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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심신라면배]

관전기/이세돌의 천려일실(千慮一失)

제17회 농심배 최종전 이세돌vs커제 하이라이트

이영재2016-03-06 01: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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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고와의 대결을 앞두고 있는 이세돌은 현재 국내 최고의 스포츠 스타다. 네이버 스포츠 메인을 연일 장식했던 이번 농심배 최종전에서 결국 세계일인자 커제에게 패한 이세돌은 오는 9일부터 세계1위 컴퓨터와 싸운다.

커제는 역시 강했다. 이세돌이 잘 싸웠지만 커제 쪽에서 이렇다 할 큰 실수가 나오지 않았고, 특유의 균형감각으로 어느새 우세를 손에 넣은 커제는 그대로 골인 지점으로 달려갔다.

지난 2015년 1월 커제가 바이링배를 우승했을 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선 '반짝 스타'일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다는 의견이 적지 않았다. 이세돌과의 첫 대결이었던 2015 삼성화재배 4강에서 커제가 2-0 완봉승을 거뒀을 때도, 그 기세를 몰아 우승을 차지하며 구리 쿵제 이후 중국이 기다려 마지 않던 '세계대회 2관왕'에 올랐을 때도 '아직은 두고 봐야 한다'는 의견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커제는 뭔가 달랐다. 삼성화재배 4강에서 이세돌과 커제가 첫 대결을 앞두고 있을 때부터 언급해왔던 얘기지만, 지난 10년간 세계 바둑계를 호령했던 '절대자' 이세돌의 후계자는 김지석도 박정환도 아닌 커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감 있는 행동과 거침 없는 인터뷰, 스포트 라이트가 집중될 때 더욱 힘을 내는 '스타 기질'까지 커제는 전성기 이세돌이 갖췄던 많은 것을 그대로 가졌다.

최소 절반 쯤은 '운'이었다고 밖에 할 수 없었던 지난 몽백합배 결승5번기 최종국 '반집' 승리도, 돌이켜보면 이세돌이 2003년 LG배 결승5번기 4국에서 이창호의 대실수에 힘입어 승리한 것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과의 세계대회 결승5번기에서 운이 따른 승리를 거머쥐며 화려하게 대관식을 치렀다는 점까지도 커제는 이세돌과 닮았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도 든다. 이세돌은 비록 패했지만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를 살려내는 파죽의 3연승을 거두며 오랜만에 한국 바둑 팬들을 열광하게 했다. 조훈현이 '바둑올림픽' 응씨배에서 우승을 한 이후, 이창호가 최초의 세계 바둑 1인자로 우뚝 선 이후 대중들이 요즘처럼 바둑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매스컴에선 요새 앞다퉈 바둑 소식을 보도한다.

무엇보다, 역부족이 역력한 이세돌이 혼신의 힘을 다해 커제의 검을 막아내며 버티는 모습은 많은 한국 프로기사들의 전의를 불태우게 만든다.

2014년 11월 첫 대결을 펼친 후 지금까지 무려 10번이나 맞대결을 펼친 이세돌은 커제에게 2승8패의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그나마 이긴 두 판의 대국도 몽백합배 결승5번기 2-3 패배 때 획득한 승리라 사실상 제대로 이긴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세돌은 마지막 순간까지 승부의 끈을 놓지 않고 최선을 다해 싸웠다. 황산벌에서 김유신의 신라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남은 동료들의 투지를 불태운 화랑과 관창의 임전무퇴 정신이었다.

바둑 팬뿐만 아니라 국가대표 프로기사들까지도 아쉬워 마지 않았던 지난 몽백합배 결승5번기 최종국과, 이번 농심배 최종전에서 연속된 이세돌의 패배. 그리고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 할 근거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세계일인자로 우뚝 선 커제의 위상. 이 모든 것이 맞물려 '타도 커제'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우리나라 프로들이 정진하고 맞서 싸울 수 있는 상황이 조성되고 있다.

조훈현-이창호-이세돌로 이어지는 세계 최고의 천재들이 한국에서만 태어난 까닭에 우리는 언제나 정상에 서 있는 데 익숙해졌다. 하지만 지난 30년간 중국이 절치부심하며 준비했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가 전열을 재정비하고 결의를 다진 채 전장에 나서야 한다.

이세돌과 커제의 열 번째 대결, 5억원의 우승 상금을 차지할 주인공이 결정된 단판 승부 농심배 최종전의 하이라이트를 해부해본다.

하이라이트1 이세돌의 번뜩이는 기지, 절묘한 응수타진 백4

● 커제 ○ 이세돌
좌변 커제의 흑 모양에 침투했던 이세돌의 백 돌들이 큰 피해 없이 중앙으로 진출하는 데 성공하면서 바둑은 장기전 양상. 커제가 흑1,3으로 하변 백 돌을 압박했을 때, 이세돌이 먼저 백4에 끊어 응수를 물어본 수가 좋았다.

응수타진의 묘미는 주변 상황이 결정되기 전에 상대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데 있다. 지금은 흑이 5로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다르게 받는 것은 백이 그에 맞춰서 전략의 방향을 바꾸면 그만이기 때문에, 커제는 부분적으로 최선의 수인 흑5로 응수했다. 그러자 이세돌이 백6으로 시원하게 날아오르며 본격적인 수읽기 대결이 시작됐다. 

하이라이트2 백10~14, 이세돌 강수 작렬!

● 커제 ○ 이세돌
커제가 흑7로 머리를 내민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 이곳이 봉쇄된다면 괴롭힐 수 있는 대상이라고 여겼던 중앙 백과 하변 백이 손을 맞잡게 되므로 흑이 견딜 수 없다.

바로 이 장면, 여기서 이세돌은 백8을 아낌 없이 선수한 후 백10~14로 과감하게 흑 돌을 끊어갔다. 지난 관전기에서 소개한 이세돌-이야마 유타의 농심배 13국이 떠오르는 형태. 그 바둑에서도 이세돌은 중반 전투 과정에서 기회가 왔을 때마다 특유의 정확한 수읽기와 결단력으로 강수를 작렬시키며 주도권을 움켜쥐곤 했다.

오늘 대국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이세돌이 백14로 끊은 시점에선 프로들의 형세 판단 보다 더 정확하다는 타이젬 승부예측 그래프가 이세돌 쪽으로 기운 상태였다. 세계 초일류 프로들이 펼치는 명승부를 숱하게 지켜본 타이젬 회원들도 이 때는 기회가 찾아오면 단 한 칼에 상대를 베어버리는 이세돌의 능력에 더욱 점수를 주고 있었다.
  
하이라이트3 이세돌의 호수 백16, 커제의 묘수 흑17 

● 커제 ○ 이세돌
커제가 흑15로 밀고 나왔을 때, 이세돌의 백16이 반상에 떨어졌다. 이세돌과 커제의 대결에서 언제나 먼저 초읽기에 몰리는 쪽은 이세돌이다. 심지어 첫 대결이었던 2015 삼성화재배 4강전 3번기에선 제한시간이 고작 2시간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커제는 초읽기에조차 몰리지 않았다. 이세돌이 마지막 초읽기까지 몰려가며 분전한 것과 크게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오늘 바둑도 비슷한 양상. 이세돌의 시간 사용량이 커제를 웃돌았다. 초반부터 특유의 속기 바둑을 구사하던 커제는 백16을 보고 잠시 손이 멎었다. 그 순간, 한국에서 이 바둑을 해설하고 있던 많은 프로기사들이 '이세돌 매직쇼'의 완성을 점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커제의 흑17이 놓였다.

본래 진정한 묘수란 두어지고 나면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돌이었던 것처럼 당연하게 느껴진다. 묘수의 제왕이라고 할만한 이창호가 두었던 숱한 묘수들은 언뜻 보기엔 너무 평범해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더 이상의 공격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한 이세돌이 백18로 타협했고, 커제는 흑19로 좌변 백△ 4점을 수중에 넣었다. 백18로 흑▲를 포획했고, 더구나 흑15와 백18의 교환이 대 악수여서 이 당시엔 국내 프로기사들은 백 성공, 나아가선 우세를 점쳤다. 그러나 냉정히 국면을 분석해본 결과, 흑21로 절호점을 선점해선 흑이 유망한 국면이었다. 백16은 이세돌이 미리부터 봐둔 호수였지만, 커제는 위기상황에서 흑17의 묘수를 찾아낸 것이다.  

참고도1 어려운 수상전

▲ 참고도1.
만약 흑이 3으로 응수한다면, 백4~12로 하변 흑 대마를 절단하는 수가 있다. 백2가 호수인 이유는 이후에 흑이 A의 곳에 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 백2가 응원군으로 작용해 B로 단수치는 수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렇게 된 이후 수상전도 쉽지는 않다. 언뜻 백의 수가 많아 보이지만, 흑에게도 C의 곳을 끊어 백의 수를 줄이는 맥점이 있다.

참고도2 이세돌의 천려일실(千慮一失) 흑1

▲ 참고도2.
커제가 흑1로 끊은 수가 묘수인 이유는 백이 2로 단수칠 수가 없기 때문. 흑이 3으로 탈출하고 나면 백은 4로 흑을 끊어갈 수가 없다. 흑5로 단수치는 순간 양단수에 걸리기 때문.

천변만화를 모두 그려봤던 이세돌이 간과했던 단 한 수, 이세돌의 천려일실이 바로 흑1이었다.
 
참고도3 커제의 끊음 수가 묘수인 이유
▲ 참고도3.
만약 흑이 그냥 1로 나갔다면, 백2로 단수치는 수가 성립한다. 이 때는 흑이 5로 끊었을 때 A의 곳으로 두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커제의 끊음 수가 묘수인 이유는 흑5와 백A의 교환을 강요했다는 데 있다.

참고도4 타이젬 류민형 해설자의 제안, 백1
▲ 참고도4.
이세돌이 시원한 승전보를 전한 이야마 유타와의 대결에 이어 이틀 연속으로 타이젬 생중계를 맡은 소소회장 류민형 프로는 백1로 먼저 단수 치는 수를 제안했다. 지금이라면 흑은 2로 받는 수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리고 나서 백3을 두었으면 실전 같은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흑이 4로 끊더라도 이젠 백5로 단수쳐서 그만이기 때문. 이후 흑이 A로 나간다면 알파벳 순으로 백B~F로 두면 된다. 커제가 피하고 싶었던 참고도1 어려운 수상전 형태로 환원되는 것.

실전진행 세계일인자 커제의 탁월한 균형감각
● 커제 ○ 이세돌
하이라이트3 이후 이세돌은 백1로 우상귀에 걸쳐갔다. 이미 여유를 되찾은 커제는 흑2,4로 튼튼하게 지켜둔다. 우변 침입과 상변 침입을 맞보기로 하겠다는 의도.

이세돌은 흑에게 침입을 허용했을 때 더욱 큰 피해가 예상되는 우변을 백5,7로 보강했다. 그러자 커제는 흑8로 쳐들어온다. 결국 상변 전투에서 이세돌의 실수를 포착해 득점을 올린 커제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

이세돌이 커제에게 첫 승점을 올렸던 몽백합배 결승5번기 제1국, 당시 이세돌은 흑으로 승리하며 2015년 한해 동안 이어졌던 커제의 '백번필승'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그리고 1-2 열세에서 승부를 최종국으로 이끌었던 몽백합배 결승4국 승리. 이세돌이 승리한 두 판의 대결은 모두 단명국으로 승부가 끝났다. 기회를 잡은 이세돌이 커제가 더 둘 수 없을 만큼 큰 타격을 줘서 일찌감치 항서를 받아냈던 것.

반면 승리가 확실해보였던 몽백합배 결승2국과, 중반 우세를 잡았던 결승5국, 그리고 오늘 대국까지 흐름이 좋다고 느낀 순간 느슨해지면 커제는 그 틈을 파고들며 어느새 턱밑까지 추격해오곤 했다. 핀치에서 벗어나는 순간부터 커제는 특유의 균형감각으로 판을 정리하며 눈 깜짝 할 사이에 앞서가 버린다. 확실한 우세를 내준 이후엔 역전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여기서 커제를 제압할 해법의 단면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메이저 세계대회 3관왕(바이링배 삼성화재배 몽백합배)에 오른 데 이어 올해 하세배 우승, 농심배 최종전 승리 등 패배를 모르고 질주하는 커제가 실적 면에서 세계일인자라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커제도 실수를 한다.

비록 아쉽게 패했지만 이세돌이 분전했던 커제와의 대결. 귀한 자료가 될 이 기보들에서 한국 프로기사들이 '커제 시대'를 끝낼 해법을 찾아내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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