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중계 뉴스 기보 상점 새소식

[취재수첩]

4부 세계 초일류 수읽기 진수를 보다!

박정환 자전해설 대단원, 상세 관전기 최종편

이영재2016-06-28 10:37:03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 중앙 패 싸움 공방 하이라이트. 상세 해설은 기사 하단 참조.

☞ 관전기 1부 바로가기(박정환vs커제 1~48)

☞ 관전기 2부 바로가기(박정환vs커제 49~85) 

☞ 관전기 3부 바로가기(박정환vs커제 86~120)

제17보(121~127)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3부 마지막 수는 박정환이 둔 백△, 120번째 수다. 4부 포문을 열며, 커제는 흑121로 응수한다. 백122는 팻감을 만드는 수. 흔히 '팻감 공작'이라고 불리는 수법이다.

잠깐, 그렇다면 백△는 어떤 의미일까? 바로 이 시점에서 당시 생중계를 담당했던 해설자들은 "박정환이 흔들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백120이 팻감 공작인 줄 알았는데, 패를 걸지 못하고 다시 중앙으로 향하다니. 알고보니 백122가 팻감 공작 아닌가. 그렇다면 백△는 집으로 대악수다.

마지막 순간 대역전승을 거둔 이 바둑. 커제 승리가 결정적이었을 때, 박정환이 '우세한 바둑을 흔들려서 역전 당했다'는 이야기가 잠시 나왔던 배경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지금부터 박정환과 커제가 보여준 세계 초일류 수읽기 진수를 감상해본다.    

참고도32

지금부터 그리는 참고도는 가상이다. 프로기사, 또는 바둑 고수들이 본다면 수순 배치가 합리적이지 않을 수 있다. 왜 실전과 같은 수가 나왔는지 바둑 팬들에게 보여드리는 쪽에 중점을 뒀다. 박정환과 커제가 남긴 수읽기 편린들을 모아봤다.

백A와 흑B, 기보 상으로 백120과 흑121을 교환하지 않고 실전처럼 패를 건다면 어떨까?

참고도33

이 교환이 없다면, 흑은 6으로 패를 해소한다음, 흑8로 우상귀 백 대마 전체를 잡으러 가는 수가 가능하다. 만약 우상귀 백이 잡힌다면, 좌상귀 흑을 잡은 정도로는 수지가 맞지 않는다.

참고도34

전도에 이어 계속해서 백9로 버텨봐도, 흑14까지 진행되고 나면 백 대마가 갈 곳이 없다.

참고도35
이제 백△와 흑▲ 교환 효과를 확인할 시점이다. 참고도33과 같은 진행이 됐을 때, 지금은 백1이 선수다. 교환을 미리 해둔 덕분에 흑은 2로 이을 수밖에 없다. 계속해서 백3으로 두면, 흑은 4로 파호해야 한다. 이 자리를 백이 두면 분리된 두 집이 생기면서 완생하기 때문이다.

백은 이제 5로 연결할 수 있다. 흑6에는 백7로 이어둔다. A로 하변과 손을 잡는 수, B로 집을 내는 수가 맞보기라는 사실이 한 눈에 확인된다.

집으로 손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박정환이 백△를 둔 이유다.

제18보(128~130)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128로 패를 때려낸 박정환은, 다시 백130으로 팻감을 만든다. 중앙에서 패 싸움이 시작될 경우, 흑은 팻감이 단 한 개도 없다. 따라서 무조건 만패불청 해야 된다. 백은 두 번을 연타했을 때, 상대에게 가장 크게 타격을 주는 형태를 만들어놓고 패를 시작해야 한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백130은 어떤 효과가 있는지 살펴본다.

참고도36

백1과 흑2과 교환된 상황에서 패를 걸면, 백5로 치받는 팻감을 사용할 수 있다. 흑6으로 해소하는 건 필연. 만약 흑이 패를 받았다가는 백이 반대로 6에 때려냈을 때 팻감이 없다. 어느 곳을 두 번 둬도 중앙 피해를 상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백7로 좌중앙을 연타하는 모양이 자랑스럽다. 백A로 중앙을 계속해서 돌파하는 수가 남은 건 물론이고, 흑▲ 8점은 모두 잡힌 상태다. 흑B로 끊어봐도 알파벳 순으로 백G까지 진행되면 백 돌은 연결된 모습이다.

깊은 수읽기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던 찰나, 박정환이 특유의 작은 목소리로 반전 드라마를 만든다.

"참고도처럼 되면 좋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습니다."(박정환 9단)

참고도37

좌측 모양은 간단하게 바꿨다. 주목해야 할 형태는 우중앙 패싸움과 흑이 패를 해소하는 방법이다.

백1로 패를 걸고 팻감을 사용하면, 흑은 참고도36 흑6과 같이 이어서 패를 해소하지 않는다. 본도 흑4로 단수치는 수가 좋다. 이렇게 패를 해소하게 되면, 아래쪽과 위쪽 백 돌이 자연스럽게 갈라진다.

참고도38

좌중앙 쪽은 어떻게 두더라도 백은 두 수가 필요하다. 팻감으로 연타를 해야 흑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수는 흑이 잡는다. 흑6으로 단수를 치는 순간, 불안감이 엄습한다. 백 돌은 살 수 있을까? 

A로 때려내봐도, 흑B로 이어서 그만이다.

참고도39

지난 참고도35에서 백에게 구명조끼와도 같았던 백7 선수 활용.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백7,9로 아무리 발버둥쳐도 흑10으로 파호를 당하면 백 대마가 모두 잡힌다. 이렇게 되면 당연히 바둑도 끝이다.

참고도40

지금부터 보여드리는 참고도는 향후 진행될 수순, 제19보 서막이다. 예고편 같은 느낌인데, 이걸 먼저 봐야 다음 수순을 따라가기 수월하다고 판단해서 순서를 바꿨다.

만약 백△와 흑▲ 교환이 되어 있다면 어떨까? 이 때는 백1로 단수를 치는 수가 생긴다. 참고도39에 이르러 전부 잡히고 말았던 백 대마가 지금은 활로를 찾는다. 

참고도41

흑은 단수에 몰린 상태다. 따라서 흑2로 때려낼 수밖에 없다. 백이 3으로 같이 한 점을 때려내는 수까지 외길수순.

참고도42

서로 한 점을 들어낸 다음 상황이다. 보기만 해도 백 모양이 시원하다. 백A로 때려내는 수가 언제나 절대 선수라는 점이 자랑이다.

참고도43

흑1로 끊어서 공격하는 건 이제는 두렵지 않다. 백2로 하나 때려낸 후, 백4,6을 선수하면 모양이 갖춰진다. 백8에 잇는 순간 백은 완생이다. 이렇게 되면, 흑은 좌중앙 ▲ 8점이 속절없이 잡혔고, 백은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당연히 형세도 역전. 백 승리다.

제19보(131~132)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박정환이 백△로 붙인 장면에서, 커제는 흑131로 때려냈다. 팻감 공작을 당해주지 않겠다는 의도다. 이 때 박정환이 백132로 끊은 수를 이제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왜 지금 상황에서 여기를 끊었는지 알고 보면, 백132를 더욱 음미할 수 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박정환이 갈팡질팡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백120, 백130, 백132. 세 수가 각각 다른 곳을 유영(游泳)하고 있다. 물 밖에서 수면을 바라보면 평온하고 고요하다. 하지만 물 속은 작은 세계다.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가 끊임없이 일어난다.

박정환이 건넨 물안경을 쓰면, 물 속이 보인다. 세계 초일류 수읽기 진수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참고도44

제19보 흑131, 본보 흑▲로 때려냈을 때, 바로 백1로 둬서 중앙을 잡으러 가는 건 어떨까? 백A로 패를 걸지 않고 백△로 붙였을 때 흑이 손 뺀 장면이다. 우중앙 패싸움에서 백은 한 수를 벌었다.

만약 백1로 흑을 잡을 수 있다면, 아직 우중앙 패싸움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좌중앙 흑을 먼저 잡게 된다. 한 수 차이가 난다.

"백1도 생각해봤는데, 성립하지 않습니다."(박정환 9단)

참고도45

"흑2로 단수치고, 계속해서 흑4,6으로 끊게 되면 백이 몇 발짝 나가지 못합니다. 한 수만 늘릴 수 있다면 백 승인데 그게 잘 안 돼요. 백9까지는 필연이고, 흑10으로 수를 조이게 되면 흑은 4수, 백은 3수. 백이 한 수 부족합니다."(박정환 9단)

제20보(132~139)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커제는 흑133로 중앙을 막았고, 박정환은 백134로 늘어서 흑▲ 한 점을 제압했다. 이제는 흑135가 급해진다. 반상최대다. 백136으로 중앙 패를 때려내자, 커제가 싹싹하게 흑137로 받는다. 백138로 큰 자리를 차지하자, 두텁게 중앙을 흑139로 밀어두는 커제.

"백138은 139에 먼저 단수를 쳤어야 합니다. 그래도 바둑은 흑이 우세하지만… 흑139가 놓인 장면에서는 승부가 기울었습니다."(박정환 9단)

이 바둑은 결국 역전된다. 모두가 알고 있는 결말이다. 결과를 알고 봐도 과정을 즐길 수 있다. 바로 이 점, 바둑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매력 중 하나가 아닐까. 사실, 결과론에 불과하지만 139 요처를 흑에게 허용한 게 나중에는 역전을 이끌어낸다. 얼마나 기막힌 운명 장난인가.

지금 차이는 앞서 언급한 9~10집이 아니다. 조금 더 벌어졌다. 아마추어들에겐 여전히 어렵고 오리무중인 바둑이지만, 박정환이 보는 형국은 다르다. 사형선고를 받은 상황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돌격 앞으로!" 밖에 없다.

동귀어진(同歸於盡)이냐, 옥쇄냐. 괴로운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참고도46
커제가 앞선 제20보 흑133으로 응수한 건 냉정한 수였다. 고수들은 우세하다고 적당히 물러서는 법이 없다. 수가 되면 결행해서 끝내는 쪽이 빠르다. 상대가 벼르고 벼른 검도 날카롭다. 빌미를 제공하면 언제 내가 다칠지 모른다.

만약 본도 흑1로 잡는 수가 가능했다면, 커제는 이 길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박정환은 백2로 뚫고 나갈 생각이었고, 커제는 이 변화가 쉽지 않다고 봤다. 흑A로 뚫는 건 백B가 안성맞춤이다. 우중앙 백에 큰 타격을 주지 못한채 좌중앙만 뚫린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언제든 갑자기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 역전되는 건 한 순간이다. 이 바둑도, 찰나의 순간에 역전된다. 지금은 냉정했던 커제가 초지일관 하지 못한 탓이다.   

제21보(140~152)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백140,142는 현 시점에서 반상최대. 이 때 커제가 나풀나풀 나비 같은 손길로 흑143을 떨어뜨린다. 급소다. 이 수가 성립하기 때문에, 박정환은 제20보 백138로는 흑139에 먼저 단수쳤어야 한다고 후회했다.

흑149로 백 두 점을 포획했다. 이렇게 되고보니 백150도 큰 자리. 여기를 후수로 잇게 되자, 두 점을 선수로 잡은 흑은 전리품으로 선수까지 획득했다. 커제가 점점 멀리 달아나고 있다. 한국 검토실은 탄식이, 중국 검토실은 환호성이 터진다.

바로 이 때, 조심해야 한다. 축구에서도 골을 넣은 후 5분을 가장 조심하라고 하지 않던가. 흑151로 손바람을 낸 수. 커제가 이 바둑에서 범한 두 번째 실수다.    

박정환은 이 바둑에서 커제가 세 번 실수했다고 얘기했다는 점을 알려드렸다. 첫 번째가 우하귀 흑▲였고, 박정환이 백△로 받아주는 바람에 댓가를 치르지 않고 넘어갔다는 점 또한 언급했다.

두 번째는 달랐다. 커제가 흑151로 빈틈을 보이자, 박정환이 백152로 돌진한다. 좌변을 손 빼면 패가 난다. 패는 요술쟁이, 불리한 쪽에서 패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고수는 수를 잘 본다. 고수는 수를 빠르게 본다. 이게 때로는 독이 된다. 커제는 백152가 놓이자 마자 실수를 깨닫는다. 손바람을 냈구나, 어려운 길을 자초했구나. 이걸 몰랐다면 커제가 이겼을지도 모른다. 바로 이 때부터, 냉정하던 커제가 흔들린다.

참고도47


흑1로 지켰으면 더 이상 변수가 없었다. 얼마나 간단한가. 오히려 이럴 때는 하수가 유리하다. 하수는 언제나 중앙이 커보인다. 더구나 흑1과 같이 경계선을 확정짓는 수라면 두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 거린다.

알파고였다면 흑1로 지켰을까? 커제가 둔 제21보 흑151은 패 뒷맛을 노리며 상대를 압박해 더 큰 이득을 보려는 수다. 알파고가 패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굳이 패를 하지 않아도 이길 때는 패를 하지 않는다. 꽃놀이패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흉내내려면, 계산에 대한 완벽한 믿음과 자신감이 동반되어야 한다.

알파고가 전성기 이창호와 닮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유다. 본도 흑1,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 든다. 흑1은 이창호 스타일이다. 이창호는 딱 반집만 유리해도 흑1과 같은 수를 뒀다. 무시무시한 계산력, 스스로에 대한 완벽한 믿음. 이 두 가지는 이창호를 입신(入神) 경지로 끌어올렸다. 

제한시간이 짧아진 탓도 있지만, 현대 바둑에서 이런 수를 좀체 찾아보기 힘들다. 초읽기에 몰린 선수들은 대체로 최강수를 찾는다. 계산보다 수읽기에 더 자신이 있기 때문일까. 어떨 때는 감에 의존하는 모습도 보인다. 알파고와 상대했던 이세돌 역시 자성했다. "그동안 너무 감각에 의존했다. 앞으로는 계산에 중점을 둔 바둑을 두겠다." 전투 13단 이세돌이 한 얘기라 더욱 와닿는다.

제22보(153~158)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중앙 요처를 선점당한 흑은 153으로 패를 걸 수밖에 없다. 분명 꽃놀이패다. 흑은 져도 손해가 크지 않지만, 백은 질 경우에 좌변이 떨어져나간다. 그럼에도 흑153으로 패를 결행하는 커제 손길은 씩씩하지 못하다. 이미 쉬운 길을 놓쳤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23보(159~164)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흑159는 기분 좋은 팻감. 손해가 없는 자리다. '고수는 아끼다 진다'는 말이 있음에도 프로들이 선수 활용을 아끼는 이유다. 반대로 백에게 159 자리를 역으로 허용해서 패한다면 눈물이 찔끔나겠지만, 이런 자리를 팻감으로 사용할 때는 즐겁다.

지금부터 진행되는 수는 패싸움 과정이다. 한 보에 몰아넣지 않고 토막낸 이유는 따낸 자리가 겹치는 걸 막기 위함. 타이젬 관전기를 바둑판 없이도 볼 수 있게 해드리고 싶은 기자 마음이기도 하다. 최근 재오픈한 타이젬 모바일이 눈에 띄게 좋아진 만큼, 스마트폰으로도 언제든지 편하게 즐겨주시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제24보(165~170)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패싸움이 이어지고 있다. 바둑 내용에 대한 설명이 필요없는 부분이어서, 박정환도 빠르게 돌을 늘어놨다.

제25보(171~176)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흑171은 다소 악수. 백172가 좋다. 커제가 흑173으로 때려낼 때, 백174로 한 점을 준동한 수가 탁월한 승부호흡. 이 수는 당시 생중계를 하던 많은 해설자들에게도 칭찬을 받았다.

지금 타이밍에, 백174를 그것도 팻감으로 쓴 건 대단했다는 기자에게, 박정환은 말없이 미소를 보인다. 원래 말이 없다는 점과 별개로, 프로기사들은 대개 본인 수에 대한 칭찬에는 침묵한다. 실수는 먼저 얘기하며 아쉬워하고 부족함을 스스로 책망하지만, 반대로 잘둔 수는 남이 먼저 얘기를 해줘도 맞장구조차 치지 않는 법이다.

하수는 스스로 잘못 둔 수는 감추고 잘둔 수를 부각한다. 고수는 공은 감추고 과는 드러낸다. 허물을 부각해 자성한다. 그리고 고친다. 바둑 고수가 되는 비결이 인생 고수가 되는 비결과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제26보(177~183)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전보 백174가 멋진 팻감이었다. 흑은 이제 기분 좋은 팻감이 없다. 지금부터는 어디를 둬도 악수 팻감이다. 커제가 선택한 악수 팻감은 흑177. 가장 확실한 팻감이지만, 뒷공배를 채운 자충수다.

잘 풀릴 때는 이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흑177과 백178 교환이 이 바둑 승패를 뒤바꾸고 만다. 운명이라면 정말 기구하다.

박정환은 이 바둑을 승리한 기세를 몰아 이세돌을 2-1로 꺾고 응씨배 결승에 올랐다. 세계 3관왕에 오르며 단숨에 세계랭킹 1위를 꿰찼던 커제는 이 바둑을 패한 이후 박정환에게 판 맛을 보지 못하고 있다. 갑조리그 주장전과 LG배에서 박정환은 연거푸 커제를 제압했다. 내용도 오히려 이 바둑보다 손쉬운 승리였다.

순간의 방심과 과속. 그리고 설마설마 했던 악수 팻감 하나. 점점 역전 드라마 내용이 구체화되고 있다. 보통 영화에서는 이런 장면을 클로즈업한다. 관객들은 지금 이 일이, 저기 놓인 그 물건이 발단이 되어 뭔가 큰 사고가 나겠구나, 유추한다.

바둑은 각본 없는 드라마다. 아직은 아무도 잠시 후에 벌어질 대역전극을 예측하지 못했다. 기보를 보는 재미, 관전기를 읽는 맛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이미 대국 결과를 알고 있음에도, 시나브로 완성되는 스토리를 보는 즐거움이 있다.

제27보(184~186)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박정환이 백184로 한 칸 뛰고, 커제가 흑185로 응수했다. 바로 지금 시점에서, 형세는 흑 우세다. 패싸움 과정에서 변화가 일어났지만, 좌변 백 돌을 잡은 흑이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았다.

박정환은 오히려 흑 승리가 더 굳어졌다고 얘기했다. 당시 해설자들 분석 역시 다르지 않았다. 좌변이 뜯겨나간 건 아픈데, 백이 얻은 건 별로 없어보인다.

그럼에도 이 바둑은 백승으로 끝난다. 해설자들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즉 패착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밝혀내지 못했다.

박정환이 이겨서 기쁜 건 당연하다. 그런데 왠지 시원한 느낌은 없었다. 언제 역전이 된 걸까? 커제가 두고 만 마지막 실수, 패착은 어디였을까?

흑185가 놓인 장면에서 흑 승리는 부동이다. 박정환이 백186으로 밀었을 때, 커제가 금기시되는 '혼자만의 상상'을 하고 말았다. 냉정함을 잃고 삐끗했다. 박정환이 그 틈을 놓칠 리 없다.

바로 아래에 등장할 흑187이 패착, 백188이 승착이다. 

박정환과 커제는 고수다. 고수도 그냥 고수가 아니라, 세계 일인자를 다투는 고수다. 고수간 맞대결. 정말 두려운 승부다. 흑185에서 흑승 불변이었던 바둑은, 백188이 놓인 장면에서 백승 불변으로 바뀐다. 

제28보(187~188)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흑187이 패착이다. 박정환은 이 수를 커제가 범한 세 번째 실수로 지목했다. 세 번째 실수 이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다. 기회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실수도 없다. 이미 진 상황에서 손해를 보는 건 실수가 아니라 승부수로 해석될 여지도 있기 때문이다.

박정환이 백188을 사뿐히 내려놓는다. 백승이 확정됐다. 응씨배 28강 대진추첨 때부터 예상됐던 건곤일척 승부, 박정환 대 커제 8강전. 한국 최강자 박정환이 중국1위 커제를 제압하는 순간이었다.

커제는 흑187로 A에 뒀어야 했다. 흑A를 차지했으면 흑이 이 바둑을 지는 일은 없었다. 지금부터 마지막 승부처를 집중해부해본다.

참고도48

흑이 전보 A자리를 두면 이긴다고 하니, 먼저 백1로 두면 어떨까? 흑이 2,4로 꽉꽉 눌러막은 후 6으로 호구를 치면 이것 역시 흑승이다. 지금 백A로 찌르는 건 흑B로 막아서 그만이다.

참고도49

백1에 흑2로 받는다면, 바로 이 때 백3에 둔다. 지금은 흑8로 호구쳐도 전도와는 다르다. 백9로 중앙을 돌파할 수 있다.

참고도50

이걸 모를 리 없는 커제는 흑1과 백2를 교환해서 만사 불여튼튼, 중앙 흑을 단단하게 지켜놓고 싶었다.

"커제는 아마 흑1과 백2를 교환하고 흑3에 두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박정환 9단)

백A는 흑B로 끊어서 수 부족이다. C로 때리는 패도 있어서 중앙은 문제가 없다.

참고도51


박정환이 제시한 수는 흑1. 백2로 나가도 흑3으로 끊어서 그만이다. 언뜻 허술해보이는 거미줄이지만, 의외로 촘촘하다.

참고도52


백4로 단수를 쳐도 흑5가 선수로 듣고 있다. A와 B가 맞보기다. 여전히 흑C로 때려내는 수도 있다. 중앙 거미줄을 벗어날 방도가 없다.

커제가 이 변화를 보지 못했을까? 직접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럴 리는 없어 보인다. 다만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테고, 앞서 흔들렸던 상황 때문에 냉정해지지 못했던 탓일 확률이 크다. 

제29보(189~190)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흑189는 내친걸음이다. 백190으로 꼬부리자 응수가 난감하다.

참고도53


흑1을 둔 이상 백2에 흑3으로 받을 수는 없다. 백6까지 진행됐을 때 중앙이 막히지 않는다. 백△가 기세등등하게 중앙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참고도54

제29보 백190으로 꼬부린 장면에서, 본도와 같이 흑1로 찝어서 왼쪽 백□ 5점을 잡을 수 있다면 여전히 흑이 이길 수 있다.

바로 이 순간, 앞서 언급했던 상변 흑▲와 백△ 자충 교환이 말을 한다. 초읽기가 없는 응씨배. 시간에 쫓겨 둔 수도 아니고 팻감으로 어쩔 수 없이 교환했던 바로 그 수가 이렇게 중요한 시점에 결국 발목을 잡고 만다.

흑1,3으로 두면 백은 2로 이은 후 다시 4로 단수를 친다. 흑이 5로 이을 때, 백6으로 가만히 나오는 수는 중급자여도 간단히 발견할 수 있다. A와 B가 맞보기로 흑 파탄. 커제가 흑1로 두지 못한 연유다.

제30보(191~200)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제스처가 많은 커제 몸짓이 커진다. 흑191을 두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백192를 둘 때, 194에 나오지 못하고 흑193으로 잡아야 한다는 사실이 커제를 아프게 한다. 백194로 단수치고, 알뜰하게 백196도 활용한다.

처참하다. 중앙 흑 모양이 쑥대밭이 됐다. 오히려 백194를 선수로 한 백이 2집 가량 쏠쏠하게 집을 챙겼다.

선수까지 뽑은 박정환은 백198로 향한다. 흑▲ 두 점을 잡은 시점, 백200까지 내려 놓은 박정환은 해설을 멈췄다.

"지금은 차이가 제법 납니다. 잘해야 흑이 반면 3~4집 정도 이기는 바둑입니다."(박정환 9단)

이후 끝내기에서는 승리를 확인한 박정환이 안전하게 마무리 하면서 약간 손해를 봤다. 차이가 줄어들게 된 이유다. 커제는 시간을 남겼고, 박정환은 초과하면서 벌점 2집을 받았음에도 승부는 바뀌지 않았다.

제8회 응씨배 8강전
백: 박정환
흑: 커제
239수끝 백1점승

승부는 끝났다. 박정환 자전해설도 여기서 멈췄다. 하지만 바둑 팬들은 이후 수순도 궁금할 수 있다. 작품(기보)을 완성할 수 있도록, 수순을 조금 더 보여드린다.

제31보(201~219)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백206으로 두 점을 끊어 잡은 게 큰 이유는 본보에서 보듯, 백212로 붙이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백214로 하나 키워두고 백216을 선수하면 여기도 두 집이 생긴다.

고수들은 언제나 다음수를 보고 있다. 사카다 에이오 9단은 '세 수 수읽기'를 설파했는데, 내가 둔 후에 상대가 두고 다시 내가 둘 자리까지 예비한 후 착점하라는 의미였다. 이걸 할 수 있다면 좋은 기보를 남길 수 있다.

제32보(220~248)
● 커제 ○ 박정환 2016.4.24 응씨배 8강전

이쯤되면 흔히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이 바둑은 그렇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시간 공제로 인한 벌점 문제가 남아있었고, '전만법'이라는 독특한 계가 방식 때문에 정확한 형세 판단이 더욱 어려웠다.

가장 승패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은 박정환과 커제, 두 대국자였다. 박정환은 흔들림없이 결승선을 향해 나아갔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반상을 훑으며 빈틈없이 바둑을 마무리했다.

커제는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괴로워했다. 딱 세 수. 시종 잘두던 커제가 딱 세 번 실수했고, 첫 번째 실수는 그냥 넘어갔으므로 실상 두 번 잘못 둔 셈이다. 커제는 야속하겠지만, 고수들 대결에서는 한 번 실수로도 승패가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니, 두 번 실수했으면 지는 게 당연하다고 해야할까.

특히 제28보 흑187은 두고두고 커제 밤 잠을 설치게 할 수가 되고 말았다. 눈 감으면 떠오르는 그 장면, 그 한 수가 바둑인에게는 하나씩 있다. 

제32보 248수 이하 줄임, 백(박정환) 1점승. 

<4부작 관전기를 마치며>

"연구생 시절에 이렇게 공부했다면 입단했을 텐데…"

박정환 9단 자전해설을 들으며 느꼈던 감정이다. 작은 바둑판 속에 이토록 엄청난 변화가 숨어있다니.

바둑 기자들은 프로기사와 만날 기회가 잦으니, 언제나 자전해설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팬들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실, 기자는 자전해설을 처음 들었다.

바둑과 관련된 매체가 월간 <바둑>과 같은 잡지 형태가 유일했던 때는 오히려 자전해설을 듣기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자전해설이 아니면 프로기사 해설을 접하기 어려웠던 시절이다. 요즘은 타이젬과 같은 인터넷 매체 해설, TV중계 등 프로기사 해설이 넘쳐난다.

범람하는 해설을 참고하며 글을 마무리하다보니, 깊이 있는 내용을 담지 못했다. 자전해설 위력을 새삼 느꼈다.

첫 자전해설을 박정환 9단에게 들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살인적인 일정으로 늘 바쁜 박정환 9단을 섭외하느라 애쓴 월간 <바둑> 이세나 편집장에게도 감사 인사를 드린다).

성의껏 해설해준 박정환 9단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바둑과 글이 모두 부족한 탓에 박정환 9단이 보여준 신세계를 온전히 팬들에게 전달하지 못해 송구스럽다. 향후 자전해설을 들을 기회가 또 생긴다면 그 때는 더욱 적확하게, 더욱 재밌게 전달해드릴 것을 약속드리며 글을 마친다.

총 댓글수: 0새로고침

0/150자등록
관련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