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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통신]

살아있는 棋聖 100세 吳淸源

내달 100세 맞은 현대바둑의 창안자 오청원

김경동2014-05-13 15: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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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바둑의 창안자 '살아있는 기성' 오청원이 올해 100세를 맞았다.

1914년 음력 5월 19일 생, 양력으로는 6월12일 '살아있는 기성' 오청원(중국명 우칭위엔)이 자신의 100세 생일을 맞는다.

근래 부인이 사망하는 등 우칭위엔은 좀처럼 외출을 하지 않고 집에 머물고 있으며, 평상시 딸과 제자들 그리고 소수 도우미의 도움을 받고 있다. 그의 제자인 루이나이웨이의 소개에 의하면 다음달에 탄신 100년을 맞는 그날 소규모의 축하행사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본기원 및 우칭위엔의 전성시절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요미우리신문 등의 기관은 7월에 비교적 성대한 기념행사를 개최하려고 예정하고 있다.

우칭위엔은 푸저우의 명문가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일본에 유학을 해서 바둑을 둘 수 있었는데 이는 우칭위엔 형제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 중 우칭위엔의 천부적인 소질에 전체 집안이 베이징으로 이사를 갔는데 우칭위엔 당시 국수였던 구수이루(고수여 顧水如)의 추천으로 바둑을 아주 좋아했던 두안치루이(단기서 段祺瑞)의 후원을 받게 됐다. 당시 규모가 작은 중일바둑교류에서 우칭위엔의 천부적인 자질은 일본 명가인 세고에겐샤쿠(瀨越憲作)의 관심을 받았으며, 이후 일본기원 총재인 오쿠라기시치로(大倉喜七郎)의 후원으로 세고에 문하로 들어갔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비록 바둑의 기원은 중국이었지만 당시 중국바둑은 몇명의 국수를 배출하기는 했으나 근대에 이르러서는 전혀 발전이 없는 상황이었다. 반면 일본의 기예는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으며, 이미 중국바둑의 수준을 훨씬 뛰어넘어 차이가 벌어진 상태여서 우칭위엔은 일본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고에나 오쿠라의 지위때문에 우칭위엔은 명인 슈사이(秀渽)가 친히 기사들을 이끌고 기차역으로 가서 우칭위엔을 맞이하는 전대미문의 대접을 하게 되는데 이때 우칭위엔의 나이는 14세때였다.

일본바둑계가 현대바둑이념에 대해 많은 공헌을 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백화제방(百花齊放)이 싹 틀 무렵이었지만 바둑은 전통문화와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관리체계상의 이념은 전통과 보수적인 색채를 띄기 마련이었다. 설사 잠재력을 인정받았지만 우칭위엔도 완전히 자신의 실력으로 일본기원 내에서 한바탕 '혈전'을 경험해야 했으며, 결국 3단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기타니미노루(木谷實)와의 흉내대국과 슈사이와의 특별대국을 통해서 우칭위엔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하지만 승단에 있어서는 아주 융통성이 없었고 또 공식적인 타이틀전이나 세계대회가 없었기에 진정 우칭위엔의 위상은 높여준 것은 10번기 대결이었다.

▲ 10번기 하이라이트 대국. 후지사와 호사이-오청원.

1939년 10월, 우칭위엔은 슈사이와의 은퇴바둑에서 승리를 거둔 기타니미노루와 '가마쿠라(鎌倉: 1939년 7월 우칭위엔과 기타니미노루가 10번기를 시작한 장소)10번기'를 벌였다. 6국에 이르렀을 때 우칭위엔은 이미 5승1패로 앞서나가 기타니를 몰아붙였다. 이 정상급기사에게는 아주 굴욕적인 사건이었다. 이렇게 10번기는 1941년까지 계속해서 두어졌으며 우칭위엔은 최종 6승4패를 기록했다. 이후 그는 하나하나 10번기로 당대 일본 일류고수들을 물리쳤으며, 1939년부터 1956년까지 일명 '우칭위엔 시대'를 열었다. 당시 그는 바둑계에서 소화기성(昭和棋聖)이라고 불렸다.

우칭위엔 전성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는 마침 일본군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하여 전쟁이 고조될 때였다. 우칭위엔은 홀로 일본에서 일본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바둑전장에서 싸우는 전사였으며, 말할 수 없는 압박을 받았다는 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일본 바둑계에서는 천하무적이었던 그였지만 1950년이 되어서야 그는 일본기원으로부터 정식 9단을 인정받았다. 게다가 그의 10번기 대국은 매번 아주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그 중에 한 판을 진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고 빼앗기는 것은 의미하는 벼랑 끝 전쟁이었다.

그는 일찍이 1939년 일본국적을 취득하여 '우호방국단'에 참가하여 군대위문을 하는 등으로 인해 비난을 받았으며,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 그와 일본인 부인은 갑자기 일본국적을 박탈당했고 1979년에 되어서야 다시 일본국적으로 바꿨다. 우칭위엔은 중년에 국적과 극단적인 종교로 인해서 방황에 빠지게 됐다. 1960년 세고에겐사쿠(瀨越憲作)가 방문단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할 때 저우언라이 총리가 우칭위엔에 대해서 언급을 했으며, 또한 2년 후 천주더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천주더에게 특별히 우칭위엔을 만나보라고 부탁을 했는데 이러한 일만 보더라도 당시 우칭위엔을 중국정부 차원에서 주목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61년 우칭위엔은 교통사고를 당한 후 전적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일본 프로 타이틀전이 막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으며, 이후 1984년 정식 은퇴를 하여 우칭위엔은 무관의 제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젊었을 때 과감하게 새롭게 만들었던 바둑이론과 세계바둑계의 위치는 탁월했다. 1987년 일본 당대 초일류 기사 여섯 명의 공개인터뷰에서 조치훈, 린하이펑(우칭위엔 제자), 다케미야마사키, 가토마사오 등은 "우칭위엔은 바둑역사상 최강자"라는 일치된 의견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고바야시고이치와 오오다케히데오의 의견은 달랐다. 그들은 "근대 고수들은 서로다른 시대를 살아 서로 비교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다. 만약 굳이 누가 최강자였냐고 묻는다면 대략 수책(秀策 슈사쿠), 도책(道策 도사쿠), 우칭위엔 세 명을 들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1988년 오청원과 대만바둑영재였던 하함예와 복기장면.

▲ 2012년 일본 본인방전 도전기에 모습을 드러낸 오청원.

노년이 되어서도 우칭위엔의 바둑에 대한 갈망은 변하지 않았다. 바둑올림픽인 응씨배에서 심판장과 명예고문을 맡았으며,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는 대국장에 모습을 드러내는 열정을 보였다.

재작년 부인이 별세한 후 우칭위엔은 딸의 보살핌으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온 니우리리 등이 그의 생활을 도와주고 있다. 금년 2월 26일 제38기 일본기성전에 우칭위엔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어 현장에서 관전을 하며 기사들과 검토를 했다. 2005년 91세 때 베이징까지 날아가 제5회 잉씨배 결승 4국 심판을 맡는가 하면, 100세가 된 올해 2월엔 38기 기성전 도전기를 현장에서 검토하는 열정을 보이기도 했다.

우칭위안은 2년 전 부인이 90세로 별세한 후 외동딸을 도쿄 자택에 남겨두고 가나가와(神奈川) 현 오다와라(小田原) 소재 노인 요양시설에서 지내고 있다.

만년의 그는 생각에 큰 변화가 왔다. 더 이상 승부에 얽매이지 않고 '육합바둑(六合之棋),중의정신(中的精神)'을 창도했다. 비록 기술적인 범주 내에서 바둑계의 다른 의견을 불러일으켰지만 사실 그의 바둑에 대한 사고는 이미 인생철학의 이념이 투여되어있으며, 361의 교차점 위의 흑백바둑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래 전에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만약 100살까지 산다면 일을 다 끝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순식간에 탄신 100주년을 맞은 지금 노익장은 결과 멈출 기세가 없다.

주목할 것은 오랫동안 일본에 머물러 있던 우칭위엔이 중국영화와도 인연이 많다는 것이다. 중일 합작으로 촬영한 <끝나지 않은 바둑>은 아주 많은 줄거리 부분이 우칭위엔의 개인적인 일생이기도 하다. 2006년, 톈주앙주앙 감독 제작으로 상영한 영화 <우칭위엔>은 중국의 유명한 배우 장전이 젊은 시절의 우칭위안의 역할을 맡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우칭위엔의 명성을 드높인 10번기가 다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우승상금 500만위안(약 8억2000만원)의 'Mlily몽백합배 이세돌-구리 10번기'는 이미 4국까지 진행되어 이세돌과 구리가 2승2패로 동점을 이루고 있다. 누가 우칭위엔의 전설을 이어 역사에 남을 주인공이 될 것인가?

▲ 2006년 개봉된 영화 <오청원>의 포스트.

▲ 오청원을 딸(중앙)이 오청원 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경화상'을 수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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