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럽 각지에 한국 바둑을 보급하기 위해 힘 쓰는 한상대 교수. 한 교수는 "해외에 나가 보면 바둑보급에 우리나라가 얼마나 소홀히 해 왔는지 누구나 금방 느낄 수 있다. 늦은 감이 있으나 지금이라도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다."고 말한다. 2006년 4월 10일
우리의 첫 목적지는 유럽 바둑문화 센터(European Go Culture Centre)이다. 월요일은 쉬는 날인데 우리가 온다니까 프랑켄이 미리 나와서 기다리겠다고 한다. 기차 한번, 전차 여섯 정거장, 그리고 1km를 걸어서 목적지에 도달했다. 해원이와 하진이가 건물이 큰데 놀란다. “한국기원보다 더 좋아요”한다. 그런데 사고가 발생했다. 항공표 담당 하진이가 우리 비행기표 전체를 호텔 방에 두고 나왔다고 한다. 해원이는 여권 담당이다. 내가 “너희 둘 중 한 명만 잃어 버려도 나는 망한다. 그러니까 잘 보관들 해라.” 하는 말을 몇 번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었다. 믿을 곳은 또 하리 뿐이다. 하리에게 전화 하니까 하리가 웃으며 자기가 호텔에 가서 표를 찾아서 이리로 오겠다고 한다. 하리는 여기서 60km 떨어진 레이든에서 자기 집에 찾아 온 손님들과 얘기 중이라고 한다. “하리가 우리하고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나 왜 자꾸 이렇게 꼬이지?”,“방 청소하는 사람이 항공표를 버렸으면 어떻게 하지?”,“항공 표를 분실했을 경우 일인당 백불 정도 내면 되니까 최악의 경우는 공항에 일찍 나가 그렇게 라도 하자” 우리는 별 상상을 다 해 봤다. 그동안 우리는 프랑켄의 안내로 문화센터를 돌아 봤다. 대국장으로 쓰는 큰 홀이 너 댓 개 되는데 일부를 브릿지 대회장으로 쓰고 있다. 홀을 대여 해 주어 그 수입으로 세 명이 월급을 받고 이 곳에서 일 한다고 한다. 작은 방은 많다. 어느 방은 일본 학교로 쓰이고 있다. 일본 식 다다미로 꾸며진 방은 일본 타이틀 매치 할 때 와 똑 같이 꾸며 놨다. 복도에는 이 곳 역사를 알려 주는 사진들이 걸려 있다. 프랑켄과 필립이 10대 소년일 적에 바둑 두는 사진도 있어 보면서 같이 웃었다. 그러다가 이와모토 9단 사진 앞에 오더니 프랑켄이 합장을 하고 절을 한다. 그가 이 센터의 건립 자이다.
이와모토 가오루(岩本熏) 9단은 일본에서 본인방을 지낸 강자로서 일찍부터 브라질에 진출하여 국제기도보급을 해 온 기사다. 그가 1985년 동경의 자기 기원 땅 값이 폭등하여 돈을 벌자 그 돈으로 유럽에는 암스텔담, 미국에는 뉴욕과 시애틀, 브라질에는 상파울로에 바둑 문화 센터를 설립했다. 자기의 전 재산을 투입하여 세계 네 곳에 이런 바둑 센터를 건립하자 일본 기원에서도 많은 협조를 했다고 한다. 이와모토 9단은 생전에 본인방을 지낸 것 보다 바둑 인으로 훨씬 위대한 일을 했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96세 때에도 이 곳에 와서 바둑 해설을 왕성하게 했다고 한다. 내가 3년 전에 이 곳에 왔을 때 이 센터의 설립 목적이 일본과 유럽의 문화증진 및 일본 바둑의 유럽 보급으로 되어 있었다. 내가 유럽 바둑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설립자도 기도보급이 목적이었지 저렇게 바둑을 한 나라 것으로만 국한 시키는 것은 원 뜻이 아니었을 걸로 믿는다.” 라고 했다. 이번에 오니까 센터의 목적이 유럽에 바둑 보급을 증진하는 것으로 고쳐 놨다. 아래층 바에 갔는데 3년 전에는 'Go Bar' , 'Go Hamburger' 등이 있어서 재미있었는데 이번에는 없다. 한 시간 후에 하리가 비행기표를 들고 웃으며 들어 오는데 미안해서 죽겠다. 내가 하리에게 “3년 전 한국대사관 직원, 네덜란드 바둑협회 간부 8명이 나와 함께 식사를 했던 한국 식당이 여기에서 멀지 않았는데 기억하느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한다. 내가 “그리로 가서 점심을 맛있는 걸로 쏘겠다.”고 했다. 그런데 가니까 월요일은 휴업이다. 할 수 없이 그 옆 중국 식당에 들어가서 우리의 마지막 유럽 식사를 했다.(저녁부터는 기내식)
그래서 그는 파리를 떠나 몇 년 동안 아를르 지방과 정신병원을 전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베르 쉬르 와즈에서 살며, 그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작품을 완성한다. 그는 동생 테오(바둑쟁이 테오와 같은 이름)의 도움으로 그나마 그 만큼 생존 할 수 있었다. 빈센트가 권총 자살을 한 후 동생 테오가 너무 상심해 하다가 6개월 후에 따라 죽는다. 그들의 무덤이 나란히 있는 사진 앞에 사람들이 많이 서 있다. 이 박물관이 그의 일생과 작품을 사진과 함께 상세히 보여 주고 있다. 내 눈에는 그가 정신질환을 앓고 자살하기 전까지 마지막 2년간의 작품이 가장 아름답다. 밝은 색채, 대담한 공간 활용은 정신병자 눈에만 보이는 순수한 세계가 아닐까. 나는 여기 오면 꼭 포스터 몇 장을 사게 된다. 해원이와 하진이도 몇 가지씩을 산다. 1983년에 우리 가족과 서봉수 9단이 암스텔담에 와서 당시 유럽 바둑 연맹 회장인 얀 프랑켄하우센(Jan Frankenhuisen 2단)씨 집에 5일 간 묵은 일이 있었다. 그 때 건축가인 얀의 형이 이 고흐 박물관을 지었다. 이 박물관에는 공중에 반은 떠있는 계단이 있다. 내가 그 계단으로 2층에 올라 가려니까 얀이 말린다. “내가 우리 형을 잘 아는데 틀림없이 어딘가 잊어 버리고 빠트린 곳이 있다. 저 계단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라고 단언한다. 자기는 계단을 절대 밟지 안는다. 23년이 지난 오늘도 그 많은 사람이 올라 다니는데 끄덕 없다. 얀을 만나면 물어 보고 싶은데 암스텔담까지 와서 그와 다른 친구들을 볼 시간이 없다는 게 안타깝다. 박물관에서 나오니까 이제는 암스텔담 시내를 구경 할 시간이 없다 그래서 중앙 역으로 가는 전차를 타고 시내 한 복판을 통과하기로 했다. 해원이가 “그래도 고흐 박물관을 본 걸로 만족해요.” 한다. 우리는 역에서 유레일 파스를 마지막으로 사용하여 스키폴 공항에 갔다. 비행기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주머니에 남은 유로화를 다 털어 선물용 초콜릿을 샀다. 네덜란드는 마약, 섹스, 안락사가 허용되는 유일한 국가다. 한국 관광객이 역 근처 창녀 촌, 담슈타트의 섹스 박물관, 튜맆 페스티발 등에 많이 간다. 우리 부부도 몇 년 전 암스텔담 시내에 있는 렘브란트 광장엘 밤에 나갔는데 알고 보니 호모들이 모이는 장소다. 남자끼리 키스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집 사람이 너무 놀라서 나에게 빨리 호텔로 돌아가자고 하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이 나라의 국민 의식이나 생활수준을 보면 선진이고 살기 좋은 나라인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나라엔 필립스 전기회사, 축구 오렌지군단, 히딩크 감독이 풍차, 튤립과 함께 알려진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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