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박정환은 여간해서는 질 것 같지 않다. 전성기 시절 이창호에 비견될 정도의 '포스' 아니냐는 얘기도 솔솔 나온다.
아닌게 아니라, 박정환의 경기를 생중계를 통해 보고 있노라면 믿음이 간다. 초중반 형세가 좋지 않더라도 느긋하게 감상할 수가 있다.
얼마전 바둑TV에서 박정환의 KB리그 경기를 생중계하던 송태곤 해설위원은 티브로드에서 주장 박정환에게 '의심하지 마!'라는 별명을 붙여줬다고 소개했다. 바둑이 좋아보이지 않아도, 지금 두는 수가 당장 납득이 되지 않더라도 결국은 이겨주기 때문에 섣부른 의심을 하지 말라는 의미일까.
박정환은 지난 6월13일 중국 갑조리그 7라운드를 시작으로 어제(10일) 판팅위와의 대국까지 16전 15승1패, 가히 무적에 가까운 성적을 기록중이다. 상대한 선수 면면을 살펴보면, 조한승 퉈자시 미위팅(2판) 장웨이제, 판팅위, 천야오예 후야오위 천셴 등 호락호락 하지 않은 멤버들이다.
2015 국수산맥 한중 단체대항전 출전선수 명단이 발표 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우세를 점쳤다. 중국은 1~3위 스웨 커제 천야오예가 모두 빠진 반면, 한국은 1,2위 박정환 이세돌, 그리고 랭킹은 6위로 다소 하락했지만 최근 컨디션이 좋은 최철한이 등판하기 때문이었다.
'예상대로' 우승트로피는 한국이 차지했지만,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한국은 8일 강진에서 열린 1라운드에서 1-2로 패했다. 박정환만 미위팅을 제압했을 뿐, 이세돌 최철한이 각각 판팅위와 퉈자시에게 패점을 안았다.
하지만 9일 영암에서 벌어진 2라운드에서 한국은 대 반격에 나섰고, 3-0 완봉승을 거뒀다. 중간 스코어 4-2. 3라운드에선 한 판만 이겨도 한국의 우승이 확정되는 상황 . 그러나 그 한 판을 이기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세돌이 퉈자시에게 1년전 같은 대회에서 당했던 패배를 설욕하지 못했고, 최철한은 본 대회에서 2패를 당하고 있던 미위팅에게 반집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스코어는 이제 4-4. 대국 개시 시점의 느긋한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고, '이러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대 역전패를 당하는 것 아니냐'는 반응들이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 믿음직한 수문장 박정환. 미위팅 퉈자시 판팅위를 차례로 물리쳤다.
에이스의 역할은 꼭 이겨야 하는 순간에 반드시 승리하는 것. 위기의 순간, 新수문장 박정환이 한국 에이스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1라운드 미위팅, 2라운드 퉈자시를 완파하며 2연승을 달리고 있던 박정환은 최종 3라운드 주장전에서 까다로운 상대 판팅위를 돌려세웠다.
천금같은 결승점을 올린 박정환은 한국 우승을 자신의 손으로 확정지었다. 한국과 중국의 탑랭커가 총 출동하는 대회인 만큼, 지난해 2014 국수산맥 한중 단체대항전에선 3연승자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는 박정환이 3전 전승의 주인공이 되었다.
바둑 내용 또한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세돌이 비세에 빠지고 최철한은 미세한 반집승부를 벌이고 있던 순간, 판팅위의 작정한듯한 철저한 실리작전에 휘말려 집 부족으로 고전하던 박정환은 희대의 묘수를 발견했다.
판팅위는 보지 못했고 박정환은 찾아낸 '신의 한 수'로 바둑은 순식간에 끝났다(기사 하단 상세해설 참조). 세계정상급 선수들의 대국에서 단 한 수로 유리했던 바둑이 돌을 거둬야 하는 상황으로 돌변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더구나 3년전 응씨배 결승에서 뼈 아픈 패배를 안긴 판팅위를 상대로 묘수를 작렬시켰기에 짜릿함은 더욱 배가 되었다. 시상식과 폐막식이 모두 끝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한국 우승의 주역 박정환과 대화를 나눴다.
▲ "정환아 잘했어!" 시상식 전 담소를 나누는 박정환과 최철한.
3전 전승을 거두고 한국 우승을 확정지었다. 시상식 때 이세돌 최철한 선수와 웃으며 대화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되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나? 오늘 둔 바둑 내용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오늘 승리에 대해) 잘했다고 했다(웃음).
우하귀에서 붙이는 묘수는 정말 인상적이었다. 하변을 어깨 짚어서 공략할 때부터 보고 있던 수였나? 그 때부터 그 수를 보고 둔 것은 아니었고, 두다 보니 발견하게 되었다. 어깨 짚은 수(실전진행1)는 흑을 압박해 집으로 이득을 보기 위함이었다.
판팅위는 붙이는 수를 못 본 것인가? 얼굴을 맞대고 대국하기 때문에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못 보고 있었다. 1선에 내려빠져서 버틸 때, 아마 선수로 끝내기를 하려는 것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붙임수를 당하고나서 많이 괴로워 하더라.
일각에선 한국이 최정예인 반면, 중국은 1~3위(스웨 커제 천야오예)가 모두 빠져 1군 멤버가 아닌 것 같다는 얘기도 있었다. 물론 스웨와 커제가 강한 상대지만, 퉈자시 미위팅 판팅위도 모두 정상급으로 상대하기 쉬운 선수들은 아니다.
랭킹시드로 대회에 출전했다. 출전 요청이 왔을 때 흔쾌히 수락했는지? 물론 흔쾌히 참가했다. 아직 제 실력이 대회를 가려 출전할 정도는 아니다. (바둑 공부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3판의 대국 중 가장 어려웠던 판은? 1라운드 미위팅과의 대국이다.
원래도 좋았지만, 최근엔 성적이 더욱 좋다. 요즘은 형세가 좋지 않아도 관전하는 사람들이 '결국엔 이겨주겠지' 하는 믿음을 갖는다. 특별한 변화가 있었는지? 실력은 그대로다(웃음). 별다른 변화는 없는데, 요즘은 마음을 편하게 갖고 대국에 임한다. 예전에는 '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는데, 그것이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최근 들어 타이젬 대국 횟수가 많이 줄었다. 궁금해하는 팬들이 많은데. (시합 일정이) 바쁘기도 했고, 주로 관전을 많이 했다. 이제 다시 두려고 한다(웃음).
인터넷 바둑을 두는 것은 스파링의 일환인가? 시합 바둑에 비해 인터넷 바둑은 부담이 덜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열심히 두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주 대국하는 중국 탑랭커들과는 서로 ID를 알고 있기 때문에, 공식 대국 만큼의 부담은 없지만 자존심이 걸려있다.
공부량이 엄청난 걸로 유명하다. 바둑 외에 즐기는 취미생활이 있는지? 영화도 보고, 노래도 듣는다.
어떤 음악을 주로 듣는지? 최신가요를 듣고, 발라드 음악을 좋아한다. MC THE MAX 노래를 자주 듣는 편이다.
박정환의 '신의 한 수' 상세 해설
● 판팅위 ○ 박정환 실전진행1 박정환이 백1로 어깨를 짚어가자 판팅위가 흑2로 연결한 장면. 초반부터 4귀를 모두 차지한 후 상변과 하변 타개에 모두 성공한 판팅위가 집으로 앞선 상황이다. 이세돌 비세, 최철한 반집승부 상황에서 이 대국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고 있었다.
▲ 참고도1. 실전진행1에 이어 백이 참고도1과 같이 백1,3으로 흑을 끊으려고 하는 수는 흑6까지 성립하지 않는다.
● 판팅위 ○ 박정환 실전진행2 백1과 흑2의 교환이 된 상황. 하지만 백이 A의 곳으로 차단하는 수는 여전히 성립하지 않는다. 알파벳 순으로 F까지 진행되면, 백1과 흑2의 교환이 있어도 흑이 연결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 판팅위 ○ 박정환 실전진행3 백1로 젖힌 수가 '신의 한 수'의 서곡. 판팅위는 위험신호를 감지하지 못한채 당연하다는듯 흑2로 끊었고, 여기서 박정환은 백3으로 돌려친다. 이 때 이미 박정환은 수를 봤고, 판팅위는 아직 수를 보지 못하고 있다.
▲ 참고도2 흑이 1로 따내는 것은 백이 2로 단수쳤을 때 당장 곤란해진다. 흑3으로 단수치고 백은 △의 곳에 따내 패의 형태가 되는데, 흑보다는 백의 팻감이 월등히 많기 때문.
● 판팅위 ○ 박정환 실전진행4 묘수 작렬! 판팅위는 흑2로 내려빠지면서 백의 다음 수로 흑3의 곳을 예상했다. 선수로 끝내기를 하기 위해 둔 수라고 생각했던 것. 하지만 여기서 이 바둑은 갑작스럽게 종국을 맞이한다. 백2로 잇는 수가 놓이자, 검토실은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아니, 이 좁은 공간에 무슨 수가 있나?' "의심하지 마!" 백 4가 떨어진 순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나온다.
▲ 참고도3. 흑이 아무 생각없이 1로 찌른다면, 물론 귀는 잡을 수 있다. 하지만 백2로 넘는 수가 절대선수가 된다는 게 함정. 백4로 갈라치는 순간, 흑에겐 구명조끼가 없다. 흑 A의 곳부터 알파벳 순으로 진행을 한다면 백이 F의 곳을 이었을 때 더 이상 둘 수가 없게 된다. 참고도1에서 언급한 연결수단이 참고도3 백2의 곳에 돌이 놓여 성립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박정환 '신의 한 수'의 위력이다.
● 판팅위 ○ 박정환 실전진행5 판팅위가 울며 겨자먹기로 흑1에 젖힌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백2~백8로 흑의 안방에서 백이 알토란 같은 두 집을 만들며 완생하자 흑은 졸지에 빈털털이가 되었다.
● 판팅위 ○ 박정환 실전진행6 승부 끝! 더욱 기가막힌 것은 안방을 내준 흑이 오히려 삶을 구걸해야 한다는 사실. 흑1로 한집을 내자 백은 2로 추궁한다. 그러자 흑3, 목숨만 살려달라는 수다. 백4로는 흑7의 곳에 단수를 쳐서 패를 만드는 수도 있다. 하지만 이미 계산서가 나온 박정환은 싹싹하게 백6으로 잇고 판을 마무리 한다. 흑이 후수로 7에 곳에 둬서 달랑 두 집을 내고 살게 된 순간, 이 바둑의 승부는 끝났다. 이후 수순이 많이 진행되었지만 마음을 추스르기 위한 시간일 뿐.
▲ 참고도4. 돌이켜보면, 흑은 백1의 젖힘수에 섣불리 응수하지 말고 더욱 조심했어야 한다. 흑2로 늦춰서 받았더라면 실전과 같은 최악의 참사만은 피할 수 있었던 것. "참고도4 흑2로 받는 것이 실전보다는 분명 더 낫다. 하지만 이것도 자체로 워낙 굴복이라… 이렇게 진행된다면 미세하지만 백이 유망한 계가바둑인 것 같다."(박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