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에서 무슨 일이?

1.거제로 가제.
난 거제를 잘 모른다. 20여년 전에 삼성중공업에 일이 있어서 들렸을 때, 고현이라는 곳이 초라하고 한가로운 어촌이었다 밖에는 모른다. 한국 연안에서 제일 큰 섬이며, 오만가지 물상에 금강산을 뚝 떼어 놓은 절경이 있더라..밖에는 모른다. 거제대교가 놓아진 후로는 섬 아닌 섬이요, 조선경기 호황을 타고 주민평균소득이 울산을 넘어섰다는 그 호황의 섬. 그 정도밖에는 모른다. 그런데 어떤 타이젬 회원이 한 달전에 거제에서 무슨 일이 있다는 제보를 해왔다. "이유는 묻지말고, 무조건 거제로 가제."

그 후 한달이 지났다. 나는 대구에서 KTX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도대체 거제에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초중고의 방학 시작과 더불어 펼쳐지는 여름의 향연을 기대하는 바캉스족들의 뜨거운 열기 틈에 껴서 부산역에서 간신히 빠져나와, 연안부두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엎어지면 코 닿을만한 거리라더니, 날도 더운데 거기까지 가는데, 억수로 땀범벅. 연안부두에서 표를 사고 점심을 먹었다. 나로서는 처음 먹어보는 국, 산초(?) 냄새 진동, 이상했다. 배 탈때는 편한 음식을 먹어야하는데..실수. 배멀미..위험.

골드코스트 라는 페리호. 바다를 달리는 바둑판이다. 바둑판처럼 편평한 배라서. 실내 좌석들도 나란히 종횡으로 놓여져 있었다. 사람들 머리는 바둑돌. 타고보니 배도 참 오래간만에 탄다. 20년? 요즘에는 툭하면 10년전 20년전 거슬러올라가면서 돌이켜 보게되니, 세월 참 빠르다. 세상의 뭇 인간들, 점차 장수중. 지금 세대가 생명공학의 그 첫번째 혜택받는 장수세대가 될지도 모른다던가. "어, 100년전에 말이지, 여기서 페리호 타고 거제도 건넜었는데~~" 라고 추억하는 일이 올지도 모르겠지.

부산에서 거제도 고현까지 해양 직선거리로는 42킬로, 육지로 돌아가면, 직선거리만도 112킬로, 길 굴곡을 대략 따져보니 200킬로 정도가 된다. 차로 세시간. 배로가니 불과 1시간 10분 . 육지는 곡선이지만, 바다는 직선이다. 위도와 경도는 바둑판의 줄이다. 바닷물은 짙은 먹색이다. 바다를 파랗다고 느낌은 하늘빛을 반사광을 봄에 불과하니, 바다의 진짜 색깔은 먹색. 그것도 녹음깃든 검나무에 가까운 먹색. 색깔 짙은 바둑판이겠다. 바다의 수 많은 섬들은 흑돌. 수 많은 배들은 흑돌 사이를 왕래하는 백돌. 이러하여 바닷가 바둑이 더 쎈가. 인천바둑, 목포바둑, 부산바둑, 그리고 거제바둑...

그 중 거제는 한국 연안에서 가장 큰 섬이렸다. 한국에서 가장 큰 흑돌이요, 세계최대의 백돌이라는 백돌은 모두 여기서 만드는 모냥이니, 백돌중에 백돌을 만들어내는 흑돌중에서도 왕흑돌이렸다.
2.팔도에서 거제로 모인 이유
이런 저런 생각하다가 깜박 잠. 배가 덜컹 거리길래 눈 떠보았더니, 거제 도착. 미리 알아둔 전화로 걸었다. 고현시외버스 터미널에서 가까운 거리란다. 회원프라자.

와보니 건물을 올려보는 방향으로 커다란 플랫카드가 걸려있었다. 세계아마선수권대회우승자 하성봉...이렇게 크게. 그 위에 거제기원. 거기가 목적지인데.

빈손으로 들어가기는 섭해서, 인스턴트 커피 한 박스를 들었다. 들어가보니 자동커피 자판기가 있어서 대략 민망. 이미 여러 사람들이 기원에 자리잡고 앉아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약 20개의 바둑판. 아래 왼쪽 사진속의 사게불이. 오늘 나를 여기 오게한 주인공.


윗 우측 사진속의 우측이 거제기원 원장인 프로슈머. 그리고 왼쪽은 타이젬 음방장으로 오랜 활약을 한 은비령, 잘 생긴 두 아들과 동행했다. 4시가 되어서, 서울에서 일행이 왔다. 서울 부산 목포 임실 전주 등등 전국 팔도에서 모이고 보니 그럭저럭 30명. 서울에서 온 일행중에는 플랫카드에도 나와있는 하성봉8단과 바둑TV에서 보조해설자로 활약하는 이승현, 그리고 하늘바둑사랑이라는 바둑교실을 운영하는 사범 김경래도 포함. 아래 사진에 하성봉을 중심으로 좌우에 있다.

마침 오늘 행사에 참석한 이들은 모두 타이젬 회원들, 아이디를 나열해보니.청강만리,청아현,무영랑, 아침엔이슬,놀부9단,술취한땡삐,gm5544,딩이,특공701,광염소나타,바람의박乭,사게불이,rimugin,늘사랑,핵산,루카치,싸이버캅스,은비령,프로슈머 등등. 이렇게 부산에서 온 흑돌, 서울에서 온 백돌 전국 각지에서 모인 타이젬 흑돌 백돌들이 거제에 모였다.거제기원은 4월중순경에 개원. 그동안 지역사회에 홍보를 위한 행사로 차피일 준비하다가 오늘에서야 한다. 이재웅으로 알려진 '감각적인'을 오래전에 섭외중에, 대회가 촉박하여, 다시 하성봉 8단을 섭외 초대했다. 하성봉 8단은 바둑팬이라면 다 아는 아마 최고수. 얼마전 일본에서 개최된 아마세계바둑선수권대회 우승자. 작년 같으면 프로로 직행했으련만. 한국기원 규정이 바뀌어져서 입단전에 8강 시드를 받음만으로 만족. 게다가 삼성화재배 아마 최강전 8강시드도 받았다. 여기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삼성화재배 본선에도 진출할 수가 있으려니. 이승현은 바둑교실에서 바둑을 배우면서 프로기사의 꿈을 펼쳤으나 입단하지 못하고, 바둑학과를 졸업한 후에 바둑TV에서 활약한다. 사진속의 그녀를 카메라가 시기하는지 미모를 잘 보여주지를 못한 듯.

서로 통인사를 한 후에 다면기. 여러 기우들은 접하기 힘든 행사에 기쁨을 갖고 참여, 모처럼 고수와의 바둑에 분위기가 뜨겁다.

다양한 수담을 마친 후에 저녁식사를 갔다. 근처 시장의 횟집. 거기에서 다시 얼굴익히며 회로 수담을 나누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 요즘 살아가는 이야기. 바둑이야기. 바둑판 이야기 등.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장소를 옮겼다. 여울펜션. 여기 위치가 어디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다음날에 차를 타고 나올 때 눈짐작으로는 대략 남쪽 해안가 근처.

3.無言 無答 無心.
이야기를 듣다보니 거제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깊은 곳이 많다. 가배량성, 옥녀봉 봉수대,가라산봉수대 아주동 고분, 고분현치소지, 청동기시대 유물인 지세포리의 지석묘까지 있다니, 거제는 유구한 역사의 보고다. 이 세상을 구하는 인물이 나온다는 그 유명한 계룡산이 거제에도 있단다.

그 뿐 아니다.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바둑암이 곳곳에 있어, 과거 바둑을 둔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단다. 거제를 떠올린다면, 아무래도 해금강이 가장 유명한데, 가는 도중에 신선대가 있단다. 편평하게 바둑판처럼 있는 바위 양쪽으로 우뚝 솟아오른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는 멀리서 보면 바둑두는 신선처럼 보인다던가. 더 큰 놀라움은 바둑돌부전이라는 신기한 나비였다. 바둑무늬가 선명하니, 그 자태가 매우 곱다.

살다가 화초에 관심이 가고 작은 동물에 관심이 가고, 이름모를 기암괴석이 아름다와 보이면 나이가 들었음이요, 이를 ‘응-마-색-난-석(鷹-馬-色-蘭-石)’이라고 하던가. 말 그대로 20대(鷹) 30대(馬) 40대(色) 50대(蘭) 60대(石)이란 말이다. 鷹은 매사냥을 뜻하는데, 게임이나 놀이 등으로 변환할 수 있겠다. 馬는 타고 다니는 동물이므로, 세상을 돌아다니는 수단이어서, 세상 벼슬이니 제물이고로. 色은 性이다. 蘭은 화초로 관심이 가는 마음을 의미하며, 石은 수석이니 무생물에게 관심 가짐을 뜻한다.

곰곰이 따져보면 신체활동이 왕성한 20대에 性에 몰두성 싶지만, 이때는 주로 교우관계를 더 중시한다. 맘에 맞는 친구와 있으면, 어떤 놀이든 좋다. 그들에게는 性도 놀이의 일종이며, 무얼 하든지 같이 즐거우면 한다. 그러나 그 놀이가 삶 자체는 아니다. 그러다가 30대가 되면 경제적 자립에 몰두한다. 가정을 지키기 바쁘고, 2세를 키우기 바쁘다. 주위를 돌아볼 틈이 없다. 좋든 싫든 해야한다. 그들에게는 놀이도 性도 부차적인 것일 뿐 탐닉의 대상은 아니다. 오히려 性에 탐닉함은 주로 40대인데, 신체적 활동이 20대처럼 왕성하지 못해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잠시잠깐이라도 10대 20대처럼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한다. 초등 동창을 찾고 중고등 동창을 찾아서 옛날 짓꺼리 대화를 하며, 과거로 돌아가본다. 때론 불 처럼 뜨거운 사랑도 하고판다. 마치 꺼지기 전의 불꽃이 더욱 화려하려니! 그렇게 50대를 넘기고 나면 중후반에 들어선 그네는 서서히 시끄러운 인간에 싫증을 낸다. 싫증 낼수록 조용한 화초가 너무 맘에든다. 조용히 살아있는 생명들이 신비스럽고 아름답게만 보인다. 조용이 좋으니 독서도 좋고, 조용한 여행도 좋다. 그후엔 60대가 훌쩍 넘게되면 이제 아예 살아있는 생물과 대화하는 자체가 힘들어지면서, 무생물인 수석이나 기암괴석과 무언의 대화를 한다.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과 유사하니, 無言 無答 無心이라.

4.개미지옥에 빠지다.

하성봉은 순수 아마기사는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프로기사를 목표로 연마해온 예비프로기사다. 중학교를 마친 후에는 바둑에만 전념했다. 입단의 문턱에서 여러번 무릅을 꿇었고, 어느새 28살의 청년이되었지만, 아직도 꿈에 부풀어 있다. 아마로서 세계아마선수권 우승은 최고의 성취, 허나 이는 과정일 뿐, 그의 목표는 변함이 없다. 지금도 바둑교실에서 보급기사 활동을 하며 미래를 준비한다. 그에게 아마 바둑 발전을 위한 몇 마디를 청했더니, 과거 아마 기사로서 훌륭한 성적을 냈던, 김철중 3단의 예를 든다. 그는 결국 프로로 입단을 했지만, 부산에서 바둑교실을 열고 보급기사로 훌륭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프로기사 인원수 규제에만 전전 한다면, 한국 바둑 발전에 좋지않다고 지적한다. 세계아마선수권대회 우승 후에 귀국해서 한국기원에서 격려금이라도 받았느냐고 물었다."아~~~~뇨"

진행자로 활동을 하는 이승현은 곧 결혼 예정, 방송활동 초기에는 잘못한다는 질책을 받고 얼마동안 쉬었다. 이제는 나름 경험을 쌓고, 익숙해졌다고. 해설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언젠가 본 바둑TV 시청자 덧글이 생각이 났다. 그 중 떠오르는 몇 가지를 소개하니 모두 박장대소.

바둑을 業으로 삼고 밥 먹는 이들이 프로기사들만은 아니다. 흔히 프로는 아니지만, 프로나 다름없이 사는 기사를 세미프로기사라 칭한다. 많다. 입단 인원 제한으로 입단적령기를 놓치고, 연구생 출신이라는 과거를 달고, 평생을 살아간다.대다수는 바둑교실을 운영하면서, 생활하는 경우도 있으나, 전국 아마기전을 유랑하는 이들도 있다. 요즘 인터넷바둑이 활발해지면서, 국내에서 개최되는 인터넷기전과 랭킹전을 모두 독식한다면, 2억까지도 벌 수가 있다지만, 힘든 일이다. 아마로서 최고의 자리까지 오른 하성봉이 동양생명배에 여러번 참여를 했으나, 불과 32강 16강 문턱에서 돌을 놔야했다. 인터넷 기전은 사실상 쟁쟁한 프로들의 텃밭이라는 말이 실감된다. 세미프로들은 점점 늘어간다. 바둑계를 떠나지도 못하고, 머물지도 못하는 이들이 늘고있다.
이들 뿐이겠는가, 바둑에 빠진 사람들이. 깊은 심야에 타이젬만도 수천명이 접속을 하고 있으니, 모든 바둑 사이트를 합한다면, 수만명이 넘겠다. 비록 이들은 프로도,아마도 아니지만, 진정 바둑광. 한 번 빠지면 못나온다는 개미지옥. 바둑이 꼭 그러하다. 모를 때에는 그냥 지나가는 함정, 알게되면 알고서도 빠지는 함정. 여기에 빠진 개미들이 모인거다. 세계최고 아마 왕개미 하성봉에서, 18급 초보 아기개미까지.섬 같지않은 섬 속의 깊은 산중에 자리잡은 개미지옥은 이들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함정. 밤 깊어간다. 친선대국, 지도대국, 페어대국. 하성봉 바둑 강의, 바둑이야기등...남해 바닷바람 받고 큰, 거제의 짙은 녹음은, 이들을 더욱 검초록 개미지옥으로 빠뜨리는구나.

[Tygem i진선]
[i진선 한 마디]
다음날 7월13일 일요일에 삶의 터로 각각 흩어졌습니다.

서울로 부산으로 목포로 광주로 대전으로....언젠가는 다시 모일 수도 있다는 기약없는 약속을 뒤로하고.

거제 원근에 사시는 타이젬 기우님들은 한 번 방문해보시죠. 원장님이 반겨주실 겁니다. 이번 행사를 초대해주신 기우님들께서 왕복 KTX, 페리호표를 부담해주셨습니다. 지면을 통해서 더욱 감사드립니다.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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