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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 현대 바둑 略史

中國, 현대 바둑 略史

i진선2011-03-22 23:5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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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중화인민공화국, 현대 바둑 약사

1950년대 중반기부터 한중 현대 바둑이 시작된다. 한국과 중국의 교류를 중심으로 중국의 현대 바둑사 궤적을 짚어보자. 

 

기록으로 명확히 남아있는 한국과 중공의 첫 접촉은 1980년 8월 14일 유럽의 유고에서 열린 제24회 유럽바둑선수권대회중에 열린 시범대회였다. 이 대회는 유럽의 아마추어 대회이며 한국과 일본 중공의 프로기사들이 업서버로 초청되었다. 한국에서는 윤기현8단, 정창현7단과 아마 이성범 6단이, 일본에서는 코지마 5단등 2명이, 중공에서는 당시 중국의 최상위 기사였던 왕여남(王汝男) 나건문(羅建文)등의 3명이 왔다. 이날 유럽바둑대회에 추전한 선수들의 성화(?) 덕분에 예정에 없던 한중 시범 대국을 진행하였는데, 정7단이 백을 잡고 제한시간 각각1시간에 다섯집 공제에서 덤 한 집으로 승리를 했다.

 

현대 바둑사에서 한중 첫 대결에서 한국이 이겼다. 정7단도 한국에서 매우 뛰어난 기사였지만 80년은 조훈현9단이 압도하는 형세라서 한국을 대표하는 최강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7단의 상대인 왕여남은 섭위평 다음가는 중국의 2인자에 속해있던 최강자였다. 당연히 중국측의 표정이 굳어질 수 밖에. 당사자 왕여남은 얼굴이 하얗게 창백. 불과 시범대국에서 한 번 패배에 왜 그렇게 중국측이 싸늘했느냐. 당시 세계 바둑판도를 살펴보면 짐작할 수가 있다. 세계 바둑 운영에 한국을 빼고 중국과 일본 자기네들끼리 생각한 세계 최강 12인은 아래 사진과 같았다. 자기네들 눈에는 한국은 안중에도 없었다. 바둑의 원조는 중국이고 현대 바둑은 일본이다.  한국 바둑은 그저 꼽싸리 낀 것 뿐이다.(이하 단위생략)

 

일본 바둑계를 주름잡고 있는 조치훈이 자리잡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바둑은 한국 바둑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어쨋든 숨은 세계 최강자 조훈현을 뺀 자기네들끼리 인정하는 세계 최강들은 훗날 그에게 연이어 묵사발난 것을 보면 후련. 여하튼 정창현과 왕여남의 대국은 시범대국은 시범대국이고 한중간의 공식대국은 좀 지나서 있다. 1985년 4월경. 중국 최강 섭위평이 나선다. 한국에서는  한국 최강 김인과 조훈현.

 

조훈현은 중국의 섭위평과 1대1, 김인은 섭위평에게 불계승을 거두어 한국 바둑의 매운 맛을 보여준다. 한중바둑교류의 시작이 좋아서인지 그 후에도 한국 바둑은 계속 중국 바둑을 괴롭힌다. 중국 바둑 괴롭히기 전통은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에 이어 이창호까지 이르는데, 중국 바둑을 한 없이 짓밟던 이창호을 周鶴洋이 1997년 4월에 후지스배에서 우승하자 중국 바둑계는 물론 중국 대륙은 얼마나 열광을 했었는지.

  

하여튼 중국 현대 바둑은 여러번의 곡절을 겪었다. 1957년 중화인민공화국 부총리겸 외교부장인 진의(陳毅)가 중화인민공화국 체육총회 산하에  기예원(棋藝院)을 조직함으로 해서 중국 현대 바둑이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중국 현대 바둑의 뿌리는 훨씬 그 밑으로 내려간다. 청 말기부터 일본의 중국 대륙 통치하에서 중국 각 지역의 바둑은 매우 발전해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 활약하던 바둑인 상당수가 대만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중국 바둑계는 이들을 정통으로 보지않아서 공식적인 중국 현대 바둑史 출범 시기가 한국과 대만보다 훨씬 늦춰졌다.) 중공 부총리 진의(陳毅)는 기도진흥(棋道進興)1차 10개년 계획을 세우고 10년내 바둑인구 1000만돌파, 타도 일본을 위하여 내세운 구호 "바둑이 융성해야 나라가 산다." 였다. 그 해에 전국도시바둑대회를 거창하게 열었다. 중국 바둑은 일본과 국교수립에도 큰 기여를 했는데, 시초는 중국 부총리 진의(陳毅)와 일본 정치인 미우라의 추진으로 중일위기교류전이다. 이 시기에 활약을 했던 사람이 전국 도시 바둑대회에서 맹활약한 유체회(劉棣懷)와 과척생(過惕生) -이 있는데 남유북과(南劉北過)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대단히 인기가 많았다.

 

 ▲항주기원

동 시대의 바둑 강자는 중국식 포석을 창시한 천주더(陳祖德)를 비롯하여 황영길(黃永吉) 와생(渦生) 장복전(張福田) 진석명(陳錫明) 장주주(江鑄久) 왕루난(王汝南) 오송생(吳淞笙) 공상명(孔祥明) 등등. 중국 대륙 현대바둑의 1차 번영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국 현대 바둑의 싹이 트여지는가 싶었는데 1966년의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으로 바둑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공공장소에서 바둑 금지. 기예원 전격 폐지. 심지어 바둑 고수들은 돼지농장으로 끌려간다. 바둑 고수들이 뿔뿔히 흩어지고 만다. 그러다 문화생활을 탄압했던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사그러지자 다시 중국 현대 바둑 재건에 나선다. 1972년에 주은래(周恩來)와 등소평(鄧小平)의 지원하여 다시 중국국가위기집훈대(中國國家圍基集訓隊)를 조직한다. 단위 제도를 정비하고 승단대회도 실시한다. 중일위기교류전의 후속인 중일슈퍼대항전도도 창설한다. 이 시기에 활약한 기사가 중국 전국 개인전 6연속 우승에 신체육배 8연속 우승 등 대륙을 휩쓴 영웅이자 철의 수문장 섭위평(攝衛平)과 전국 개인전 5연패와 명인 8연패 천원 13연패의 대륙의 자존심 마효춘(馬曉春)과 유소광(劉小光) 위빈(兪斌) 조대원(曹大元) 장원둥(張文東) 창하오(常昊) 저우허양(周鶴洋) 뤄시허(羅洗河) 왕레이(王磊) 왕위후이(王煜輝) 사오웨이강(邵偉剛)등의 한국 바둑팬들에게도 익숙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중국 현대바둑 2세대라고 할 수 있는 섭위평을 중심으로한 청년기사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일본의 최고수들이 중국 기사들에게 연전연패하자 일본 문화계는 "중국발 지진"이라고 했을 정도

중국 바둑계는 정치적인 이유로 중국 바둑 1세대가 참화에 가까운 타격을 입은 기억이 남아있어서 인지, 중국 일류기사에게 공산당 당원증은 필수가 된 듯. 중국기원은 한국 일본과는 사회속의 입지가 다르다. 중국기원은 국가기관이고, 중국프로제도하의 중국기사는 공무원과 유사하다. 세계기전에 중국 선수가 누가 나오던 간에 중국 선수 전체를 상대해야 할 정도로 개인보다 팀의식이 앞서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아시안게임과 정관장배 농심배등의 연이은 단체전에서 중국의 연패는 아이러니. 아직 중국 바둑계는 땅덩어리가 워낙 넓다보니 한국이나 일본에 비하여서는 보급-운영-조직면에서 아직 전체적으로 정비되지 않은 상태임에도 최근 몇 년간 중국의 세계기전 성적은 눈부시다. 만약 중국 바둑계 체계가 한국 일본에 버금갈 정도로 완비된다면, 어느 정도에 이르게될런지 상상만해도 걱정된다. 

작년 아시안게임에서 바둑을 공식 종목으로 채택하여 세계 스포츠계에 첫걸음을 디디게한 공로는 얼마나 큰가. 더구나 중국 리그를 통해서 대륙의 오지까지 파고들어가면서 바둑을 보급하며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중국 바둑의 미래는 매우 밝다. 한국 일본이 중국 바둑을 밴치마킹해야 할 시대가 점차 다가온다. 

                                                                                                            (타이젬 i진선)

[i진선 한 마디]

월간바둑 3월호의 "기록의 발견" 코너의 저의 기고문의 중국 바둑 관련 내용중에서 요약 재편집한 글 입니다. 회원분께서 원문 개제를 요청하셔서 기사화했습니다만, 저의 글일 지라도 기고문을 허락없이 올릴 수는 없지요. (물론 편집장님께서 허락해주시겠지만 바쁘신데 연락하기도 그렇고...) 그래서 고민 끝에 한국 바둑계와 중국 바둑과 직접 연관있는 내용으로만 뚝 떼어서 요약하고 재편집하였습니다. (중국인명의 한자명과 번체와 발음등등으로 원고 손질하는데 매우 고통스럽네요..ㅡ.ㅡ::치웬주어더-천주더-陳祖德-진조덕 으으윽...) 윗 기사의 인명 표기는 혼란스러운데, 관용적으로 이해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2000년 이 후의 최근 중국 바둑 근황史를 준비중입니다. 그 기사의 예비기사인 셈이죠. 곧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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