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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둑 부부가 사는 법]

“온갖 시련이 우리를 단련시켰죠!”

<이 부부가 사는 법> 양천대일바둑도장 김희용 이분옥 부부

진재호 바둑평론가2015-07-16 08:4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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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천대일바둑도장 김희용 원장과 아내 이분옥 씨.

권갑룡바둑도장 장수영바둑도장 충암바둑도장 이세돌바둑연구소 등이 작금 한국의 대표적인 바둑도장이다. 이렇게 꼽고 나서 왠지 허전한 기분을 느낀다면 그는 굉장한 바둑마니아일 터. 바로 양천대일바둑도장이 빠졌다. 지난 1999년 이후 불과 15년 만에 신선한 동량지재를 길러내는 신흥 명문도장으로 우뚝 선 양천대일.

위에 거명한 도장들은 이미 유명 프로의 명함이 새겨있으니 도장의 혁혁함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강유택 안성준 김정현 김승재 이동훈 신민준 등 오늘보다 내일이 더 밝은 기대주를 비롯하여, 최근 입단에 성공한 안정기까지 무려 30명의 프로를 배출한 양천대일바둑도장은 이제 한국 대표 도장이다.

<이 부부가 사는 법> 이번에는 신세대 프로들의 등용문 양천대일바둑도장을 찾아 김희용(55) 원장과 그의 아내 이분옥(53) 씨의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바둑인생을 들어본다.

▲ 약간은 전근대적인 이 슬로건은 양천대일 김원장의 뚝심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다.

'안되면 되게 하라!'

도장 상담실의 문을 열어 제치자 이 문구가 손님을 반긴다. 기자도 어릴 적부터 이런 불굴의 투지로 살아가자는 군대식 슬로건을 많이도 보아 왔다. 일터나 군대서나 운동부 체육관 벽에 큼지막하게 붙어있어야 어울리는 구호가 아니던가.

애제자 이동훈이 4년 정도 복싱을 배웠고, 이호범도 복싱을 하고, 엊그제 프로가 된 안정기도 복싱을 한다. 전혀 바둑하고는 이미지가 안 맞는다는 기자의 말에 역시 우락부락한 외모의 김원장도 끄떡끄떡 수긍한다.

원래 김원장은 김현치의 동아체육관, 용산 크라운체육관 등 당대 유명 도장에서 열심히 샌드백을 치던 복싱선수였다. 곧 프로 데뷔할 예정이었지만 불운하게도 그는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운동을 그만 두게 되었다. 체대에 가고 싶었던 꿈도 이때 산산조각이 났다.

다행히도 가정은 부유한 편이었다. 집안에서도 딸 여섯에 외동아들이라 복싱하는 것 자체를 크게 반대했다. 또 다행인 것은 아버지, 어머니, 큰 누나, 둘째 누나 등등 식구들이 바둑을 전부 둘 줄 알았다. 그의 부모님은 초보였지만 어릴 적부터 부부간에 간혹 바둑을 두었다. 그는 고3때 매형에게 바둑을 배웠다.


부부는 닮는다고 했거늘, 한눈에 우락부락 근육질에 더프하게 보이는 김희용 원장과 상냥하고 미인인 부인 이분옥 씨는 30년을 살았는데도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미녀와 야수'는 어떻게 만났을까?

"그날이 제 생일이었어요. 비가 갑자기 쏟아졌는데 급한 마음에 남의 우산 속으로 황급히 들어갔죠. 지금의 아내 우산이었죠."

"일부러 들어온 것이겠죠(웃음). 신림사거리에서 커피를 마시곤 넥스트 날짜를 얼떨결에 잡았죠. 나중에 보니까 원장님이 너무 못 생긴 거예요(웃음). 바람을 여섯 번이나 맞혔죠. 그러다 한번은 또 버스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점퍼를 확 던지고는, 여기서 웃거나 다음 약속을 잡지 않으면 집에 안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놓길래 무서워서 다음 약속을 잡았죠(웃음)."

우락부락하긴 했지만 심성은 고왔던 김원장이었다. 딸 여섯에 외아들 집안이라 시집을 가게 되면 몹시 고생할 것이라하여 주변에서 는 교제를 말렸다. 그래도 부인 이씨는 있는 집에 가면 설사 마음고생은 하더라도 돈 고생은 안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결혼 허락을 했단다.

이들 부부는 결혼 초기에는 특별한 기술 없이 여러 사업을 하다 많은 실패를 봤다. 건축업 요식업 등 재미를 본 사업이 거의 없었다. 그냥 겨우 먹고 사는 정도였다. 그러다 바둑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은 우연치고는 필연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서울 상계동에서 바둑교실을 하던 매형이 바둑교실을 해보라고 추천을 해서 1993년 34살에 신림동에서 바둑인생을 출발한다.

▲ 도장 건물 옥상에 자그마한 텃밭을 돌보는 부부의 모습.

지금은 어엿한 프로가 된 윤준상을 1994년 김원장은 처음 만났다. 느는 속도가 무진장 빨랐다. 당시 2학년이었는데 3년 정도 가르치니 한국기원 연구생3조까지 뛰어올랐다. 윤준상을 권갑룡바둑도장에 보낸 이후 마치 금단현상처럼 아무리 놀러 다녀도 인생이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1999년 도장을 시작하게 된다.

"신림동 바둑교실 때부터 제가 운전을 해서 봉고차만 9대를 거쳤어요, 100만km이상을 뛰었어요. 신림동, 난곡, 봉천동 등 안 다닌 곳이 없어요." (이분옥 씨)

당시에는 바둑교실도 잘 되는 시기였고 계속 하고 있었어도 무방할 텐데 왜 하필 도장으로 갈아타기를 시도했을까. 프로도 아닌 사람이 감히 프로를 만들겠다고 나선 까닭은 왜 일까. 주변에서는 '도장은 아무나 하나'하며 비아냥 일색이었다. 과연 순탄했을까? 김원장은 빙긋이 미소 한번과 함께 고개를 가로 젓는다. 

바둑교실의 원생이 200명이 넘으니까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는데, 왜 어려운 도장을 하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인은 극구 말렸다. 그러나 김원장은 특유의 뚝심으로 아내를 주저앉힌다. "당신이 자꾸 반대를 하면 이혼하고서 나 혼자 하겠소!"

한 달에 300-400만원씩 적자를 보면서도 계속해서 힘든 길을 갔다. 바둑교실은 아내에게 맡기고 도장을 운영하다보니 교실원생들도 하나 둘 씩 빠져나갔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는 것이었다. "역시 처음 가는 길은 어렵구나 하고 느꼈죠. 하긴 누가 나를 보고 아이들을 보내겠어요?"

그러나 서서히 아이들이 어린이대회에 나가서 성적을 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입소문이 나서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학부모들이 지방에서 아이 한 명을 보내기 위해서 도장분위기를 2년 동안 본다고 한다. 전국 시합 어딜 다녀도 김원장 부부가 열심인 모습을 보고 믿고 '맡겨도 되겠구나' 하는 평판을 얻게 된 것.

아이들이 바둑 두는 행위 자체가 즐거워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력과 체력도 중요하다고 봤다. 또 면학분위기에 신경 썼다. 도장 꾸며놓은 모습부터 작은 교실 전담사범제(적은 인원을 1명의 사범이 전담하는 스타일) 등 다양하게 신경을 썼다.

▲ 부인 이분옥 씨가 아이들 저녁을 챙기고 있다. 오늘은 닭도리탕이다.

1999년에 연구생이 한 명도 없다가 2002년에 연구생 10명을 만들었다. 그 중에서 2조까지 올라갔던 친구가 있었다. 곧 프로가 보였다. 그런데 이 아이가 이제는 자기가 탑이니 다른 도장으로 가겠다며 청천벽력과 같은 선언을 하는게 아닌가. 도장 인원이 40명까지 늘어나고 연구생도 10명 만들었으니 이제 조금만 더하면 되겠다고 한창 꿈에 젖어있을 때, 마치 열병을 앓듯 13명이 우르르 도미노 현상처럼 빠져나가게 된다.

"집 앞 한강변에서 술병을 든 채 혼자 울고 있었죠. 그때 어린 (이)호범을 앞세워서 집사람이 나를 데리러 왔어요. 그때 호범이 얼굴을 보면서 '얘도 똑똑한 놈인데 잘 가르치면 되겠지' 하면서 마음을 다잡았죠."

이번엔 부인이 다시 일어서자고 했다. 남아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시작하자고 했다. 부인의 한 마디에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맘 한 구석엔 도장일이 맘에 안 들었던 부인이 이번 일로 적극적인 후원자가 된 것이다.

▲ 암을 극복한 부인을 위한 정선여행 중에 민둥산
정산에서 한 컷.

이제는 시련이 끝났을까? 엉뚱한데서 시련은 또 잉태되고 있었다. 바로 자신의 든든한 '빽'이었던 부인에게 암선고가 내린 것이다. 결혼 후 병원을 한 번도 간 적이 없었던 건강 체질이었던 아내. 어쩌면 건강 체질을 빙자하여 그동안 너무 바쁘게 살았던 게 아닌가도 싶었다. 2011년도부터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유방암 3기였다. 말기가 아니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암 덩어리 10개 이상을 떼어냈다. 항암기간 동안은 가발을 쓰고, 모자 쓰고, 밖에는 나가지 않았다. 당시엔 김원장이 혼자서 도장일을 다했다. "이 사람의 존재를 다시 알게 되었죠. 이 사람 하나가 이탈하니 도우미 2명, 저희 아들 2명까지 거의 다섯 사람이 필요했어요. 지금도 이모가 와서 도와줍니다. 아가씨 때는 단발머리 찰랑찰랑해서 머릿결이 참 좋았는데…."

"암 선고를 받고 제 인생이 너무 허무하더라고요. 기숙사엔 40명 넘는 아이들이 있었고, 하루에 서너 시간 밖에 못 잤어요. 성적이 안 나오거나 문제가 있는 아이들은 5시에 깨워서 같이 한강을 뛰고 와서 6시에 아침 준비를 하곤 했죠. 어느 새 저도 뒤를 돌아보아야 할 때가 되었구나 생각했죠."

부인은 아직 완전한 몸은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낙천적인 성격 덕에 병마를 거의 이겨냈다. 부부는 앞으로 또 다른 시련이 오기 마련이고 그를 극복할 준비가 되어있단다. '김희용' 하면 모르는 사람이 더러 있겠지만 양천대일원장은 바둑가에서는 다들 안다. 김원장은 양천도장은 영원히 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제자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아이들을 꼽아보라고 했다. "제가 도장을 만들게 해준 윤준상, 한웅규는 단수부터 입단까지 키웠고, 이호범은 기숙사 1호였고, 그리고 신민준, 이동훈…, 아휴, 이름 빠진 얘들 들으면 섭섭해 해요(웃음)."

끝으로 아내와 남편에게 서로 사랑의 멘트를 하나 부탁했다.

"아내가 아픈 다음부터는 내 옆에서 아직 같이 자 준다는 게 굉장히 고마워요. 항상 내 품을 떠나지 않고 나보다 더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김희용 원장)

"지금 이대로 열심히 살아줬으면 좋겠어요."(부인 이분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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