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 한국바둑의 전설 우승 결정국은 '시간초과 해프닝'으로 끝났다. 한상열 심판이 조치훈의 '시간패'를 선언하고 있는 모습.
지난해 7월26일에 벌어졌던 한국현대바둑 70주년 기념 특별대국. 조훈현과 조치훈이 13년 만에 맞대결을 펼쳐 바둑 팬들의 큰 관심을 받았던 그날 바둑은 조치훈의 시간패로 끝났다. 당시 국면은 조치훈의 우세가 확실했던 상황. 시간패가 아니었다면 조치훈의 승리가 예상된 장면이었기 때문에 '진짜 승부'의 결과를 보지 못한 팬들의 아쉬움 또한 컸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은 사태를 예견하지 못한 가운데 뒤늦게 뭔가를 시도하는 것을 경계하는 뜻을 담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시간패 이후 늦게나마 외양간을 고쳐두었다면, 어제(13일) 또 한 번 시간패 해프닝이 발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TV대국에서 계시원이 초읽기를 부르는 것, 즉 '시간'과 관련된 해프닝이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2년 9월16일 바둑리그 17라운드 4경기 홍성지-이호범 대국에서 계시원이 "열"을 부름과 동시에 이호범이 착수했던 사건이 있었고, 2014년 10월29일엔 아마추어 바둑 최대 제전 내셔널바둑리그 챔피언결정전 제1국 이유진-박강수 대결에서 계시원이 '마지막'이라는 멘트 없이 "열"을 불러 사상초유의 '판정유보'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 시간패로 끝났던 조치훈(왼쪽)vs조훈현 대결.
▲ 사상 초유의 '판정유보' 사태가 벌어졌던 내셔널리그 챔피언 결정전 이유진(왼쪽)vs박강수 대결. ☞ 바둑리그 '비디오 판독' 해프닝 바로가기 ☞ 내셔널리그 챔피언결정전 '판정유보' 해프닝 바로가기 취재수첩의 앞선 글에서 계시원이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다는 내용에 대해 논한 바 있다. 바둑은 사실 스포츠의 요소 보다 스포츠가 아닌 요소가 더 많고, 프로기사들도 여전히 바둑이 스포츠라는데 고개를 갸우뚱 하는 사람이 더 많지만 현재 한국기원에선 바둑을 스포츠로 표방하고 있다.
스포츠로서 갖춰야 할 가장 큰 전제조건은 공정성이다. 사람이 기계 보다 더 정확할 수는 없는 일. 디지털계시기가 멀쩡하게 있는 상황에서 스포츠를 표방하고 있는 바둑이 계시원을 둔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본래 계시원 제도는 일본이 원조다. 사실 현대 바둑의 역사가 400년 이상 축적된 일본에 비하면 아직도 한국바둑은 걸음마를 하고 있는 단계. 바둑과 관련된 거의 모든 규정과 관행 등을 전부 일본에서 빌려왔고, 그로 인해 지금까지 많은 문제가 발생해왔다.
처음 시작하는 입장에선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내기 어렵기 때문에, 기존에 있는 것을 가져다 쓰는 것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창조적 모방'을 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부분.
계시원을 두는 것은 대국이 원할하게 진행되도록 돕기 위한 배려의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대국의 원할한 진행에 도움을 주기 위해선 계시원이 바둑을 잘 알아야 한다. 일반인 수준으론 안 되고, 전문가 수준이어야 하는 것. 그래서 일본에선 주요대국의 모든 기록자와 계시원이 '프로기사'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계시원의 역할이 모호하다. 대국의 원할한 진행과 대국자 배려 보다 '방송의 질'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역력하다.
이를테면, 문제가 됐던 현대바둑70주년 특별대국 조훈현-조치훈 대결의 계시원은 바둑을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만약 한국 여자프로기사 가운데 그 바둑의 계시를 할 사람을 구했다면, 단언컨대 줄을 섰을 것. 평소 존경하던 두 거장의 승부를 지척에서 감상하며 승부호흡을 함께 할 기회를 잡고 싶어하는 '진짜 바둑인'들은 현재 계시원들의 숫자 보다 훨씬 더 많다.
일본 7대 기전 중 서열1위와 2위 타이틀인 기성전과 명인전 관전기를 수록해놓은 책, 프로기사가 되고자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법한 책인 <위기명인기성전>에선 다음과 같은 대목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30초, 40초, 조치훈 사범님! 마지막입니다."
"아, 벌써 그런가?"
"마지막 하나, 둘…"
마지막 1분 초읽기 상황에선 대국자를 위한 배려의 일환으로 30초 정도 단위부터 시간을 10초 단위로 사전에 고지하며, 대국자가 상황을 잘 인지하지 못했다고 판단될 경우엔 "ㅇㅇㅇ사범님, 마지막입니다"와 같은 멘트를 약 44~45초 언저리에 미리 한 후, '마지막'이라는 최종 고지와 함께 초를 세기 시작하는 것이다.
1분이라는 시간 안에 멘트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특정 선수에게 시간을 더 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상대 대국자 입장에서도 항의 할 이유는 없고, 반대로 자신도 같은 상황이라면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
정리하면, 계시원을 두는 '철학적 기초'는 대국자가 원할하게 바둑을 둘 수 있도록, 대국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그것을 위해 바둑을 잘 아는 전문가, 즉 프로기사가 계시를 맡게 되는 것이다.
바둑TV에서 현재 계시원을 섭외하는 절차와 기준에 대해선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지만, 적어도 프로기사가 계시를 맡은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 거의 유일하게 프로기사들이 기록 혹은 계시를 맡게 되는 대회인 삼성화재배. 삼성유성연수원 또는 글로벌캠퍼스에서 벌어지는 이 대국엔 많은 프로들이 연수를 오게 된다. 그에 따라 일부 프로기사들은 기록과 계시를 맡게 되는 것.현대바둑 70주년 조훈현-조치훈 대결에서 시간패 해프닝, 2016 한국바둑의 전설 우승 결정국에서 또 다시 시간패 해프닝. 이미 소를 두 마리나 잃었지만, 이제라도 외양간을 고쳐야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을 수 있다.
해결책은 두 가지. 일단 첫 번째는 계시원 제도를 폐지하고 모든 대국에 디지털계시기를 놓는 것이다. 거의 모든 프로기사들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로, 가장 합리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다.
☞ LG배 취재수첩 "이제부터 계시기는 제가 직접 누를게요" 바로가기 만약 계시원 제도를 단번에 폐지하기가 부담스럽다면, 두 번째 해결책으로는 정확한 규정 확립이 있겠다. 앞서 <위기명인기성전> 관전기에 등장한 사례를 언급했지만, 현실적으로 이런 식의 진행은 우리나라 바둑계 상황에선 실현되기 어렵다.
그렇다면, 계시원을 사전에 충분히 교육하고 정확한 규정을 만들어 전달한 후 최대한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안배를 할 수밖에 없다. 특히 지난번 조훈현-조치훈 특별대국과 이번 2016 한국바둑의 전설 대결은 승부에 주안점을 둔 대국이 아니었다. 바둑 팬들을 위한 행사였고, '스포츠 바둑'의 또 다른 주인공인 팬들은 단 한 명도 전설들의 승부가 '시간패'로 갈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상대 대국자에게 피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대국이 원할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계시원의 역할이다. 기계처럼 시간을 세다가 '열'을 불러 대국을 종료시키는 일을 할 거라면, 더 정확한 디지털계시기를 놓을 일이지 사람이 끼어들 하등의 이유가 없다.
어제(13일) 시간패로 끝난 조치훈-유창혁 대결을 TV를 통해 시청한 팬이라면 모두 잘 알고 있겠지만, 조치훈은 대가 답게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고 싹싹하게 패배를 시인했다.
복기를 마치고 돌을 쓸어담으며 유창혁이 "계시원이 초를 세는 것을 못 들으셨어요?"라고 묻자 조치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본에선 30초, 40초를 미리 알려줘서… 아니, 그래도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라고 답했다.
만에 하나라도 이번 일이 논란으로 이어지는 것을 원치 않는 것이 분명해보였고, 본인의 갑작스런 패배가 너무나 아쉽지만, 그로 인해 작은 분쟁이라도 생기는 것은 조금도 바라지 않는 것이 느껴졌다.
'시간패 해프닝'으로 끝난 전설들의 승부는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이번 일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한국 바둑계가 향후 더 발전되고 성숙해지길 기대한다.
▲ 계시원이 "열"을 부른 직후, 한상열 심판이 대국장에 들어왔다.
▲ 시간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들은 조치훈이 힘 없이 "졌어요"라고 패배를 시인한 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이윽고 승부가 끝나기 바로 직전 유창혁의 착수가 있었던 중앙 부분을 되짚어 보는 조치훈.
▲ 복기가 시작되었다.
▲ 자책하는 조치훈.
▲ 더 이상의 분쟁을 막기 위해 싹싹하게 패배를 시인한 대가 조치훈도 패배의 아쉬움을 바로 떨쳐낼 수는 없다.
▲ 언제나 스토리가 있는 바둑을 구사하는 진정한 승부사 조치훈.
▲ 승리했지만 마냥 기쁠 수 없는 유창혁.
▲ 갑작스러운 종국에 바둑TV스튜디오 덩달아 분주해졌다.
▲ 과정은 순탄치 않았지만, 2016 한국바둑의 전설 우승자는 유창혁이다.
▲ 복기는 수순을 거슬러 초반으로.
▲ 복기가 모두 끝난 후 인터뷰를 위해 두 선수가 이동하고 있다.
▲ 착석하기 전 안경을 닦는 조치훈.
▲ 마음을 추스른 대가 조치훈(왼쪽)은 아쉬운 패배 직후임에도 "바둑 공부뿐만 아니라 한국어 공부도 해야겠어요"라며 위트 있는 소감을 남겨 많은 바둑 팬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