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아주 재미있는 바둑 관련 글을 보게되었습니다.
어떤 분이 쓰셨는지 알 수는 없으나...아마도 무척 바둑을 아끼는 분 같습니다.
글쓴분께 좋은 글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바둑 관련 글 많이 써주싶사 부탁을 드리고
싶네요...
내가 ‘바둑’이라 불리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신비스럽고 가장 재미나는, ‘게임’이자 ‘오락’이자 ‘스포츠’이자 ‘예능’이자 ‘수련道場’인, 그 종합세트를 알게된 것은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인 것 같다. 동네가게 앞 평상에 아저씨 두 분이 마주 앉아, 네모넓적한 판대기 위에다 조그맣고 동그란 돌멩이를 번갈아 올려놓고 있었다. 한참을 자기 돌 하나씩 만을 바둑판에 올려놓다가, 갑자기 한 아저씨가 만면에 웃음을 띄며 바둑판에 있는 상대방 돌멩이를 왕창 끄집어내었다. 이상하다. 저건 반칙 아닌가? 왜 남의 돌을 상대방 허락도 없이 따내고 좋아하는가? 분위기가 너무 심각했다. 두 아저씨의 이마는 서로 닿을 듯 했고, 피고 있는 담배는 꽁초가 되어 손가락을 태울듯 했다. 신기했다. 세상에 저것이 뭐길래, 사람 애간장을 저리 태우나..., 저 놀이가 뭐길래, 사람들이 저렇듯 몰두할 수 있을까? ‘신선놀음에 도끼 썩는 줄 모른다’ ‘바둑은 인생의 축소판이다’ ...이런 바둑에 관한 찬사와 미사여구들이, 바둑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지적호기심 왕성한 꼬마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나의 바둑을 향한 종교와도 같은 경외감이, 어렴풋이 이 때부터 생겼는지도 모른다. 당시 우리 집에는 바둑두는 사람이 없었고, 바둑판도 없었다. 용돈을 모아 문방구에서 싸구려 바둑판과 바둑알을 샀다. 다리가 없이 가운데를 접을 수 있는 싸구려 바둑판이었고, 잘 깨지는 바둑알이었다. 주위에 바둑두는 친구가 없어서, 처음에는 그 바둑판으로 친구들과 오목 만을 두었다. 조치훈이 일본에서 성공한 후 우리나라에 바둑붐이 크게 일어서 어린이 바둑교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나 그것은 먼 훗날 이야기이고, 당시에는 어린이가 바둑을 둘 수 있는 기회가 원천봉쇄된 상태였다. 옆집에 영관이라는 아이가 새로 이사왔다. 신기하게도 영관이는 바둑을 둘 줄 알았다. 영관이 아버님에게서 배운 것이란다. 영관이는 이사온 지 얼마되지 않아 다른 친구가 없었으므로, 나를 매일 자기집으로 초대했다. 나는 그의 바둑제자가 되었고, 따라서 영관이집은 내가 찾은 첫 기원이 되었다. 내 인생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는 내 기원편력의 첫 걸음이었다.
영관이네 바둑판은 삐까번쩍한 오동나무 재질로, 겉보기에도 품격있는 바둑판이었다. 영관이가 바둑을 조금 둔다 했으나 그 수준은 거의 초보였다. 하지만, 잘났건 못났건 그는 내 바둑 스승이었다. 그 녀석에게서 아다리, 축, 장문...이런 기본적인 바둑용어와 개념을 배웠다. 사실 우리는 집 짓는 것 보다는 아다리(단수)치고 상대방 돌 따먹는 재미로 바둑을 두었다. 내가 바둑에 소질이 있었는지 몇 달 만에 영관이 실력을 추월하게 되었다. 처음에 배울 때 9점 이상 깔고 두던 내가 얼마 안 되어서 그의 맞수가 되었다. 도리어 그가 깔고 두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들 바둑시합은 시들해지고 급기야는 중단되었다. 그 이후 학창시절은 내 인생에 있어 유일한 '바둑 암흑기'였다. 두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다. 바둑을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대입 재수생 시절이다. 왕십리 네거리 근처에 있던 광심다방은 놈팽이 우리들의 아지트였다. 음악다방이었던 그 다방에 DJ로 내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다방에서 그의 조수로도 일했다. 명색이 재수생이라 공부도 해야 했으므로 나는 학원 종합반 외에도, 광심다방 근처에 있는 독서실에 다니기로 하였다.
그 독서실이 있는 건물에 기원이 있었다. 엘레베이트가 없는 그 건물 5층 독서실까지 오르려면, 당연히 3층에 있는 기원 옆 계단을 지나야했다. 지나갈 때 마다 바둑알 부딪치는 소리, 시끌시끌한 말소리로 하여 그 기원은 항상 떠들썩하였다. 그 소리를 들으니 어린시절 한 때 몰두하던 바둑에 대한 향수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거절할 수 없는 강한 유혹이었다. 의지 박약한 나는 어쩔수 없이, 그 깊고도 깊은 바둑의 세계로 운명처럼 들어설 수 밖에 없었다. 성동기원, 그 곳은 항상 만원이었다. 한 삼십평이나 될까, 실내는 자욱한 담배연기가 마치 안개와도 같았고, 떠들썩한 분위기는 시골 장터같은 생동감이 있었다. 원장아저씨가 내게 몇급이냐고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한 10급쯤 될 것이라 말했고, 아저씨는 당장 파트너를 구해 주었다. 그 날 이후, 내 청춘은 그 기원에 담보 잡혔다. 매일 개근하는 내 실력은 욱일승천 하였다.
수많은 실전과 함께, 나는 불타는 향학열로 바둑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우리 바둑계의 대부, 조남철선생님은 내 훌륭한 스승님이기도 했다. 선생님이 펴낸 책으로 바둑공부 많이 했으니까,
드디어 바둑 입문 수개월만에,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기원바둑 3급이 되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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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두는 곳 기원은, 각 기원마다 독특한 분위기가 있다. 이를 무식한 이분법으로 대별해보면, 먼저 사랑방같이 건전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기원이 있다. 바둑을 건전한 취미로 여기는 사람들끼리의 동호회장소 같은, 보다 아늑하고 아마츄어틱한 분위기이다.
사실 그런 분위기의 기원은 드물고, 대개의 경우 기원은 조금은 불량한 장소로 인식된다. 백수나 자영인같이 시간이 무진장 남아도는 사람들이 바둑을 기화로 하루 종일 죽치는 곳, 내기바둑이 성행하는 곳, 한 걸음 나아가 화투나 카드 도박까지 가능한 곳, 그래서 보다 음침하고 프로패셔널한 곳, 내 첫 기원인 성동기원은 후자 쪽에 가까웠다. 성동기원은 분위기가 살벌할 정도는 아니나, 그리 유쾌하지도 않았다. 바둑두다 다툼도 자주 있었고 가끔은 진짜 싸움도 일어났다. 거의 매일 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루 종일 기원에서 지내는 죽돌이 중에 한심하게도 20,30대의 젊은이들도 꽤 있었는데, 학생도 있었지만 거의 실업자인 것 같았다. 노인들도 꽤 많았다. 바둑이라는 훌륭한 취미를 가졌기에, 그 노인들은 공원이나 노인정 가는 것 보다 훨씬 보람있게 노후를 즐겼다고도 생각된다. 성동기원 사람들은 대부분 내기바둑을 두었다. 대부분 판은 그렇게 크지 않았던 것 같다. 무시무시한 진짜 꾼들은 보지 못했다. 6-7명의 젊은 백수들이 하루 종일 자기들끼리 토너멘트로 내기를 두었는데, 그들 모두 대단한 고수였다. 바둑의 수준차로 인해 나는 언강생심 그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청년파, 노인파 등 기원 내 주류(主流) 들과 소원했던 나는, 뜨내기 손님들과 바둑을 많이 두었다. 원장님은 나를 사랑하였다. 항상 대기하고 있다가 손님이 오면 실력불문하고 상대하여 주었으니까, 창가 한쪽 구석 똑같은 자리에서 노인 둘이 매일 바둑을 두었다. 환갑을 훌쩍 넘긴 것 같은 비슷한 연배의 두 노인은, 기원 개장 시간부터 파하는 시간까지 하루 종일 담배내기 바둑을 두었다. 둘이 7,8급 정도로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한 판의 바둑을 두는데 보통 5분이 안걸리는 속기였다. 대충 계산해보아도 하루에 백판은 넘게 둘 것 같았다. 영감님들 체력도 좋지! 바둑을 두면서 그들이 짓는 표정은 엄숙함 그 자체 였다. 마치 일생일대의 승부를 앞둔 ‘OK목장의 결투’처럼..., 비장했다. 그들은 또 바둑으로만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도 매일 싸웠는데, 주로 “물려 달라” “못 물려 준다”의 실랑이였다. “ 일수불퇴다” “ 아직 손이 안 떨어졌으니 착수가 아니다. 물리는 것이 아니다” “ 무슨 소리냐 , 바둑판에 손 떨어진지 얼마나 지났는데 오리발이냐” “조금 전에 너도 물렸으니 한번만 물려줘라.“ 뭐 이렇게 티격태격하다가, 급기야는 “ 이씨왕조를 욕되게 하지 마라. 네가 그러고도 전주이씨냐. ” 라는, 상대방 집안까지 들먹이는 극언이 오고 간 후에, 그들은 서로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나는 원장님께 물었다. “저 영감님들은 왜 매일 싸우면서도 왜 매일 같이 두나요?” 원장님 왈 “어디 매일 뿐이더냐.. 저 양반들, 1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창가 저 자리에서 싸우고 있다. 천적이야, 천적... 전생에 웬수였을거야...” 어언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골초에다가 다혈질이었던 두 영감님이 아직도 살아 계실 리 없고..., 두 양반, 저승에서도 내기바둑 두면서 아직도 싸우고 계실까?
k대 신교수는, 바둑은 그리 강하지 않았으나 구찌펀치(입심)가 강했다. 바둑을 두면서 쉴 틈 없이 떠들어서 상대방 기를 꺾었다. 심리전의 대가였다. 대마라도 하나 잡으면 “세상에서 제일 큰 대마를 잡았다”고, 기원 내 모든 사람들에게 구경 좀 하라고, 자랑하고 다닌다. 그 교수님과 바둑 둘 때에는 귀마개가 필수였다. 개그맨 엄용수도 그 기원의 터줏대감이었다. 개그맨으로 등장하기 전이었다. 막강한 입심 못지않게 바둑 실력도 고수였다. 엄용수는 자기 바둑을 두는 것 보다 돌아다니며 남의 바둑 훈수하는 것을 즐겼고, 항상 현란한 애드립과 위트로, 기원분위기를 고양시켰다. 나도 급상승하는 실력에 맞추어 내기바둑을 두기 시작하였다. 뿌연 담배연기 속에 하루하루 한판 승부의 긴장감과 짜릿함에 중독이 되어갔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사람은 승부가 걸린 게임을 할 경우 무엇인가를 걸고 싶은 것이 본능이다. 물리적인 것을 걸지 않는다면 자기 위신이나 자존심을 걸어야 할 것인데, 하찮은 바둑때문에 그 거창한 것을 걸수는 없으니, 내기를 두어야 한다"는 지론이었다. 궤변이지만, 이 이야기도 약간은 일리가 있어 보였다. 아무튼, 나도 기원 내에서 기우도 생기고, 바둑꾼으로서 나름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하루 종일 바둑을 두고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올 때, 왠지 알지 못할 서글픔이 몰려오곤 했다. 젊디 젊은 내가 이렇게 청춘을 허비해도 되는 것인지...
내 청춘은 방황의 연속이었다. 세상 모든 가치들에 대해 회의하던 나는, 자칭 니힐리스트였다. 바둑만이, 스포츠만이 의심할 수 없는 내 삶의 역동성이었다. 기원에서 나는 행복했고, 내 존재가치를 느꼈다. 모든 지식, 모든 사상, 모든 예술보다 바둑은 가장 확실하게 내가 우러러볼 대상이었으며, 천착해도 천착해도 파내지 못할, 깊고 깊은 진리의 샘이었다.
밝은 태양이 무서웠다. 응달진 골방같은 기원에서 내 청춘은 시들어갔지만, 어쩌면 내 영혼은 그 곳에서 구원받았다. 내 청년시절의 지독한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도록, 진정한 쉼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으니까..., 내 마음의 고향같은 그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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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기원은 내 바둑인생에 있어 첫 보금자리요 아지트였다. 성동기원은 당시 내 바둑의 모든 것이었지만, 시끄럽고 혼탁한 분위기에 점차 싫증이 나기 시작하면서 슬슬 다른 기원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조강지처인 성동기원 눈치를 보며 슬슬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내에 약속이 있거나 영화구경을 갔는데 시간 여유가 좀 있으면 다른 기원을 찾았다. 지금은 자투리시간이 있을 경우 무조건 사우나나 찜질방에 직행하지만, ‘조강지처’인 성동기원을 배신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으니, 그것은 인근에 ‘한양기원’이라는 새로운 기원의 등장이다. 신장개업한 그 기원은 ‘처녀’인데다가 ‘미인’이었다. 한양기원은 조그만 사랑방같이 포근한 분위기였다 신장개업하였으니 모든 것이 새로왔다. 실내도 깨끗했고 탁자, 바둑판, 바둑알도 기름이 잘잘 흐르는 새삥이었다. 그것들을 보자마자 바둑을 두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대머리 원장아저씨는 너무도 인자하고 편안하게 생기셨고, 서가에 바둑서적도 많이 있어서 어찌 보면 도서관 분위기까지 났다. 게다가 커피도 무상으로 제공하면서도 기료는 성동기원과 같았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의리를 모토로 하는 나지만 마음이 많이 흔들렸고, 결국은 첫사랑 성동기원을 배신하고 딴 살림을 차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양기원의 단점이라면, 개업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바둑상대가 없을 때도 있다는 거였는데, 그럴 때면 나는 그 기원에 널린 바둑책으로 바둑이론을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이론과 실기를 겸비한 막강한 실력자가 되어 갔다. 드디어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기원1급이 되었다. 1급이라 하지만 아마3단이 될까 말까한 약1급이었다. 보통 기원에서 1급인 경우 기료를 받지 않는다. 강자들이 많아야 손님이 몰리고 기원이 번창하기 때문이다. 보통 1급에게는 사범이라는 호칭을 써주는데 내게 아무도 성사범이라 부르지 않은 것으로 봐서, 또 원장님이 내 기료를 한번도 면제해 준 일이 없다는 것을 봐서, 나는 아무래도 물1급이었던 것 같다. 한양기원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차차 단골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나도 한양기원의 핵심멤버가 되어갔다. 원장님이 혹시 출타할 일이라도 생기면 나에게 기원을 맡기고 가셨다. 나는 월급없이 근무하는 부원장이었다. 한양기원의 특징이라면 매너가 좋은 신사들 만이 모였다는 것이다. 기원 건너편에 있는 약국 사장님은 바쁜 일과에도 매일 와서 하루에 딱 한 판만 두거나 구경만 하고 가는데도, 기료를 꼬박꼬박 내는 신사 중의 신사였다. 거기서 내 첫 바둑맛수라 할 성주를 만났다. 나보다 4살 어린 성주는 그 후 오랫동안 내 필생의 바둑 라이벌이 되었다. 나를 친형처럼 따랐던 성주는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집에 무단으로 쳐들어와서 바둑을 두곤 하였다. 그는 바둑 두면서 생각을 많이 하는 장고파였다. 그래서 그의 별명은 영화제목처럼 ‘비바 장고’였다. 나는 거의 속기파였는데 간혹, 어린 나이에 최선의 바둑수를 위해 골몰하고 고뇌하는, 성주의 바둑에 대한 열정에 경외감이 들기도 했다. 매일 내기바둑을 두는 고수 중에 30대 초반 정도의 미남형 아저씨가 있었다. 소매가 헤진 철지난 양복 단 한 벌로 연명하는 그는 항상 초췌하고 창백했다. 바둑실력은 강1급으로 상당히 고수였지만 말이 별로 없는 그가 가끔 내뱉는 말은 항상 냉소적이고 시니컬했다. 그의 사상은 반정부적, 반사회적, 어찌보면 무정부적이기도 했다. 그의 정체가 의심스러웠다. 혹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도피생활을 하는 재야인사?.....아니면, 낮에는 기원에서 은인자중하다가 밤중에 암약하는 간첩? 오지랖 넓은 성주가 그의 정체를 반쯤 알아냈다. 그는 부산에서 상경한 백수이며, 지금 그가 거주하는 곳은 기원 옆 전풍호텔인데 무일푼인 그가 호텔에서 기거하는 이유는 호텔 지배인이 고향친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호텔 빈방을 놀리느니 친구를 재워준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숙소는 해결되었지만 끼니는 어떻게 해결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낮시간에는 기원에서 짜장면이라도 시켜 먹지만, 아침과 저녁은 그의 창백한 몰골로 보아서 거의 굶는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서울에 온 목적은 모르겠지만, 사상범의 도피행각은 아닌 것 같고 현재로 봐서는 그의 직업을 내기바둑꾼으로 봐야 하는데 내기가 밤을 새우는 지구전이 되었을 때 그가 자꾸 돈을 잃는 이유는, 장기간의 타향살이로 인한 영양실조로 체력이 약해서 일거라는.... 분석이었다. 그런 그가 바람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다. 여기저기에 채무를 깔아 놓은채... 나는 그에게서 창백한 인텔리의 고뇌를 보았다. 세상과 맞서지도 못하고 섞이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자신의 세계 속에 갇혀서 바둑이라는 도피처로 도망다니는... 감당할 수 없는 염세를 위악으로 맞서는.... 나는 그에게서 또 다른 나를 보았다.
부디 그가 자신의 음침한 세계를 박차고 이 따뜻한 대지로 얼른 나오기를 바란다. 세상은 바둑판보다 넓고 따뜻하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내게 빚진 돈 3,000원은 이제 갚지 않아도 좋다. 기원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다. 기원에 출입하는 사람중에 대부분은 어둡고 우울한, 내성적인 사람들이었다. 간혹 명랑하고 활달한 사람들도 있지만, 기원 사람들의 근간은 자의식이 강하고 사색적인 사람이라고 보고 싶다. 근래 들어 바둑을 스포츠로 편입한다는데 글쎄, 나는 반대이다. 바둑을 스포츠라 부르기에는 정신의 측면이 너무 아깝다. 바둑은 본래 정적인 두뇌활동이며 어떤 편집증같은 중독성이 있다. 심오한 바둑의 세계에 한번이라도 발을 딛고 허우적거려 본 사람이라면 안다. 바둑이 철학이고 道이며 ...아니, 표현하기 어려운 궁극의 그 무엇이라는 것을... 어떤 엄청난 본질이라는 것을...
나는 그 기원에서 ‘알까기’를 배웠다. 바둑을 두다 지겨워지면 오목을 두었고 신종게임 알까기를 하였다. 간혹 알까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는데, 바둑으로 심각했던 사람들이 떠들썩한 웃음과 미소로 휴식하는 시간이었다. 2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간혹 지나가다가 왕십리 전풍호텔 옆, 지금은 다른 용도로 쓰이는 한양기원 건물을 바라본다. 아련한 향수와 애뜻함이 찾아온다.
그 때 그 사람들은 다 어디에 갔을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 사람들 아직도 바둑은 두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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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진선 한 마디]
오...마지막 부분이 계절에 맞게 여운을 주네요. 기원에 다녔던 분이라면 경험할 수도 있는 아주 친근하고도 따뜻한 글 입니다. 타이젬 문단에서 "나의 기원 편력기" 라는 주제로 글쓰기 대회라도 한 번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의 추억으로만 잊혀지기 아쉬운 기원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옮기니 재미도 있고 기원의 추억에 잠기게 하네요. 저는 이 글을 http://blog.naver.com/heongks/50020112904 퍼왔는데, 원문은 어디서 나온 글인지를 모르겠네요....ㅜ.ㅡ:: 아시는 분은 덧글 부탁드립니다.
2부의 맨 마지막 부분과 3부의 맨 마지막 부분을 연결하니 한 편의 시 같습니다.
아...좋네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민경아^^:: 힘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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