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거진T 2006-09-25 13:21] | ||||||||||||||||||
개그맨을 웃기는 개그맨, 최양락 인터뷰
MBC 라디오국의 복도에서 희끗한 머리의 최양락을 만났다. 인터뷰와 사진 촬영을 준비하는 동안 그는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전화를 끊은 그가 머쓱하게 말한다. “바둑 TV에서 또 섭외가 와서...” 그는 바둑 TV 역사상 최하수 진행자로서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베스트를 골라달라는 주문에 그는 두서없이 얘기들을 꺼내며 이렇게 덧붙인다. “그게, 남들 하고 똑같지 뭐. 가족이나 일에서나 가장 좋은 일들,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질 거예요.”
최양락: 81년 6월 1일 MBC 라디오 축제 대상으로 데뷔했다. 그때가 제일 기뻤다. 상도 많이 받고. 81년이니까 벌써 25년도 넘었다.
이 든다. 지금 생각해보면 ‘네로 25시’는 차라리 상황극에 가까운 것 같은데, 최양락의 개그를 정의하자면.
최양락: 내가 말하긴 뭣하지만, 나의 개그는 말과 극의 조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개그는 원맨쇼도 아니지만 또 코미디적 요소가 없지도 않다. 주고받는 대사나 동작들이 과장되고 아이 러니하다. 굳이 말하자면 그게 내 개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최양락: 개그맨이라는 건 선척적인 어떤 게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노력해야한다. 어느 분야 나 마찬가지겠지만, 개그는 정말 머리가 아플 정도로 연구에 연구를 해야 한다.
최양락: 개그맨의 정의는 내가 내릴 수는 없는 것 같고. 필요한 것들은 먼저 본인이 모든 걸 다 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직접 소재의 아이템을 개발하고 기획해야 하는 거다. 내가 만약 탤런트라면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감독에게 써서 가져갈 순 없다. 그리고 ‘나 이런 연기 할 수 있어’라면서 직접 연기를 보여줄 수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개그맨은 된다. 전유성씨도 된다. ‘나 이런 거 재밌어.’ (이때 그는 전유성의 성대모사를 했다) 봐라, 이게 얼마나 좋은 직업인가. 우리에게는 정년이 없다. 능력만 되면, 또 자기 관리하고 연구만 게을리하지 않으면, 40살이든 80살이든 상관없이 할 수 있다. 송해 선생 봐라. 아시아 최고령 사회자 아닌가. 개그맨도 그런 거다.
최양락: 그것들은 모두 내 개그의 연장이다. 나는 말과 몸으로 웃기는 개그를 했고 그것들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가 개그맨, 코미디언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나의 사명은 즐거움을 주는 거다. 그렇다면 앵커까지는 안 되더라도 ‘내일의 날씨’ 정도는 할 수 있지 않나. 어떤 포맷 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즐거움을 주면 되니까. 얼마 전엔 영화 '잘 살아보세' 의 사투리 감수를 했다. 각색까지도 좀 했다. 그것도 같은 맥락이다. '맨발의 기봉이'에는 까메오로 출연 했는데 최양락으로 나온다. 최양락으로 나올 것. 그게 출연 조건이었다. 충청도 어느 마을에서 배출한 개그맨 최양락. 웃기지 않는가. 다른 까메오라면 내겐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개그맨이니까.
최양락: 우리는 개그맨 커플 1호였다. 웃긴 게, 결혼 발표하니까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더라. 개그맨들끼리 결혼하다니. 개그맨들도 ‘역시 최양락 특이해’ 란 반응이었다. 결혼한 지 18년이 다. 88년 10월 1일에 결혼했으니까 딱 18년이네. 애 엄마는 거의 활동을 접었다. 내조를 한 거지.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연예인은 다들 자기중심적인 게 있다. 대접받으려고 하고. 사랑이 깨지지 않으려면 바라면 안 되는데 연예인들은 서로에게 바란다. 서로 잘났다고 한다. 내 경우 엔 와이프가 양보를 했지. ‘그래 니가 나보다 더 웃겨. 잘 났어. 잘 해봐라’ 그랬다. 그래서 나도 내가 정말 잘 난 줄 알았지.
최양락: 그때, 좀 쉴 때. 정말 남달랐다. 가족이 이런 거구나, 했다. 1년 동안 호주에 있었다. 여유가 있으면 그렇게 계속 살고 싶더라. 그런데 어쩌면, 앞뒤가 안 맞는 얘기인데, 가족은 같이 있어야 한다. 나는 애를 호주에 떼어놓고 온 사람이라 이런 말 하는 게 모순이지만, 어쨌 든 가족은 같이 있어야 한다. 부부도 같이 있어야 한다, 특히. 그래서 나는 애한테 엄마를 뺏어 가지 말라고 했다. 사랑해서가 아니라 좀 이기적이어서 그런 거지. 나는 이 친구가 없으면 안 된 다. 내조를 잘 하니까. 농담이다. (웃음) 어쨌든 가족은 같이 살아야 한다. 이건 정말 모순이지 만, 내가 애를 그렇게 하고선 말이지.
최양락: 우리 애들은 엄마랑 외식하는 게 익숙했는데 내가 거기에 끼면 너무 이상하게 생각 하더라. 바빴으니까. 호주에서 지내던 때, 딸애가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은 학교도 안들어갔던 때다. 지금은 딸애가 고등학생이네. 1년 정도 지내고 돌아왔더니 영어에 관심을 보이더라. 그래서 지금은 호주에 유학 가 있다. 얼마 전엔 책도 냈더라. 자기 유학 생활을 책으로 쓴거지 뭐.
최양락: 나도 몰랐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도매급으로 넘어간 것 같더라. 방송사에서 자기들 끼리 준비하고 말한 건 아니지만.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 이제 후배들에게 넘겨줘야죠.”라고 하더라. 그리고 내가 맡던 프로그램이 없어졌다. 못하던 건 아니었다. 시대가 바뀐 거지. 오래 했던 게 문제였을까. 그런데 좀 천천히 그랬으면 좋겠는데 느닷없이 단칼에 없애버린 거다. 우리 또래들은 많이 섭섭했지. 나도 마찬가지였고.
최양락: 나, 약발이 다 되었구나. 이게 재미가 없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냥 네 알겠 습니다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가족들을 데리고 호주로 갔는데 생각해봐도 내가 할 줄 아는 게 없더라. 그래도 좀 쉬고 왔더니 여기저기서 불러주긴 하더라.
최양락: 서글픈 거지. 메이저 방송이 아니니까.
최양락: 쉬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그 시간동안 당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봤다. 시대가 바뀌기도 했다. 사람들의 눈높이가 높아졌다. 볼링에서 말 하자면 애버리지 같은 거. 우리는 200이 넘는 프로들인데, 기대치가 낮으면 시시하겠다고 생각했다. 더 강한 게 필요했다. 그거에 맞춘 거다. ‘알까기’가 성공하고 아내와 함께 울 정도 로 기뻤다. 운동은 못하는데 보는 건 좋아한다. 어떻게 보면 개그도 비슷한 거 같다. 예를 들어 이승엽을 보자. 어느 날 슬럼프가 온다고 하면, 계약은 했으니 2군으로 보낸다. 우리도 그런 것 같다. 하염없이 쉴 수도 있고 작은 방송국으로 갈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개그란 본인 이 연구하는 거라는 사실이다. 내가 개그맨이 아니었으면 재기가 불가능했을 거다. 지금도 기회는 있다. 문은 언제나 열려있으니까. 재미있는 것만 가지고 가면 된다.
임하룡은 영화배우로, 이봉원은 기획자로 자리를 잡거나 활동하고 있다. 반면 최양락 은 여전히 개그맨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최양락: 그들의 분야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쉽긴 하지. 그래도 개그맨은 시청자들 에게,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다. 웃기든 춤을 추든 재미를 주면 된다. 나는 그게 안 된다. 앵커도 개그맨이 보면 안 되나? 그런데 나랑은 안 맞으니까 안한다. 요새는 정극 배우 들도 코미디를 많이 하더라. 옛날엔 코믹 드라마도 싫어했는데. 그래서 우리는 더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 같다. 시트콤이 생긴 게 10년이 좀 넘었는데, 그때 난 드디어 우리도 안정적으로 코미디를 할 수 있겠다고 기뻐했는데 웬, 탤런트들이 시트콤을 하더라. 정말 열이 받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는 건 재미가 없다고 하더라. 너무 당연해서. 이제는 시트콤이 좀 황당무계 한 드라마일 뿐이란 생각이 든다. 공식화되었으니까. 나도 임하룡 선배처럼 안 웃기고 이미지 변신해서 정극하면 안 되겠나. 사극은 못 하겠나. 그런데 나는 안 된다. 못한다.
: 토크쇼도 진행하고 라디오도 진행하려면 다른 분야를 알아야 할 것 같다. 최근의
관심사는 어디로 향해 있는가.
최양락: 네로 할 때는 관심사가 정치였다. 하긴 그땐 다 그랬다. 독재가 언제 끝날까. 3김 시대가 어떻게 될까. 그러면서도 살벌했던 시기 아닌가. 박정희 끝나고 봄이 오나 했더니 전두환이 와서, 그 밥에 그 나물이었던. 그래서 그 시절엔 시사 풍자, 아니 정치 풍자하는 거에 사람들이 높은 점수를 줬다. 그런데 지금은 정치면보다는 사회 면에 더 관심이 많다. 그냥 시대가 바뀐 것 같다. 문제는 그 수준을 맞추는 게 어렵다. 높이면 잘난 체 한다고 하고, 너무 낮추면 진짜 무시하고. 그냥 보통사람으로 가야한다. 모르면 모른다, 아는 건 확 아는 체 해야 하고. 그런데 사람들은 최양락은 그냥 그 수준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최양락: 있다고 본다. 예전보단 덜하지만, 분명히 있다. 그런 게 깨지면 좋겠다. 쉽게 얘기해서 어떤 권위주의, 그런 거. 출신 따지고 그러는 거. 외국에서는 정말 말할 수 없이 하찮은 출신이 스타가 되면 박수를 보내고 존경을 보낸다. 그런데 우리는 그게 알려지면 매장되니까 숨긴다. 또 그런 걸 굳이 캐려고 하고. 사회가 너그럽지 못한 게 있다. 훌륭한 건 인정을 해주고 박수 쳐 줘야지. 나도 그렇다. 개그맨 최양락은 인정을 해준다. 그런데 그게 다다. 그 이상으로는 안 봐 준다. 진행하는 토크쇼, 거기에는 개그나 해라 그런 말이 올라온다. 솔직히 기분 나쁘지. 왜냐 면 내가 어떤 부분에서 잘못했다, 이런 게 아니라 그냥 나 자체에 대한 험담이잖나. 그건 개그를 그냥 낮게 보는 것 같다. 그게 기분 나쁘다. 우리나라에서 개그는 아직도 이렇구나, 이런 생각이 든다.
최양락: 덕분에 아쉬운 것도 있었지만, 너무나 행복하게 살아왔다. 물론 욕심은 끝이 없고 아쉬 운 것도 있지만. 만약에 미국에서 태어나 개그를 했다면 이런 생각도 들고, 만약 토고에서 태어 났으면 또 달랐을 거 아니냐. 여기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후회한 적은 없다. 내가 밖에서도 잘 웃긴다, 그래서 아마 개그맨들이 나보고 웃긴다고 할 거다. 식당에서도 동네에서도 사람들한테 개그해서 잘 웃기고.
최양락: 말했지만, 사람들이 개그를 약간 낮게 보는 그런 게 있다. 오히려 대접을 못해줄 망정. 분명한 건 희극이 먼저다. 이렇게 된 건 개그맨들의 책임도 있겠지만, 정극배우들에 비해서 한 수 아래로 보는 게 깔려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속상하다. 이게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을 거다. 그 래도 나는 ‘저 사람은 한 눈 안 팔고 개그를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자기가 개그 대표주자 도 아니면서 저 나이까지 열심히 하는 모습이 아름답구나’ 그런 말을 들으면 좋겠다. 나중에 나중에도 말이지.
(글) 차우진 lazicat@cine21.com (사진) 백가현 bbaik99@cine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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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P.] 개그의 원형을 만드는 개그맨, 최양락 | |||||||||||
| [매거진T 2006-09-25 13:21] | |||||||||||
사실 최양락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어떤 사람 들은 더 이상 최양락에 대해서 더 궁금한 게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는 더 이상 대중의 호기심 자체가 작용하지 않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는 ‘옛날 사람’이기 때 문 이다. 그러고 보니 그가 데뷔한 지도 벌써 25년이 넘었다. 81년에 데뷔한 그를 개그맨으로 기억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30대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사람들을 웃기고 재담을 과시한 다. 브라운관의 프라임 시간대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는 매일 저녁 8시, 라디오의 프라임 시간대에서 여전한 입담을 과시하고 케이블 방송에서 시사 토크쇼 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시대를 풍미한 코미디언, 시야에서 사라지다
81년, MBC 라디오 축제 대상을 받으면서 방송계에 입문한 그의 재능이 만개한 것은 1986년 KBS가 '쇼 비디오자키'라는 새로운 방식의 코미디 프로그램을 선보이면서였다. 그는 이 프로그램에서 정치 풍자 코미디인 ‘네로 25시’라는 코너에서 네로 황제를 맡으며 전 국민적인 인기를 얻었다.
더불어 풍자 코미디의 달인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그도 그럴 것이 네로 황제가 당돌리우스나 침묵리우스와 같은 신하들과 정치를 논하던 장면들은 당시 국회에서 벌어지던 ‘웃기는’ 현실의 축소판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네로 25시’가 전폭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그를 비롯한 코미디언들의 재치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른바 그 시대가 정치 풍자가 ‘먹히던’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이 코너로 87년 KBS 코미디연기대상 인기상을 수상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그가 누리던 인기는 대단했다. ‘네로 25시’를 비롯해 ‘도시의 사냥꾼’과 ‘남 그리고 여’로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자리 잡았고, 그의 코미디는 세태 풍자의 최전선에서 기능했다.
특히 ‘네로 25시’는 정치 풍자 코미디의 전형으로 기능했고, 슬랩스틱 코미디와 스탠드업 코미디 의 절충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의 코미디는 고정관념의 비틀기와 그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의 반어적인 재미로부터 발생했다. 세련된 도시인의 이미지로 커피 자판기 앞에서 언제나 ‘아메리 칸 스타일’을 찾거나, 연애 관계에서 “나는 봉이야”라며 ‘오빠’의 위치를 점유하면서도 역설적 으로 애인을 등쳐먹는 역할은 이후 등장한 수많은 라이브 코미디 코너들의 원형으로 기능하기 까지 했다.
그렇게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며 숱한 아이디어들을 내뱉던 그는 88년, 동료 코미디언 팽현숙과 결혼을 발표해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최양락, 팽현숙 커플은 한국 최초의 코미디언 커플이기도 했다. 결혼 이후 그는 89년 KBS 코미디대상 남자 연기상, 92년 SBS 올해의 스타 상과 93년 한국백상예술대상 코미디언상과 96년 한국방송대상 코미디언상을 비롯해 거의 매 년 코미디 관련 상을 휩쓸다시피 하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런 그가 90년대 후반 이후 갑자 기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사실 사라진 것은 최양락 뿐만이 아니었다. 김형곤과 전유성, 김미화 같은 시대를 풍미하던 코미디언들도 사라졌다. 물론 그들은 사라졌다기보다는 브라운관에서 다른 곳으로 자리 이동 을 했을 뿐이었다. 김형곤은 대학로 무대에서 TV보다 수위가 높은 성인 코미디를 선보였고 전유성과 김미화는 '개그 콘서트'의 뒤를 받쳐주는 든든한 대들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최양 락은 어디에서도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사라졌던 것이다. 누구나 바닥을 칠 때가 있다
90년대 후반, 코미디 프로그램의 전면적인 개편으로 모든 주류 미디어에서 사라진 그는 한동안 잠적했다가 2000년 경인방송의 '금요 코미디 쇼'를 진행하며 브라운관에 모습을 나타냈다. 다른 동료들이 대학로에서 공연을 하거나 시사 프로그램의 MC를 맡는 전업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는 여전히 코미디의 한 지류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웃음의 코드가 변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채 박제가 되거나 영원히 사라질 것처럼 보인 것도 사실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그가 ‘할 줄 아는 게 개그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사리에 카페를 하나 열었지만 그것은 사업이라고 할 만한 규모도 아니었고, 다른 동료들처럼 정극 드라마에서 감초 조연을 맡으며 연기를 할 수도 없었다. 코미디언 이미지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시트콤에서는 정극 배우들이 코미디 연기를 하고 있었고, 방송국의 개그 프로그램에서는 바야흐로 활발한 세대교체가 진행되고 있던 시절, 그는 ‘간간이 불러주는 곳에서 코미디를 하며 버티고’ 있었다.
그런 그가 2001년, MBC '코미디 닷컴'의 ‘알까기 명인전’(알까기)이라는 코너로 재기한다. 바둑판에서 흑백알을 나눠 튕기던 유년기의 놀이는 브라운관에서 엄숙하게 진행되는 해설과 함께 등장했다. 해설자는 최양락이었다. 그는 이 코너 로 브라운관을 포함해 대한민국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했다. ‘알까기’는 가족 레크리에이션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고, 학교 축제와 신입 오리엔테이션에 자주 등장하는 메뉴로 전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알까기’가 의미 있는 이유는 이전의 그가 제시했던 것처럼 어떤 개그의 원형 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알까기'는 ‘사소하고 하찮은 것을 엄숙하게 비평하는’ 패러디의 전형성을 재현하는 개그였다. 그는 이 코너 덕분에 바둑 TV에서 실제 바둑 대국을 해설하기도 했다. 사실 우리는 '알까기'가 가장 초보적이고 가장 유치한 놀이의 한 종류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름 붙이기 나름이겠지만, 바둑판에서 조마조마한 마음 으로 바둑알을 손가락을 튕기던 기억은 누구나 유년의 어떤 시절에 경험한 놀이였다.
이것을 보다 진지하고 엄숙하게 해설한 것이 바로 '알까기'의 성공 요인이었다. 이전에 도 그랬지만, 최양락은 이른바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개그를 가장 대중적으로 표현 하는 법을 아는 코미디언이었다. 어디에 있어도 코미디언은 코미디언
KBS '유머 1번지'를 비롯해 30년 간 코미디 프로그램만 연출해 온 연출가이자 인덕대 방송 연예과 교수인 김웅래 교수는 최양락과 전유성을 가장 아이디어가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 한다. 그의 별명이 ‘개그맨을 웃기는 개그맨’인 이유는 바로 그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쉴 새 없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변주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지금은 4년 째 MBC 라디오의 2시간짜리 프라임 타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케이블 방송에서 시사 토크쇼의 MC를 맡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다른 코미디언들이 시사 프로그램의 MC나 공연 기획자로 활동을 넓혀가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일례로 그가 토크쇼를 진행하는 것과 김미화가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김미화의 경우 코미디언에서 전통적인 MC로 ‘변 신’한 것에 가깝다면, 최양락은 시사 프로그램이나 라디오 진행자라는 자리에 코미디언으로 서의 자기 이미지를 그대로 옮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를 여전히 현재 진행 형의 코미디언으로 기억해야할 이유다. 시대가 바뀌고 웃음의 코드가 달라져도 그는 여전히 어딘가에서 사람들을 웃기는 존재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 차우진 lazicat@cine21.com |
[i진선 한 마디]
개그맨 최양락씨는 인정많고 인사 잘 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죠.
알까기가 무슨 바둑이냐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최양락씨의 알까기 개그는
바둑이 일반인들에게 쉽게 다가가는데 큰 도움을 준 것은 사실입니다.
알까기 개그로 시중에 바둑판이 품귀현상을 불러일으켰을 정도입니다.
최양락씨가 바둑Tv에 처음 나올 때 바둑Tv에 무슨 개그맨이냐 하면서 부정적으로
보신 분들도 없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바둑이 언제까지나 신선노름으로 일반인과
유리된 상태에서만 남아있을 수는 없지요. 개그맨들도 가수들도 영화배우들도
바둑Tv에서든 뭐에서든간에 바둑붐을 위해서 앞장을 서야지요.
앞으로 다시 한 번 바둑 관련 개그를 개발해서, 일반인들께 바둑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대담하는 것을 보니, 최양락씨가 "안 웃기는(?) 개그맨" 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을 잘 하시네요. 새로운 모습을 보아서 기쁩니다^^::
차우진 기자님께서 미리 철저히 준비를 하신 노고가 인터뷰 곳곳에서 볼 수가 있네요.
앞으로도 좋은 대담기사 부탁 드립니다^-^::
아..그런데 어느새 최양락씨가 윗글에서처럼...원로 개그맨 소리를 듣나요?...ㅜ.ㅡ::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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