다. 한국 바둑의 유아기라고나 할 20세기 초

일본에 건너가 선진 문물을 전달한 선교사였고, 순장바둑에서 현대바둑으로 옮겨간 조타수

(操舵手)였습니다.

완고한 노국수들을 설득해 단위 제도와 전문기사 제도를 뿌리내린 선각자였고, 빈손으로 한성

기원 조선기원 한국기원으로 이어지는 토대를 마련했으니 보기 드문 경영인이기도 했죠.

최초의 바둑 책 ‘위기 개론’을 쓰고 용어(用語)를 정비한 문화인인가 하면 신문 기전을 개척한

행정가였습니다.

하지만 선생의 매력을 꼭 이런 업적에서 찾고 싶지는 않습니다. 휴매니티 넘치는 하나의 인간

이란 점이 우선 사람을 잡아 끕니다. 회고록 도처에서 만나는 그의 에피소드들은 보는 사람을

 미소 짓게 합니다. 조남철이 이끄는 조선기원과 옛 국수급 노장들을 배경으로 한 경성기원이

 팽팽히 대립하던 시절 일화 하나. 대회 준비로 동분서주하던 조남철이 노국수 민중식(閔仲植)

과 맞섰습니다. 몸살로 열이 펄펄 끓던 조남철은 리그전서 1패를 안았고, 노국수들의 암묵적

밀어주기에 힘입은 민중식은 전승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대국이 시작되자 민중식은 “술이 없으면 수가 안 보인다”며 소주를 꺼내놓고 마셨습니다. 상대

 기세를 꺾으려는 의도였죠. 조남철은 냉수에 아스피린 두 알을 녹여 마신 뒤 필사적으로 싸워

 이겼습니다. 더 이상은 정말 싸울 몸이 아니었건만, 노국수 들은 동률 재대국을 연기하자는

조선기원 측 요청을 일축했지요.

조남철은 혼미한 가운데서도 또 한번 승리, 기어이 주도권을 유지합니다. 그 승리에 힘입어

개혁 노선(?)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뜻이었는지도 모릅니다. 6.25가 터진 뒤 공사장

 노동과 채소 장사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조남철에게 입대 영장이 날아들었습니다. 배웅 나온

아내는 12월의 삭풍을 맞으며 말없이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 있었죠. “대마불사라고 당신도

들어봤지? 내가 곧 돌아오리다.”

농담으로 아내를 안심시킨 조남철은 허리춤에서 보퉁이 하나를 꺼내 내밉니다. 틈틈이 써 온

 바둑 원고였죠. “혹시라도…내가 잘못되거든 꼭 책으로 내달라”며 그는 훈련장으로 향합니다.

압록강을 향해 북상할 당시 어느 전투에서 조남철은 왼쪽 팔과 오른 쪽 다리에 부상을 입고

후송되죠. “바둑은 둬야 하니까 오른 팔만은 다치지 않게 해달라고 평소에 빌었다. 기도가

 효험을 본 셈이었다.” 회고록 속에서 조남철은 이렇게 말하며 파안대소합니다. 그는 6개월간

 대구 육군병원에 입원합니다. 여기서도 그는 장경근 고재필 등 바둑계를 도와주던 군 고위

층들과 얽힌 숱한 에피소드를 쏟아놓습니다.

요즘엔 일주일이 멀다하고 각국에서 국제전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 역시 근원을 거슬러 올라

가면 조남철과 만나게 되죠. 해방 후 숱한 고난을 헤쳐가면서도 그는 언젠가 벌어질 세계

대회를 염두에 두고 준비해 나갔습니다.

대만과의 교류전을 위해 그는 평소 꾸준히 연락을 취했고, 1954년 마침내 한국 최초의 국제

전이 타이페이에서 열렸습니다. 그 경비를 환전(換錢)하는 과정에서 저 유명한 경무대(지금의

 청와대) 대국이 이승만 당시 대통령 앞에서 치러지기도 했지요. 기도보국(棋道報國)의 일념

으로 동분서주하던 조남철. 그는 어느 날 아내로부터 가슴이 내려앉는 충격적인 소리를 듣습

니다. 빨래터에 나갔던 아내를 향해 이웃 아낙네가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하더라는 겁니다.

“송연이 아빠(조남철)가 도박의 두목이라면서요?”

놀란 아내에게 이웃 여자는 “다들 그러던데요 뭐. 얼마 전엔 중국까지 가서 도박을 하고 왔다

면서요?”하며 쐐기를 박았습니다. 눈물 그렁그렁한 아내를 보는 조남철의 마음은 어땠겠습

니까. 그가 우리 바둑계를 일구고 씨 뿌리며 수확해 오면서 겪은 가장 큰 어려움은 이 같은

주위의 시선이었을 겁니다.

모든 것이 ‘한국 1호’인 조남철이 9단 승단만큼은 조훈현보다 늦었지만 여기에도 사연이 있습

니다. 후배들과의 실력차이가 워낙 많이 나자 승단을 기피했던 거죠. “아직 몇 판 더 이겨야

승단”이란 직원의 말을 믿고 이겼는데, “계산을 잘못했다. 승단하셨다”는 바람에 7단에서

8단이 된 조남철입니다. 8단에서 9단으로 오르는데 20년이 걸린 것도 뭔가 수상(?)하지

 않습니까.

회고록은 본인이 직접 쓰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그렇지 못했던 건 건강 때문이었죠. 회고록은

 월간 ‘바둑’지에 만 3년간 연재됐으며 한국기원 홍보실 양형모 팀장이 선생의 구술(口述)을

받아 소설 형식으로 정리했습니다.

취재 초기 무렵만 해도 주요 장소를 찾아 함께 따라나섰던 선생은 이듬해부터 산소 호스를

착용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거실 구석에 놓인 산소통과 5~6미터짜리 줄로 연결된 산소

호스가 선생의 삶을 이어주는 생명선이라니 참으로 비감할 뿐입니다.

50대에 폐기종 수술을 받은 선생은 작년에야 60년 경력의 담배를 끊었습니다. 어지간한 애연

가였고, 또 어지간히 상태가 나빠졌음이 느껴지네요. 초기 취재 때 그토록 또렷하던 기억을

 후반부엔 거의 메모 자료에 의존해야 했다지요.

그러나 선생은 잡지에 실리기 전 원고를 반드시 보여 달라고 요청했고, 날자와 이름 등 잘

못된 곳을 바로잡아 줄 만큼 꼼꼼했습니다. 어떤 때는 이미 나간 잡지의 한 부분을 오려놓고

 “이게 틀렸더라구”하며 웃으시더랍니다.

지주(支柱)가 소중한 시대입니다. 국부(國父), 대가(大家), 거장(巨匠), 비조(鼻祖), 마이스터,

 태두(泰斗)…이런 존재의 유무는 그 세계의 흥망을 좌우합니다. 처칠 워싱턴 드골 손문(孫文),

 또 베토벤 셰익스피어 괴테 엘리어트 톨스토이 이태백 미켈란젤로 세잔, 그리고 뉴턴 파블로

다윈 아인슈타인 플라톤 칸트 데카르트…. 이 분들이 없었다면 인류 역사도 수 백 년은 늦춰

지지 않았겠습니까?


중국 바둑계가 요즘 때 아니게 ‘오청원 우상화’에 열중하고 있는 현상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선생을 일본 바둑의 일원으로 간주해 온 중국의 이 같은 태도 변화는 말 할 것도 없이 바둑

발상국의 체통을 되찾기 위함입니다. 지난 가을 촬영에 들어간 영화 ‘우칭위안’은 오랜 준비

기간과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거작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일본 역시 지난여름 바둑 ‘명예의 전당’을 만들고 첫 헌액 멤버로 도쿠가와(德川家康) 등 4명을

 선정했죠. 세계 최강을 외치고 있는 한국은 어땠나요? 외국의 그같은 움직임들이 그저 ‘흥미

로운 해외뉴스’로만 머물러 왔습니다.


“들여다봐야 헛거여! 조남철이가 와도 못 산다니께….” 노인들은 바둑을 두다가 이렇게 외치곤

 했죠. 언젠가부터 조남철이 조훈현이되고 다시 이창호로 바뀌었습니다만, 불과 20년 전만해

도 우리 서민들에게 바둑은 곧 조남철이고 조남철은 곧 바둑이었습니다. 그런 선생의 존재를 뒤늦게나마 깨달아 자서전이 출판되고 다큐멘터리도 제작도 시작한다니, 죄 없는(?) 저부터 신부님 앞에 돌아와 선 탕아처럼 약간은 떳떳해 지는군요.


다큐멘터리 기획안을 방송위원회에 제출, 우수 컨텐츠 선정과 함게 지원금을 받게 된 케이블 TV ‘바둑채널’은 이 역사(歷史)적 역사(役事)에 크게 고무된 듯 의욕적인 자세로 벌써 제작에 들어갔습니다.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기다니(木谷實) 도장을 비롯해 일본과 중국 현지 촬영에도 나서고, 생생한 인터뷰와 대역(代役) 재연까지 동원한다니 신년 벽두 개국 1주년 특집 방송이 자못 기대되는군요.


1994년 71세 때 세계 최고령 본선(18기 국기전) 기록을 세운 뒤 1999년 4월 제4회 LG배 세계

기왕전 예선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난 조남철. 하지만 일제와 전화(戰禍) 속에서 ‘노름 왕초’

소리까지 들어가며, 온갖 고초 속에 한낱 사랑방 소일거리였던 바둑을 동호 인구 1000만명의

 융성으로 이끈 그의 외길 기도(棋道) 정신은 영원히 살아 숨쉴 것입니다. 부디 선생이 건강을

되찾아 장수(長壽)하시길 두 손 모아 기원합니다.

이홍렬 / 조선일보 바둑 전문기자 겸 LG배 세계기왕전 관전필자

 

업글중입니다.

 

[관련자료2]

 

[贯铁洞时代(59)]韩国棋院陶醉于繁荣回避丑陋的过去

http://weiqi.tom.com 2006-07-02

  

[贯铁洞时代(59)] 韩国棋院陶醉于繁荣回避丑陋的过去

[관철동시대 59] 한국기원은 ‘번영’에 취하여 초라했던 옛날을 회피하다


http://weiqi.tom.com 2006-07-02


【TOM棋圣道场】贯铁洞韩国棋院1967年11月5日举行奠基仪式,68年光复节的8月15日竣工,工程花了10个月时间。韩国现代围棋的教父赵南哲回忆说:“建的非常棒,钢筋一点也没有省。参与工程的技术人员说:比相仿的建筑多花了50%的材料。虽然表面看起来旧,但是非常结实,不是现在那些看起来花花的建筑可比。”

 

[TOM치성다오창] 관철동 한국기원은 1967년 11월 5일 착공식을 갖고 10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1968년 광복절인 8월 15일 준공하였다. 한국 현대바둑의 아버지[敎父] 조남철선생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정말 튼튼하게 지었지요. 철근 한가닥도 안 빠졌어요. 당시 공사기술자가 ‘다른 건물보다 자재가 50%는 더 들어갔습니다. 겉으로는 그저 그래 보여도 정말 짱짱합니다. 요즘 저 겉만 뻔지르르한 건물들과는 비교가 안되요’ 라더군요.”

 

 

  1945年光复时,赵南哲是韩半岛唯一的职业棋手,他在小推车里码起棋盘展转街头普及围棋。到五十年代赵南哲手里捧着棋谱游说各家报纸,他想说服报纸创办和日本一样的新闻棋战。但得到的回答是:可以不收广告费刊登棋谱,但是对局费不可能。近半个世纪过去后,赵南哲呵呵笑着说:“奖金都超过1亿,真是壮大了。”

 

    1945년 해방 때 조남철선생은 한반도의 유일한 프로기사였다. 그는 리어카 안에다 바둑판을 싣고 골목골목을 누비면서 바둑을 보급하였다. 1950년대까지 조선생은 기보를 들고 각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일본과 같은 신문기전을 만들도록 ‘유세’를 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뭐 광고비 없이 기보를 싣는 거야 가능하겠지만 대국료 때문에 곤란할 것 같습니다” 였다. 근 반세기 뒤에 조남철선생은 허허 웃으며 “이제 상금이 전부 해서 1억이 넘어. 정말 많이 커졌지” 라고 그때를 회고하였다.

 

 

  进入九十年代赵南哲已经是七旬老人,而且比年纪衰老了许多。为围棋奋斗一生的老胜负师经常陷入缅怀中,他的脸上既洋溢着自豪感,也有世事无常的落寞。赵南哲虽然一生和围棋相伴,但是没有自己的对局集。赵南哲的实战谱是韩国现代围棋活的历史,但是现在一半已经佚失。在学术界如果教授过花甲,那么他的弟子会为恩师出纪念论文集。严格来说,韩国棋界的所有职业棋手都是赵南哲的弟子,但是赵南哲年届七旬仍看不到对局集的影子(译注:后来出了朝鲜桑纸,手工装订的“天地人”三卷线装全集,收赵南哲早期留学日本至1994年最后一次打入本赛的235局。赵南哲全集精美、耐久度超过限量发行的日本本因坊全集,共发行300套)。

 

    1990년대 들어 조남철선생은 벌써 70줄 노인이 되었으며 몸은 당신 나이보다 훨씬 더 쇠약해졌다. 바둑을 위해 평생을 바친 노승부사는 옛날 일을 생각할 때면 항상 얼굴에 뿌듯한 자부심을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인생무상의 허전함도 드러내곤 하였다. 조선생은 비록 평생을 바둑과 같이 했지만 아직 자신의 대국집이 없다. 한국 현대바둑의 산 역사이기도 한 조선생의 실전기보는 반은 잃어버려 찾을 수 없는 상태다. 학계 같으면 교수가 환갑이 되면 그 제자들이 모여은사님을 위해 기념논문집을 만든다. 엄격하게 말해 한국 바둑계의 프로기사들은 모두 조선생의 제자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생이 7순에 이르렀어도 대국집의 그림자는 찾을 수 없었다(역주: 뒤에 ‘조선상[朝鮮桑 ?]’ 신문사에서 조선생의 초기 일본유학시절부터 1994년 마지막 본선전까지 모두 235판의 대국을 담은, 수공 제작한 3권짜리 ‘천지인’ 전집이 출판되었다. 정교하고 멋있으면서도 튼튼하게 만들어진 조남철전집은 그 수량이 역시 한정판매된 일본본인방전집보다 적은 300질이었다.

 

 

  或许韩国围棋已经扬起巨帆驶向黄金海岸,曹薰铉、徐奉洙、刘昌赫、李昌镐各自忙着加速,所有的目光都是投向前方。九十年代全国已经掀起围棋热,一觉醒来就有新推出的棋战,而且儿童围棋大会云集几千名学棋的孩子。韩国棋院忙于处理前进的速度,无暇回头看身后的问题。此时也有自省的声音呼吁:寻根同样很重要。日本不仅有本因坊全集,而且收录他们的所有非正式对局。我们也应寻找韩国特有的巡将棋谱,在老国手们离世之前,由他们和赵南哲先生整理出版。尤其应该留下韩国现代围棋的教父赵南哲的对局集。

 

    큰 돛 달고 ‘황금해안’을 향해 항해하는 ‘한국바둑’이라는 범선은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와 같은 선장의 지휘 아래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갔고, 모든 눈빛은 앞만 쳐다보았다. 1990년대 전국은 이미 바둑바람에 휩싸여 눈만 뜨면 새로운 기전이 탄생하였고, 어린이바둑대회만 열리면 수천명의 ‘바둑어린이’들이 몰렸다. 한국기원은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를 높이는 데에만 바뻐 잠시 자신을 뒤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이때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하였다. “이제 뿌리를 찾는 것도 중요하다. 일본은 ‘본인방전집’을 만든 것은 물론 그들이 둔 비공식대국까지 모두 수록하고있다. 우리도 마땅히 우리 고유의 순장바둑기보를 찾아 노국수들이 세상을 뜨시기 전에 그분들과 조선생이 이를 정리하여 출판할 수 있게 해야한다. 특히 한국 현대바둑의 아버지 조남철선생의 대국집을 빨리 만들어야한다.”

 

 

  但是,这样的呼吁很快被接连的激战和凯旋的喧闹所淹没。而且韩国棋院陶醉于繁荣,有意无意地回避丑陋、而且发霉的过去。赵南哲呵呵笑着说:“胜负世界无情就是道理。”赵南哲为了普及围棋亲手写围棋书(译注:《围棋概论》,至今也是名作),而且为杂志撰稿。赵南哲91年因身体虚弱一盘正式对局都没有下,92年赵南哲先是4败,到年末赢了一局。1994年,赵南哲打入第18期国棋战本赛,而且战胜河灿锡进入了第二轮。1989年曹薰铉获应氏杯冠军时,韩国政府颁给赵南哲勋章。1984年日本棋院颁发赵南哲权威的大仓奖。赵南哲在八段停留了二十年,在曹薰铉升入九段一年后推举为九段(83年)。赵南哲是累于他本人制定的段位制度,他担心段位的水分严苛限制升段。赵南哲八段那时如果想升九段,必须授四段两子取胜。贯铁洞时代就要垂下帷幕,必须记下赵南哲先生一笔。

 

    그러나 이러한 호소는 금새 격전과 개선의 환호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한국기원은 ‘번영’에 도취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초라하고 쉰내 나는 옛날을 회피할 뿐이었다. 조남철선생은 허허 웃으며 “승부의 세계는 원래가 무정한 법이야”고 말하였다. 조선생은 바둑 보급을 위해 바둑책(역주: ‘위기개론’[?]은 지금도 명작)을 썼고 잡지에 원고도 투고하였다. 1991년에는 건강이 나빠 한판의 정식대국도 두지 못하였고, 1992년 조선생은 처음에 4연패하다가 마지막에 1판을 이겼다. 1994년 조선생은 18기 국기전 본선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하찬석 9단을 이기고 본선 2회전까지 진출하였다. 1989년 조훈현 9단이 잉씨배 우승을 차지하였을 때 한국정부는 조남철선생에게 훈장을 주었다. 1984년 일본기원은 조선생에게 오쿠라상[? 大仓奖]을 주었다. 조남철은 8단에만 20년 머물러있다가 조훈현 9단이 9단으로 오르고 1년 뒤(1983)에야 9단으로 올려졌다. 조선생은 그가 직접 만든 단위제도에 유난히 신경을 써서 충분한 실력이 안되면 승단을 어렵게 하도록 하였다. 조선생은 8단 때 9단이 되려면 4단에게 2점 접어주는 실력은 되어야한다고 믿었다. 관철동시대도 이제 곧 막이 내리려하니 조남철선생을 위해 이렇게 한 글자 기록하여 남기는 것도 마땅한 일이리라. 

 

[관련자료3]

네티즌들의 추모 덧글

 ddakkabi | (2006.07.03 00:04)   
 
이분에게 제일먼저 바둑협회에서 명예 10단을 드렸어야 하는데. . 저도 몇년전 신문 바둑이야기 연재에서 알았던 분인데. 삼가고인의명복을 빕니다.  
 mbh5310 | (2006.07.02 22:53)   
 
바둑의 거장이신 조남철선생님께 먼저 머리숙여 조의를 표합니다. 후진들은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길이 빛낼것입니다 .편히 쉬소서 
 kmwine | (2006.07.02 22:46)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 바둑계의 빛나는 별이 되셔서 보다 더 바둑이 발전되도록 하늘 나라에서 지켜 봐 주시기 바랍니다.깊이 머리숙여 명복을 비옵니다. 
 yyycccsss2002 | (2006.07.02 22:01)   
 
한국 바둑계의 거목이 갔다. 조남철 그는 개척자이며 원로로서 품위를 잃지않고 후학 양성에 힘을 쏱았다.그의 업적은 영원히 기록될것이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greatboydad | (2006.07.02 22:01)   
 
소시적 바둑 배울 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이름인데 이젠 고인이 되셨군요. 삼가 명복을 빕니다. 
 kkh1495411 | (2006.07.02 21:48)     
 
고 조구단님의 명복을 빕니다. 
 pejhi31 | (2006.07.02 21:07)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조남철 국수님 신선이 되셨군요 조회 2추천 02006/07/02 23:42
fhrgotj IP 152.99.xxx.11신고
막연히 줄바둑을 둘 때부터 당신은 나의 영웅이었습니다
조서시대의 그 파란만장한 시간에도 당신은 우리의 기둥이었습니다
이창호 유창혁 이세돌 등이 세계를 호령할 때에도 당신은 중생들의 귀감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우자들이 아직 당신의 뒷꿈치를 따라가지도 못할때
풍진의 시름을 벗고 신선이 되셨군요
하얀 수염을 기르시며 기다리고 계셔요 먼 훗날 오로길에서 한 수 부탁 드릴께요
--- 마음이 허해진 하수가 올립니다 ---
한국바둑의 아버지..고이 잠드소서. 조회 2추천 02006/07/02 23:31
edeles IP 222.99.xxx.218신고
조남철 9단..드디어 가셨구나..

 한국기원의 창립자이면서 동시에 각종 기전의 창립과 바둑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던 한국바둑의 아버지. 천국에서 편히 쉬소서.
정말 슬프군요 조회 1추천 02006/07/03 00:24
ehswnfl IP 220.71.xxx.226신고
초등학교때부터 바둑을 두면서 지금까지 바둑을 사랑하는 저로서는
인생의 전부를 바둑에 쏟으신 고인을 위해 눈물을 흘리고 싶네요..ㅠ.ㅠ
한국바둑계의 산 증인 조회 3추천 02006/07/02 23:31
dj1473 IP 211.203.xxx.194신고
바둑계에서는 아니 문화관광부는 동상 하나라도 세워야하는거 아냐///
마음이아프네요..바둑인에한사람으로고맙습니... 조회 32추천 02006/07/02 21:50
333ldy IP 61.248.xxx.20신고
마음이 아프네요 전 바둑을 잘두진 못하지만 바둑을 보는것을 참 좋아했고.. 아주 오래전 고 조남철선생님 기보를 본적이 있었습니다.. 아버진 정말 잘두신 분이며 최고였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바둑인에 한사람으로 고맙다고 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바둑계의 큰별이 지셨군요. 조회 38추천 02006/07/02 19:19
makendou IP 125.130.xxx.107신고
평소 바둑을 좋아하는 독자인데 바둑계의 아버지가 타계하셔서 슬프네요.
부디 좋은곳으로 가시길 빕니다..

 

 

[i진선 한 마디]

한국 현대 바둑의 어버이, 조남철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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