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랜만에 바둑리그에서 프로의 꼼수를 감상할 기회가 생겼다. 사진은 변상일-조한승(승).
바둑을 모르는 일반인도 흔히 쓰는 말 중 '꼼수'가 있다. 어떤 이는 '꽁수'라고도 하는데, 꼼수가 올바른 말이다. 중급자 정도가 되었을 때는 보통 당하지 않으려 꼼수를 배우기도 하지만, 기력이 점점 상급자에 가까워지면 상대를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배우는 경우도 많다. 상대가 그 수에 대한 대처 방법을 모를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면, 확실히 한 건 할 수 있는 매력이 있기 때문. 대부분 아마추어들은 책이 아닌 실전으로만 실력이 향상된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히 그 방비책을 알기 쉽지 않다.
상대가 그 응수법을 안다면 오히려 자신이 망하는 것을 알면서도 왜 꼼수를 사용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가 몰랐을 때의 쾌감이 더욱 짜릿하기 때문이다. 보통은 실력차이가 나는 경우(상대가 정확히 대응할 때 고수는 변화가 자유롭기 때문) 성공빈도가 높고 대등한 경우는 아무래도 낮아진다.
프로들의 경우도 꼼수는 통한다. 물론 프로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그런 수준이 아니고 그들이 말하는 꼼수는 비교적 높은 수준일 것이다. 당연히 프로끼리는 꼼수를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초읽기에 몰린 경우, 그리고 뒤진 쪽에서는 가끔 생긴다. 바로 그런 상황이 모처럼 생겼기에 소개하기로 한다. 바둑리그 지난 주 포스코켐텍-화성시코리요 대국에서 두 번이나 그러한 장면이 나왔다.
▲ 안국현(승)-김성진.
장면1 꼼수 실패 백 김성진(화성시) 흑 안국현(포스코)
백1은 흑이 살아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당연히 A로 두어 끝내기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어차피 이기지 못한다고 보고 백은 1로 둔 것이다. 프로에겐 일종의 꼼수. 그런데 흑은 쉽게 살았다고 생각하고 경솔하게 되면 쉽게 걸려든다.
흑2에 백3으로 두는 것이 손님 실수 기다리는 수. 여기서 B로 두어 깔끔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백이 C로 단수치는 순간 흑은 살 수가 없고 바로 바둑은 역전이다. 팀원들과 함께 안국현이 방심해서 경솔하게 B로 둘까봐 조마조마 했던 40초 초읽기였지만 다행히 흑은 D로 두어 양패로 사는 수를 찾아냈다. 김성진은 바로 돌을 거두었는데 꼼수는 실패하면 이렇게 허무한 경우가 많다.
장면2 희대의 꼼수 백 조인선(포스코) 흑 진시영(화성시)
다음날 벌어진 3국. 진시영은 시종일관 유리했던 바둑을 믿어지지 않는 실수를 거듭하며 완벽한 역전의 위기에 몰렸다. 너무 완벽하게 자멸하는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 오히려 방심하게 만든 것일까. 흑1이라는 희대의 꼼수를 만들어 냈다. 보통이라면 당연히 흑은 2로 끊어야 하는데 이 경우 백은 D를 선수하고 6으로 두면. 자체 팻감이 많아 상변의 백을 살 수 있다. 산다면 백 승.
흑1을 두었을 때 조인선은 상대가 포기한 것으로 생각하고 조금이라도 더 이득을 보기 위해 2로 이었다. 여기서 백2로 이은 수는 절반은 꼼수에 걸려든 수. 이 수로 그냥 6으로 두면 백은 살 수 있다. 다시 흑이 3으로 두었을 때라도 눈치를 챘다면 백6에 두어 아직도 어렵지만 백이 사는 길이 있었다. 하지만 백4로 두어서는 역으로 95%는 걸려들었다.
사실 완벽하게 구렁텅이에 빠진 이때도 몇 십 수가 넘는 어려운 수읽기가 가능했다면 긴 바둑으로 갈 수 있었지만 이미 자책+뇌정지로 패닉 상태. 백8이 패닉 초기 증상의 일부분이고 백10은 흑11로 완전히 호흡기를 떼는 심장정지상태가 되었다.
흑1,3이 완벽한 꼼수인 이유는 이후 백A, 흑B로 이어질 때 백은 C의 패감이 있지만 흑도 3으로 인해 D로 자체 팻감을 2개나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흑3의 꼼수는 D의 팻감을 만들기 위한 술책이었으니)
▲ 완벽한 연기력을 과시한 진시영.
시간이 많았다면 프로가 흑1에 걸려들 확률은 거의 제로. 하지만 냉정하게 40초였다면 더군다나 분위기가 상대가 자멸한다는 느낌일 때 백2,4의 선택은 어떤 프로도 자신 있게 100% '난 안 걸린다'고 자신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앞선 김성진의 수는 상대의 순간적인 경솔을 얻기 위한 단순한 꼼수라면 진시영의 수는 고도의 심리작전과 바둑계 '대종상'감 연기력의 결과라는 점이다. TV화면을 본 팀원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의 진시영을 보며 흑1을 둘 때 백이 2로 이어 속된 말로 완전히 맛이 갈 정도로 최대한 이득을 봐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백이 2로 두자 상대 팀 때문에 박수까지는 아니지만 더욱 신나 있었다.
실제 대국장 밖에 있던 팀원들도 진시영의 연기력에 녹아들고 있는 분위기였는데 바로 앞에서 상대의 얼굴과 호흡을 느끼는 조인선이 걸려든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조인선의 3국 패배는 원래대로 그냥 완패 당한 것보다 더 충격적인 상황이 되면서 분위기는 완전 급반전. 팀의 운명 역시 호흡기를 떼야 하는 상황에서 심폐소생술에 성공하는 극적인 장면이 벌어진다.
▲ 변상일-조한승(승).
장면3 고정관념 백 조한승(포스코) 흑 변상일(화성시)
마지막 5국. 유리했던 조한승은 특유의 낙관이 나오며 미세하게 지는 수순으로 가고 있었다. 이 때 나온 변상일의 흑1은 공배를 둔 것이나 다름없는 한 수. 이것도 초읽기에 몰린 상황에서 나온 고정관념이 부른 참극이다.
우변의 백은 3선으로 7줄이나 밀어져 있는 상황이다 보니 어지간하면 살아 있다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두 기사는 흑1의 곳에 돌이 없으면 그냥 산 것으로 생각했다고 복기 때 얘기했다. 흑1은 A에 두어 백이 2로 받게 만든 후 C로 두었으면 흑 승. 하지만 흑1, 백2가 되자 B와C가 맞보기가 되며 흑은 순식간에 10집정도 손해로 바둑이 허무하게 백의 승리로 끝났다.
참고도 흑1로 둘 때 백이 손을 빼면 흑은 3-9까지 쉽게 패를 만들 수 있다. 백4를 귀 쪽으로 막아도 똑같은 패턴으로 패가 된다.
프로야구 4강 싸움처럼 바둑리그도 4강에 들기 위한 각 팀들의 사활을 건 마지막 경쟁을 하고 있다. 또다시 응급수술을 받는 심정으로 5명이 생존의 사투 5할의 미학에 도전한다. "선수들이여~ 제발 살아서 돌아와 다오. 플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