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기타]
'고' 아닌 '바둑'을 건 콩그레스
호주바둑콩그레스 참관기 2편
이광구 바둑평론가2015-02-04 06:13:07
▲ 제1회 호주바둑콩그레스 모습.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 직항편은 비싸다. 7월 말쯤에 이미 왕복 150만 원 선이었고, 대회 임박해서는 200만 원 안팎이었다. 11월 하순, 베트남 항공이 140만 원을 넘나들었다.
그 와중에 싼 게 있었다. 대회 시작 열흘 전 쯤, 부산의 여성기객 김향희 씨가 말레이시아 에어아시아(AirAsia) 항공의 105만 원 항공권을 가르쳐 주었다. 베트남 항공은 호치민에서, 에어아시아는 쿠알라룸푸르에서 7~8시간을 경유하는 코스여서 23~25시간의 걸린다.
바둑과 바둑 친구가 좋아 1년에도 몇 번씩 일본 중국 홍콩 대만 베트남 태국에다가 콩그레스가 열리는 유럽의 나라마다 찾아가는 김향희 씨는 “열 몇 시간 쪼그리고 앉아 한 번에 가는 것보다 중간에 내렸다가 타는 것이 더 재미있다. 7~8시간이면 바깥에 나갔다 들어올 수 있으니 표 한 장에 두 나라를 구경하는 것”이라면서 웃는다. 물론 비싸더라도 직행을 타겠다는 사람도 많지만.
도착하는 날 시드니에는 비가 내렸다. 기온은 37도, 근래 최고 기록이었다. 37도에 비까지 내렸지만 끈적끈적하지는 않았다. 비는 대회 이틀째까지 오락가락했고 사흘째 하늘이 맑았다. 낮에는 좀 더운 듯했으나 해가 지면 기온은 떨어졌고 밤에는 서늘했다. 묘한 날씨다. 낮에 긴 팔 남방을 입어도 덥지 않았고, 밤에 반 팔 티셔츠로 돌아다녀도 춥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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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의 상징 코알라와 오페라하우스(사진출처=호주콩그레스 홈페이지).
대회 개막식에서부터 논란이 있었다. 주최 측이 예상했던 대로 '바둑(BADUK)'이냐, '고(GO)'냐, 역시 그거였다. 일본 선수들이 이의를 제기했다. "국제공용은 '고' 아닌가. 아무리 한국 사람이 주동해 만든 대회라 해도, 한국에서 열리는 것도 아닌데, '바둑'이라고 한 것은 지나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세계 각처에서 자기네 바둑 룰을 열심히 보급하고 있는 중국도 최근 국제대회 이름에는 '웨이치(WEIQI)'를 고집하지 않고 '고'를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주최 측은 "호주콩그레스 조직위원회의 회의를 거쳐 결정한 사항"이라고 대답했고, 일본 선수들이 다시 물었다. "내년에도 회의에서 그렇게 결정하면 결정에 따를 것이냐?" 주최 측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바둑이냐, 고냐'에 대해서는 각국의 선수들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한국 사람이 주최하고 한국 사람이 후원하는 대회니까, '바둑'을 내세울 수 있다고 본다."
"호주바둑협회가 현재 회장이 한국 사람이라고 해서 '바둑'을 주장한다면, 나중에 회장이 바뀌면?"
"한국기원 홍석현 총재가 IGF(세계바둑연맹) 회장이기도 하니 안건에 올려 토론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것도 이상하다. IGF 회장을 중국 사람이 맡으면 웨이치, 일본 사람이 맡으면 고로 하자고 할 것 아닌가."
"무엇보다 일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바둑세계화의 선발을 어쨌든 일본이다. 일본이 서구에 바둑을 보급한 역사가 100년이 넘지 않는가. 바둑 세계화에서는 한국이나 중국이나 거의 무임승차한 것 아닌가."
"그러나 시대가 바뀌면 용어도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세계 바둑계를 누가 이끌어 갈 것인지 생각해 보자. 이번 대회만 하더라도 한국과 중국에서는 젊은이들이 참가했지만, 일본 젊은 층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이 바둑 세계화를 선도한 것은 분명하지만, '역할의 교대(交代)'라는 것도 있다."
"한국과 중국이 바둑이냐 웨이치냐를 놓고 경쟁하는 것이 바둑세계화에 촉매제도 되는 것 아닌가. 그게 싫다면 일본도 한국이나 중국처럼 어린이 청소년 바둑 육성에 힘을 쏟아 경쟁에 들어오면 된다. 사실은 그거야말로 바람직한 일이다."
▲ 대회 모습.
라운드가 거듭되면서 분위기도 무르익었다. 제1섹션과 제2섹션, 최강부와 유단자부에서는 한국이 선두를 독점하고 있다. 일본의 ‘남녀 노인부대’는 의연하다. 옆에 태블릿 피시를 켜놓고 자신의 바둑을 기록하면서 천천히 두어간다.
선수단의 리더로 보이는 효도 슌이치(兵頭俊一 ) 4단은 80세. 그래도 꿋꿋이 유단자부에서 1-2위 한국 청년, 3위 중국의 15세 소녀 에이미 송(Amy Song) 다음 4위를 차지했다. 명함에는 'Go Instructor', 지금도 바둑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런가하면 동료 곤도가즈미(近藤數美) 초단은 82세로 최고령 선수. 큐슈(九州)의 가고시마(鹿兒島)현 기리시마(霧島)시에 있는 영어교육 관련 NPO(비영리법인)의 이사장이다. 산악 지대인 기리시마에는 일본 최초의 국립공원이 있으며 여기서 제일 높은 산(1700m) 이름이 한국악(韓國岳)이다. 일본 발음으로는 '가라쿠니다케'라는데, 이게 묘하다.
한(韓)의 옛날 일본식 발음이 '가라'였고, 우리말 '가라(加羅, 伽羅, 迦羅)' 혹은 '가락(駕洛, 加洛)'은 또 가야의 별칭이었다는 것 아닌가. 그러니 이건 아무래도 뭔가 있는 거다. 곤도 초단이 유난히 한국 선수들에게 친밀감을 표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하세가와가나미(長谷川 加奈美) 5급을 빼놓을 수 없다. 외모는 단아한데, 배포는 여장부다. 마흔다섯 살 땐가 오토바이를 배워 몇 년 후 혼자 오토바이로 미국 대륙을 횡단했다. 바둑은 쉰이 넘어 시작했는데, 시작하자마자 국제통이 되었다. 세계 곳곳의 바둑대회를 순방하며 강진의 '김인국수배 시니어 세계대회'에도 웬만하면 빠지지 않는다.
이벤트로 '한(韓) 시스템 대회'가 곁들여졌다. 한상대 교수가 유럽 바둑인들의 전투력을 키워 주기 위해 고안한 변형 방내기다. 집 차이가 많이 나게 이길수록 점수를 더 주는 것.
반집에서 10집까지는 60점, 20집반까지는 70점, 30집반까지는 80점, 40집반까지는 90점, 그 이상이면 만방으로 100점. 상수들은 만방을 위해 하수를 찾아다녔고, 하수들은 고수에게 한 판 배우는 맛에 만방 헌납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 안영길-이다혜 공개해설회 장면.
대회 첫째 날 한국-이라크의 축구가 있었다. 한국 선수들은 웨스트라이드에 있는 '광명'으로 몰려갔다. 한국음식과 생맥주, 위스키 같은 것이 있다. '광명'은 시드니 한인기우회 회원들이 모이는 곳.
홀 한쪽에는 바둑판이 쌓여 있다. 실내는 만원이었다. 선수들은 교포들과 함께 2대0 승리를 환호했다. 이런 기세라면 31일, 호주도 이기고 우승할 것 같았다. 매일 라운드가 끝나면 김일환 안영길 이다혜 프로의 지도다면기가 펼쳐졌다. 사람들이 앞 다투며 신청했다.
대회 마지막 날에는 안영길과 이다혜의 공개해설이 있었다. 안영길은 영어가 유창했고, 이다혜는 안영길의 영어 해설을 일본어로 통역해 주었다. 이다혜는 중국어도 잘했다. 해외보급기사로는 최적격인 셈이다. 안영길은 언어 봉사 외에도 대회 기간 내내 우리 선수들을 위해 운전 봉사를 해주었다. 지면을 빌려 감사의 말을 전한다.
대회 기간에 또 바빴던 사람은 진행을 담당한 네빌스마이스 부회장이었다. 은퇴한 수학교수. 대회장 한쪽 벽면의 대형 스크린에는 대국 현황과 그때까지의 각 섹션 순위가 나타나고 있다. 한 판 한 판이 끝날 때마다 이긴 사람의 이름이 굵고 밝아졌다. 전체적인 방식은 맥마흔시스템인데, 거기에 스마이스교수가 몇 가지 디테일을 첨부 보강한 것. 사람들이 "그렇다면 이건 '스마이스시스템'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박수를 보내자 밝게 웃는다. 집은 캔버라지만, 대회 기간 내내 기숙사에서 지냈다.
▲ 시드니의 바 '광명'에서 한국-호주 아시안컵 결승전을 보고 있다.
대회가 끝난 후 각국 선수들은 골드코스트로, 케언즈로, 스노우마운틴으로 2차여행을 떠났다. 시드니가 초행인 선수들은 시드니 근교를 돌았다. 블루마운틴으로 가는 사람이 많았다. 고아한 옛 정취를 느끼고 싶은 팀들은 아름다운 저택과 목장들이 있는 보럴(Bowral)로 차를 몰았다. 시드니에서 캔버라로 가는 길 3분1쯤이니 이 역시 만만치 않은 거리다.
시드니에 남은 사람들은 다시 '광명'을 찾았다. 한국-호주의 결승이다. 이날은 정말 한국 응원석 쪽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홀에는 대형TV가 사람들이 여기저기 아무 데서나 볼 수 있게 여섯 개나 걸려 있다.
축구가 아닌 TV도 하나 있었다. 멜버른에서 열린 2015 호주오픈 테니스 결승이었다. '광명'이 한국 식당이 아니었다면 테니스와 축구의 TV 점유 비율이 거꾸로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작은 TV들도 있는데, 거기서는 경마, 경견(개 경주), 핸드볼이 펼쳐지고 있다. 화면 밑에는 현금인출기가 있다. 사람들은 돈을 빼고, 그걸 어디에다 넣고, 주로 고개를 흔들었다. 사람들이 달리고 개들이 달리고 말들이 달리고 있다.
전반 막판에 호주가 한 골을 넣었다. 호주 사람들이 장내가 떠나갈 듯 환호성을 질렀다. 후반 44분, 끝났구나 싶었던 순간에 손흥민의 동점골이 작렬했다. 홀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뒤는 생략하고….
31일 밤에도 비가 약간 내렸다. 시드니는 호주에서 공기가 제일 나쁜 곳이라는데, 비를 맞아도 상쾌하니, 실감이 되지 않는다. 멜버른에서는 탱크 같은 근육질의 윌리암스가 괴성을 지르는 사라포바를 꺾고 우승했다. 윌리암스는 27억원, 사라포바는 14억원의 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윌리암스는 펄쩍펄쩍 뛰었고 188cm의 사라포바는 먼 하늘을 응시했다. 축구와 테니스와 경마와 개 경주, 그 사이에 바둑이 있었다.
▲ 보럴(Bowral)에 있는 영국식 전통의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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