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그 곳, 양평을 훅 빠져 나오는데 3시간이 걸렸다.
미처 나오지 못한 마음이 여전히 그 곳에 있다. 이제는 빠져나올 때가 됐다.
뜨거운 목요일 오후였다. 작가는 말 없이 객에게 문을 열어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간다. 발을 들여놓고 잠시 기다리며 찬찬히 보금자리를 둘러본다. 환한 열기로 가득한 바깥과 달리 그 곳은 모든 것이 멈춰있었다. 고서로 가득한 어둑어둑한 실내에 외부의 빛과 가느다란 바람이 들어오고 있다.
안경을 찾아 나온 작가의 얼굴이 수척하다. ‘좀 일찍 도착했죠? 뭐하고 계셨어요?’라며 대화를 청했다. 많은 질문을 준비해갔지만 따로 질문하지 않았다. 머리가 하얗게 센 작가의 이야기를 듣고, 적고 또 적었다.
묘한 긴장감 속에 시작된 이야기는 오래 전 그날부터다.
가난했던 소년은 출신 성분과 학벌을 따지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찾았다. 사회주의자 아들로 낙인 찍힌 남한에서 열다섯 소년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열아홉 소년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인간이란,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으려 했다. 우연한 계기로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면 우주의 근원을 아는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며 소년은 도봉산 천축사로 출가를 결심했고 공부를 했다. 법명은 정각(正覺).
우연히 문예공모에 ‘목탁조’가 당선되면서 그의 이름 석자 ‘김.성.동.’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목탁조’를 본 조계종 지도부가 일부 내용을 문제 삼았고, 작가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작가는 자신을 ‘돌판(바둑), 중판(불교), 글판(문학)’ 삼판의 삶이라고 평했다. 프로기사가 되려고 했던 돌판과 승려가 되려고 했던 중판, 소설가로 살아가는 글판을 설명한 것이다. 당시에는 돌판, 중판, 글판에는 자격증이 필요 없었다.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었다.

바둑 잡지 기자 한 명을 뽑는데 신성빌딩 7층에 40명이 몰렸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었기에 모두가 절박했다. 작가는 이전에는 시험 조차 볼 수 없었다. 그 때나 지금이나 학력, 자격, 증명서를 따지기는 매한가지다. 바둑 공부를 같이 했던 (현 프로기사) 유건재, 김동면이 용기를 북돋아줬다.
문장력 테스트를 위해 3개의 주제가 주어졌다. 바둑이란 무엇인가, 한국바둑의 앞날에 대하여, 조치훈 바둑에 대하여 논하라.
“바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보고 다들 쫄지! 인생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이야기인데, 모두 고민하는데 나는 원고지 10장 이상을 쓰고도 더 달라고 했어.”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들을 가지지 못한 작가는 무식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유치하면 유치하다고 하겠지만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이길 뿐이었다. 원고지는 어느덧 50장이 넘어갔다. 당연 1등 합격이었다.
하지만 월간『기계』(월간『바둑』의 전신)의 편집기자로 활동을 시작하고 고작 두 번의 출간을 한 뒤 '기계파동'이라는 시련을 겪고 실직하게 된다.

생계가 막막해지자 절박한 심정으로 펜을 들었고 동양 최고의 구도소설 ‘만다라’를 써내려 갔다. ‘만다라’는 20대 젊은 날에 겪은 삶에 대한 번민이 고스란히 서려 있으며, 당시 산업화의 병폐가 나타나고 있던 한국사회와 속세의 가치를 탐했던 불교에 대한 직관적인 비판이 녹아 있는 작품으로 김성동 작가의 대표작이다.
한국기원이 명동에 있던 그 시절 입단대회도 두 번이나 나갔다. 열 달 만에 1급이 될 정도로 작가는 기재가 있었다. 바둑으로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도전했다. 슬픈 이야기이지만 바둑은 혼자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었다.
입단대회의 기억도 생생하다.
"6연승 후에 1패를 했다. 신광여고 여학생에게 당한 1패다. 기가 막힌 것이 다 이겼는데 안 던지더라. 구경꾼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내 뒤로는 그 누구도 서지 않았다. 견딜 수 없이 외로움이 몰려왔다. 인간이란 어차피 외로움이다. 그런 마음이 들면 안됐는데 다른 생각이 들면서 한수 부족으로 오히려 져버렸다."
훗날 여고생 조영숙은 최초의 여성기사가 된다.
이제 내기바둑으로 고서를 사던 그 시절 이야기도 웃으며 할 수 있다.
"문단에서 소설가 송영을 빼고는 적수가 없었다. 시인 신경림도 다섯점을 깔고도 나한테는 안됐다. 인사동에 한인문학사 잡지사에 들려 사고 싶은 고서가 있으면 주인에게 팔지 말고 한두 시간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기원에 갔다. 내기 바둑 서너판이면 그 책은 내 것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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